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poleon Bonaparte>



1 生涯

1.7  滅亡으로

  




 * 러시아 전쟁 <계속...>

 



 
  3. 모스크바 制壓

 그리하여 9월 14일 '나폴레옹 군'은 ‘표도르 바실레비치 로스토프친’ 市長에 의해서
 모든
'라이프라인(Life Line)'이 제거(멈춘)당한 뒤였던 텅 빈 '모스크바' 시가를 행진했다.

 ※ lifeline은 전기, 가스, 수도 등 생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네트워크 시스템.

 <그
때의 시점으로 대육군의 병력은 11만이었으며, 나폴레옹은 그 다음날인 15일 아침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적의 수도를(당시 러시아의 실제의 수도는 상트페테르부루크) 공략함으로 해서
 '아렉산드르1세가' 항복을 수락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사령관은 항복하지 않았다. 거기다 또 '모스크바'에는 대화재까지 일어났다.
 그리고 또
그것은 9월 14일부터 18일(러시아의 음력에서는 9월 2일~6일)까지 최고조에 달했었다.

 그래서 그때 '모스크바'의 중요한 건물들은 거의가 다 목조(木造)였기 때문에, 그로인해서 시가는 거의가 다 전소했고, 그것이 또 결과적으로는(미리 예상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프랑스군들의 주둔을 효과적으로 막는 구실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화재는 '러시아군'의 '방해 작전' 一名 '초토(焦土)작전'에 의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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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poleon-Moscow Fire"



 아무튼, 그래서였던지 나중에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떠나기 전 '모르티에 장군'에게 '크렘린'과 함께 공공건물들의 폭파를 명했다. 그러나 다행으로 그때 또 큰 비가 내렸고, 그리고 이어서 도착했던 '러시아군'들에 의한 방어로 인해서 3개의 탑과 성벽 한 변, 그리고 병기고의 일부만이 파괴되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
나폴레옹'은 후에 그에 대해서 또 다음과 같이 말을 했었다고 한다.

 
<만약, 우리가 2주간만 더 빨리 출발했었더라면, 타르티노에서 쿠트조프군을 격파했을 것이다>라고...

 
어쨌든 '나폴레옹'의 말대로 그렇게만 되었었더라면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아무 소득도 없이 나와야만 했던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그 후에 '프랑스군'에 대항할만한 군대가 재집결할 수 있었던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또 그때 '프랑스군'은 '모스크바' 침공으로부터 퇴각까지의 단 1개월 동안에 병력이 현저히 감소했고, 그로써 그때, 즉시 가용할 수 있었던 병력은 겨우 10만 정도에 불과했다.




"KREML 크렘린"



 <퇴각(退却)>


 
어쨌든 다시 10월 19일, 세 번에 걸쳤던 화의(和議)도 결국에는 무위로 돌아갔고 '나폴레옹'은 계속되던 '러시아'의 불복을 바라보면서 이미 잿더미로 변해버렸던 '모스크바' 시가에 진지을 마련했지만, 그러나 그때부터 더 한층 심해졌던 '러시아군'의 방해공작으로 인해서 '나폴레옹'은 어쩔 수 없이 퇴각명령을 내려야만 했다.

 그리하여 10월 24일 '프랑스군'은 한때 '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에서 잠시 신승(辛勝)을 거두기도 했으나, 하지만
그때 이미 '러시아군'은 '프랑스군'보다 더 빨리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먼저 '프랑스군'의 귀도경로가 될 '스몰렌스크'를 '모스크바'처럼 초토화시켜버렸다. 그리고 또 '쿠투조프'는 '프랑스군'이 그 '스몰렌스크' 쪽으로 퇴각하도록 유도했고, 그 작전은 성공했다.

 그리고 또 그 '스몰렌스크' 街道는 '프랑스군'이 '모스크바'를 침략했을 때 사용했던 길로, 이미 양군(兩軍)의 전투로 인해서 초토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프랑스군'으로서는 식량조달은 꿈도 꿀 수가 없었다.

 그런데다 또 '쿠투조프'는 그런 '프랑스군'을
남쪽의 좁은 길을 통해서 밀집대형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유도를 해나갔으며, 이어서 빨치산(유격대)부대를 준비시켜서, 당시 '프랑스군'의 최대 약점이었던 치중대(輜重隊-수송대)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작전을 구사해나갔다.

 
그리고 또 그 사이 '코사크 기마병'(앞에서 설명되었음)을 포함한 '러시아'의 '輕기병대'는 '프랑스부대'를 계속해서 습격했고, 그리고는 또 막고, 고립시키는 작전을 병행해서 해나갔다.



 * 輕騎兵

 
방패와 갑옷(鎧) 등, 重裝甲으로 무장하고 적의 주력을 괴멸시킬 목적이었던 중기병과는 달리
 최소한의 장비로 속도전의 이점을 살린, 후방교란을 주목적으로 했던 兵種이었다.
 
역사적으로는 내륙의 유라시아의 유목민의 전술에 기원을 둔다.
 
그 지역의 牧民戰士들은 유목생활 중에서 몸에 익힌 탁월한 馬術과 활 기술에 의한 弓騎兵으로 활약했고, 근대적인 대포를 기반으로 하는 전술이 보급될 때까지, 유라시아대륙에서부터 북부아프리카 지역에까지 가장 유력했던 군사세력의 하나였다.





<그림 설명>

16~18세기, 폴란드-리투아니아공화국의 <후사리아>기병. 그림은 이동시의 경장.
전장에서의 돌격공격 시에는 투구와 갑옷을 추가해서
스스로의 등에 거대한 날개장식처럼 붙이고 다녔고
말에도 투구와 갑옷을 입혔으며, 거기다 또 수 미터나 되는 長槍을 휴대했다.



