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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내 남은 생의 첫날 -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 101인의 가상유언장
도종환.황금찬 외 지음 / KD Books(케이디북스)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어릴 적 읽었던 동화작가 정채봉 선생님의 책 중에 죽음에 대해 설명한 글이 있었다. 초등학생용으로 나온 책이라 분명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인데도 아직 기억이 난다. 내용은 이렇다.
-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길을 가신다. 한참을 걷다가 보니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막다른 길에 부딪힌 되돌아가신 것으로 묘사했다. 죽음을 ‘되돌아가는 것’으로 해석하신 것이다. 단순한 언어유희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어린 나에게는 ‘아... 죽음이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구나.’라는 죽음에 대한 처음이자 대단히 진지한 성찰을 준 글이었다고 생각한다.
유언 [遺言] [명사] 죽음에 이르러 말을 남김. 또는 그 말.
‘오늘은 내 남은 생의 첫날’은 우리문인들이 쓴 가상의 유언장이다. 어쩌면 그 사람이 일생에 글로 남길 수 있는 가장 빼어난 작품인 것이다.
짧게는 사십 몇 년에서 길게는 팔십 몇 년을 살아오신 분들의 삶에 대한 가장 깊은 성찰과 정수를 그대로 엿볼 수 있는 책인 것이다. 다만 불필요하게 넘치는 한자표현과 군데군데 드러나는 자기과시의 글들이 좀 거슬렸지만 아무리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그가 생에서 가장 나중에 남기는 이 글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책의 서평을 씀에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최대한 많은 인용을 남기는 것이리라.
‘사랑하는 가족을 포함한 나를 아는 모든 분들에게 용서를 빈다. 한 조각 메아리도 없는 문학을 한 죄다. 그 벌로써 ’5공‘의 멍에를 썼다. 이후의 세상은 나와는 아무 상관없이 제 멋대로 굴러가고, 제멋대로 돌아갔다. 무엇 하나 내 뜻대로 이룩한 게 없다. 그래서 고독하고 쓸쓸하였다. ... 몹쓸 육신 한 조각을 이 세상에 남긴다는 일이 부끄러울 뿐이다. (중략) 나는 생애의 마지막 20년을 은둔했다. 임종을 지켜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그저 고요한 죽음을 원한다. 가정불화로 집을 뛰쳐나가 어느 이름도 없는 기차역에서 임종을 맞은 톨스토이처럼.
햇살이 닿지 않는 아득하고 깊은 심연에 고요히 침잠해 있고 싶다.‘ (천금성 - 이 책에서 가장 솔직한 자기고백의 유언이었다. 과거의 과(過)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그의 모습에서 연민과 함께 큰 용기를 보았다. 우리 주위에는 아직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
‘나는 네가 자라는 동안 한 번도 너를 매로 다스리지 않았다. 너도 네 자식과 남에게 매를 들지 말거라. 부모 자식과 네 동료와 이웃이 폭력이 아닌 말과 합리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네가 어려서 갖고 싶어하던 장난감이 많았지만 나는 네게 총과 칼과 탱크같은 전쟁장난감을 한 개도 사주지 않았다. 네가 폭력을 가까이 하지 않고 평화로운 삶을 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네 자식에게도 그러하기를 바란다. (도종환)
‘지난 날 사람들이 떠나갈 때 그들에게 나는 손을 흔들어 주며 보내는 역할을 맡아했다. 오늘 나를 떠난 모든 이들이 등을 보이고 사라졌듯이 내가 등을 보이며 멀리 사라질 차례다. ... 슬퍼하거나 아쉬워하지 말자고 마음을 단단히 먹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 너무 슬퍼서 눈물을 참을 수 없다. 영원한 이별의 고통이 슬픔이라면 차라리 고마운 것일는지.
사막의 모래가 바람에 쓸려 산이 되었다가 또는 평원이 되면서 그 모양을 자주 바꾸듯, 내가 살던 흔적도 그렇게 깎이고 쓸리고 차차 지워지면서 천천히 잊혀질 것이다.
