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의 일상사 - 맹신과 무관심 사이, 과학기술의 사회생활에 관한 기록 Editorial Science : 모두를 위한 과학 1
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들(박대인, 정한별) 지음 / 에디토리얼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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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인·정한별 저, 『과학기술의 일상사: 맹신과 무관심 사이, 과학기술의 사회생활에 관한 기록』, 에디토리얼, 2018.

1.
「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들」(줄여서 '과정남')이라는 팟캐스트가 있다. 제목 그대로 과학기술정책에 관한 이야기를, 주제와 관련된 게스트를 초빙하여 주거니 받거니 대담하는 형식의 팟캐스트이다(최근에는 여러 사정으로 휴방 중). 어쩌면 무거울수도 있는 이야기를 길 가면서 듣기 딱 좋게 풀어냈기에 나도 길가면서 종종 듣곤 했었다. 다만 이게 두 기획자의 비영리(혹은 취미?) 활동이다보니 업로드 일정이 들쑥날쑥하긴 했지.

나도 여기에 게스트로 참여하여 녹음한 적이 있었다. 이 인연으로, 과정남이 책으로 나왔다길래 '부디 이 가난한 수료생에게 이 책을 하사해 주시옵소서'라고 굽신굽신했더니, 정성이 갸륵(?)하였는지 저자들이 직접 책을 보내주었다. 서평 쓰라는 조건과 함께. 이게 내가 바로 이 글을 쓰는 이유다.

물론 조건은 '서평을 쓰라'는 것이었지, '호평가득한 홍보용 서평 겸 축사를 쓰라'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솔직하게 가감없이 쓸 것이다. 그래서 약속을 맺을 때에는 내용을 세밀하게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흐흐흐.

2.
우선 목차부터 살펴보자. 총 11개의 장과 에필로그로 구성된 이 책은, 각 장에서 1. 기초과학이란 무엇인지, 2. 과학기술과 법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3. 과학관(Science Museum)이 어떤 곳이고 한국의 사정은 어떠한지, 4. 연구자의 고용환경은 어떠한지, 5. 연구지원정책이 연구와 어떤 연관이 있으며 현실은 어떠한지, 6. 과학기술계에서 여성이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7. 과학기술이 재난방지에 정말 많은 기여를 하는지, 8. 연구보조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9. SF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10. 과학의 검증 체계는 어떠한지, 11. 과학기술정책전략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등을 옴니버스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각 챕터만 따로 읽어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저자에게 물었더니, 그렇게 읽도록 의도했다고 한다.

주제 하나하나가 모두 가볍지 않은 것들이다. 그런데 저자들은 그 무거운 주제들을 쉽게 풀어서 설명한다. 사실 '과학기술정책'이라는 것이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분야임과 동시에, 너무나도 익숙한 분야이기도 할 것이다. 정말 지겨울 정도로 여기저기서 들리는 소위 '4차산업혁명'이라 하는 슬로건도 과학기술정책의 한 단면이다. 어쩌면 과학기술 그 자체보다 더 친숙한 분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3.
모든 글이 그렇지만, 이 책 역시 저자들의 관점과 의도가 분명히 들어있다. 저자들이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것은 '과학기술이 현실로 튀어나오는 정책 분야는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무엇에 집중하고 무엇을 배제할 것인지 결정하는 정치의 영역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고민하자'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책을 다 읽어도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에필로그에서는 저자들의 의도와 관점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각 장의 내용과 에필로그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 느낌을 준다. 이 문제는 옴니버스식 전개가 내포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4.
국내에 과학기술정책을 이렇게 대중적으로 접근한 책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 그나마 있는 것들도 4차산업혁명과 같은 유행 위주거나 연구서같은 어려운 책들이다. 이 책은 그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이모저모를 쉽게 풀어낸다. 이 책의 가치는 바로 그 접근용이성에 있다.