 

 그러자 병참(兵站-군사 작전에 필요한 인원과 물자를 관리, 보급, 지원하는 일. 또는 그런 兵科)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던 '프랑스군'은 점점 더 그 꼴이 말이 아니게 되어갔고, 게다가 이동수단이었던 말의 생명유지조차도 어려워졌기 때문에, 그 틈을 노린 아사직전의 병사들은 그 말들을 식료로써 도륙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또 이제는 말(馬) 없는 기병도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그 기병들조차도 나중에는 도보진군으로 퇴각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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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각하는 프랑스군>

 
 그래서 그때 '프랑스군'에서는 기아와 질병, 거기다 혹독한 엄한(嚴寒)으로 사상자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탈주병까지 급증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또 그 대부분의 탈주병들은 포로가 되든지, 아니면 '러시아 농민'들에 의해서 즉석에서 처형되었다.

 
아무튼 그리하여 1812년 11월 초가 되자 '프랑스군'은 굶주림과 동상(凍傷) 그리고 행군으로 인한 피로누적 등으로 정상적인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그리고 말(馬)들마저도 죽어나갔기 때문에, 그래서 그 <러시아'에서의 겨울>은 그들에게서는 그야말로 말 그대로 악몽이 되었던 것이다. 

 거기다 또 '비아즈마'와 '보로츠크'에서도 '러시아군'이 '프랑스군' 부대를 습격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그때 큰 타격을 입었다. 그리하여 11월 3일에는 프랑스군의 병력이 5만으로 감소했고, 11월 8일 스몰렌스크에 도착했을 때는 3만5천정도로 줄어있었다.

 아무튼 또 
11월 6일 '나폴레옹'은 '말레 장군'이 10월 23일 '프랑스'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리고 또 11월 28일 '드네프르 강'의 지류인 '베레지나 강'에 폰툰(pontoon) 다리(橋)가 가설(假設) 되었고


 ※ pontoon= 1. <군사> 상륙, 도하(渡河) 등에
사용하는 군용의 철주(鐵舟).
                   2. <해양> 밑이 평평한 작은 배. 목제, 강철제, 철근, 콘크리트제 등이 있으며
                      기중기, 준설 펄프의 대선(臺船), 부잔교(浮棧橋) 등으로 이용한다.



<사진은 독일군이 가설 중인 폰툰 교>


 그러자 '구투조프'는 그것이 재 반격의 호기라고 생각하고는 '베레지나 강'을 건너던 '프랑스군'을 급습했다.
 그러자 또 그 결과 '프랑스군'은 많은 희생자를 냈다.

 그리고 또, 그 참혹했던 전투는 <베레지나 도하작전>이라고 불렸으며
 그리고 또한, 그 후 '프랑스군'의 병력은 3만으로 줄어들었다.

 그러자 12월 5일 '나폴레옹'은 '뮤라 원수'에게 뒷일을 부탁하고는 썰매를 타고 급거 귀국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뮤라'도 '나폴리 왕국'을 지키기 위해서
 ‘우제누 드 보아루네’에게 그 부대를 맡기고 탈주했다.

 
그 후 '프랑스군' 대부분의 부대에서 잔존 병이 격감했고, 이어서 1812년 12월 14일에는 그들 모두 '러시아'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그때 살아남았던 병사들은 겨우 22000명 정도였다.
 그러니까 결국 '프랑스군'은 처음 60만이었던 것이, 그때는 5천 정도까지 병력이 줄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전투로 인해서 사상된 사람들의 수는 '러시아'나 '프랑스'나 별 차이가 없었지만
 그러나 그때 전선이 통과하면서 생겼던 황폐해졌던 지역이나, 그 주민의 사상자 수는 그보다 더 훨씬 많았다.

 
그러니까 그때, 전체적으로 대략 수백만 명 정도가 사망했었다고 본다면
 양군의 사망자 수는 약 100만 명 정도였었다고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또 그 결과로 볼 때 '프랑스군'은 30만 명 '폴란드군'은 7만 명 '이탈리아군'은 5만 명 '독일군'은 8만 명 그리고 또 '러시아군'도 그때 아마도 45만 명 정도는 잃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 인명(人命)과 함께 '프랑스'는 말 20만 마리와 대포 1000문도 함께 잃었다.



<참고도: 병사들의 수와 기온의 변화-오른쪽 꼭지점이 모스크바. 검은 색이 후퇴경로>


 그리고 또 '러시아어'로 <거지>나 <페텐師>를 의미하는 '샤롬이지니크(러:шаромыжник)'라는 말은 '프랑스어'의 'cher ami(친애하는 친구)'란 말이 그 어원이라고 하고, 그것은 또 그 심상찮았던 겨울추위 속에서 병사들이 '러시아' 원 주민들에게 구걸을 했을 때 썼던 말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한편, 요리점(비스토로-불:bistro-대중식당)이란 말은 그 어원이 '러시아'라고 생각하고 있다.

 4. 역사적인 평가

 
1812년 '러시아전쟁'서의 패배는 '나폴레옹'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 나중에 그가 '엘바 섬'으로 유형 가는데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고, 더불어서 '나폴레옹전쟁'의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엘바 섬 위치도-중앙>
 

 그러나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그 전쟁이 <조국 전쟁(영:Patriotic Warr, 러: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이 되었던 것과 함께, 이후 19세기 '러시아국민'들의 애국심에 큰 영향을 주게 되는 <강화된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것의 간접적인 영향의 결과로는 ‘데카브리스트’의 난(亂)으로부터 시작해서 1917년의 2월 혁명까지 이어지게 되는 일련의 혁명으로 연결되어서, 근대화에 대한 강한 요구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 데카브리스트(러:Восстание декабристов, Decembrist revolt=dekabrist)의 亂

 1825년 12월 14일(그레고리력 12월 26일)에 '페테르부르크'에서 '농노제(農奴制)'의 폐지와 '입헌정치'의 실현을 요구하며 '러시아'의 '청년장교'들이 무장봉기하여 일으켰던 반란이었다.
 봉기는 실패했지만, 그 정신은 '러시아'의 현실에 불만을 품은 다음 세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데카브리스트의 난>


※ 2월 혁명-차르(tsar)의 전제정치가 계속되던 중
'1917년의 2월'에 혁명으로 인해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 된 사건.

