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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더듬다 - 한 맹인의 19세기 세계 여행기
제이슨 로버츠 지음, 황의방 옮김 / 까치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산행 중에 만난 사람 중에 머릿속에서 또렷이 남아 있는 두 사람이 있다. 지난 여름 벽소령에서 만난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다. 지리산 능선길이 잘 가꾸어진 건 사실이지만, 시각장애를 가진 이가 산행을 한다는 건 보통의 평지를 걷는 것과는 달리 몇십 배는 어려울 수밖에 없지 않나 싶었다. 사실 이건 내 과장일 수도 있는데, 당시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2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4시간 만에 왔으니, 딱 두 배의 시간이 들었을 뿐이다. 시각장애인은 스스로 지리산을 가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고, 그의 친구가 기꺼이 동행이 되어 길을 나섰다. 보지 못하는 그에게 산은 어떻게 느껴졌을까.
모든 이에게는 인간으로서의 가질 수 있는 욕구가 있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열정이 많은 인간일수록 그 욕구는 더욱 강렬하다. 이 욕구는 온갖 난관과 고통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도전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며 열정은 그것을 성공으로 이끄는 기폭제가 된다. 19세기 증기기관도 발명되기 전 시대를 살던 영국인 제임스 홀먼은 신분상승을 위해 군에 들어갔다가 얻은 중병으로 그만 시력을 잃고 만다. 시각장애인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구걸밖에 없던 그 시절에 그는 피나는 노력 끝에 해군기사단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일주의 꿈을 꾸었다.
말과 마차, 그리고 도보만으로 육지를 돌아다녔고 범선에 의지해 대륙을 오가며, 말라리아가 모기로부터 생긴 병이라는 것도 모르는 시절에 아프리카를 누비고 다녔고, 식인종들을 만나 그들의 풍습을 유럽에 전하기도 했다. 그가 다녔던 거리는 최소한 40만km에 이르고 그가 접한 문화권만 해도 역시 적게 추산해서 200여개에 이른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이 2만3천km였으니 제임스 홀먼의 여행이 얼마나 길고 오랜 여행이었는지 상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는 보지 못하는 대신 사람들의 말에 귀기울였고, 만져보고, 냄새를 맡았다. 현지에서 사람들의 도움과 호의를 받았지만, 대부분의 여행은 혼자 출발했고, 혼자 돌아오는 여행이었다.
따라서 그의 여행은 느린 여행이었다. 시각은 한꺼번에 대상을 받아들이고 그 정보를 분석하지만 촉각은 천천히 받아들이고 그 정보를 자꾸 되새기며 파악하는 일이다. 우리의 삶의 속도를 생각하면 제임스 홀먼처럼 느리게 여행하는 일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세상은 점점 바뀌고 있다. 거리를 정복하고 얼마나 멀리 얼마나 많은 곳을 다녀왔냐가 자랑인 여행에서 이제는 감각으로 넘치는 여행,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한 여행의 시대가 다시 오고 있는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 차마고도의 옛길을 이용해 티벳으로 가는 사람,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이 책은 그렇다고 해서 마냥 재미있지만은 않다. 400쪽이 넘는 분량에서는 다루고 있는 양도 방대하다. 제임스 홀먼의 일대기를 다루면서도 한편으로 당시의 시대상이나 풍습들도 상당히 면밀하게 다루고 있어서 사람에 따라서는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임스 홀먼의 호기심을 따라 살펴본다면 그다지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장애에 대한 편견을 떨어 버릴 수 있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시각장애인은 눈으로만 보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대상을 이해하는 방법은 단지 시각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제임스 홀먼이 보여준 용기와 모험은 이를 잘 나타냈다. 실제로 제임스 홀먼의 경우 아무리 처음 가는 방이라도 불과 몇분동안만 거닐어 보면 생활하는 데에 아무 지장이 없을 정도로 공간 파악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게다가 높은 곳이나 어두운 곳에서는 오히려 비장애인들 보다 훨씬 뛰어난 활동을 보여주었다. 그에게 고소공포증이 있을 리가 없고, 어둠은 낮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책의 첫부분, 활화산이었던 베이비오 화산을 올라가는 제임스 홀먼의 모습은 그가 정말 시각장애인이 맞을까 하는 의심이 들게 할 정도다.
문득 내 자전거 여행이 생각난다. 도시와 도시, 마을과 마을을 자전거로 달리는 그 중간중간에 스쳤던 가슴 뛰는 풍경들. 그것은 내 여행의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다. 하늘을 가득 덮었던 낙엽들, 벼 베기가 끝난 들녘에서 한가로이 이삭을 쪼고 있는 시골닭들의 풍경, 동네 어귀부터 나를 따라오며 짖어대던 강아지들, 길을 달리며 만나는 풍경들이 한가롭기만 했다. 명승지를 탐방하고 뛰어난 풍경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여행과는 달리 바람을 벗하고 구름과 동행하는 여행의 기억은 여전히 내 삶에 강렬한 모티프가 되고 있다.
제임스 홀먼의 세계여행기를 다룬 <세계를 더듬다>는 그런 면에서 우리 안의 여행 본능을 일깨운다. 현지의 문화와 사람들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서는 느린 여행의 멋과 맛을 알려주는 진정한 여행기의 진수를 우리에게 선물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