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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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스플레인'이란 신조어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리베카 솔닛의 신작. 운 좋게 서평단에 당첨되어 책을 무료로 받아보았다.
제목 때문에 일견 뻔해 보일 수 있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다. 특히 이 책의 원제와 같은 제목의 '모든 질문의 어머니' 라는 짧은 글과 '침묵의 짧은 역사' 라는 글은 전문을 필사하고 싶을 정도로 압축적이고 강렬한 글이었다. 오랜 활동가 경험으로 인해 갖게 된 통찰력과 내공을 갖고 한 문장 한 문장 꾹꾹 눌러쓴 명문이었다. 내가 작년에 페미니즘 활동을 하며 느꼈던 답답함과 막막함을 놀라울 정도로 명료하게 언어화하는 그녀의 능력에 내내 감탄하며 읽었다.


모든 질문의 어머니

 그녀가 저술한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서 한 인터뷰어는 그녀에게 "왜 아이를 갖지 않으셨나요?" 라고 묻는다. 그래, 바로 그 질문이다. 소탈한 관심과 상식을 가장하고서 시도때도 없이 우리에게 던져지는 질문. 말문을 턱 막히게 하고 앉은 자리에서 끌어내려져 심문당하게 하고 공개적으로 얻어 맞은 것 처럼 비참하게 만드는, 질문 자체로 공격인 질문.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결함 있는 존재로 돌아보게 하는 질문. 이 질문은 "왜 결혼을 하지 않으셨나요?" 일 수도, "아이를 낳는 건 여자의 본성 아닌가요?" "여자들은 일보다 사랑에서 더 성취를 얻지 않나요?"일 수도 있다.

리베카 솔닛은 이 질문에 깃든 폭력에 대해 거듭 사유한다. 그녀는 저런 질문이 사실 질문이라기보다 단언이라고 한다. "스스로를 개인으로 여기고 자신의 앞길은 자신이 개척한다고 생각하는 우리더러 너희가 틀렸다고 단언하는 말(16p)" 이다. 그 질문은 "여자라면 반드시 아이를 가져야 하고 따라서 여자의 생식 활동은 자연히 공적 문제라는 가정을 깔고 있(17p)"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로, 그 질문은 여자에게 적합한 삶의 방식은 하나뿐이라고 가정했다.(18p)" 그리고 그녀는 말한다. "여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정답은 없고, 여자들이 습득해야 할 기술은 오히려 어떻게 그 질문을 거부할 것인가인지도 모른다."(18p)고.

사람들은 세상에는 답이 여러개일 수 있는 열린 질문이 있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닫힌 질문도 있다.
정답이 하나뿐인 질문, 최소한 질문자의 입장에서는 하나뿐인 질문이다.
우리를 무리 속으로 몰아놓고 우리가 무리로부터 벗어날라치면 물어뜯는 질문, 질문 속에 이미 답이 포함되어 있으며 실은 우리를 강제하고 처벌하는 것이 목적인 질문이다. 내 인생의 목표 중 하나는 진실로 랍비처럼 문답할 줄 아는 자가 되는 것, 닫힌 질문에 열린 질문으로 답할 줄 아는 것, 내 내면에 대한 권한을 스스로 가짐으로써 다가오는 침입자에 맞서서 훌륭한 문지기가 되는 것.
최소한 "왜 그런 걸 묻죠?" 라고 재깍 되물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18-19p)

작년에 정희진 선생님과 만났을 때도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었다. 내 인생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어떻게 말도 안 되는 질문에 '우아하게' 대답하는 거냐, 하는 거고 더 중요한 건 어떻게 그런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하는 거냐 하는 거라고. 그리고 우리에게 조언해주셨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줄 알아야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이건 십수 년 동안 활동한 활동가들만이 내어줄 수 있는 조언이다. 너무나 많은 질문에 찔려본 사람, 오만 군데에 구멍이 나서 피를 줄줄 흘려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이걸 보면서 지금껏 날 후려친 수 많은 질문들, 단지 질문함으로써 날 동등한 대화자로 인정하지 않고 인간 이하의 존재, '자궁'을 가진 존재로 환원해 버리는 폭력적인 질문들을 떠올렸고, 그것들이 옭아맨 언어의 그물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애처로운 발버둥을 생각했고, 그래서 좀 울었다. 왜 그때 난 그 질문을 "폭력"이라 규정하고 단번에 거부할 수 없었던 걸까? 

