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가죽소파 표류기 - 제3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정지향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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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 하늘이 있다. 올려다보면 막연히 파랗게 펼쳐져 있다. 노란 햇살도 그렇다. 그저 어느새 피부에 맞닿아있는 것. 「고아의 도시」에 사는 ‘그들’, 아니 ‘우리’는 현실을 그렇게 체감한다. 실감하기보다는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것들. 하지만 자의로 잡거나 거부하거나 할 수도 없는 그런 성질을 가진 것들. 그래서 ‘초록’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입장이 다르기보다 명암이나 농도 같은 것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것이 어쩌면 청춘이고 연애이고 삶의 방식일 테니까. 정지향의 장편소설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의 이야기들이 그렇다. 초록과 같이 명확한 듯 명확하지 않으며 모호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모호해서 더욱 아름다운 이야기.

 

  내가 한국에 간다면, 그때 말했던 것처럼 네 ‘소파’를 내어줄 수 있어?

  -p.39

 

  이 소설은 세 명의 주인공이 있다. 나, 요조, 민영. 이들은 너무 친밀하기도, 너무 친밀해서 잘 모르기도 한다. (이것은 주로 ‘나’와 ‘요조’의 관계이다.) 자발적 고아든(요조) 이국적 고아든(민영) 아니면 후천적 고아든(나-그렇다고 선천적이란 말을 지울 수는 없다.) 이들은 한 곳에 모여 있다. 모여들었다는 말이 정확할까? 사회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욕망을 가진-혹은 사회로부터 겨우 그림자 정도만 걸쳐 둔 공간이 바로 「고아의 도시」다.

 

  요조와 나는 방학 한가운데서도 그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애들을 고아라고 불렀고, 거기엔 우리도 포함됐지.

  -p.14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는 무더운 여름을 중심으로 묘사된다. 무기력이라고 할까, 아니면 별다른 감흥을 느끼기 힘든 무감각의 상태라고 할까. 그것은 ‘나’의 소설 쓰기에 드러난다. 요조와 늘 같이 있기에 쓸 수 없는 요조에 관해서. 민영과 한순간 너무도 가까웠지만 ‘나’가 한국에 돌아와서 무언가 이야기를 쓸 수 있었던 민영에 관해서. 그리고 마음보다 손이 빨라 보이는 문창과 후배들의 열정에 관해서. 한 문장조차 쓸 수 없었던 ‘나’의 어떤 소설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나’의 이야기이므로. 그것이 여름-장마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나’의 방식이므로. 고아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겪어왔던 우리의 이야기이므로.

 

  나는 민영을 질투하는 것 같기도 했고, 요조를 질투하는 것 같기도 했어.

  -p.102

 

  나에게 민영은 어쩌면 파란 하늘처럼 자유로운 존재로 보였을지 모른다. 요조는 늘 내리쬐는 태양처럼 붉고 노랗고 익숙했을 거다. 이들은 사실 누구나 ‘카우치 서퍼’이기도 하다. 다만 그것이 가능한 곳은 ‘나의 방’이고, ‘언젠가 갖고 싶은 초록 가죽소파’이다. 앉아 있는 순간에는 알 수 없다. 이미 ‘초록 가죽소파’ 위일지라도. 느끼지 못하는 ‘초록’보다는 왠지 아늑하고 편안하고 좋아 보이는 ‘초록’을 원하는 것이 사람이니까. 그걸 꿈꾸는 게 대학생들의 권리이고 의미니까.

  모두 ‘초록 가죽소파’ 위에서 ‘표류’ 중이니까.

 

  나는 김이 빠진 맥주를 부끄럼 없이 나눠 먹을 사람을 또 만난다고 해도 언제나 요조를 떠올리게 될 것 같아. 나는 언제까지나 미국 산티아고 위성도시의 방식으로 볶음밥을 만들 것 같아.