  
  하지만 그 전쟁으로 인해서 '나폴레옹'이 완전한 재기불능상태까지 갔던 것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1년 후 '나폴레옹'은 다시 '독일'에서의 패권을 다투기 위해서 그보다 한층 더한 大원정을 결행하게 되고, 이어서 2만 5천 명의 동맹군과 함께 총 40만의 '프랑스군'을 또 그곳으로 보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또 1813년 10월 16일부터 19일까지 치러졌던 ‘라이프치히 전투’에서도 '나폴레옹'은 패배하고 말지만, 그러나 그런 움직임은 1814년의 '프랑스 전쟁' 때까지 계속되게 된다.

 
어쨌든, 그 '러시아전쟁'으로 '나폴레옹'이 <천하무적>이 아닌 것이란 것만은 확실하게 밝혀졌다. 그러자 또 그 틈을 노리고 '프로이센 민족주의자'들과 '러시아 지휘관'들의 요청으로 인해서 '독일 민족주의자'들이 <라인-프로이센 연합>을 결성해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던 것이다.

 
그랬으므로, 만약에 '러시아'에서의 그 패배소식이 세상에 알려지지만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 결정적인 '독일원정'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 원정 - 끝>


 

 





<冬宮의 군사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는 러시아 영웅들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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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生涯
  1.7  滅亡으로






 * 러시아 전쟁 <계속...>



 



 8월 20일, 자기현시(自己顯示)욕구가 강하고, 당시 인기도 있었던 ‘쿠투조프’가 그 후임으로 들와왔다.
 그러자 그는 '톨리'의 작전에 대한 결점을 과장되게 비판했다.
 
하지만 그는 곧 '프랑스'와의 교전으로 인해서 무익한 희생을 치르지 않으려던 '톨리'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그의 작전 대부분을 수용했다. 그리고는 그 방어진(防禦陣)을 '보로디노'에서 펴기로 결정을 했다.
 
그러나 그 9월 7일의 ‘보로디노의 싸움’은 '나폴레옹전쟁' 중 하루 전투로서는 가장 처참했던 것으로
 그것은 인류역사상 특필(特筆)할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었다고 할 수가 있었다.



 ** 보로디노 전투(러:Бородинское сражение) 1812년 9월 7일(율리우스력 8월 26일)



 *** 보로디노는 러시아, 모스크바 州 西部의 모자이스키 地區에 있는 村



<모스크바 주 위치도>

<보로디노의 구세주 수도원>


  

 
1812년 러시아전쟁(나폴레옹 전쟁)때 치러졌던 전쟁 중 하나였다.
 프랑스에서는 <모스크바江의 전투(프:Bataille de la Moskowa)>라고도 불린다.
 
모스크바 西方의 '보로디노' 근교에서 프랑스황제 나폴레옹1세가 인솔하던 大陸軍(프랑스군을 핵심으로 한 유럽제국연합군)과 '쿠투조프'가 인솔하던 러시아군과의 싸움이었다.
 
양군 모두 막대한 손해를 입었지만 그러나 결정적인 승리는 얻지 못했고
 러시아군의 전략적인 철퇴로 싸움은 끝났다.




<보로디노의 싸움>



 <배경>

 
1812년 6월 23일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시작되자 '러시아군'은 몇 차례에 걸쳐서 방위진지구축을 시도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대육군'의 침공속도에 밀려서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
 
그 이후 '톨리'는 해임되었고, 그 후임으로 '쿠투조프'가 취임했다.
 
하지만 '쿠투조프'도 '대육군'과의 싸움으로 인해서 무고한 희생이 느는 것을 막고자 '대육군'을 '모스크바' 서방 100km까지 유인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그리고는 '스몰렌스크'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길 위에 있는 '보로디노'에서 '프랑스군'을 기다리기로 결정을 하고는 9월 3일부터 진지구축에 들어갔다.



<참고: 상황도-청색이 프랑스군=지면상 크게 할 수 없음을 양해 바람>
<대충설명-상좌(24시)-상우(3시~9시)-하좌(9시~14시)-하우(14시~16시)>



 <경과>

 '러시아군'은 '보로디노'에 육군부대 120,000명과 야포 640문을 집결시켰다. 그리고 또 그 밖에 예비 병력으로 민병(Ополчение)이 후방에 있었지만, 그러나 전투에는 참가시키지 않았다.

 '
러시아군'은 '톨리'가 지휘하던 우익을 '카라챠 강'가에 배치했고, 중앙부를 '라에프스키'에게 그리고 좌익을 '바그라티온' 부대로 배치했다. 그리고 그 외측은 삼림(森林) 자체가 방어진이 되었다.

 
그에 맞섰던 '대육군'은 병력 133,000명, 야포 587문으로 대치했고, 북쪽으로 '우제누'의 '제4군단'과 '네이'의 '제3군단' 그리고 '쥬노'의 '제8군단' '다브'의 '제1군단' '포냐트후스키'의 '제5군단'을 배치했다.

 그리고
전투개시 전 '다브'가 '러시아군'의 좌익을 남쪽으로부터 우회하는 작전을 제안했지만, 그러나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의 좌익에서의 정면공격을 명령했다.

 
그것은 또 <나폴레옹답지 않은 너무나도 단순했던 작전이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또 <러시아군을 그날 안에 물리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작전이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날 '나폴레옹'은 심한 高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이 '나폴레옹'의 지휘를 방해해서 그를 태만하게 만들었다거나 또는 단순한 작전으로 유도하게 했던 이유였다>고 말을 했던 사람도 있었다.



<보로디노에서의 나폴레옹>


 아무튼, 그렇게 해서 9월 7일 오전 6시가 되자 '대육군'은 '러시아군' 좌익을 향해서 전진을 개시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러시아'의 치밀했던 준비에 의해서 '우제누 군단'이 큰 손실을 냈고, 그것은 또 이어지던 다른 군단들을 정체시키는 결과를 낳게 했다.

 
(러시아는 그때, 角面堡와 突角堡 등, 우리나라로 치면 고구려의 치(雉 또는 雉城)와 유사한 형태의 방어진을 구축해놓고 프랑스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전 10시까지의 전투상황은 상방이 심대한 희생을 수반하며 소모전의 양상을 나타내고 있었고, 그 결과로 '대육군'에서는 '네이'가 부상을 당했으며 '러시아군'에서는 '바그라티온'이 빈사(瀕死)상태까지 가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하지만 정오가 지나면서 '바그라티온'이 지키던 돌각보를 '뮤라'가 보병과 기병 합동작전으로 돌격해서 기어이 탈취해냈다. 그러자 '러시아군'도 인접해있던 고지로부터 맹렬한 포격을 퍼부어댔다. 그러자 또 '뮤라'는 '나폴레옹'에게 '친위대'의 증원투입을 요청했지만, 그러나 그날 상태가 좋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무슨 생각이었던지 그 요청을 거부했다.