침묵의 짧은 역사

이어지는 [침묵의 짧은 역사]의 장은, 페미니즘을 어느 정도 공부한 사람이라도 거듭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이 글은 단순 정보를 엮어 독자에게 흐름을 설명해주는 글이 아니다. 수 천년 동안 계속되어온 침묵의 화석을 현장에서 매번 발견해 온 목격자의 증언이다. 침묵의 거대한 바다에 아직도 우리가 잠겨있음을, 수면에 겨우 고개만 내밀고서 뻐끔뻐끔 증언하는 글이다. 행간마다 오랜 시간 축적된 슬픔과 분노가 묻어나온다.

침묵은 금이라고, 어릴 때 나는 들었다. 나중에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침묵은 죽음이라고, 에이즈를 둘러싼 방기와 억압에 맞선 퀴어 활동가들은 거리에서 외쳤다. 침묵은 말해지지 않은 것, 말할 수 없는 것, 억압된 것, 지워진 것, 들리지 않는 것으로 이루어진 바다다. 그 바다는 말하도록 허락된 사람, 말해질 수 있는 것, 들어주는 사람으로 이루어진 섬들을 에워싸고 있다. 침묵은 여러 이유에서 여러 방식으로 일어난다. 우리는 누구나 말하지 않은 말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바다를 갖고 있다. (34p)
여성에 대한 폭력은 종종 여성의 목소리와 이야기에 대한 폭력이다. 그것은 여성의 목소리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 목소리의 의미를, 즉 자주적으로 결정하고, 참가하고, 동의하거나 반대하고, 살며 참여하고, 해석하고 이야기할 권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남편은 아내를 때려서 침묵시키고, 강간을 저지르는 데이트 상대나 지인은 피해자의 '싫다'는 말이 자기 몸에 대한 권한은 자신에게만 있다는 뜻임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사회의 강간문화는 여자의 증언에는 가치도 신뢰성도 없다고 선언하며, 낙태 반대 운동가들은 여성의 자기결정권마저 침묵시키려고 하며, 살인자는 여자를 영원히 침묵시킨다. 이는 모두 피해자에게는 아무 권리도 가치도 없으며 피해자는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행동이다.
여성을 침묵시키는 행위는 좀더 사소한 방식으로도 벌어진다. 어떤 여자들은 온라인에서 끈덕진 괴롭힘을 겪다가 입을 닫아버리고,
대화 중에 상대가 끼어들거나 말을 가로채는 일을 겪으며, 얕보이거나 깔보이거나 무시당한다. 목소리를 갖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것이 인권의 전부는 아니지만 핵심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성의 권리와 그 결핍의 역사를 침묵과 그 침묵을 깨는 일의 역사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38~39p)

레베카 솔닛은 철학자 레이 랭턴이 구분한 침묵의 세 종류를 언급한다. 첫째는 문자 그대로의 침묵이다. 둘째는 이야기 해도 듣는 사람이 없는 경우이다. 셋째는 말을 해도 그말로 의도했던 행동을 수행하는데 실패하는 경우다. 여성이 '싫다'고 말하는 경우가 그에 속한다. 여자들은 거부하려고 '싫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포르노그라피적 맥락에서 곡해되어 애초의 의도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들. 또는 이야기를 해도 아무도 듣지 않거나,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 이야기해도 그 원래의 의도 자체가 불신당하는 사람들. 여성과 소수자들의 침묵은 여전히 말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섬을 둘러싼 바다이고, 이 바다의 얼음은 아직도 깨어지지 않고 있다. 이 침묵은 기존의 공고한 가부장적 체제에 의해 유지되고 있고, 이 침묵을 벗어나려고 하는 시도들은 제제받고 처벌당한다.

수천년 된 침묵을 깨려는 행동이 몇십년 전부터 활발해지게 되었지만, 이건 단 몇 세대의 작업으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미 여자는 평등을 얻었다고. 그러나 그것은 여자들이 이제야 겨우 첫 번째의 침묵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여자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들은 여전히 거의 없다. 여자들의 말은 무시당하고, 그저 흘러지나가고, 사라진다. 얼마 전에 본 다큐에서 다나 해러웨이는 말했다. "여자들이 이룬 업적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지를 보세요." 리베카 솔닛은 이 침묵의 역사를 깨뜨리기 위해, 기억되는 역사의 지형도를 바꾸기 위해 기나긴 투쟁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것은 "종종 전투에도 휘말려야 하는 창조와 파괴의 과정"이다.