쉽고 친숙하게 풀어냈기 때문에 글 내용은 그다지 엄밀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 단점은 대중교양서가 자연스레 가지고가는 문제라서 어찌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며, 이 문제는 보다 깊고 자세한 내용은 연구서들을 찾아보면 해결된다. 어쩌면 이 책을 계기로 이 척박하기 그지없는 한국의 과학기술정책 분야에 보다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라고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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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의 일상사 - 맹신과 무관심 사이, 과학기술의 사회생활에 관한 기록 Editorial Science : 모두를 위한 과학 1
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들(박대인, 정한별) 지음 / 에디토리얼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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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만 어려운 책이자 어렵지만 쉬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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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이의 있습니다 - 재판을 통한 개혁에 도전한 대법원장과 대법관들
권석천 지음 / 창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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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글은 상처다. 상처에서 시작되어 상처로 끝난다. 이 책도 상처에서 비롯되었고 상처로 남을 것이다."

 이 책은 사법개혁에 앞장섰던 어떤 대법원장의 회한이 담긴 기록이다. 주인공은 이용훈 前 대법원장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이용훈이 대법원장으로 재임하던 시기인 2005년 9월과 2011년 9월 사이의 기간만을 다룬다. 이 기간동안 그가 그토록 강조했었던 '구술주의', '공판중심주의', '재판의 독립', '국민을 섬기는 법원', '불구속수사원칙'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저항받고 좌절하고 후회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법학을 전공했던 사람은 알 것이다. 저 구호들은 모두 법학 교과서 안에 있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그저 단순한 것이었다. '배운 대로 하자.' 참으로 쉬우면서 명쾌한 구상이다. 하지만 배운대로 행해지지 않는 곳이 사법부만일까? 오히려 배운대로 행해지는 곳을 찾는 게 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구상을 가지고 법원 개혁에 착수한 그는 시작부터 내부든 외부든 강렬한 저항에 직면하였다. 모든 일을 마치고 퇴임한 후 그는 '로드맵을 구상하여 단계별로 적용하면서 법원 사람들을 하나하나 설득해나갔어야 했다'고 후회하지만, 당시 그가 택했던 방법은 법원행정처를 활용하여 일선 판사들을 압박해나가는 것이었다.



 1

 그는 처음에는 법원행정처를 '활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법원행정처를 중심으로 한 사법관료화 문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간 대법관이 맡았던 법원행정처장을(정확히는 법원행정처장이 대법관을 겸임하는 형태이다. 대법관인 법원행정처장은 재판업무에서 제외된다.) 대법관이 아닌 법관이 맡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가 추진하고자 했던 개혁이 큰 반발에 직면하면서 이 저항을 돌파할 방법로 법원행정처를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법원행정처장을 대법관 아닌 법관이 맡도록 했던 방법 또한 얼마 후에 예전으로 원상복귀된다. 대법관이 아닌 법관이 법원행정처장을 맡으면서 국회 상대 업무 등에 애로사항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법원행정처를 활용한 사법개혁은 그의 재임 기간 중에는 어느정도 효과를 보였다. 하지만 그가 퇴임하고 후임으로 양승태가 대법원장이 된 후부터 법원은 빠르게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당연히 그가 추진했던 사법 개혁은 거의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그런데 법원행정처가 가졌던 힘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책에 나오는 내용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 이후의 일들을 잘 알고 있다. 비대해진 법원행정처와 더 공고해진 사법관료화는 일선 판사들을 상대로 감시하고 제재하고 개입하였고, 심지어 재판을 청와대에 잘 보이기 위한 선물로 포장하는 구상에까지 활용했다. 신뢰는 오랜 기간을 거쳐야만 쌓이지만, 무너지는 건 단 한순간이다. 법원행정처는 저항을 일소하고 단기간에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서 잘 벼려낸 칼이었다. 하지만 칼은 쓰는 사람에 따라 맛있는 요리를 하기 위한 용도로 쓰이기도 하고 사람을 찔러 죽이기 위한 용도로 쓰이기도 한다. 저항을 베기 위한 칼이었는데, 그 칼이 결국 사법부 자체를 찔렀다.


