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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바퀴로 가는 과학자전거 - 강양구의 과학.기술.사회 가로지르기 세 바퀴로 가는 과학자전거 1
강양구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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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이었다. 냉장고가 고장 났다. 전원은 들어가는데, 냉장고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다. 일부 오래된 음식은 이미 썩어갔다. 냉장고 음식들 중에서 중요한 음식들은 김치 냉장고로 옮겼다. 음식들을 옮기면서 느낀 것은 냉장고에 쌓아 둔 식재료들이 정말 많았다는 것이다. 집안에서 그렇게 음식을 많이 해 먹지 않는데, 이 많은 식재료들은 왜 여기 쌓여 있는 것일까. 정작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아 일부는 냉동실에서도 썩어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우리 회사 냉장고도 마찬가지다. 도시락을 드시는 분들의 반찬도 있고, 야식용으로 먹다가 남은 음식들도 냉장고로 들어간다. 냉장고는 미어터질 것 같고, 이상한 냄새도 난다. 매번 자기 음식을 정리하자고 하지만, 정작 넣어둔 사람들도 잊어버려서 매번 대대적인 정리를 해 음식을 버려야 한다. 냉장고가 작아서 그런다는 사람도 있지만, 커진다고 이런 일이 없어질까?



냉장고만 그럴까? 아니다. 전 세계의 식량운용을 보면 더 아이러니하다.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전 세계인이 골고루 나누어 먹고도 남는 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쪽은 영양과잉으로 인한 질병에 시달리고, 지구 한편은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 식량 생산을 위한 과학기술이 발달한 지금, 우리는 왜 이런 세상의 고통을 목격해야 할까?


이제는 집집마다 있다는 자동차 이야기를 해볼까? 요즘 나오는 자동차 중에는 최고 300km까지 달릴 수 있는 엔진을 장착했다고 하지만, 출퇴근 도심의 자동차 평균 속도는 15km 내외라고 한다. 옛 문헌에 따르면 자동차가 등장하기 전 마차의 속력이 시속 17km였다고 하니 우리는 지금 마차를 타는 것보다 느리게 도시를 달리고 있다. 또 나는 자전거로 출근할 때 회사까지 약 16km의 거리를 한 시간 안에 간다. 자동차와 비슷한 셈이다. 그래도 자동차인데, 도심이 아니라면 더 멀리 더 빨리 갈 수 있는 자동차가 좋은 게 아니냐고 한다면 다음 이야기를 해 보겠다.


서울에서는 한 여름이면 창문을 열어놓기 어렵다. 창문을 닫고 에어컨과 공기청정기를 켜야 한다. 시골 바람과 서울 바람의 차이가 여기서 드러난다. 시골 바람은 논두렁을 내달려와 대나무 숲을 지나 대청마루로 올라오지만, 도시 바람은 공장 굴뚝의 연기를 품고, 자동차 배기가스를 지나, 열로 한참 달궈진 아스팔트와 시멘트 건물을 타고 올라온다. 여름이라지만 창문을 꽁꽁 닫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기오염이 가져온 결과다. 최근의 대기오염의 주범이 자동차인 만큼 자동차가 좋을 이유가 없다.


이처럼 과학기술의 발달은 우리 삶에 다양한 불편을 주고 있다. 편리만을 추구하다 빚어진 모순이다. 더군다나 잘못 사용된 과학기술은 차별과 전쟁, 파괴에 활용된다. 그러기 때문에 과학기술은 단순한 편리를 넘어 인권과 평화, 환경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도 들어오면서 과학기술은 중요한 사회적 가치를 저버리고 자본의 이익에만 종사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황우석 사태에서 보이듯이 돈이 된다면 기꺼이 거짓과 왜곡을 벌이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과학기술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이 된다고 하니 그것을 묵인해야 한다는 대중의 의식에 우리의 과학기술은 위태롭게 서 있다.