봉기의 해

"페미니즘 리부트"는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었다. 2014년 미국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일어났다. 리베카 솔닛은 2014년이 여성과 페미니즘의 분수령이었다고 한다. 여자들이 "강간, 살인, 구타, 길거리 성희롱, 온라인 협박 등 여성에 대한 폭력의 전염병을 잠자코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시끄럽게 굴고 혁명을 일으켰던 해였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와 매우 유사하게 온라인 상에서 촉발되었다. 여자들은 그 해에 일어난 각각의 사건들이 그냥 조용히 묻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고, 해시 태그를 만들어 온라인 상에 전파했다. #yesallwomen(여자들은 다 겪는다), #whyileft(나는 왜 헤어졌나), #whyistayed(나는 왜 참았나) 등의 해시태그가 유행하며 수 많은 여자들에게서 가지각색의 증언과 고발들이 쏟아져나왔다.

이는 2015-16년,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일련의 여성혐오 사건들로 인해 온라인 상에 뜨겁게 촉발되었던 페미니즘 운동 현상과 맞닿아 있는 것 처럼 보인다. 2015년 장동민의 발언에 분개한 여자들이 #Go Wild, Speak Loud, Think Hard(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는 구호를 만들어 반격에 나섰으며 메르스 사태에 이르러서는 '메갈리아'라는 전대미문의 여혐 미러링 사이트 창설에 이르렀다. 그 뒤로 2016년엔 '강남역살인사건'과 '문화계성폭력' 사건들을 거치며 오프라인과 온라인 양쪽에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났다.

 리베카 솔닛은 이 해를 '봉기의 해'라고 부르며, 왜 하필 이때 이 문제가 전면으로 부상했는지에 의문을 던진다. 작년과 제작년 페미니즘 강연에 가서 만났던, 오랫동안 운동을 하신 활동가 분들도 이 지점을 궁금해 하셨다. "왜 하필 지금?"이냐고. 그 전에도 남자들은 무수히 헛소리를 많이 하고, 여자들은 수 없이 남자에게 억울하게 죽어갔는데 왜 갑자기? 라는 것이 그분들의 물음이었다. 우리는 뭐라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전까지 우리는 깜깜한 대륙에서 잠자코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인식의 파도가 몰아닥쳤달까. 시대가 바뀌어 남자애들과 평등한 대우를 받으며 교육 받아와서 '내가 여자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 잘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거대한 파도에 후려져져서 '여자'에게 허락된 좁고 깊은 지하공간으로 떨어져 내린 기분이었다.

 어쨌든 리베카 솔닛은, 그리고 우리나라 페미니즘 운동의 대모님들은 말한다. "이 순간을 몇 십년 동안 기다려왔다"고.
 봉기의 해에 몇 가지 계기가 된 사건들이 발생하긴 했지만, 그 정도의 사건은 그 이전에도 숱하게 일어났다. 이번의 봉기는 지진과도 같은 지각변동 처럼 갑자기 터져나왔다. 리베카 솔닛은 여기에 대해 이전 세대들의 노력 때문에 세상이 이미 바뀌었다는 것, 그리고 소셜미디어의 부상으로 누구나 이야기를 퍼뜨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꼽지만 솔직히 그것만으로는 분석하는 게 역부족이라고 생각한다. 지진이 일어날 때 그것의 원인을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 처럼, 이번의 봉기도 수 많은 사건과 요소들이 누적되어 갑자기 터져나온 것일 거다.

 분명한 것은, 봉기 이후의 세상은 완전히 바뀌어버렸다는 거다. 여자들은 자신들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란 걸 보여줬다. 성추행범들은 마땅한 처벌을 받지는 않을 망정 자신들이 언제든 사회적으로 공개 망신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자들은 더 이상 이전처럼 '여자를 함부로 대하고도 처벌받지 않을 권리'를 누릴 수 없게 되었다. 몇몇 남자들은 자신들이 그럴 권리(맘놓고 성추행할 권리, 여자를 항상 성적 대상화할 권리)를 빼앗겼다는 것에 분개하여 백래쉬를 일으켰지만, 나아가는 과정에서 감내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김현미 교수님은 2015년을 '한국페미니즘의 원년'으로 지칭하며, 대한민국의 페미니즘은 이제서야 시작되었다고 하셨다. 일본에서도 2016년 #남녀가뒤바뀐일본사회 란 해시태그가 유행하며 미러링 열풍이 불어 한일 연대를 위한 트위터 계정이 생긴 적도 있었다. 폴란드에서도 2016년 수많은 여성들이 검은옷시위를 열어 낙태죄를 폐지시켰다. 미국, 한국, 일본, 폴란드 뿐만 아니라 수 많은 나라들에서도 이와 비슷한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기를 꿈꾼다. 언젠가는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 그동안 잠겨있던 침묵의 바다가 드러날 수 있기를.