 혹자는 이것이야말로 '좋은 대법원장'을 앉혀서 강도높게 사법개혁을 진행해야 하는 이유라고 말한다. 나는 그러한 주장이야말로 정말 위험한 주장이라고 본다. 법적 판단은 선례를 무시하기 어렵다. 판결은 결국 행위의 기준이 된다. 그런데 기판력있는 판결이 대법원장이 바뀔때마다 대법원장의 성향에 따라 판단 그 자체가 뒤집어지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무슨 잣대로 판단하고서 행위해야 할까? 이 문제는 곧 사회 혼란으로 이어진다. 즉, 법적 안정성이 무너지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미국은 사법의 정치화가 가장 심한 나라다. 따라서 미국연방대법원의 판결이 정치성향에 따라 우후죽순으로 뒤바뀌면 미국 사회는 혼돈의 도가니가 될 것이다. 예측불가능은 곧 리스크이며, 리스크는 헷지해야 한다. 연방대법관이 종신직인 이유가 한둘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사법의 정치화를 인정하면서 법적안정성을 도모하기 위한 것도 있으리라 짐작한다. 종신직이면 오랫동안 일관적으로 판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미국이 아니다. 대법원장과 대법관은 임기제이며, 법관에게 중립성을 강조하며 성문법규의 해석을 중심으로 판결을 이끌어낸다. 따라서 미국과 아주 이질적인 사법제도를 바탕으로 운영된다. '수장'이라는 인물 중심으로 강력하게 이루어지는 개혁은 그 방향성이 아무리 좋았더라도 그 인물이 떠나고 다음 인물이 그 의지를 잇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원상복귀된다. 따라서 사법 개혁은 한 인물이 철두철미하게 주도적으로 지휘하는 방법보다는,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과 정착, 판사 개개인에 대한 끝없는 의식개선이라는, 느리지만 정공법인 방법만이 부작용을 최소로 하여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

 그의 재임기간 중에는 다채로우면서 유익한 소수의견이 많이 나왔다.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가 빚어낸 결실이다. 그래서 책에는 대법관 후보 선정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리고 김영란, 박시환, 김지형, 이홍훈, 전수안 대법관이 제시한 소수의견에 포커스를 둔다. 이러한 의견들은 치열한 논의를 통해 판결문의 형태로 남았다. 소수의견이 없을 때에는 소수의견을 찾아서라도 판결문에 싣고자 하였다. 이들의 소수의견은 비록 판결로서 효력을 얻지는 못 했지만, 우리 사회를 한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는 단초가 되었다고 저자는 평한다.


 그는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사이에 재임했다. 노무현 정부는 이용훈 대법원장 체제에 협조적이었기에 저항이 있었음에도 그가 구상했던 개혁안을 어떻게든지 관철시킬 수 있었던 것이리라. 문제는 이명박 정부였다. 이명박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그의 개혁의지가 점점 사그라들고 무기력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책의 맥락을 통해 읽을 수 있다. 특히 신영철 서울중앙지법원장을 대법관 후보로 제청한 것이 '실수'였음을(물론 책에서 "실수였다"라고 대놓고 언급하지는 않는다) 자인하며 후회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이명박 정부와 사사건건 충돌하였다. 대법원장직을 걸고서라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도 내비친다. 그래서 이 시기가 매우 힘들었다고 회한한다. 소위 '독수리 5남매'라 불리던 5인의 대법관 중 김영란 대법관이 퇴임하면서 대법원판결에도 소수의견의 비중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기에 전원합의체 만장일치 판결은 108건 중 39건(2011년 9월~2016년 8월)이었다. 이 '만장일치' 전원합의체 판결은 일선 하급심 판사들에게 대법원 견해만 따르라는 무언의 압박으로 작용한다. 법관 개개인은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법원 조직은 상명하복의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피라미드형 조직이 아니다. 오히려 점조직에 가깝다. 사법의 관료화가 문제되는 점이 바로 이 지점이다. 사법의 관료화는 법원 구성원을 피라미드형으로 재배열하여 윗사람의 말을 따르도록 만들고, 이는 결국 '재판의 독립'을 형해화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만장일치 판결 중 원세훈 국정원장 사건과 형사사건 성공보수 금지 사안 등은 현재 청와대와의 재판거래(거래일까? 아부일까?) 의혹의 중심에 있는 사건들이다.



