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흰 개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소설이라기 보다는 에세이에 가까운 글이다.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 와 같은 장인적인 작품을 기대하고 페이지를 열었다가 곧 단념해야 했다. 인종차별주의에 깊게 물든 사람들의 비유인 ‘흰 개’ 이야기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로맹 가리가 실제로 겪은 일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구성이나 문체는 애초에 생각조차 한 적 없다는 듯 로맹 가리는 와츠폭동과 마틴 루터 킹의 암살, 프랑스 68혁명과 같은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서 쉬지 않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직접 경험한 것들을 날 것으로 옮겨놓았다. 아주 경솔한 발언이나 스치는 정념까지 여과 없이 산만하게 그대로 담겨있어서, 책을읽는 내내 소설가로서가 아닌 로맹 가리란 사람 자체를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작품에 소설이라는 잣대를 굳이 들이대지 않는다면 상당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작품 속에서 로맹가리는 동명의 화자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미 전쟁과 점령을 가지고, 내 어머니와 아프리카의 자유와 폭탄을 가지고 문학을 했다고. 그러니 미국 흑인을 가지고 문학을 하는 건 거부하겠다고. 그런 그가 결국 펜을 든 것은 작품 속에 역시 동명 그대로 등장하는 그의 아내 진 세버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 세버그는 ‘네 멋대로 해라’라는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의 주연을 맡았던 여배우로, 24살이란 나이차를 극복하고 로맹가리와 결혼했던 여자이다. 부부관계는 8년 만에 파경을 맞지만 그들의 인연은 평생동안 이어져서 가리는 항상 그녀를 지켜보며 몇 번이나 위태로운 세버그의 뒤를 돌보아 주었다. 진 세버그는 자신이 성공한 스타라는데서 죄책감을 갖고 항상 약자를 도와야만 한다고 느끼는 좌파적 경향의 사람이었는데, 언제인가부터 흑인 문제에 몰두해서 흑인을 돕는 데 사명감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녀는 블랙 펜서라는 극좌파 흑인 자경단에 들어가서 자신의 수입 대부분을 기부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흑인의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했다. 백인 팬들은 그녀의 지나친 정치적 행위에 점점 떨어져 나가고, 흑인들조차 그런 그녀의 죄의식을 이용하여 돈을 뜯어내며 오히려 자신들이 그녀의 정신적 문제를 도와줬다는 태도를 취하며 비웃는다. 이 책에는 그 사이에서 점점 망가져 가는 그녀를 고칠 수도 위로할 수도 없는 가리의 안타까움과, 인종주의를 각자의 방식으로 처리해버리는 수 많은 어리석은 인간군상에 대한 분노와 연민이 담겨져 있다.
유대계 러시아인으로태어나 프랑스에서 살았던 로맹 가리가 소수자이자 이방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미국의 인종문제는 ‘단지 인종차별이나 정치적 현안이 아닌, 광기이고 정치적 질병’ 이다. 그는 인종문제를 하나의 이념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것을 대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통해 생생하게 묘사한다. 죄책감 때문에 흑인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백인 부르주아, 그런 백인을 이용해먹는 몇몇 흑인들, 자선활동으로 유명세를 떨치려는 스타들, 자기 자신의 문제에서조차 주인으로서의 자리를 빼앗겼다고 여겨 자선가를 오히려 공격하는 흑인들, 피해의식에 젖어 백인을 모두 싸잡아 증오하며 봉기를 외치는 흑인. 어디에도 단순한 가해자-피해자는 없다. 모두들 자신의 심리적 문제와 사회 문제를 이리 저리 결부시키고 감정 이입하고 증폭시켜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출하고있다. 소설 속 반유대주의자 흑인의 등장은 그 자체로 흑과백, 선과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무참히 깨부수고 비웃는 사건이다. 흑인이라는 피해자의 이미지는 그가 자신 보다 더 소수민족인 유대인을 적대시함에 따라 가해자로 전복된다. 아마 그는 유대인이라는 공공의 적을 비난하면서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쾌감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한 사건에서 피해자의 입장에 있었다 해서 그의 모든 걸 감싸주려 하는 건 우스운 행동이다. 피해자는 선량한 사람과 동의어가 아니다. 다른 상황에 있었다면 더 심한 가해자가 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면 그도 인간이니까. 흑인만 공격하도록 길들여진 흰 개를 훈육하여 흑인을 백인과 똑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백인만을 공격하도록 재훈육시키는 흑인조련사는 백인보다 더 나을 게 하나 없는, 잔인하고 어리석은 인간이다.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로맹 가리가 프랑스에서 68혁명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 파리의 어느 한 벽에서 우연히 대학 동기를 만났던 장면이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 '상상력에 권력을!' '제 3세계를 원한다.' 와 같은 구호들이 빽빽이 적힌 벽 앞에서 그의 친구는 망설이다 펜을 꺼내들고 구호를 이어 쓴다. '드골을 박제하라.''보안기동대는 나치 친위대다''파시즘은 통과 못한다.' 그러자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가리가 그에게서 펜을 빌려 벽에 구호를 이어 써 나간다. '디미트로프를 해방하라.''마테오티의 원수를 갚자.''에티오피아를 구하자' 그리고 오랫만에 재회한 두 사람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찡한 마음을 느끼며 악수를 한다. 불의에 대한 억눌러왔던 분노, 올곧은 정의에 대한 갈망, 현실에선 어떤 식으로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항상 변질되고야 말았던 온갖 희망들을 표출하면서, 로맹 가리는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 혁명에 동참한 듯한 기분을 느꼈을 거다.
세상과 인간을 대하는 로맹 가리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작품을 읽는 내내 어떤 문제를 생각이나 얄팍한 이념으로 속단하지 않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가리의 뛰어난 통찰력과 윤리감각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정념에 몸을 맡긴 채 쓸려가지 않으며, 사람들을 쓸어모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이성을 내세우며 냉소적인 태도로 사건을 외면하지도 못한다. 왜냐면 그에겐 뜨거운 심장이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정말 멋진 작가를 만났다. 한 동안은 로맹 가리만 읽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