*내가 인상깊게 읽었던 건 대부분 1부에 수록된 글들이다. 2부의 글은 상대적으로 짧은 기고문들이어서 소품격으로 느껴졌다.
문학에서의 여성혐오 문제를 다루고 있는 글이 몇 편 있는데 케이트 밀레트의 '성의 정치학'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다지 새롭지 않은 내용이다. 아직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여기 수록된 글들이 이 문제에 대한 좋은 안내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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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09-06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읽은 책이었는데 님의 리뷰를 읽으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멋진 리뷰입니다^^

힐데 2017-09-08 11:47   좋아요 0 | URL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Nina 2017-09-07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다른 글들에서 보여주신 역량에 비해 본서는 입서 경로 때문인지 홍보동기에 치우쳐 독창적 비판 관점은 다소 결여된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하는 궁금해하시는 근래의 세계적 페미니즘 고양 현상의 원인에 대한 유력설들을 정리한 내용이니 일독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1. 가정-학교에서의 성평등 교육 대 사회적 성불평등 온존유제 간 모순심화설
; 일명 ’드높은 기대’설

¶ Orr, Judith(2015). [Marxism and Women’s Liberation]. Bookmarks.
국역본: 오어, 주디스(2016).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 책갈피.
(특히 ˝제1장 드높은 기대˝를 집중 검토할 것.)

한국을 포함해 국제적으로 뉴페미들의 ˝feminist moment˝에 대한 경험적, 직관적 자기고백들은 매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 이 범주에 일치하며 크게 벗어나지도 않음.

2. 신자유주의 갈등 증폭설
←노골적 차별, 배제에 의한 불평등 (온존 아닌) 심화설
¶ http://blog.aladin.co.kr/790316263/9522683

2.1. 신자유주의적 경쟁주체의 자생적 대응양식 중 내적 대응으로서의 극단적 자기계발 노오력과 외적 대응으로서의 혐오, 분노.

2.2. 신자유주의 체계 위기에 따른 중산층 붕괴 및 남성-가부장제 (생계부양자 모델) 위기에 따른 여혐 심화.

2.3. (중공업 이윤율하락과 사양화 이후) 탈산업사회 경제, 특히 post-Fordism과 노동유연화에 가장 적합하며, 경제위기 시 제1공격 취약대상인 여성 계층에의 착취, 수탈, 공격의 집중

크게 이 두 계열, 4대 기본요소의 증폭 상호작용에 의한 시너지 효과로 페미니즘이 폭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음.
: 요약하면, 가정-학교에서의 성평등 교육은 꾸준히 확대 경향을 지속해왔으나 사회적 불평등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다, 신자유주의기에 오히려 모든 차이들이 노골적 차별로 전치되면서 대폭 심화되고 붕괴-위기기에 감정적 갈등, 혐오 폭발까지 겹쳐 양 경향의 모순이 최대치에 이른 것이 그 원인이라 정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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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데 2017-09-08 11:45   좋아요 0 | URL
오...이렇게 길게 댓글을 남겨주시다니..추천해주신 도서 꼭 읽어보겠습니다!
아래 정리해 주신 요지는 작년에 이런 저런 강연회 다니면서 대체적으로 접하긴 했는데 그래도 시원하게 이해가 되지 않더라구요. 책을 읽으면서 좀 더 맥락을 꼼꼼히 짚어봐야겠습니다.

저는 이것 외에도 가정-학교 내에서 여성들에게 형식적인 평등이 주어졌지만 실제로 어린 여성들에게 페미니즘 교육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던 것도 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여성이라는 게 어떤 걸 의미하는지 모르고 나름대로 평등한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가다가 갑자기 차별을 자각하게 되고 충격을 받은 거지요.

제도를 바꾸는 데 힘썼던 80년대 페미니스트들과는 달리 90년대에 활동했던 영페미니스트 세대는 ‘일상의 정치화‘를 주장하며 자신들만의 공동체 생활과 문화적인 영역으로 활동 범위를 축소했고 그래서 이후 세대에 자신들의 흐름을 충분히 전수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 세대 간의 단절이 일어난거지요. 실제로 저를 포함한 현재의 20대-30대 초반세대는 공교육 과정에서 제대로 된 페미니즘 교육을 한 번도 받지 못했으며, 윗 세대에서도 그런 영향을 줄 만한 선배들을 일상에서 만난 적이 거의 없어 페미니즘의 무풍지대에서 자라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신자유주의가 심화되면서 여성혐오가 나날히 심해지자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서 분노를 느끼고 갑작스런 자각과 함께 반발하게 된 거지요.