 3

 이 책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불편했던 부분이 하나 있다. 삼권분립의 한 축인 사법부의 수장이 다른 한 축인 행정부의 수장에게 은근히 한 수 접고 들어가는 듯한 표현이 바로 그 문제의 부분이다. 대법원장의 의전서열은 3위이지만, 의전서열이 서열의 위아래를 직접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은 서로 동등한 지위에 있는 헌법기관이다. 따라서 실제로도 동등해야 한다. 그런데 이 책의 묘사에선 동등해 보이지는 않는다. 저자의 표현 한계일까, 저자의 의도적 표현일까? 후자라면 대법원장이라는 기관이 현행 헌법에서 잘못 설계되었다는 말이 된다. 명목과 실제 사이의 간극이 큰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면 권력관계에 왜곡과 기만이 발생한다.



 4

 현대의 사법제도 근대 유럽 사회에 그 뿌리가 있다. 우리는 그저 일본제국을 거쳐 수입된 것을 개량하여 쓰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는 사법 전통이라는 게 없다. 이제 만들어가는 단계일 뿐이다. 반면에 유럽은 오래전 로마법과 교회법이라는 양대 법계에서 이어지는 오랜 계보와 전통이 존재한다. 이 기나긴 역사 중에 진전도 있었지만 퇴보도 분명 있었다. 2보 전진 1보 후퇴는 물론이요, 3보 후퇴 2보 전진이라 할 수 있는 것들도 있었다. 이렇게 후퇴와 전진을 반복은 하나의 역사가 되어 재판 신뢰의 근거이자 살아있는 판단 기준의 보충으로서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런 게 없다. 양승태의 법원행정처가 폭주하여 지금과 같은 문제를 일으킨 것도 우리 사법의 역사 자체가 없기에 폭주에 제동을 걸만한 역사적 문화적 바탕 자체가 없어서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그렇다고 양승태 이전의 법원행정처가 순수히 지원업무만 했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오히려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사법부는 법원행정처를 통해 청와대와 긴밀하게 유착했을 가능성이 크다)


D. 1, 1, 1pr. 울피아누스 『법학원론』 제1권

법학도는 공부에 앞서 ius(법)라는 명칭의 유래부터 알아야 한다. iusiustitia(정의)에서 나온 말이다. 즉, 켈수스가 훌륭히 뜻매김하기를, 법은 선과 형평의 학예(ars)라 한다.

 법(法)은 정의(正義)의 구체화이며, 정의는 법을 통해 실현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의 동의하지 않을 명제라 예상한다. 그런데 유럽에서의 정의(iustitia) 개념은 보통 법과 관련되어 있다. 머나먼 고대부터 법(ius)은 정의(iustitia)와 동의어나 마찬가지였던 역사성 때문이다(iustitia는 형용사 iustum의 추상명사형이며, iustum은 명사 ius의 형용사형이다). 고대 로마에 가까워질수록 적어도 그 내용에 있어서 저 둘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정의를 바로 세운다는 것은 곧 법을 바로 세우는 것이요, 법을 바로 세우는 것은 곧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한 번 상처입은 신뢰는 회복하기 매우 어렵다. 몹시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 책도 상처에서 비롯되었고, 상처로 남을 것이다. 그 상처들이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이것이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이 책을 읽기를 권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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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제요
Gaius 지음, 정동호 외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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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번역서는 로빈슨 영역본의 중역이다. 번역표현이 어떠한가는 어찌보면 주관적인 문제이므로 논외로 한다. 하지만 용어의 원 라틴어 표기를 병기한 것 중에 엉뚱한 용어를 병기한 부분이 많은 것은 객관적인 문제로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역어의 선택이 오로지 역자의 권한이므로 존중한다 하더라도, 사전적 정의와 완전히 다른 용어를 엉뚱하게 병기해놓는 것도 역자의 선택으로서 용인해야 할 범주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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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사회 - 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
카롤린 엠케 지음, 정지인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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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린 엠케 저, 정지인 역, [혐오사회], 2017, 다산초당


혐오(Hass, Hate)가 만연한 사회. 지금 이 시대의 사회 모습이 아닐까. 당장 지금만 하더라도 일상에서 혐오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스마트폰으로 네이버뉴스댓글을 봐도, 페이스북을 봐도, 트위터를 봐도 혐오는 차고 넘친다. 심심하면 IS소행 테러가 일어나는 유럽에서는 이슬람혐오가 넘치고 있고, 미국에서는 대안우파(alt-Right)가 득세하고 있다. 태평양 너머, 아시아 대륙 너머 저 멀리에 있는 소식까지 갈 필요가 없다. 당장 우리 사회에서 여성혐오 논쟁과 성소수자혐오 논쟁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며, 이민자혐오 문제는 이미 논쟁 축에도 못 낄정도로 일상화되어 있다. 어디 그 뿐인가, 노동현장에도 고용형태에 따른 혐오가 일상화된지 오래다.