프레시안의 강양구 기자는 오랫동안 돈에 지배되고 있는 과학기술의 위험성을 지적해 왔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과학을 이야기해 왔다. 황우석 사태에 대해서도 모두가 그를 떠받들 때부터 조용히 그 위험성과 편향성을 지적해 온 실력 있는 기자다(그가 <녹색평론> 2005년 1-2월 호에 보낸 ‘과학기술의 덫에 갇힌 언론’을 볼 것을 추천한다). 그가 쓴 <세 바퀴로 가는 과학 자전거>는 주로 과학기술자를 꿈꾸는 10대 청소년을 대상으로 쓰였지만 과학기술에 관심 있는 초심자들도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평화와 환경을 생각하는 공정한 과학, 인간을 생각하는 기술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사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누군가는 부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 하나 살기도 복잡한 세상에 어렵고 복잡한 과학기술도 챙기며 살아야 하는 것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런 이에게 꼭 권하고 싶다. 알면 보이고 보이면 실천할 수 있다. 모르면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이겠지만, 친절하게 쓰인 강양구 기자의 이 책을 보면 전혀 어려운 문제에 접근하는 길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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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휴머니즘 - 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아홉 통의 편지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지음, 이두부 옮김 / 이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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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난 가난하지 않다. 그렇다고 부유하고 넉넉하게 살아가는 건 아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삼십대 중반의 미혼 남성의 삶이란 게 거기서 거기다. 아침마다 부대끼는 대중교통에서 졸면서 출근하고, 점심시간마다 오늘은 얼마짜리 밥을 먹나 고민하고, 휴일도 반납하며 철야도 마다하지 않고 회사에 매달려 살아간다. 누구나 그렇지 않나?

열심히 산다면서 항상 불안하다. 노숙자나 거지를 보면 애써 피하는 이유는 미래의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지금 삶과 노동에 대해 불만이 가득하면서도 참고 사는 것은 그런 가난이 가져올 ‘충격과 공포’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가난하지 않은 것에 안심하고 있다. 우리 의식은 노숙자나 거지를 피하듯이, 그렇게 가난을 외면하고 있다. 거기에 존엄한 가난, 가난한 휴머니즘은 없다. 그 이면에는 가난에 대한 지독한 냉소와 두려움과 멸시가 담겨 있다. 공선옥 소설가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가난은 무능력하고 낡은 것, 더러운 것, 혐오스러운 것, 그리하여 일종의 페스트 같고 에이즈 같은 것이다. 암과는 달리 그것들은 점염에 대한 공포를 야기하는 질병이다. 오늘날 가난은 바로 그처럼 전염에 대한 공포를 야기하는 몹쓸 질병과 같은 것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는 ‘존엄한 가난’을 이야기한다. 그는 아이티의 가난한 빈민가 사람들을 위해 싸워온 신부다. 끊임없는 내란과 독재에 시달리며 가난과 굶주림에 지친 아이티에서 네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네 번 모두 군사 쿠데타에 의해 물러나야 했다. 그의 총 집권 기간은 불과 5년 8개월에 불과하지만 이 기간 동안 그는 군대를 해산하고, 국영기업의 조건 없는 민영화를 거부했는가 하면, 공공분야에 대한 투자와 지원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교육과 보건의 사회적 질을 높였고, 최저임금의 인상을 이끌어 냈다. 이 책은 아리스티드가 세계인에게 보내는 편지다. 여기에는 그의 아이티 민중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담겨 있고, 특히 어린이와 여성에 대한 무한한 관심과 배려가 나타나 있다. 또 부의 추구보다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길에 대한 사유와 성찰 속에서 아이티가 나아갈 제3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전 세계가 경제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 이 충격과 공포를 어찌해야 하나. 왜 우리는 아이티 같은 나라보다 잘 산다고 자부하면서도 이런 불안과 두려움을 지속적으로 겪어야 하나. 이 책에 그 해답은 없다. 하지만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 우리 자신의 마음의 가난을 돌아볼 수 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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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더듬다 - 한 맹인의 19세기 세계 여행기
제이슨 로버츠 지음, 황의방 옮김 / 까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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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중에 만난 사람 중에 머릿속에서 또렷이 남아 있는 두 사람이 있다. 지난 여름 벽소령에서 만난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다. 지리산 능선길이 잘 가꾸어진 건 사실이지만, 시각장애를 가진 이가 산행을 한다는 건 보통의 평지를 걷는 것과는 달리 몇십 배는 어려울 수밖에 없지 않나 싶었다. 사실 이건 내 과장일 수도 있는데, 당시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2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4시간 만에 왔으니, 딱 두 배의 시간이 들었을 뿐이다. 시각장애인은 스스로 지리산을 가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고, 그의 친구가 기꺼이 동행이 되어 길을 나섰다. 보지 못하는 그에게 산은 어떻게 느껴졌을까.