제가 궁금한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세대 간의 단절이 있었을까? 그리고 그 단절이 근래의 갑작스런 세계적 페미니즘 고양 현상의 공통 원인일까? 하는 부분인데... 이것에 대해 명쾌히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더라구요. 2세대의 ‘일상의 정치화‘ 라는 문화적 페미니즘 물결이 영미권에서도 있었긴 하지만 그게 우리나라처럼 세대 간 단절을 일으킬 정도였는지도 모르겠구요. 그리고 아시아와 영미권 이외 다른 문화권 - 유럽, 중남미, 중동 - 등에서도 이런 페미니즘 고양 현상이 있었는지, 이런 점들은 계속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있네요. 다른 국가 상황까지 조사해 볼 여력이 없어서;

누가 이런 걸 좀 거시적인 관점에서 분석해줬음 좋겠는데 그런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네요... 그리고 저는 리베카 솔닛에게는 애초에 이런 현상들에 대한 독창적인 분석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리베카 솔닛은 페미니즘을 깊게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라 액티비스트이자 에세이스트니까요. 서평단에 뽑혀 더 긍정적인 관점에서 리뷰를 쓰기는 했지만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저는 이 책이 나름의 역할을 다 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할 역할은 최대한 자신의 경험을 살려 전달력 강한 언어로 페미니즘에 문외한인 사람들이나 초심자들을 끌어들여 관심 갖게 하는 것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나라에 이런 역할을 하는 책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구요. 더 깊고 날카로운 분석을 보여주는 책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요.

Nina 2017-09-08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축자적 독해를 하시는 경향이 있으신 게 아닌가 싶어요.
원래 제1계열 원인은 ˝가정-학교 교육에서의 성평등 (확대경향)˝이었는데 댓구를 맞추기 위해 ˝가정-학교에서의 성평등 교육˝으로 바꿨던 거고 명시적, 의식적 (페미니즘) 이론/지식 교육 뿐만 아니라 암묵적, 묵시적, 비형식적 풍조 (전승으)로서 광의의 교육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불필요한 혼란을 피하기 위해 ˝가정-학교에서의 성평등 문화/환경˝으로 바꾸기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정리하면 힐데가르트님의 진술경험도 다른 국제적 뉴페미들처럼 이 범주에 거의 포함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덧글이나 댓글로 반복적 의견교환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닌데다 보충설명이 쪼끔 길어질 수도 있을 듯해 짬이 나는대로 틈틈이 추가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아 너무 죄송하지만 이하는 나중에 시간 되실 때 천천히 다음의 본문 하단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http://blog.aladin.co.kr/790316263/9554127

우선 급한대로 짧게만 말씀드리면,
객관적 Feminism 운동사를 고찰해볼 때 Feminism이론과 교육의 계승/단절 여부 등의 Weberian factor는 그리 결정적 변수가 아니고 오히려 외생적인 경기변동과 경제위기를 주변수로 이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는 주기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세대 feminism은 자유경쟁 증기기관 산업자본주의기 섬유업 등의 경공업 분야에 노동자로 대거 진출하며, 이를 위한 (최소)대중교육으로 의식이 성장하고 역량이 축적된 여성계층이 1873~1895년 연간의 자본주의 제1차 구조위기를 전후로 도전받으며 그에 대한 저항으로 참정권 이쓔를 중심으로 부상했던 것이며,
1929~1945년 연간의 제2차 구조위기시엔 독자적 feminism 운동으로 가시화하진 못했으나 연속되는 세계대전의 포화와 지구적 계급투쟁의 열기 속에 완전히 흡수되어 동시 출현했었다고 보아야하고,
1970~1980년 연간의 제3차 구조위기를 전후로 68운동에 뒤이어 2세대 feminism이 부상했으며,
이번 2007~2008년 세계금융위기에 의한 대공황이라는 제4차 신자유주의 구조위기로 세 번째 feminism의 대물결이 몰려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3세대 feminism이 2세대 post-feminism에 불과했고 이번이 진짜 3세대 feminism이 될지, 아니면 그냥 4세대 feminism이 될지는 이번 물결의 크기와 구체적 성격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이런 주기성에 입각해서 볼 때, 무의식화된 아비튀스적 문화축적과 제도만이 계승될 뿐 Feminism 운동과 이론 자체의 부침, 단절은 세계적 보편성이며 각 물결마다 그 초반기에 특정 경향성들이 압축반복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전 사회적으로 계승되는 요소인 이 아비튀스와 제도도 누적적으로 보전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위기기와 신자유주의 같은 우파집권 반동기에 대대적 공격을 받아 후퇴와 퇴행을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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