카롤린 엠케는 [혐오사회](원제: Gegen den Hass)에서 유럽 사회 특히 독일 사회에 급속히 퍼진 (것으로 보이는) 혐오 문제부터 살펴본다. 2016년 2월 18일, 독일 작센 주 클라우스니츠 지역에서 무슬림 난민이 탑승한 버스에 100여명의 군중이 진입로를 가로막고선 난민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p.60) 에서 시작한 의문은 "분노가 발생하고 표명되는 특정한 맥락"(p.76), "현실의 협소화"(p.77) 등의 특징을 살펴보고, "증오의 공급자"(p.89), "공포의 부당이득자"(p.90), "증오를 방조하는 자"(p.93)들을 통하여 "증오에의 공모"(p.95)가 일어난다고 논증한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묻는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p.102)

구약성경 판관기(사사기) 제12장에는 에프라임으로 가는 요르단 강 건널목을 점령한 길앗인(길르앗인)이 에프라임인(에브라임인)을 판별하여 잡아 죽일 때 "시뽈렛"(시볼레트Sibbolet)이라는 발음을 하느냐 못 하느냐로 판가름한 이야기가 나온다. 엠케는 이 성경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특정한 정치운동들은 유난히 자신의 정체성을 동질적인 것, 본원적인 것, 또는 순수한 것으로 규정하기를 좋아한다"(p.138)는 것을 포착하여 이 동질성, 본연성, 순수성이 어떻게 혐오와 폭력를 생산하는지 추적한다. 그들의 주장을 파훼할만한 반론은 무엇일까? 엠케는 장 뤽 낭시의 말을 인용하며 "개인성은 서로 함께하는 관계, 서로에 대한 관계 안에서만 인식될 수 있고 실현될 수 있다"(p.211)고 하면서, 따라서 "한 사회 내의 복수성은 개인이나 집단에게서 자유를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보다 먼저 그 자유를 보장한다"(p.222)고 역설한다. 즉, 동질성, 본연성, 순수성을 고집하는 집단의 주장은 허황된 소리라는 것이다. 엠케는 더 나아가 "혐오와 증오의 틀은 현실을 유난히 협소하게 묘사하는 이야기들을 통해 형성된다"(p.242)면서, "부족한 상상력은 정의와 해방의 막강한 적대자"(p.244)이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상력의 여지를 다시 넓혀주는 진실 말하기"(p.244)라고 말한다. 따라서 엠케는 민주적이고 열린 사회를 추구한다.

엠케는 이러한 혐오 현상에서 무엇을 가장 위협적이라고 생각했을까? 그건 바로 증오 뒤에 있는 "광신주의적 풍토"(p.24)라고 지적한다. 이 풍토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점점 더 근본주의적으로 거부하며,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에 대한 혐오와 멸시가 계속 심화되고 확대되면 결국 모든 사람이 해를 입게"(p.24)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엠케는 "증오로써 증오에 맞서는" 방법을 거부하며, "정확환 관찰과 엄밀한 구별과 자기회의로써 대응"(p.25)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즉, 증오의 근원을 공론장으로 끌어내어 하나하나 해체하는 방법으로 그들의 주장이 가진 힘을 파훼하며 맞서야 한다는 게 엠케의 방법론이다. 따라서 엠케는 머릿말 말미에서 "문명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 모두의 책임"(p. 27)을 강조하며, "증오에 대항하는 가장 중요한 태도는 고립되지 않는 것"(p.28)이기에 "공공의 공간을 다시 열기 위한 움직임"(p.28)이 필요하다는 것을 책 전반에 걸쳐서 호소한다.

누군가는 엠케가 제시한 해법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혹자는 이 책은 유럽 사회의 이야기일 뿐 우리 사회와는 다르다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혐오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한번쯤은 읽어보고 심도있게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카롤린 엠케가 추구하는 공론장의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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