  -p.140

 

  청춘의 시기에 느끼는 외로움이란 게 이럴 거다. 혼자여도 괜찮을 줄 알았던 것들이 불현듯 찾아오는 순간들. ‘맥주의 시간’과 당신과 나눠 먹던 어떤 ‘음식의 시간’, 혹은 ‘나’를 한때나마 증명하고 긍정하던 그들의 흔적이 묻은 사물들. 표류의 끝은 무엇일까? 사회로의 진입이거나 한 생을 포기하는 것? 아니면 고아임을 자처하면서 고아임을 스스로는 알고 있는 것? 아마도 표류라는 단어를 이해하는 순간이 아닐까. 소설 쓰기가 한 페이지에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을 때 이전의 서사들, 사건들이 그리워지는 그 순간이 아닐까. 표류의 끝은 아이가 어른이 되기보다는 아이가 다른 아이가 되어 ‘다른 소파 위에 앉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금요일 퇴근시간의 지하철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많았지. 손잡이를 잡을 수조차 없었어. 사람들 사이에 낀 채 가만히 서 있을 때면, 고아의 도시와 서울이 완전히 다른 나라처럼 느껴졌어. 둘 중 어느 곳이 정상인지 알 수가 없었어.

-p.35

 

  나의 말을 들으며 나와 요조와 민영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공감보다는 교감에 가까울 것이다. 타인을 이해하거나 동질감을 느끼기보다는 너와 나는 다른 처지지만 갈 곳이 없는 건 마찬가지잖아? 하는 것. 친구와의 대화란 늘 그렇다. 함께일 땐 듣기 싫으면서 듣고 싶은 생활이 있고 나누고 싶지만 나누기 싫은 마음이 있고 혼자일 땐 그립고 서러울 정도로 외로운. ‘나’의 말은 그래서 아는 것은 불편하고 그래서 친밀한, 무기력하지만 다 같이 무력해질 수 있는 한패가 되어 서울 시내를 오갈 수 있는 것이다.

 

  뭐가 더 좋은지를 생각하기보다는, 어디가 더 좋은지를 생각하는 일. ‘가죽소파’ 위에서. 누구나 가지고 싶었고 누구나 떠나게 되는 ‘초록’의 세계에서.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만났고 위태로웠고 떠나갔다. 더 짙거나 연한 ‘초록’의 청춘을 향해.

  당신을 당신이라 부를 수 있는 한때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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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문학동네 시인선 38
오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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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원래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어디에든 있을 수 있었다

-「Be」중에서.

 

 

  쉽게도 어렵게도 쓰이는 말. 말은 같은 말을 같은 억양으로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혹은 분위기에 따라 말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것은 말의 맛이다. 때로는 달콤하고 시큼한, 때로는 텁텁하고 끔찍한 단어의 맛. 이 맛은 단편적인 자극이 아니다. 똑같이 발음되는 여러 단어에 의해 또 ‘은, 는, 이, 가’와 ‘,’, ‘ ’의 미묘한 차이로 인해 우리가 아는 말조차 삽시간에 낯설어지고 우스꽝스럽게 변하는 동시에 슬퍼지기도 한다. 희극적인 섬뜩함. 누구일까? 첫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로 말의 무한한 힘을 보여준 오은 시인이다. ‘말놀이 애드리브’에서 ‘ㅁ놀이’로, ‘입 벌리는 일을 조금 줄이고, 귀 기울이는 일을 조금 늘렸다.’고 하는 오은의 두 번째 시집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인간들이란, 어찌 그리도 인간적인지. - 「육식주의자」중에서.

 

 

  오은 시인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뱉는 말들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다. ‘미워 언제 졌지?/언제 미워졌지?’ (「부조리 -명제에 담긴 취향」중에서.) 배치 하나로 달라지는 것은 그저 말뿐이 아니라 말과 함께 오는 느낌, 말 다음에 찾아오는 느낌, 그 모든 것이다. ‘미워’를 먼저 드러내며 감정을 앞세워도 좋겠고, ‘언제’를 강조하며 시기를 어림잡는 모습으로 만들어도 좋겠다. 같은 말도 배치에 차이를 둠으로써 문장보다 큰 가능성으로 열리게 된다.

 

 

어떤 날엔 잊어버리고 잃어버리는 게 일이었다 ……어딘가 슬픈 구석이 있었는데, 이 느낌만은 아무리 잃어버려도 끝끝내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 「어떤 날들이 있는 시절 -망실(亡失)의 시대」중에서.