 
오후 3시 '라에프스키'의 각면보에서도 '대육군'은 겨우 호전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어서 '코렝쿨'의 기병연대가 돌입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코렝쿨'은 전사했고, 각면보는 결국 점령되었다.

 
그렇게 해서 '러시아군'의 제1선 진지는 공략되었지만, 그러나 그 배후에는 또 '톨리'의 우익부대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으로서는 더 이상의 전진은 힘들었다. 그리고 또한, 그때까지도 '러시아군'은 전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후 5시가 되자 양군은 준비했던 탄약들을 모두 다 소비했고, 그로써 어쩔 수 없이 싸움은 끝나게 되었다.
그 결과, 양군의 피해는 '대육군'의 전상자 33,000명 '러시아군'은 44,000명에나 이르렀다.
 
그러자 양군은 결정적인 승리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에 '쿠투조프'는 '러시아군'에 철퇴를 명령했다.



<보로디노에서의 쿠투조프> 


 
 <영향>

 
그리하여 드디어 길은 열렸고, 이어서 '대육군'은 9월 14일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 전쟁에서 끝내 결정적인 승리는 놓친 채였다.

 그리고 또 육군이 아직 건재했던 '러시아황제'는 그것을 빌미로 평화 교섭을 거부했고
 그로써 '나폴레옹'은 또 10월 9일, 어쩔 수 없이 '모스크바'에서 철수하게 된다.

 그리고는 그 악명의 귀도(歸途)에서 '대육군'은 '러시아'의 참혹했던 겨울을 맞이하게 되고
 이어서 괴멸하게 된다.

 그리고 또,
그 '보로디노'의 싸움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도 클라이맥스의 하나로써 묘사되고 있다.




 그러자 어쨌든 '러시아군'은 9월 8일, 전력의 절반밖에는 발휘하지 못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으로 결국 '모스크바'로 향하는 길을 '프랑스군'에게 열어주고야 말았다.
 그러자 그 후 '쿠투조프'는 시가에서의 철퇴도 명령했다.

 
그때까지 '러시아군'은 '모스크바' 근교의 10만 명(보로디노에서 퇴각했던 쿠투조프군 잔존병력에다 부분적인 증원이 더해졌다)을 포함해서 전군 904,000명을 헤아리고 있었고, 그 병력은 또 1812년 전쟁에서의 최다 수준의 것이었다.

 

 <러시아 원정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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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生涯

  1.7  滅亡으로






 * 러시아 전쟁 <계속...>



 



 그리고 최근의 設에 의하면, 당초 '러시아군'의 병력은 '프랑스군'보다 적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때 '폴란드' 국경을 지키고 있던 '러시아군'은 약 280,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때, 황제였던 '알렉산드르1세'는 '프랑스'의 위성국가였던 '바르샤바공국'의 침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 전쟁전야(前夜)에 '全 러시아 육군'은 대략 50만명 정도였었고
 (35~71만이라고 하는 설도 있지만, 40만 명 전후가 정확하다도 봄)
 거기에는 또 중요한 3개 군단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때의 '러시아군' 상태도 들여다보면

 前線軍

 제1西方군: 톨리 지휘, 약 159,800명
 제2서방군: 피여틀 바그라티(치)온 장군 지휘, 62,000명
 제3서방군: 토르마소프 장군 지휘, 대략 58,200명
 예비군: 3개전선 부대를 지원.
 제1예비군: 65,000명
 제2예비군: 47,000명
 등, 상기와 같았다.



 * 미하일 보그다노비치 바클레이 데 톨리(또는 미하일 보그다노비치 바르크라이 드 토오리)
   (Михаил БогдановичБарклай-де-Толли)

 1761년 12월 27일~1818년 3월 26일.
 나폴레옹전쟁 기의 러시아 군인. 원수.
 17세기 러시아로 이주했던 스코틀랜드가문의 후손.
 1786년 러시아군에 입대. 이후 여러 전쟁에 참가했으며
 나폴레옹과도 대적해서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이하, 상세한 것은 생략함)




  * 피여틀 바그라치(티)온(Пётр Иванович Багратион, Pjotr Ivanovich Bagration)

 1765년 7월 10일~1812년 9월 12일
 
제정러시아의 군인.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시에 장군으로 제2군을 인솔했다.
 그루지야왕가 바그라치온家의 후예(後裔).
 북쪽 카프카스의 키지르얄(Kizlyar, 현재의 다게스탄)에서 탄생.
 오랫동안 러시아제국의 장군으로 재직했다.






 그랬으므로 그때 '나폴레옹 군'과 곧바로 대치할 수 있었던 병력은 총 392,000명 정도였다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또, 首都였던 '상트페테르부루크'의 치안유지는 '스웨덴'과 '오스만제국'에 맡겼두고 있었는데
 그들은 또 그곳에서 100,000이상의 병력도 사용할 수가 있었다.



 * 상트페테르부루크(러:Санкт-Петербург-상트피치르부루크)

 
러시아의 도시이며, 레닌그라드州의 州都이다. 일찍이 러시아제국의 수도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후(1914년~1924년)에는 페트로그라드(Петроград)
 소련시대(1924년~1991년)에는 레닌그라드(Ленинград-리닝그라트)였다.







 어쨌든, 그러한 대처로 '러시아군'은 점점 더 규모를 확대해서, 나중에는 7, 8만의 '코사크 병'(Cossack-앞에서 설명되었음)을 포함시키지 않고서도 9월까지는 병력이 900,000 정도까지 부풀게 되었다.

 2. 모스크바 진군

 아무튼 그리하여 1812년 6월 23일, 드디어 '프랑스군'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작전 바로 전에 '나폴레옹'은 짧은 최후통첩을 '러시아'에 보냈다. 그리고는 회답도 받아보지 않고 바로 '러시아령 폴란드'에로의 진군을 명했던 것이다.

