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문학동네 시인선 38
오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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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원래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어디에든 있을 수 있었다

-「Be」중에서.

 

 

  쉽게도 어렵게도 쓰이는 말. 말은 같은 말을 같은 억양으로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혹은 분위기에 따라 말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것은 말의 맛이다. 때로는 달콤하고 시큼한, 때로는 텁텁하고 끔찍한 단어의 맛. 이 맛은 단편적인 자극이 아니다. 똑같이 발음되는 여러 단어에 의해 또 ‘은, 는, 이, 가’와 ‘,’, ‘ ’의 미묘한 차이로 인해 우리가 아는 말조차 삽시간에 낯설어지고 우스꽝스럽게 변하는 동시에 슬퍼지기도 한다. 희극적인 섬뜩함. 누구일까? 첫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로 말의 무한한 힘을 보여준 오은 시인이다. ‘말놀이 애드리브’에서 ‘ㅁ놀이’로, ‘입 벌리는 일을 조금 줄이고, 귀 기울이는 일을 조금 늘렸다.’고 하는 오은의 두 번째 시집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인간들이란, 어찌 그리도 인간적인지. - 「육식주의자」중에서.

 

 

  오은 시인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뱉는 말들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다. ‘미워 언제 졌지?/언제 미워졌지?’ (「부조리 -명제에 담긴 취향」중에서.) 배치 하나로 달라지는 것은 그저 말뿐이 아니라 말과 함께 오는 느낌, 말 다음에 찾아오는 느낌, 그 모든 것이다. ‘미워’를 먼저 드러내며 감정을 앞세워도 좋겠고, ‘언제’를 강조하며 시기를 어림잡는 모습으로 만들어도 좋겠다. 같은 말도 배치에 차이를 둠으로써 문장보다 큰 가능성으로 열리게 된다.

 

 

어떤 날엔 잊어버리고 잃어버리는 게 일이었다 ……어딘가 슬픈 구석이 있었는데, 이 느낌만은 아무리 잃어버려도 끝끝내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 「어떤 날들이 있는 시절 -망실(亡失)의 시대」중에서.

 

 

  오은 시인의 말놀이는 기존의 단어가 품고 있는 뜻을 잠시 잊어버리고 잃어버리는 데에서 출발한다. 시집의 중간쯤에 위치한 「란드」의 경우 ‘란드(land)’의 앞에 올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 ‘란드’는 핀란드도 폴란드도 네덜란드도 그린란드도 아이슬란드도 된다.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화폐 단위도 된다. 그러면서 란드는 그 자체로 란드가 된다. ‘란드’ 앞의 말을 잠시 잊어버리고 잃어버리는 것. 모든 란드가 란드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름다우면서 끔찍하다. ‘나’는 란드에서 태어나 란드에서 자랐다는 사실. ‘란드’에 내가 있다는 사실은 잃어버려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래서 이 시가 재미있고 참신하고 기발한 동시에 무서웠다. 란드에 대해 생각하다가 란드에 갇힌, 그 기묘한 느낌 때문에.

 

 

이것은 파이프다. 파이프는 파이프다. 파이프 말고 이것을 표현할 다른 수단을, 나는 알지 못한다. - 「이것은 파이프다」중에서.

 

 

  나는 이 문장이 좋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오은 시인답게 패러디했다. 사물이나 대상에 붙은 이름이 사물의 본질 그 자체는 아닐지 모르나, ‘파이프’를 ‘파이프’라고 하는 것보다 명백하게 ‘파이프’를 밝혀줄 수는 없다. ‘와이프’도 ‘나이프’나 ‘테이프’가 아니라고, 비슷한 발음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의 것들을 ‘아니다’라고 부정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파이프’가 단지 ‘파이프’라는 사실에 접근하게 된다. 파이프다, 파이프가 아니다, 라는 긍정과 부정을 따라가면 마지막엔 ‘그리고 이것은 내가 생각했던 파이프의 도입이 아니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아마도, 어떤 방식도 파이프의 도입이 ‘아닐’ 확률이 높다.

 

  오은 시인은 기존의 단어를 해체하되 파괴하거나 다른 것으로 바꾸지는 않는다. 단어는 그대로 두되 그 단어를 몇 번이고 잊어버리면서, 매번 새롭게 발음하면서 의미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첫 시집이 말의 가능성을 극단까지 밀고 가는 재기발랄함으로 가득했다면 이번 시집은 말의 재미에 내면적인 요소가 첨가되어 달콤하면서 씁쓸한 초콜릿과 같은 복합적인 맛이 난다. ‘서 있어도/앉아 있는 사람들보다 작았다//가장 많이 떠들었는데도/듣는 사람들보다 귀가 아팠다’ (「면접」중에서.)의 블랙코미디적인 느낌은 표현은 재밌는데 어딘가 서글프다. ‘나’ 또한 살기 위해 ‘질문만 있고 답이 없는’ 곳으로 가려고 ‘순순히 떨어지지 않았다’는 모습은 나의 이야기이기도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마음을 뭐라고 해야 할까. 아득해지는 이 마음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채, 우리는 오은의 시 속에서 서서히 아늑해진다. 우리가 사랑하는 분위기는 ‘거의 모든’ 분위기일 수도 있고, ‘우리가 있는’ 분위기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어떤 말을 발음하다 보면 참을 수 없이 낯설어질 때가 있다. 낯설다는 그 느낌이 참을 수 없이 좋을 때가 있다. 참을 수 없는 뉘앙스의 세계가 여기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분위기가 시집 속에도, 시집을 빠져나온 뒤에도 있다. 우리는 이 어쩔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익숙한 것을 익숙하지 않게 발음할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이 시집, 이 분위기 속에.

 

 

얼음이 녹는 건 슬픈 일

얼음이 녹지 않는 건 무서운 일

어떻게든 살기 위해

남몰래

천천히 녹는다

-「야누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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