모든 이에게는 인간으로서의 가질 수 있는 욕구가 있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열정이 많은 인간일수록 그 욕구는 더욱 강렬하다. 이 욕구는 온갖 난관과 고통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도전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며 열정은 그것을 성공으로 이끄는 기폭제가 된다. 19세기 증기기관도 발명되기 전 시대를 살던 영국인 제임스 홀먼은 신분상승을 위해 군에 들어갔다가 얻은 중병으로 그만 시력을 잃고 만다. 시각장애인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구걸밖에 없던 그 시절에 그는 피나는 노력 끝에 해군기사단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일주의 꿈을 꾸었다.

말과 마차, 그리고 도보만으로 육지를 돌아다녔고 범선에 의지해 대륙을 오가며, 말라리아가 모기로부터 생긴 병이라는 것도 모르는 시절에 아프리카를 누비고 다녔고, 식인종들을 만나 그들의 풍습을 유럽에 전하기도 했다. 그가 다녔던 거리는 최소한 40만km에 이르고 그가 접한 문화권만 해도 역시 적게 추산해서 200여개에 이른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이 2만3천km였으니 제임스 홀먼의 여행이 얼마나 길고 오랜 여행이었는지 상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는 보지 못하는 대신 사람들의 말에 귀기울였고, 만져보고, 냄새를 맡았다. 현지에서 사람들의 도움과 호의를 받았지만, 대부분의 여행은 혼자 출발했고, 혼자 돌아오는 여행이었다.

따라서 그의 여행은 느린 여행이었다. 시각은 한꺼번에 대상을 받아들이고 그 정보를 분석하지만 촉각은 천천히 받아들이고 그 정보를 자꾸 되새기며 파악하는 일이다. 우리의 삶의 속도를 생각하면 제임스 홀먼처럼 느리게 여행하는 일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세상은 점점 바뀌고 있다. 거리를 정복하고 얼마나 멀리 얼마나 많은 곳을 다녀왔냐가 자랑인 여행에서 이제는 감각으로 넘치는 여행,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한 여행의 시대가 다시 오고 있는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 차마고도의 옛길을 이용해 티벳으로 가는 사람,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이 책은 그렇다고 해서 마냥 재미있지만은 않다. 400쪽이 넘는 분량에서는 다루고 있는 양도 방대하다. 제임스 홀먼의 일대기를 다루면서도 한편으로 당시의 시대상이나 풍습들도 상당히 면밀하게 다루고 있어서 사람에 따라서는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임스 홀먼의 호기심을 따라 살펴본다면 그다지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장애에 대한 편견을 떨어 버릴 수 있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시각장애인은 눈으로만 보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대상을 이해하는 방법은 단지 시각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제임스 홀먼이 보여준 용기와 모험은 이를 잘 나타냈다. 실제로 제임스 홀먼의 경우 아무리 처음 가는 방이라도 불과 몇분동안만 거닐어 보면 생활하는 데에 아무 지장이 없을 정도로 공간 파악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게다가 높은 곳이나 어두운 곳에서는 오히려 비장애인들 보다 훨씬 뛰어난 활동을 보여주었다. 그에게 고소공포증이 있을 리가 없고, 어둠은 낮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책의 첫부분, 활화산이었던 베이비오 화산을 올라가는 제임스 홀먼의 모습은 그가 정말 시각장애인이 맞을까 하는 의심이 들게 할 정도다.