 그러자
처음에 '나폴레옹 군'은 저항도 거의 받지 않고 신속하게 이동했다. 그리고 또 그때 '러시아군' 총사령관이었던 '톨리'는 '바그라치온'의 급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거부했다. 그래서 '러시아군'은 급한 차에 나름대로 몇 차례에 걸쳐서 단단한 방위진지구축을 시도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그때마다 '프랑스군'의 침공속도가 너무도 빨랐기 때문에, 그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러시아군'은 하는 수 없이 그곳에서 퇴각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것은 또 초토작전의 예로써 자주 사용되고 있다)

 아무튼, 그러자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다!>고 했던 정치적인 압력과, 그에 대해서 계속된 저항으로 일관했던 장군(국민들이 협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으로 인해서 별 싸움 없이 끝나버렸던 '스몰렌스크의 싸움(8월 16일-18일)' 뒤에 '톨리'는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




 * 스몰렌스크(Смоленск, Smolensk)





 드네프르 강가(상류)에 위치한 러시아연방의 서방도시이다.
 도시 명의 의미는 성 베드로 거리.
 모스크바에서는 서남서로 360km, 인구는 351,100명(2003년 추계).
 성곽도시인 그곳은 유럽과 러시아의 길목에 해당되어서, 역사상 몇 번이나 파괴되었다.
 러시아폴란드 전쟁, 나폴레옹의 러시아전쟁, 독소전 등에서도 전장이 되었다.
 오늘날은 전자공업과 섬유산업 그리고 식품산업 등을 주로 하는 공업도시가 되었다.
 역사적인 건물로서는 성모마리아대성당과 16세기에 지어진 크레믈린(城塞)이 있으며
<스몰렌스크의 성화상>은 유명했다.


 그 도시의 이름에 대한 설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스몰루니야라는 작은 강에서 유래한다는 설도 있지만
그러나 그 강 이름의 유래는 잘 알려져 있지가 않다.
그리고 또 흑토(黑土)지대를 흐른다고 해서 ‘흑토’를 의미하는
옛날 슬라브어가 그 강의 이름이 되었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설은
송지(松脂-송진)를 의미하는 러시아어 ‘smola’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설도
있다.
그 일대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 그 전에는 소나무와 樹脂산업이 번성했었다.
 그리고 또 세계 제2차대전 때도 격전지였다.


<위치도-붉은 점>

<성모마리아취침대성당의 내부-독소전쟁에서 일부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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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生涯

  1.7  滅亡으로




 그러자 '나폴레옹'은 4월의 '에크뮐 전쟁'에서 승리했고, 또 5월에는 2번째로 '빈' 진공도 완수했지만, 그러나 '아스페른과 에슬링의 싸움'에서는 '오스트리아군'에 졌다. 하지만 또 계속되던 7월의 '바그람 싸움'에서는 쌍방 합해 30만이상의 군사가 격돌, 그리하여 양군 아울러서 5만이상(에서 7만)에 달하던 사상자를 내고서야 '나폴레옹'은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오스트리아'와 '쇤브룬 화약'을 맺었고, 그로써 <제5차 대불대동맹>은 소멸했다.

 
그 화약 뒤에 '나폴레옹'은 황후였던 '죠제피누'가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이별했고(이설의 소지가 있음), 곧 이어서 1810년에 '오스트리아' 황녀 '루이즈'와 재혼했다.

 
그 결혼에는 당초 '러시아 황녀'가 후보에 올랐던 것이었지만, 그러나 '러시아 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오스트리아 황녀'가 결정되었던 것은 '오스트리아의' 재상 '멧테르니히'(앞에서 설명되었음)의 재정(裁定)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1811년에 왕자 '나폴레옹 2세'(앞에서 일부 소개되었음)가 탄생하자 '나폴레옹'은 그 유아를 '로마왕'의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또 그 무렵 '대륙봉쇄령'에 의해서 '영국'과의 무역이 어려워졌던 '유럽 제국(諸國)'은 경제적으로 곤궁에 처하게 되었다. 게다가 또,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리던 '영국'을 대신해서 당시 '중농주의'를 유지하고 있던 '프랑스'가 그 역할을 맡는다는 것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으므로, 그래서 '프랑스 산업' 역시도 곧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 重農主義(physiocracy)

 
18세기 후반, 프랑스의 '케네' 등에 의해서 주장되었던 경제사상 및 그것에 기초한 정책을 말한다.


 ** 케네(Quesnay, Francois)1694~1774

 프랑스의 경제학자·의사. <부(富)의 유일한 원천은 농업에 있다>라는 입장으로부터 농업생산을 중시했던 중농주의의 창시자. 중상주의(重商主義)를 비판했고, 렛세-페러(laissez-faire:自由放任主義-무간섭주의. 정부가 기업이나 개인의 경제활동을 간섭하지 말라는 입장)를 주장했다. 
루이 15세<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왕(1710~1774). 루이 14세의 증손으로 오를레앙공 필립의 섭정 정치로 시작된 그의 치세는 경제적으로는 호황이 계속되었으나, 칠년 전쟁에 휩쓸려서 인도와 캐나다의 지배권을 잃고 국고는 바닥을 드러내 절대 왕정의 내부적 붕괴를 가져왔다. 재위 기간은 1715~1774년>의 시의(侍醫)로서도 유명하며, 저서에 <경제표(經濟表)>가 있다. 그의 생각은 <아담스미스>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중농주의는 창시자와 공통의 사상을 가졌던 역사상 최초의 경제학파이다.



<케네>


*** 스미스(Adam Smith)

영국의 경제학자이며 철학자(1723-1790)
고전파 경제학의 창시자.
 중상주의적인 보호정책을 비판하고
자유경쟁이 사회진보의 요건임을 주장했다.
 산업혁명의 이론적인 기초를 다졌다.
 저서에 <국부론>과 <도덕정조론> 등이 있다.






