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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4분의 1
오사키 요시오 지음, 우은명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9월의 4분의 1’ - 언제쯤일까 그때는?
오사키 요시오
9월의 4분의 1은 언제쯤일까? 9월 7일? 9월 8일?
오사키 요시오의 ‘9월의 4분의 1’은 그런 궁금증으로부터 내게로 왔다. (궁금하시겠지만 스포일러가 될 듯해 밝히지 않습니다.)
소설집이라서 그랬는지, 그의 전작인 ‘파일럿 피쉬’와 ‘아디안텀 블루’를 읽은 터라 어느 정도 그의 스타일에 익숙해져 있었던 까닭인지 ‘9월의 4분의 1’은 순식간에 읽어졌다. 드디어 국내에 출간 된 오사키 요시오 시리즈를 모두 섭렵했다.
현재엔 부재한 사랑, 과거의 극복되지 못한 상처, 현재에도 계속되는 아픔, 소통의 단절, 그러나 세상과 화해해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오사키 요시오의 세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다. 거기에 보태 순정만화를 떠올릴 정도의 순수하고 감성적인 표현과 순애보적인 사랑은 ‘이제 그런 사랑은 없다.’라고 외치는 당신에게도 하나의 울림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울림이 여러분에게도 느껴지길 기대하며 ‘9월의 4분의 1’을 소개한다.
‘보상받지 못한 엘리시오를 위해’
젊었던 우리에게 그것은 살짝 긁힌 상처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팽팽하고 탄력 있는 피부가 작은 상처쯤은 어느덧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듯이,
내가 한 말은 각각의 몸 속 어딘가에 파묻혔고, 그리고 사라졌다.
(‘보상받지 못한 엘리시오를 위해’ P. 16~7 중에서)
유약한 지식인의 이미지는 어릴 적 내겐 동경의 대상이었다. 세상의 룰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언가 부유하는듯하지만 가슴엔 커다란 불을 품고 있어 언젠간 세상에 보석같은 무언가를 내어 놓을 것 같은 캐릭터는 어린 시절의 내겐 꿈과 사랑이 가득한 만화속의 주인공들보다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보상받지 못한 엘리시오를 위해’의 주인공 야마모토에게서도 그런 유약한 지식인의 이미지를 보았다. 뭔가 의지박약인데다가 사교성은 제로이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뭔가 하나가 빠진 듯한 느낌. 하지만 무언가 몰두하는 모습은 여성으로 하여금 챙겨주고 싶고 보듬어 주고 싶게 만드는 그런 남자.
고등학교 친구인 다케이와 대학의 체스연구회에서 만난 선배 요리코. 그리고 야마모토.
체스로 시작된 그들의 인연은 퀸이 킹을 보호하는 것처럼 서로를 보호해 주는 체스였을까 누가 먼저 왕을 죽이는가를 겨루는 체스였을까?
그러나 그 쓸모없다는 점과 비생산성이 점점 더 나 자신을 몰아가고 있었다.
장래에 있어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일에 귀중한 젊은 시간을 물 쓰듯 허비한다는 일이, 일종의 쾌감을 주었던 것이다.
때때로 위장의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듯한 초조감마저도 나는 기분 좋았다.
(‘보상받지 못한 엘리시오를 위해’ P. 18중에서)
‘켄싱턴에 바치는 꽃다발’
명왕성이 존재하지 않던 세계에서 일본인으로 살다가 명왕성이 존재하는 시기엔 영국인으로 살았던 한 사람과 그의 사랑. 그리고 처음부터 명왕성이 존재하는 세계를 살아 온 나에 대한 이야기.
얼마 전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되고 소행성 134340이라는 이름을 새로 얻었다.
굳이 인식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소행성 134340이든 명왕성이든 그게 뭐 중요하겠는가?
다만 내 곁에 있어 준 그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던 것처럼 나의 무지로 깨닫지 못했을 뿐
그도, 그리고 그 행성도 언제나 그곳에 존재 했을 테니까.
동물원에서는 기린이 통화(通貨)기준이 된다고 한다. 이를테면 하마는 20기린, 코뿔소는 300기린 하는 식으로.
나는 그에게 몇 기린쯤 될까?
‘(결혼이나 사랑에 있어서) 지켜야 할 거리와 쌓여가는 짐의 무게만 주의하면 된다.’ (‘켄싱턴에 바치는 꽃다발’ P. 73 중에서)
‘슬퍼서 날개도 없어서’
“영국의 어느 철학자의 학설이야.
만약 완벽하게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는 사자가 있다고 해도,
사자와 인간과의 대화는 성립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설.
인간과 사자로서 살아 온 환경이 서로 너무 다르고 가치관도 경험도 너무 틀려서,
사자가 인간의 언어를 안다고 해도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을 거랬어.
사자의 빨강과 인간의 빨강은, 혹시 단어가 같다고 할지라도
의미하는 것이 전혀 틀릴 것이기 때문에.
언어는 모든 것, 그 축척이다, 그렇게 말했어.”
(‘슬퍼서 날개도 없어서’ P. 171 중에서)
영혼을 담아서 노래 부를 수 있는 재주를 가진 여인과 레드 제플린의 카피밴드의 기타리스트인 한남자의 이야기.
읽는 동안 ‘릴리슈슈의 모든 것’(이와이 지 감독)의 영상이 계속 맴돌았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가까워지기도, 또는 멀어지기도 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같은 언어를 구사하지만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인간과 사자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스물다섯을 넘어 날고 싶지만 슬퍼서, 날개도 없어서 그를 향해 날아오르지 못한 마미.
그녀의 노래가 듣고 싶다.
‘마흔 셋이라는 나이가 어떤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그저 내가 말할 수 잇는 것은, 20대, 30대를 지나고, 그곳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선명하게 보이는 과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30대에는 안개가 낀 듯이 흐리던, 어쩌면 의식적으로 흐리게 했던
과거의 일들이 더러워진 유리를 닦은 것처럼 선명하게 보일 때가 있다.’
(‘슬퍼서 날개도 없어서’ P. 173 중에서)
‘9월의 4분의 1’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다면 한번쯤은 익명의 누군가에게 내가 가진 고통이나 아픔. 슬픔 같은 것을 모두 이야기 해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게다가 그 곳이 태생지의 국가를 떠난 멀리 유럽의 어느 도시이고, 그가 만리타향에서 만난 연대감을 가진 모국인인라면 더더군다나 말이다.
그러고 난후에 그 상대가 이성이었다면 누군들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 순간 내가 느낀 것을 실존주의적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목적도, 용도도, 물론 설계도도 없었다.
그저 정신을 차리자 사랑의 감정만이 턱하니 존재하고 있었다.’
(‘9월의 4분의 1’ P. 223 중에서)
헤어지거나 죽어서 이젠 다시 만날 순 없지만 우리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작가는 얘기한다. 우리들의 무의식에서조차.
깃털이 남지 않았다면 환상이라고 느꼈을 새(鳥) 새벽시장의 풍경처럼 ‘언젠간 반드시 쓸 수 있다.’는 깃털을 남기고 간 그녀를 9월의 4분의 1에서 그는 만났을까... ... ... .
‘잃어버린 사랑은, 철거 된 건물처럼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그저 잔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잔상이기 때문에 보다 더 선명하게 마음에 계속 투사되는 면도 있다.
남겨진 건물보다도 철거된 건물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듯이.
(‘9월의 4분의 1’ P. 240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