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와 장소상실 논형학술총서 14
에드워드 렐프 지음, 김덕현.김현주.심승희 옮김 / 논형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가 1976년에 쓴 책이다. 번역이 진짜 늦게 나온 거다. 난 지리학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지만, 지리학을 몰라도 읽는데는 별 지장이 없다. 전문용어가 별로 없어서 읽기 어렵지 않다. 현상학적 방법론을 적용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데 현상학이란 어차피 모든 학문 분야에 있어서 방법론적 반성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맥락이 이해가 갔다. 그러니까, 이론적 도구를 정련시켜서 거기서부터 논의를 전개해나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직접적인 세계, 그러니까 '생활세계'에 대한 기술(description)로부터 출발하려는거다.  

1장부터 5장까지는 이런 '세계에 대한 기술'이 담겨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장소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나름의 분류를 하는데, 솔직히 이 부분은 살짝 지루하다. 너무 '나열'에 그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현상학적 방법=나열은 아닐텐데 말이다. 암튼 그래도 거기 담긴 문제의식은 잘 느껴졌고, 몇몇 범주들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6장부터는 앞보다 훨 재미있다. 저자가 모던 사회의 특징으로 본 '무장소성(Placelessness. 제목의 '장소상실'과 같은 단어인데 책 안에는 '무장소성'이라고 되어있다)'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이다. 서브토피아(subtopia), 박물관화, 디즈니화, 산업에 의한 경관의 파괴 등등, 중요한 카테고리들이 잇따라 등장한다. 화질이 안좋긴 하지만 사진도 많다. 저자가 분석하고 있는 것은 주로 유럽과 미국의 경관인데, 특히나 미국에 잘 들어맞는 부분이 많다. 미국 서부여행에서 약간이나마 이런 '무장소성의 극치'라고 해야 할 경관들을 봤기 때문에 '삘'이 왔다. 하긴 요즘 우리나라에도 무장소성의 경관은 넘친다. 각종 국적의 간판이 붙은 모텔촌, 새로지은 고층 아파트촌...그러나 이런 무장소성의 경관도 동네마다 특색이 있다. 렐프가 못본 것이 있는 건지도.

이 책은 '무장소성'이라는 개념을 처음 유행시킨 고전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훨씬 전에 굉장히 포스트모던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서 유명한 책인데, 지금 봐도 통찰력이 날카롭다. 물론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크게 날카로울 것도 없지만, 1976년에 썼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책 끝부분에서 결론을 유보하고 있긴 하지만, 이 책은 '무장소성의 경관'에 대한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을 담고있다. 때문에 복고적 향수취향으로 느껴지기도 한다(특히, 이 문제에 관한 한 꽤나 보수적인 이론가인 하이데거에 의존하고 있는 부분에서 그렇다). 하지만 저자가 '유보'했던 부분이 오히려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렐프는 무장소성에 대한 '불편한' 느낌은, 그것이 '새로운 것'이기 때문일 수 있으며, 그래서 본인이 처해있는 문화 속에서는 어떤 섣부른 결론을 낼 수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는 '무장소성의 경관' 속에서 렐프 시절보다 훨씬 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가. 그렇긴 한데 무장소성 그 자체도 날로 업그레이드된다. 똑같이 늘어선 신도시 고층아파드들의 경관은 굉장히 삭막해보이고 싫다. 왜일까? 렐프의 주장처럼 인간에게는 '진정한 장소성의 감각'을 가지려는 욕구가 기본적으로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아직 그것이 우리에게도 여전히 '새로운 것'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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