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드 폴 (Lucid Fall) - 오, 사랑
루시드 폴 (Lucid Fall) 노래 / Kakao Entertainment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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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홍대를 중심으로 한 인디씬이 태동하던 90년대 중후반, 막연한 호기심에 기웃거리던 그때를 기억한다. 음악을 좋아했지만 TV를 점령한 댄스그룹이나 뻔한 발라드, 또는 예쁜 여자보컬을 내세운 말랑말랑한 자칭 모던록 밴드들은 취향에 맞지 않았더랬다. 그러다 당시 유행하던 무가지나 음악잡지에서 정보를 얻고, 대학축제 에서 만나기도 하면서, 그렇게 조금씩 시작되었던 인디 음악에 대한 관심. 물론 혼자서 클럽에 갈만한 용기까지는 없었고, 그저 PC통신에서 주워듣거나 라디오의 심야방송에 간간히 소개되는 정도에 만족할 따름이었지만. 바로 그때, 쟁글쟁글 기타톤의 모던록이나 파워 넘치는 펑크가 인디의 전부인 줄 알았던 시절, 조용하게 내 귀에 스며들었던 밴드 '미선이'.

나직한 목소리와 조용한 멜로디, 마치 시를 연상시키는 가사 (알고보니 그는 마종기 시인의 시집을 즐겨 읽는다고 한다)에서 느껴지는 미선이의 음악은 단순히 서정적이라고 해서 아름답다고 느낄 만한 것은 아니었다. 방심하고 있다가 의표를 찌르는 날카로움,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라 뼈에 사무치는 듯한 절실함, 가슴에 저미는 외로움, 음악 전체에서 풍겨나오는 그들만의 절망과 쓸쓸함은 당시의 다른 어떤 음악과도 구별되는 것이었다. '송시'를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듯한 기분.

얼마쯤 후에 미선이는 해체되었지만 보컬이었던 조윤석의 솔로 프로젝트인 루시드 폴의 1집, <버스, 정류장> O.S.T로 그의 음악은 이어져 왔고, 홈페이지인 물고기 마음(www.mulgogi.net) 에서 스위스에서 유학중인 그의 소식과 함께 데모 음악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음악은 여전히 쓸쓸했고, 그 쓸쓸함에서 오히려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아,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각자 다 외롭구나, 그렇구나, 그런 생각들.

이번 루시드 폴의 두번째 앨범은 새롭게 메이저 기획사인 토이뮤직과 계약하고 서울음반에서 발매되었다. 많은 사람들 입에서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4대 일간지에 기사가 실리고, 작은 클럽이 아닌 큰 극장에 공연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예전부터 그의 팬이었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가 변했다, 변하지 않았다, 고 논란이 분분하다. 물론 예전의 음악에 비해  부드러워지고 둥글어진 점은 뚜렷하게 느껴진다. 음반 곳곳에서 흐르는 jazzy한 피아노 선율은 지나치게 세련된 것처럼 보이고, 언뜻 유희열을 연상시킬 수도 있겠다. 가을의 쓸쓸함보다는 봄의 설렘이나 아련함이 더 느껴진다고 할까. 하지만 그가 변했든, 변하지 않았든, 그 역시 폴의 음악인 것만은 분명하고, 시간의 흐름 역시 무조건 부인할 수만은 없을 것. 그저 그가 오랜 시간 동안 힘들게 키워 틔운 싹이 쉬이 지지 않기 만을 바랄 뿐. 

그리고 그저 귀를 기울일 뿐. 앞으로도 그의 음악은 계속될 것이므로.

 

+ 루시드 폴 음악의 백미라고 할 수 있을 가사. 특히 이번 앨범의 '들꽃을 보라'는 가사만으로도 한편의 시라고 해도 손색 없을 텐데. 한쪽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이 가사는 여전히 그를 믿어보게 하는 이유 중 하나. 이 곡에서 나는 연약한 '들꽃'도 되었다가, 함부로 짓밟는 그 '누구'도 되어버린다. 

 

봄.
온 세상이 푸른,
눈부시게 맑은,
긴 잠을 깨우는,
봄.

봄.
저 햇빛은 붉은,
찬란하게 밝은,
세상을 키우는,
봄.

난,
대단한 게 별로 없어.
봄을 따라 왔을 뿐.

헌데,
올해도 사람들.
무정한사람들.
날 짓밟으려 해.

참 어렵지.
사는 것.
내 뜻대로,
원하며, 사는 것.

참 두렵지.
잠시 여기 있을 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아.

누가, 나를 꺾는가.
누구의 힘으로 내 목을 꺾는가.

누가, 나를 꺾는가.
누구의 권리로 내 목을 꺾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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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春) 2005-04-17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연약한 '들꽃'도 되었다가, 함부로 짓밟는 그 '누구'도 되어버린다. --> 절절하군요. 저도 이 노래 들으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데... 잘 쓰셨군요.

에스페란사 2005-04-18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써놓고 보니 정작 음반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 사족에 가까운 내용이 많아서 올려놓고도 망설였는데..저도 하루님 리뷰 잘 읽었어요.

galapagos55 2005-04-18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음반 샀는데요, '들꽃을 보라"-처음엔 그냥 그런 꽃노래(?)인가..했는데 뒷부분 가사를 듣고 나서는 소름이 쫙 돋았어요. 이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노래중의 하나랍니다.^^

에스페란사 2005-04-19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galapagos55님, 저도 '들꽃을 보라' 많이 좋아해요. 말씀하신 것처럼 듣는 사람들에게 소름을 돋게 하는 것, 서정적인 포크이면서도 언뜻언뜻 비추는 날선 기운, 그게 바로 루시드 폴만의 정서이자 장기인거 같아요. ^^ 아쉽게도 이번 앨범에는 그런 모습이 적어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