 

 

  오은 시인의 말놀이는 기존의 단어가 품고 있는 뜻을 잠시 잊어버리고 잃어버리는 데에서 출발한다. 시집의 중간쯤에 위치한 「란드」의 경우 ‘란드(land)’의 앞에 올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 ‘란드’는 핀란드도 폴란드도 네덜란드도 그린란드도 아이슬란드도 된다.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화폐 단위도 된다. 그러면서 란드는 그 자체로 란드가 된다. ‘란드’ 앞의 말을 잠시 잊어버리고 잃어버리는 것. 모든 란드가 란드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름다우면서 끔찍하다. ‘나’는 란드에서 태어나 란드에서 자랐다는 사실. ‘란드’에 내가 있다는 사실은 잃어버려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래서 이 시가 재미있고 참신하고 기발한 동시에 무서웠다. 란드에 대해 생각하다가 란드에 갇힌, 그 기묘한 느낌 때문에.

 

 

이것은 파이프다. 파이프는 파이프다. 파이프 말고 이것을 표현할 다른 수단을, 나는 알지 못한다. - 「이것은 파이프다」중에서.

 

 

  나는 이 문장이 좋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오은 시인답게 패러디했다. 사물이나 대상에 붙은 이름이 사물의 본질 그 자체는 아닐지 모르나, ‘파이프’를 ‘파이프’라고 하는 것보다 명백하게 ‘파이프’를 밝혀줄 수는 없다. ‘와이프’도 ‘나이프’나 ‘테이프’가 아니라고, 비슷한 발음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의 것들을 ‘아니다’라고 부정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파이프’가 단지 ‘파이프’라는 사실에 접근하게 된다. 파이프다, 파이프가 아니다, 라는 긍정과 부정을 따라가면 마지막엔 ‘그리고 이것은 내가 생각했던 파이프의 도입이 아니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아마도, 어떤 방식도 파이프의 도입이 ‘아닐’ 확률이 높다.

 

  오은 시인은 기존의 단어를 해체하되 파괴하거나 다른 것으로 바꾸지는 않는다. 단어는 그대로 두되 그 단어를 몇 번이고 잊어버리면서, 매번 새롭게 발음하면서 의미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첫 시집이 말의 가능성을 극단까지 밀고 가는 재기발랄함으로 가득했다면 이번 시집은 말의 재미에 내면적인 요소가 첨가되어 달콤하면서 씁쓸한 초콜릿과 같은 복합적인 맛이 난다. ‘서 있어도/앉아 있는 사람들보다 작았다//가장 많이 떠들었는데도/듣는 사람들보다 귀가 아팠다’ (「면접」중에서.)의 블랙코미디적인 느낌은 표현은 재밌는데 어딘가 서글프다. ‘나’ 또한 살기 위해 ‘질문만 있고 답이 없는’ 곳으로 가려고 ‘순순히 떨어지지 않았다’는 모습은 나의 이야기이기도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마음을 뭐라고 해야 할까. 아득해지는 이 마음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채, 우리는 오은의 시 속에서 서서히 아늑해진다. 우리가 사랑하는 분위기는 ‘거의 모든’ 분위기일 수도 있고, ‘우리가 있는’ 분위기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어떤 말을 발음하다 보면 참을 수 없이 낯설어질 때가 있다. 낯설다는 그 느낌이 참을 수 없이 좋을 때가 있다. 참을 수 없는 뉘앙스의 세계가 여기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분위기가 시집 속에도, 시집을 빠져나온 뒤에도 있다. 우리는 이 어쩔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익숙한 것을 익숙하지 않게 발음할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이 시집, 이 분위기 속에.

 

 

얼음이 녹는 건 슬픈 일

얼음이 녹지 않는 건 무서운 일

어떻게든 살기 위해

남몰래

천천히 녹는다

-「야누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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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랑 나랑 노랑 - 시인 오은, 그림을 가지고 놀다!
오은 지음 / 난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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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당신은 이런 날을 기다려왔다. 푹푹 찌는 날씨. 뻔한 일주일. 지친 당신은 ‘레드망고’로 향한다. 누구와 함께 온 것이 아니므로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뺄지 배려할 필요가 없다. 종업원의 추천 토핑도 한 귀로 흘려버려라. 먼저 ‘화이트’로 된 요거트 아이스크림이 그릇에 담긴다. 멜론과 키위의 ‘그린’도 좋지만 한적한 오후 녹차가 가진 ‘그린’도 나쁘지 않다. ‘블루’베리를 한 알씩 씹으며 먼 나라를 떠올릴 수도 있다. 사과를 ‘레드’로써 넣을 것인지 ‘옐로’로써 넣을 것인지는 당신의 몫이다. 이것들을 섞어도 좋고 따로따로 음미해도 좋다. ‘블랙’수트를 입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당신. 당신의 감정에 따라 오늘을 다양한 색과 맛으로 기억할 것이다.