문득 내 자전거 여행이 생각난다. 도시와 도시, 마을과 마을을 자전거로 달리는 그 중간중간에 스쳤던 가슴 뛰는 풍경들. 그것은 내 여행의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다. 하늘을 가득 덮었던 낙엽들, 벼 베기가 끝난 들녘에서 한가로이 이삭을 쪼고 있는 시골닭들의 풍경, 동네 어귀부터 나를 따라오며 짖어대던 강아지들, 길을 달리며 만나는 풍경들이 한가롭기만 했다. 명승지를 탐방하고 뛰어난 풍경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여행과는 달리 바람을 벗하고 구름과 동행하는 여행의 기억은 여전히 내 삶에 강렬한 모티프가 되고 있다.

제임스 홀먼의 세계여행기를 다룬 <세계를 더듬다>는 그런 면에서 우리 안의 여행 본능을 일깨운다. 현지의 문화와 사람들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서는 느린 여행의 멋과 맛을 알려주는 진정한 여행기의 진수를 우리에게 선물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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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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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 밥먹는다.

- 무슨 반찬

- 개구리 반찬

- 살았니? 죽었니?

 

아마도 누구나 기억하는 전래놀이의 노랫말이다. 여기서 개구리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에 따라 놀이는 긴박하게 전개된다. 아무튼 삶과 죽음은 이 놀이에서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살아있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죽은 고기를 먹고 있다.(물론 가끔 '산낙지'도 먹어주고 있다) 불이라는 문명의 매체를 이용해 안전하게(?) 섭취하고 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을 하자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환경운동을 하는 후배는 채식주의자다. 유감스럽게도 그 후배와 술한잔도 못해봐서 채식주의자의 생활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채식주의자가 살아가야할 이 세상은 보통의 사람보다 몇배는 힘들 것이다. 최소한 집밖에서 돈주고  먹는 음식 중에서 완전 채식을 찾기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이니 말이다.

 

작가 한강의 연작소설집 <채식주의자>를 읽게 된 것은 아무래도 지금의 쇠고기 정국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다 읽고 나서 판단한 거지만, 난 한강이라는 소설가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채식주의와는 실상 그다지 관계가 깊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상처받은 영혼과 그 영혼에게서 식물적 상상력의 감화를 받지만 세속된 욕망을 추구햇던 예술가, 그리고 식물이 되어 죽음을 기다리는 동생을 바라보는 언니의 이야기이다. 상처와 욕망과 죽음, 세개의 이야기를 이처럼 잘 버무려 내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너무 과도한 상상을 끌어오지 않았나 싶으면서도 이야기들은 그 안에서 날실과 씨실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세개의 이야기는 연결되어 있지만 또한 각각의 독립적인 이야기로 잘 안착하고 있다. 하지만 식물적 상상력이 욕망과 어우러지는 두번째 작품 '몽고반점'은 이야기의 전개가 너무 극적이라서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이야기의 탄탄한 구성과 깔끔한 문체는 막힘없는 독서를 가능케 했다. 이 책은 '채식주의'에 대한 호기심으로 책을 펼쳐들지 않기를 바란다. 잘 스여진 연작 소설, 풍부한 상상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소설로서 충분히 만족할만한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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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생활자 -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여행기
유성용 지음 / 갤리온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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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들은 생활에 지쳐 여행을 떠나지만, 그것이 며칠짜리 레저가 아니라면, 결국 여행이란 삶을 등지고 죽음의 냄새를 맡으러 가는 머나먼 길이다.
- <여행생활자> 유성용 | 갤리온 | 2007.6.1.


책 표지는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여행기’라고 버젓이 내보이고 있다. 쿨(cool)한 것도 지겨워 핫(hot)해 버린 세상에 ‘쓸쓸’이라는 못난 두글자를 내놓은 책이다. 도대체 이 작자는 어떤 여행을 했기에 이런 말을 표제에 내걸었을까.