시계가 필요 없는 세상 속으로 빠져나가는 나를 위해 손을 흔들어주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사랑하였다는 마지막 말을 전한다. (김이연)
봄이면 제비꽃이 반갑고, 가을이면 들길을 가던 내 발자국은 이제 바람에게 의탁해야 할 시간이 되어 흐르고 있다. 떠난 뒤에도 자연의 노래는 끝이 없겠지만 서투른 내 노래는 침묵뿐이리니, 세상에 대하여 할 말이 줄어들면서 잎이 진 뒤의 나무처럼 떠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하여 나는 하나의 별빛으로 밤하늘에 선연하게 떠서 두고 가는 사람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당신과 두 아들의 시냇물과 같은 눈빛을 가지고 가렵니다. 비로 반쪽 아내와 반쪽엄마로 살았지만, 그래도 지는 꽃잎처럼 당신의 그림자를 지나서 가렵니다. (하략) ...‘ (김옥배)
‘엄마를 미워하게도 되겠지. 하지만 엄마는 알아.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너의 마음속에 가장 오래 기억되리란 것을. 그러니 혼자라고 울지 마. 네가 처음으로 엄마 없이 친구들 손을 잡고 백화점에 갔던 것처럼 조금 더 넓은 세상으로 힘차게 나아가렴.’ (하성란)
(상략 )영정사진은/ 너무 엄숙하지 않은 걸로 / 조금의 웃음이 깃든 걸로 / 놓아주세요 / 시를 쓰지 않아도 되는 지금 / 나는 이제 진짜 시가 되었다고 / 믿고 싶어요 / 갚을 길 없는 사랑의 빚은 / 그대로 두고 감을 용서하셔요 / 생각보다 빨리 / 나를 잊어도 좋아요 / 부탁 따로 안 해도 그리 되겠지요 / 수녀원의 종소리 / 하늘과 구름과 바다와 새 / 눈부신 햇T이 / 조금은 그리울 것 같군요 / 그 동안 받은 사랑 / 진정 고마웠습니다... . (이해인 시 ‘미리 쓰는 유서 중에서.)
‘제발 기억해주시오. 저 하늘에 구름이 흐르거든, 저 하늘에 비가 내리거든, 저 산에 바람이 불거든, 기억해주시오. 당신을 못 잊어 울부짖는 소리임을 잊지 말아주시오. 저 창공에 벼락이 치거든, 저 산 넘어 노을이 지거든 저 바다 건너 지평선에 달이 지거든, 저 강물위에 돛단배가 뜨거든, 생각해 주오. 못 다한 사랑 기억하며 허공을 맴도는 나의 뜨거운 넋임을. 그대! 내 영원한 사랑이여! 잊지 말고 기억해주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길남)
아직 유언을 남길만한 나이는 아니지만 이런저런 기회가 있어 유언을 써보고 몇몇의 사람들과 나누어 본 일이 있다. 성인이 된 다 큰 남자가 자신이 쓴 글을 읽으며 울음을 삼키는 일을 바라보는 일은 참으로 곤욕스러웠다. 물론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일도 마찬가지다. 아마 이 글을 쓴 작가들도 아무리 가상이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글을 쓰는 내내 깊은 상념에 빠졌으리라. 혹자는 눈물을 삼켰으리라...
스무 두 살이 되던 때부터 나는 지갑에다 나의 갑작스런 죽음을 대비해 짧은 글을 적은 종이를 끼워두고 다닌다. 수시로 문장들을 다듬고 손을 보면서 말이다.
삶이란 ‘갑자기’들의 연속이라서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나는 일이 허다하기에... 나의 갑작스런 죽음이 그들에게 상처가 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어쩌면 죽음은 죽은 사람의 몫이 아니라 살아남은 이들의 몫이기에... 그들의 죽음이 오롯이 나의 몫으로 남았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 잘 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