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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배수아, 그녀의 소설을 나는 처음 읽었다. 왠지 별로 끌리지 않았었는데, 최근 모 잡지 창간호에 실린 인터뷰를 읽고 관심이 생겨서 가장 최근에 나왔다는 이 책을 샀다. 결론은.. 어쩐지 강박적인 데서 못벗어나고 있는 듯한 진부한 느낌이 들었지만, 다 읽고나니 꽤 유쾌하기도 했다.

독신으로 인습에 반항하며 살아가는 여성이라는 소재는 우리나라 여성작가들의 가장 흔한 테마 중 하나라는 점에서 그리 참신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가부장제나 중산충의 속물근성을 거부하며 독립적으로 사는 여자. 왜 여자의 삶을 묘사하는 소설은 결국 사랑이나 결혼의 문제 주위를 맴돌수 밖에 없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물론 순종적인 여자들이 나오기 때문에 하는 말은 전혀 아니다. 은희경, 전경린 등 우리나라 여성작가들의 소설에는 <나는 니가..>의 주인공처럼 인습을 거부하고 자유연애를 하면서 홀로 서는 여자들이 주로 나오는데, 겉으로는 가장 과격하고 파격적인 듯 보이지만, 실은 이들은 실은 결혼이나 가부장제에 또 다른 의미에서 묶여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들은 '나는 독신으로 살거야' '나는 결혼을 경멸해' '나는 사랑을 믿지 않아' 이런 주장을 수시로 하고, 스스로에게도 누차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우려면 더 이상 그 무엇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삶이 아니라 그 무엇과도 경쟁하지 않고, 그 무엇에 대고도 저항하지 않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삶을 꾸려가야 하는 것 아닌가. 인습에 대한 반항은 결코 인습으로부터 자유가 될 수 없다. 인습을 더 이상 의식하지 않는 삶이라야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이 아닐까. 물론 대한민국 사회가 독신여자의 삶을 인습과 끊임없이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에 대한 반항이라는 소재가 자연스럽게 등장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은 그렇게 사회고발적인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결혼한 삶 = 편하고 안온한 삶, 독신 = 어렵고 투쟁적인 삶이라는 도식적인 이분법도 좀 단순하다. 독신은 어쩌면 결혼이 가져다주는 온갖 고통과 어려움에서 도피하는 수단일 수도 있다. 그리고 사랑을 거부하려고 하는 자세는 상처를 두려워하는 유아적인 방어벽일 수도 있다.

물론 40대 이상의 아저씨들은 이 소설을 읽으면 상당히 도발적이라고 느낄지는 몰라도, 유경의 생활태도나 사고방식이 전혀 낮설지않고, 한때는 그런 스타일을 멋있다고 생각해본적이 있는 나, 그리고 나와 비슷한 대한민국의 여자들에게는 그리 참신한 발상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런 시각상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상당히 유쾌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캐릭터를 묘사하는 작가의 쾌활하고 생생한 재능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 유경과 그 친구들 미라, 지숙, 서란, 자영의 모임에서 터져나오는 말들과 오가는 심리의 묘사는 정말 놀랍다. 그리고 남자 등장인물들인 길, 금성에 대한 묘사 역시.. 남자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이렇게 현실적인 소설을 나는 별로 못봤다.

캐릭터들의 묘사, 그리고 그들끼리 나누는 대화에서 유추해볼 때, 나는 주인공 유경의 주관적 사고가 어쩌면 이 소설의 작가가 지향하려 하는 삶을 대변해주는 것이 아니라, 유경조차도 하나의 냉소대상인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경의 친구들, 하나같이 우아한 이 여자들이 실은 친구가 자리를 뜨기만 하면 서로를 험담하고 자존심을 긁는 희화적인 광경이란!. 그들 사이에 있으면 유경 역시 그렇고 그런, 자존심만 살아있는 허위적인 인물로 보일 지경이다.

유경의 '의지'어린 삶에 대한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그녀의 의지에 동화되도록 하는 측면보다는 책 전체에 팽팽하고 날카로운 긴장감을 만들어낸다는 면에서 더 칭찬해줄 만하다, 그리고 위선도 위악도 부리지 않는, 단호하고 선언적인 문체가 마음에 든다.

아마 앞으로 배수아의 소설을 더 찾아 읽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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