제목도 생소하기 그지없다. <여행생활자>라니, 낯선 신조어 앞에서 고개만 갸웃거렸다. 책의 마지막 마침표를 핥고 나니 그 쓰디쓴 단어의 맛에 괜히 침울해진다. 여행이 생활이 된 자는 길위에서 죽음을 예고한다. 그것은 외롭고 구차한 삶이다. 생활을 잃어버리고 정처없이 떠돌다가 구천의 어느 하늘 아래에 조용히 숨을 거두어야 하는 삶은 슬프다. 그러니 쓸쓸한가.

여행생활자, 그 낯설고 우울하고 생소함

책의 시작은 여행의 시작처럼 설레임으로 시작된다. 여행자의 발걸음은, 리장의 축제에 어우러진 남녀의 춤처럼 가볍다. 아무도 두려워할 것도 없이 ‘무위(無爲)의 여정을 극진히 제 속에 새기’고 나아가는 일 뿐이 없다. 천장공로, 그러니까 중국의 시천에서 티베트로 이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에서는 눈 때문에 발이 묶여 끔찍하게 추운 밤을 지새워야 했다.

티베트에서는 일생동안 지은 죄의 업보를 씻겠다고 수미산 주위를 한바퀴 돌다가 중간에 쓰러지기도 했다. 이 산을 평생동안 여든두번째 돌고 있다는 칠순의 노인네도 만나고, 3개월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돌고 있다는 중년의 사내도 만나고, 오체투지로 산을 돌고 있는 여인네도 만났다. 이들은 이생에, 아니 전생에 무슨 업보가 그리 많아 이리도 많이 산을 돌고 있는 것일까. 여행자의 머릿속은 그저 ‘여행은 언젠가 끝이 날 것’이라는 생각만 맴돌았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이틀동안 버스를 타고 카슈미르 지역을 지나가야 했다. 군사적 긴장이 팽배하고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그림자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곳이다. 그의 여행은 이처럼 무모하기 그지없다. 그것이 세상의 끝이라 하더라도 길이 있다면 가야하는 여행생활자의 운명이기도 하다. 그래도 그 너머에서는 말도 통하지 않는 재봉사와 여러날 동안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 교감은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이해는 말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지독히 가난한 나라, 불교의 나라, 스리랑카에서는 기원을 배운다. 수백명의 경건한 얼굴들에서 기원의 방법을 배운다. 기원은 자주 되뇌고, 암송하고, 잊지 않으면, 기원이 또한 나를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다. 여행자는 여기서 무엇을 기원할까. 그 기원은 여행자를 기억해 줄까. 잊지 않을까.

여행, 그것은 제 밖으로 드러나는 길들을 오롯이 걷는 일


네팔에서는 ‘나마스테’, 만나는 이들을 위해 경배하였고, 묵티나르에 올라서 더 이상 길이 없는 길을 만나고야 만다. 나가르코트에서는 반군 게릴라 청년과 만나 지난 여름 불타올랐던 그의 열정, 지금은 차갑게 얼어붙고 있는 열정을 나에게 비춰본다.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는 이라크에서 김선일 씨가 납치 피살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파키스탄이 어떤 나라던가. 알카에다의 은둔지로 점찍힌 곳이며 그에 못지 않은 보수적인 무슬림들의 분위기가 팽배한 나라 아닌가. 파키스탄에서도 금지된 곳, 아프가니스탄 접경지역까지 일부러 찾아가 거기서 살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인들을 만나 삶의 팍팍한 일상을 엿본다. 죽어나가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난민촌까지 몰래 찾아들어가는 그 배포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리고 1년 반에 걸친 그의 여행은 끝났다. 그에게 여행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우리는 지금 생활이라는 삶이라는 여행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낯설고 무섭고 두려울 뿐이니까 말이다. 여행은 곧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고, ‘생활’을 찾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온전히 ‘나’를 잊어야 하며 ‘생활’을 잊어야 한다. ‘알아도 모른척하며 온전히 제 밖에 드러나는 길들을 오롯이 걷는 일이 여행의 근간’이라고 여행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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