 그러자 1810년, 더 이상 그것을 견디지 못했던 '러시아'가 먼저 '대륙봉쇄령'을 깨고 '영국'과의 무역을 재개했다.
 그러자 또 '
나폴레옹'은 그런 '러시아'에 대해서 계속해서 '봉쇄령'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러시아'는 그것을 무시했다. 그러자 또 이윽고 1812년 '나폴레옹'은 그런 '러시아'를 응징하기 위해서 원정을 결행했다.
 
(러시아 측에서는 그것을 ‘조국전쟁’이라고 부름)



 * 러시아 전쟁


 불:La Campagne de Russie menee par Napoleon en 1812 
 러: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단, 러시아어 호칭에 대해서는 아래를 참조.






 <사진설명>

 '상트페테르부루크'의 '카잔대성당'과 '모스크바'의 구세주 '하리스토스 대성당'에는
 나폴레옹에 대한 러시아의 승리를 기념해서 '전쟁기념비<(勝)戰爭記念碑>'가 세워져있다.
 동상은 '쿠투조프'(앞에서 설명되었음)






<상트페테르부루크 위치도>



<카잔대성당 옛날 사진>




<러시아혁명 이전, 폭파되기 전의 하리스토스대성당 원경>

 


 

 <개요>

 1812년 '러시아제국'이 '대륙봉쇄령'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해서 '프랑스제국'의
 '나폴레옹1세'가 同 제국을 침공, 그리고는 패배하고 퇴각할 때까지의 일련에 관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1812년 '나폴레옹1세'에 의한 '러시아제국'에의 침공은 '나폴레옹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 원정의 결과 '프랑스제국'과 그 동맹군들의 병력은 당초보다 2%미만으로 격감되었다.
 그리고 이
전쟁이 '러시아 문화'에 끼쳤던 영향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란 大 문학작품
 舊 소련의 독소전(독일과 소련의 전쟁. 1941년-1945년)과 동일시했던 것으로도 알 수가 있다.


 ** 톨스토이(러: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Lev Nikolajevich Tolstoj)


 1828년 9월 9일~1910년 11월 20일
 帝政 러시아 시대의 소설가.
 대표작 <안나카레이니나, 부활, 전쟁과 평화, 人生讀本 등>
 평화주의자였으며, 러시아문학과 정치 양쪽 모두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세기를 대표하는 소설가의 한 사람이다.
 (잘 알려져 있으므로, 이하 설명은 생략함)




<손녀와 함께>




 ** 獨蘇戰



 제2차 세계대전 중, 1941년부터 1945년에 걸쳐서 '나치스'의 '독일'과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 사이에서 벌어졌던 전쟁. 드물게는 '독소전쟁'이라고도 불린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국방군'이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에 침입했던 것으로 시작되었으며, 당시의 '소련'은 국민들을 고무(鼓舞)하기 위해서 '나폴레옹'에 승리했던 ‘조국전쟁’에 비교해서, 이 전쟁을 <大조국전쟁(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이라고 불렀다.





 <전쟁의 명칭에 대해서>

 1941년까지 이 전쟁을 '러시아'에서는 <조국(祖國)전쟁(러: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Otechestvennaya Voyna)>이라고 불렸으나, 1941년 이후에는 <1812년의 조국전쟁>으로 불리게 되었다.
 '舊 소련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전쟁을 <大조국전쟁(독일-소련전쟁)>으로 강조했었던 때문이었다.
 그리고 '
러시아'에서는 이 전쟁을 <1812년(의) 전쟁>이라고 부르지만, 그러나 '영국'과 '미국'에서의 <1812년 전쟁>은 자신들의 전쟁, 즉 <미국과 영국의 (美英)전쟁>을 의미한다.




 <侵攻>

 
1. 저항군

 
1812년 6월.
 '유럽'사상최대의 691,500명으로 이루어진 '프랑스제국'의 '대육군(La Grande Armee)'은
 '네만 강(앞에서 설명되었음)'을 건너서 '모스크바'에 도달하려고 하고 있었다.



<네만 강>


 그때, 대육군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1.
황제직속부대 250,000명의 중앙공격군
 2.
 우제누 드 보아루네(Eugene de Beauharnais)(80,000명)와 제롬 보나파르트(Jerome Bonaparte)(70,000명) 지휘하의 2개 전선(前線)군.
 3. 
쟈크 마크드날(Etienne-Jacques-Joseph-Alexandre MacDonald)(32,500명)과 칼 필립 퓨르스트 트 슈바르젠베르크(Karl Philipp Furst zu Schwarzenberg)(34,000명의 오스트리아군) 지휘하의 2개 遊擊부대.
 4.
225,000명 정도의 예비군.
 5.
거기다 80,000의 <국민방위군>이 '바르샤바공국'의 국경방위를 위해서 소집되었다.
 6.
거기에다 또 '러시아'국경의 '全프랑스제국군'도 모두 포함되어서, 전체 771,500명 정도가 '러시아'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7. 그리고 또
그 밖에도 '이베리아'에서 전투 중이던 30만 명과
 8. '독일'과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20만이 넘는 병력이 예비로 남아있었던 상태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과연, 그때 '프랑스제국'에 도전하려던 다른 세력들을 압도하고도 남을만했던 충분한 병력이었음에 분명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때의 병력구성을 보게 되면
 45만의 '프랑스군'이 '원정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나머지가 '동맹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다 또 '오스트리아'로부터 파견되었던 '슈바르젠베르크' 부대에 가세했던 대략 95,000명 정도의 '폴란드 병'과 90,000명 정도의 '독일 병'(24,000명이 바이에른왕국, 20,000명이 작센왕국, 20,000명이 프로이센왕국, 17,000이 베스트파렌왕국, 그리고 라인동맹 각국으로부터 수천으로 구성)도 있었다.
 그리고 또한 25,000명의 '이탈리아 병'과 12,000명의 '스위스 병' 그리고 4,800명 정도의 '스페인 병'과 3,500명 정도의 '크로아티아 병' 2,000명 정도의 '포르투갈 병'도 있었다.
 그리고 또, 거기에 더해서 '
네덜란드'와 '벨기에'로부터 파견되었던 군도 있었다.
 
