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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뿌리 깊은 나무 - 한번 무릎 꿇기는 쉬우나 다시 서기는 어렵다.
고백하자면 나는 ‘뿌리 깊은 나무’를 예비군 훈련장에서 읽었다. 마침 비가 내려주어서 실내에서 교육을 진행한 덕에 그 지루하고 비효율적인 예비군훈련을 나는 아주 흥미진진하게 보낼 수 있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코 고는 소리. 동대장의 이런 저런 목소리를 뒤로한 채 아주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려갔다.
‘뿌리 깊은 나무’는 훈민정음이 반포되기 전 수일동안 경복궁내에서 일어난 일련의 살인사건들을 말단 겸사복 강채윤이 파헤치는 이야기다. 한글창제의 이면에 숨겨진 당시의 암중모략과 정치적 음모. 이데올로기의 충돌. 살인사건의 미스테리 등을 작가는 여러 분야의(수학, 천문학, 풍수, 철학, 해부학, 언어학 등등) 방대한 지식들을 토대로 아주 짜임새 있게 풀어간다.
이런 여러 가지 갈등구조 중에서 나의 눈길을 가장 끌었던 것은 개혁과 반개혁 사대와 자주의 이데올로기가 정면으로 부딪히는 부분이었다. 강국의 비호 속에 기득권의 이익을 보호하고 자신의 안녕을 수호하려는 무리와 만인의 평등한 소통을 위해 그 당시만 해도 혁명적인 우리의 말글을 가지겠다는 신념으로 뭉친 이들이 벌이는 암투는 지겨운 예비군교육시간을 잊게 해 주기에 충분했다.
얼마 전 모 정당의 의원단이 방미하면서 ‘우리가 옛날에 중국에 죽지 않으려고 조공도 바치고 책봉도 받아가면서 살아남지 않았느냐.’고 말해 여론의 엄청난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이렇듯 현실의 우리에게는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사대주의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이들이 아직도 사회 곳곳의 요직에 자리 잡고 있다. ‘뿌리 깊은 나무’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허울을 뒤집어 쓴 채 아직도 사대굴종으로 자신의 생명력을 이어가려는 그들에게 주는 일종의 경고장은 아닐까한다. 처음 한번 무릎 꿇기 시작하면 두 번 세 번은 너무 쉬워진다. 한미 FTA등 국가적 대사가 눈앞에 닥쳐있는 요즘 곱씹어볼만한 부분이다.
훈민정음은 민본주의, 평등주의, 민족적 자주성을 잘 보여주는 우리의 자산이다. 중국을 섬기는 데에도 어긋나고, 지배층의 문자가(물론 한자)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자유로운 소통을 위해 온갖 모화주의자들의 반대를 무릎 쓰고 만들어 낸 훈민정음의 창제 정신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믿고 싶다.
일각에서 국보 1호를 숭례문에서 국보 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실려 있다. 책 속에서는 제외 되었지만 해례본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정인지의 서문(鄭麟趾序文)중 일부를 인용한다.
천지자연의 (이치에 맞는)소리가 있다면 반드시 천지자연의(이치에 맞는) 글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서는) 옛 사람이 소리에 따라서 (거기에 맞는) 글자를 만들어서, 그리하여 온갖 사물의 실상(實相)과 통하게 하였고, 삼재의 도리를 책에 싣게 하니, 후세 사람이 능히 바꾸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계는 기후와 토질이 나누어져 있으며, 말소리의 기운도 또한 따라서 서로 다르다.
(그런데) 대개 중국 이외의 나라말은 그 말소리는 있으나, 그 글자는 없다.
(그래서) 중국의 글자를 빌어서, 그리하여 그 사용을 같이하고 있으니, 이는 마치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낀 것과 같이 서로 어긋나는 일이어서 어찌 능히 통달해서 막힘이 없을 수 있겠는가?
요컨대 (글자란) 모두 각자가 살고 있는 곳에 따라서 정해질 것이지, 그것을 강요하여 같이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동방은 예악(禮樂),문장 등 문물제도가 중국에 견줄만하나 다만 방언 이어가 (나라말만은) 중국과 같지 않다.
(그래서) 글 배우는 이는 그 뜻의 깨치기 어려움을 근심하고 법을 다스리는 이는 그 곡절의 통하기 어려움을 괴롭게 여기고 있다.
옛날, 신라의 설총이 처음으로 이두글자를 만들었는데, 관청과 민간에서는 이제까지도 그것을 쓰고 있다.
그러나, 모두 한자를 빌어서 사용하므로, 어떤 것은 어색하고 어떤 것은 (우리 말에)들어맞지 않는다. 비단 속되고 이치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말을 적는데 이르러서는 그 만분의 일도 통달치 못하는 것이다.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비로소 정음 28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예의(例義)를 들어 보이시고 이름을 훈민정음이라고 지으셨다.
출처 : 한국의 한문 홈페이지 발췌 http://user.chol.com/~cytchoi/home4/home4.htm
“전쟁에는 두 가지가 있다. 강역을 걸고 싸우는 전쟁과 시간을 걸고 싸우는 전쟁이다. 나라의 영토를 두고 싸우는 전쟁이 공간의 전쟁이라면 역사의 명분을 걸고 싸우는 전쟁은 시간의 전쟁이다.” - 대제학 최만리 1권 P.288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