 

  오은의 『너랑 나랑 노랑』은 색깔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이다. ‘색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깨달았을 때, ‘오해’된 색깔들은 오히려 탄력을 받기 시작한다. 불길하고, 탐욕적이며, 포악한 것이 ‘레드’지만 불안한 우리를 꿈틀거리게 하는 에너지 또한 ‘레드’다. 에밀 놀데 <촛불 무희들>의 두 여인은 ‘붉게, 붉게 더 붉게! 댄스, 댄스, 더 댄스!’를 외친다. 촛불과 동화되어 ‘내면의 레드를 모조리 뽑아내는 과정’을 즐기는 것이다. 광기에 사로잡힌 그녀들의 춤을 보며 오은은 말한다. 불안하면 어때? 위태롭게 폭발하는 힘. 그게 ‘레드’잖아?

 

  오은이 붙인 소제목과 그림에 들어가 자유롭게 풀어내는 그의 개성 있는 이야기에 빠져들기 전에 나는 나 나름대로 그림들을 오해해보기로 했다. 왼쪽 페이지의 그림을 보고 그림의 제목과 내용을 상상해보는 일이었다. 메리 커셋 <파란 안락의자의 소녀>는 약간 따분해 보이는 소녀와 잠든 애완동물이 있는 풍경이다. 큰 느낌 없이 가벼이 넘긴 그림이었는데, 오은의 이야기를 보고 적잖이 놀랐다. 소녀가 ‘코발트블루’를 꿈꾸는 것도, 소녀가 메리인 것도, 성장한 소녀가 ‘블루’를 그리며 ‘블루’에 젖는 것도 신선했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정도가 아니라 그림을 펜촉에 찍어 글을 쓰는 느낌. 방심할 수가 없었다. 예상치 못한 색깔로, 점점 흥미진진해졌으므로.

 

  낯선 그림들 속에서 나는 모리스 위트릴로 <파리의 골목>이 주는 ‘화이트’에 독특한 인상을 받았다. ‘화이트’지만 결코 밝지 않았고, 그렇다고 마냥 우울한 것도 아니었다. ‘따듯한 멜랑콜리’라는 소제목만큼 적절한 게 없어 보였다.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는 정말 다양한 기분이 떠오르게 하지만, 그것들을 글로 옮기는 게 가능할까 라고 생각해왔다. 남자와 여자. 금빛으로 반짝이는 이미지. 무슨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오은의 말빨은 ‘색깔’도 말을 하게 만든다. 남자와 여자를 장식 취급하는 ‘옐로의 경우’가 있는 것이다. 남녀보다 더 부각되고 싶은 ‘옐로’. <키스>를 다시 보았다. 더 이상 몽환적이고 아름답기만 한 그림이 아니었다.

 

  에드바르드 뭉크 <키스> 또한 ‘블랙’을 실감하게 한다. 우리는 어둠에 빠지면 불안하지만, 반대로 완연한 어둠은 차분하게 또는 서서히 잠들게끔 만든다. ‘블랙’은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서서히 들어온 어둠은 ‘나’를 대변한다. 바깥에서 어떤 ‘블랙’이 강하게 밀려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른 개의 ‘맛’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어떤 날은 ‘블루’와 ‘옐로’를, 또 어떤 날은 ‘화이트’와 ‘그린’과 ‘레드’를, 어떤 날에는 더 진해질 수 없을 만큼 진한 ‘블랙’에 젖고 싶을 거라고. 개성 있는 그림들에 오은의 말솜씨가 더해져 내게로 번져 들어온다. ‘코발트블루라고 말할 때 내가 아콰마린을 떠올’렸을지도 모르지만, ‘코발트블루’를 통해 온전히 ‘블루’를 느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은이 풀어놓은 ‘컬러’를 맛보고 싶을 때에는 필요한 만큼 찍어서 원하는 만큼 맛보면 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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