그러므로 그 군대는 가히 '나폴레옹'에게 패배하고서 제국에 재편(再編)되었던 나라들의 '총 군대'였다고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황혼의 모스크바>









<러시아 전쟁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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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生涯

  1.7  滅亡으로





   * 제5차 대불대동맹(Fifth Coalition, 1809년 4월 9일~1809년 10월 14일)



<바그람 전투에서의 나폴레옹>


 
  2. 1809년 오스트리아 전쟁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바그람 전투>


  <바그람 전투>

 1. 개요

 바그람 전투(영:Battle of Wagram, 불: Bataille de Wagram-1809년 7월 5일~7월 6일)

 '
나폴레옹전쟁'의 하나이며 '빈' 북동 15킬로에 있는 '도나우 강' 북안(北岸) 마을 <바그람>의 주변지역에서
 '황제 나폴레옹1세'가 인솔하던 '프랑스군'과 '칼(카를) 대공'이 인솔하던 '오스트리아군'이 싸운 전쟁이다.
 
그때 '프랑스군'은 18만 '오스트리아군'은 15만이라고 하는 대군끼리 격돌해서 합계 7만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하지만
결과는 '프랑스군'이 승리했으며 '오스트리아'는 '쇤브룬 화약'을 맺고 '프랑스'에 굴복했다.

 2. 배경

 1809년 4월 9일 '오스트리아'는 '영국'과 '제5차 대불대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신속하게 반격으로 들어갔고 '에크뮐의 싸움'에서 '칼 대공'이 인솔하던 '오스트리아군' 주력을 깨고 수도 '빈'에 입성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도나우 강' 북안으로 퇴각했던 10만의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하기 위해서 '나폴레옹'은 5월 21일과 22일에 7만의 병사들을 이끌고서 다시 도하작전을 결행함과 동시에 결전에 임했지만, 그러나 그때는 '칼 대공'의 뛰어난 지휘를 당해내지
못하고 패배했다.

 
그 후, 잠시 소강상태로 들어갔던 양군은 그 사이에 전열을 다시 가다듬었고, 그 결과 '프랑스'는 '우제누'와 '마크드날'이 인솔하던 '이탈리아왕국 군'과 또 '마르몬 군단' '포냐트후스키'가 인솔하던 '폴란드군' 그리고 '바이에른군'이 그곳으로 속속 도착함으로 해서 18만의 대군이 되었으며, 그러자 '오스트리아군'도 그에 맞게 15만의 병력을 확보하고 결전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 즈음에 '티롤(독:Tirol. 영:Tyrol-유럽 중앙부에 있으며,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국경, 알프스산맥 동부지역에 있다)'에서 ‘안드레아스 호퍼’가 봉기(蜂起)를 했다. 그리고 또 '네덜란드'의 '와르헤렌 섬'에도 '영국군'이 상륙하는 등, 배후에서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그러자 '나폴레옹'으로서는 시간적인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서둘러서 재차 '칼 대공'과의 결전에 들어갔던 것이다.

 3. 경과

 '나폴레옹'은 <아스페른과 에슬링 싸움>에서 패배한 후, 다시는 그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주도면밀한 계획을 가다듬었다. 그 결과 '로바우 섬'에 집결하고 있던 '프랑스군'은 7월 4일,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을 일부러 선택해서 도하작전을 결행했고, 그와 동시에 가교를 설치하면서 단번에 대군을 도하시켰다. 그러나 단, 그 와중에 참모장이었던 '베르티에'의 계산착오로, 2개의 군단에 같은 다리를 할당하는 일이 생겨서 일시적인 지연이 생기기도 했다.

 
아무튼, 그러자 '오스트리아군'은 불의의 습격에 완전히 노출되었고, 이어서 강가를 경계하던 부대는 단번에 무너졌다.
 그러자 또
이어서 '프랑스군'은 7월 5일 낮까지 '아스페른'에서부터 '에슬링' 일대까지를 제압했고, 오후에는 18만 대군이 도하를 전부 완료했다. 그리고는 좌익에 '맛세나 군단' 중앙부에 '베르나도트'가 인솔하던 '작센 군단' '우제누 군단' '우디노 군단' 우익에 '다브 군단'을 배치해서, 20킬로에 달하던 반원(半圓)전투대형을 형성했다. 그리고 또 바로
이어서 '요한 대공'이 인솔하던 '오스트리아군' 별동대 12,500명이 참가하기 전에 승부를 결정지으려고 '나폴레옹'은 7월 5일 공격을 시도했지만, 그러나 소규모의 공격에만 머무르고 말았고, 실패했다.


<7월 6일 아침 상황도-흰색이 프랑스군. 최상단 중앙이 바그람>
-------------------------------------------------------------------------------------------------


 7월 6일 이른 아침, 전투가 재개되었다. 그러자
처음에는 '오스트리아군'이 먼저 주도권을 잡고 '프랑스군' 우익으로 공격을 걸었다. 그것은 양동작전이었던 것으로, 계속해서 제3군단, 제6군단에 의한 본격적인 공격이 '프랑스군' 좌익으로 이어졌다. 그러자 '베르나도트'의 '작센 군단'이 후퇴했고, 거기에다 '브데 사단'마저 패주당해서 '프랑스군'의 후방 연락선이 급격하게 위협 당했다. 그러자 또 '프랑스군'에서는 '맛세나 군단'의 일부와 기병이 증원되었고, 거기다 또 '로바우 섬'으로부터 포격까지 퍼부어지자 '오스트리아군'의 공세가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편, 우익에서는 '다브 군단'이 그때부터 '오스트리아군'을 역공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의 전술적인 시각은 그 호기를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이어서 그는 '오스트리아군' 전체 중에서 부채(扇)의 손잡이에 해당하던 핵심 중앙부를 향해서 '마크드날 군단'과 '친위대'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마크드날' 지휘하의 8,000병력은 곧 쐐기대형을 편성해서 '오스트리아군'의 중앙부에다 총검돌격으로 찔러 넣었다. 그리고는 이어서 처참한 싸움이 전개되었고, 얼마 후 '오스트리아군'의 중앙부는 돌파되어서 분단되었다.

 오후 4시.
 '요한 대공'의 '별동대'가 그 전장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승패는 이미 결정나있었다.
 '
오스트리아군'은 그때 40,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는 무너지기 바로 일보직전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때 '프랑스군'도 사상자 32,500명, 포로 7,000명이라는 숫자를 냈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그 전투의 참혹했음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가 있는 것이다.


