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디안텀 블루
오사키 요시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사랑하는 요코.


하루 종일 차가운 바람을 피해 방안을 뒹굴 거리다가 왜 갑자기 당신의 사진들이 생각났는지 모르겠어요. 책장 한 쪽에 꽂아 둔 앨범을 꺼내서 한참을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었네요.

당신이 찍은 물웅덩이 사진. 그 속에 비친 파란 하늘, 그 웅덩이 속에서 흔들리는 숲, 아이들의 미소, 그 속에서 입 맞추고 헤어지는 연인의 모습.

그 모습들을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네요.

그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여전히 당신은 이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어느 순간 눈시울이 그렁해져서 당신의 사진들이 뿌옇게 흐려질 때까지 오래...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어요.



사랑하는 당신.

힘들어질 때면 우리가 니스에서 보낸 그 시간들을 떠올려보곤 해요.

거대한 물웅덩이 같던 그 바다. 샤갈의 그림들. 버섯펜션과 미셸, 프레드릭. 토플리스차림의 여인들과 수프 드 푸아송. 보르시치. 당신의 머리카락을 스쳐가던 그 바람을.

나는 니스에서의 시간들은 한 순간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기억하나요? 미셸의 얘기. 죽은 사람은 여러 가지 형태로 살아 있는 이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그래서 죽은 이는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 늘 살아 있다던.

당신은 이제 내 곁에 없지만 당신은 끊임없이 내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어요.

아침에 일어나 킹 크림슨이나 레드 제플린 대신 ‘Your song'을 들어요. 이제 당신이 돌아오더라도 CD플레이어의 CD를 바꿔 끼울 필요는 없어요. 길을 걷다가도 당신이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겠거니 생각하게 되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곤 한답니다.

니스에서의 당신은 소멸해가고 있었지만 우리의 사랑은 초속 4000킬로미터의 속도로 팽창해 가고 있었어요. 믿어지나요? 아직도 팽창하는 우리의 사랑이... ... .



사랑하는 당신.

방안에 수조를 들여 놓았어요. 아직 제대로 된 물고기 한 마리 살고 있지 않지만 텅 빈 수조는 묘하게 위안을 준답니다.

방안에 불을 끄고 차츰 어둠에 익숙해질 때쯤 수조의 유리에 비치는 빛들은 당신 사진 속의 물웅덩이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아픈 기억들도 떠올리게 합니다.

내겐 원죄와 같았던 도둑질을 하다 잡혀서 받았던 모멸감과 멸시. 공포의 순간들. 휴즈의 죽음. 선배 미쓰코의 자살기도.

얘기했었나요? 빠져 나올 수 없을 것 같던 그 시간들 속에서 나를 구원한 것이 ‘히로미’였다는 걸.

나의 ‘히로미’는 요코, 바로 당신이었어요. 그때그때 모습들을 바꾸어서 내게 왔지만 이젠 알아요. 당신이 나의 ‘히로미’였어요. 기억하세요.


영원이라는 시간. 천년에 한번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 와 1천 5백 평 크기의 바위를 복숭아색 비단 날개옷으로 한 번 문지른대요. 그렇게 해서 그 바위가 다 닳게 되는 시간을 영원이라고 불러요.

내게 소원이 있었다면 그 영원의 시간들을 당신과 함께 하고 싶은 것이었어요.

지금 당신은 내 옆에 없지만 당신의 기억은 내 가슴속에 남아서 늘 나를 살아있게 합니다.

기억하세요. 힘들었지만 당신이 있어주어서 나는 그 날들을 견딜 수 있었답니다.

기억하세요. 당신이 곁에 있을 때 내게 세상은 더없이 아름답고, 따뜻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 이젠 갈매기와 괭이갈매기를 구분할 수 있나요?


안녕... 늘 기억해요. 눈부시던 당신을... 사랑해요... ... .



2006년 12월 4일에.

당신의 R.Y. 혹은 야마자키 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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