 4. 영향

 아무튼, 7월 10일 '오스트리아'는 정전을 신청했고, 이어서 12일에는 정전협정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또 같은 날 '프랑스군'에서는 전공에 의해서 '마크드날'과 '우디노' 그리고 '마르몬'이 원수로 승진했다.
 
그리고 또 '베르티에'에게는(비록 실책은 범했지만) '바그람 大공작'이 수여(授與)되었다.
 
그리고 또 한참 지난 10월 14일에 '오스트리아'는 '쇤브룬 화약'을 맺고 '프랑스'에 굴복했다.
 
그리고 또, 그 광대했던 영토를 '프랑스'와 '바이에른'에게 할양해야 했으며
 거기다 거액의 배상금까지 부과 받았던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1809년 '오스트리아'의 '나폴레옹'에 대한 도전은 실패로 끝이 났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서 '나폴레옹의 제국'은 그 <最 절정기>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후 '바그람'의 경험으로 '오스트리아군'은 舊來의 '용병 군'으로부터 탈피했다. 그것은 또 '
아우스트리트'의 굴욕적이었던 패배이후 '오스트리아'는 계속된 군제개혁과 함께, 혁명으로 인해서 다시 태어났던 '프랑스군'들처럼, 그때서야 비로소 <국민>으로서의 의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것은 또 개인적인 명예나 이익 때문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려는 <국민군>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냈던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들이 후에 '라이프치히'에서의 빛나는 승리를 차지하기까지에는
 그로부터도 또 수년의 세월이 더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5. 전후처리

 
10월 14일 '쇤브룬의 화약'이 체결되어서 '오스트리아'는 광대한 영토를 할양 당했다.
 
거기다 1810년에는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아 루이자가 '프랑스'의 황후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즈음의 '나폴레옹'의 패권은 '네덜란드'와 '함부르크' 그리고 '로마' 등을 병합한 '프랑스 제국' 외에도, 통치권하의 '이탈리아왕국'과 형 '죠제프'가 왕위에 앉아있던 '스페인' 그리고 남동생 '제롬'이 통치하던 '베스트파렌 왕국' 그리고 또 의동생 '뮤라'가 왕위에 앉아있던 '나폴리' 그리고 또 동맹국이었던 '스위스연방'과 '라인동맹' '바르샤바공국'에까지 이르고 있어서, 그래서 그때야말로 가히 <나폴레옹의 最 절정기>였다고 평가할 수가 있는 것이다.


 


 ** 마크드날(Etienne Jacques Joseph Alexandre Macdonald) 1765년 11월 17일~1840년 9월 25일

 영어로는 ‘맥도날드’ 라고 쓰인 것이 많다.
 
나폴레옹전쟁 기에 활약했던 프랑스의 군인, 원수.




 수단(Sudan-아프리카 북동부에 있는 민주공화국-수도는 하르툼)의 스코틀랜드系 家系에서 태어났다.
 찰스(Charles Edward Sturt-1720년 12월 31일~1788년 1월 31일)소참왕(小僭王-어린왕위후계자-우리나라로 치면 世子정도. 또는 왕자-설명은 생략함)과 함께 스코틀랜드에서 프랑스로 피해 왔던
'자코바이트(Jacobite-1688년 영국에서 일어났던 명예혁명의 반 혁명세력을 통칭함)'의 후예였다.


<찰스>

<1746년-Battle of Culloden-좌측이 자코바이트>



 ** 우디노(Nicolas Charles Oudinot) 1767년 4월 25일~1847년 9월 13일

 나폴레옹전쟁 기에 활약했던 프랑스의 군인, 원수. 르지오公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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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8년 7월 2일 제국백작. 에슬링 및 바그람 전쟁의 功으로 1809년 7월 12일에 제국 원수로 승진.
 
제국민전쟁에서는 베를린공략을 맡았지만, 그로스베른 싸움에서 패배해서 실패했다.
 복고왕정 때는 근위대소장, 1823년의 스페인전쟁에서는 제1군단 사령관으로 참전했다. 




 ** 쇤브룬의 화약(불:Paix de Schonbrunn) 1809년 10월 14일

 '나폴레옹전쟁' 중에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쇤브룬 궁전'에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체결되었던 강화조약. '쇤브룬 강화조약(불:Trait de Schonbrunn)'이라고도 불린다.

 <
개요>

 '
이베리아반도 전쟁'에서 '나폴레옹1세'의 고전(苦戰)을 확인했던 '오스트리아'는
 1809년 4월 9일 '영국'과 '제5차 대불대동맹'을 결성하고 '바이에른'을 침공했다.
 그리고 그것은
1805년의 '프레스부르크 화약'으로 잃었던 영토를 탈환할 목적에서였지만
 그러나 상황은 정 반대로 되어서 '나폴레옹'에게 수도 '빈'을 점령당했으며
 거기다 7월 5일부터 6일에 걸쳐서 치러졌던 '바그람 전쟁'에서도 패배해서
 결국 7월 12일에 정전이 성립되었다.

 그 
10월 14일에 체결되었던 강화조약은 '오스트리아'에게는 아주 굴욕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또 그 내용을 잠시 들여다보면

 '프랑스'에는 '트리에스티'와 '달마치어'를
 그리고 '바이에른 왕국'에는 '찰스부르크'와 '티롤'을
 그리고 또 '바르샤바 공국'에는 '북부 가리치아'와 '루브린'을 할양 했다.
 
그리고 또 '러시아 제국'에 대해서는 '오스트리아'와 싸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부 가리치아'를 할양해야 했다.

 
그로써 '오스트리아'는 전인구의 6분의 1에 상당하는 400만 명의 인구마저 잃게 되었다.
 게다가 또, 육군의 총병력은 15만 명으로 제한되었으며, 8,500만 프랑의 배상금까지 부과 받았다,
 그리고 또 '죠제프'를 '스페인국왕'으로 승인했던 것과 동시에
 '대륙봉쇄령'의 준수 또한 확약당해야만 했다.


 










            <제5차 대불대동맹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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