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獨島)
독도(獨島) 즉, 일본(日本)에서 부르는 이름 타케시마(竹島)는, 우리나라의 동해(東海), 일본(日本)으로서는 일본해(日本海)의 남서부(南西部-일본의 입장에서)에 있는 섬으로, 북위(北緯) 37도(度)15분(分), 동경(東經) 131도(度) 52분(分)에 위치해 있는 섬으로 그들은 보고 있다.(더욱 정확하게는 북위 37도 14분 30초, 동경 131도 52분 0초라고 함)
참고: 일찍이 일본정부 외무성(外務省)에서는 북위(北緯) 37도(度) 9분(分), 동경(東經) 131도(度) 55분(分)으로 표시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2005년 7월에 마이니치(每日) 신문에 의해서 그 오류가 지적되었고, 그리하여 바르게 정정(訂正)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의 주소(住所)는 시마네(島根) 현(縣) 오키(隱岐) 군(郡) 오키(隱岐)의 시마쵸우(島町) 타케시마(竹島) 국유(國有=官有) 무번지(無番地)라고 하며, 1905년(明治38年) 1월 28일에 일본정부는 그 독도(獨島)를 자신들의 영토로 할 것을(隱岐 所管) 각의(閣議=內閣會議) 결정(決定)했다.
그러자 1952년(昭和27年) 1월 18일,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그 독도(獨島)를 대한민국의 영토라고 선언(宣言)했으며(일본의 입장에서는 일방적), 그와 동시에 근해(近海)를 포함했던 <이승만 라인>을 설정했다.
그리하여 그 후, 1965년(昭和40年) 6월 22일에 있었던 <한일기본조약(韓日基本條約)> 체결(締結) 시까지 한국은 일본인들이 그 <라인>을 넘었다는 이유로, 일본어선 328척(隻)을 나포했으며, 더불어서 일본인 44명이 살상(殺傷) 당했고, 3929명이 억류(抑留)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그 사이에 해상보안청순시선(海上保安廳巡視船)에 총격을 가했던 사건은 15건에 달했다고 하며, 그로인해서 또 16척(隻)의 배가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지금도 한국(韓國)은 무력으로 그 섬을 점유(占有)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日本)과의 사이에서 영토문제가 발생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위(經緯)>
1. 양국(兩國)의 인식 차이 2. 독도(獨島)의 역사(歷史) 또는 내력(來歷)에 대한 개요
1) 한국의 인터넷 참고 자료(사이버 독도와 그 外의 자료들 참조. 단, 그냥 연대순으로 기술함)
※ 단, 상기까지 한국의 자료이며, 이하는 일본의 자료와 비교 병기(倂記)함. 그리고 한국의 자료(인터넷 등)은 "한"으로, 사이버 독도의 자료는 "사"로, 일본의 자료는 "일"로 표기함.
----------------------------------------------------------------------------------------------------------- (사) 1693년(4026, 癸酉) 조선 숙종 19년.『肅宗實錄』권26 30,『邊例集要』권17. 안용복(安龍福) 1차 渡日. 3월 동래와 울산의 어부 40여명이 울릉도에서 일본 어부와 충돌했는데, 일본인들이 안용복과 박어둔(朴於屯)을 꾀어 오키 섬(隱岐島)로 납치함. 안용복은 隱岐島主에게 자신들을 잡아온 이유를 따지고, 다시 호우키슈우(伯耆州) 太守를 만나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이므로 일본인의 울릉도 왕래를 금해줄 것을 요구함. 호우키슈우 태수는 막부에 보고하고, 이를 준수하겠다는 書契를 안용복에게 전달함. *참고문헌 『肅宗實錄』 권26ㆍ30,『邊例集要』 권17 雜條 附 鬱陵島,『五洲衍文長箋散稿』 권35 陵島事實辨證說, 『旅菴全書』 권7 疆界考 島 鬱陵島條 安龍福事.
(한) 1693년. 자산도로 호칭, 안용복사건.
(일) 1693년에도 그들은 조우(遭遇)했으며,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 그 두 사람을 요나고(米子)로 연행(連行)했던 것을 계기로 해서, 일본과 조선 양국 간에 분쟁이 발생함.(일명 竹島一件-앞에서 설명되었음)
※ 참고:안용복 (일) 안용복에 대한 일본 측의 자료
안용복(安龍福 : 1657年?-沒年不詳)은 조선국 경상도 동래현 부산(朝鮮國 慶尚道 東萊県 釜山)에 살았던 어부였다. 그는 수군(水軍) 경험이 있었던 사람으로 생각되며, 천민(賤民)이었던 것으로도 여겨진다. 그리고 또한, 그의 발언들은 지금까지도 독도문제에 영향을 주고 있다.
안용복(安龍福)은 1693년, 울릉도에서 불법으로 어로(漁勞)행위를 하다가 그 섬을 개발했던 일본인들과 조우(遭遇), 그들에 의해서 일본으로 연행되었다. 그러자 그 후, 그는 조선으로 다시 송환(送還)되었는데, 그런데 그 당시 그가 했던 증언이 발단이 되어서 울릉도의 영유(領有)를 둘러싸고 일조(日朝) 간에 외교문제로 발전했다.(竹島一件)
아무튼, 그로부터 3년 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왔던 그는 울릉도와 우산도(于山島)는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했지만, 그러나 다시 귀국했을 때, 그는 조선(朝鮮) 정부(朝廷)에 체포되었고, 이어서 불법 일본 도항(渡航)과 직소(直訴) 죄의 혐의로 유죄(流罪-유형)판결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일본이 마츠시마(松島)라고 불렀던 그 독도(獨島)를 우산도(于山島)라고 주장했던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런 연고로 해서 그는 현재 한국에서는 그 독도(獨島)의 영유(領有)를 일본에 확실하게 인식시켜주었던 인물로 영웅시하고 있고, 심지어는 장군(將軍)으로 칭하면서 당시, 민간외교를 수행했던 어부로서 중고(中高)교과서에서도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또, 당시 안용복(安龍福)이 어로(漁勞)를 나갔던 그 울릉도에는 <안용복장군충혼비>가, 그리고 또 그가 당시에 살았던 부산에는 <안용복장군상>이 건립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증언(證言)에는 모순되는 점과 부자연스러운 점이 많기 때문에, 그래서 일본에서는 그의 말에 신빙성(信憑性)을 부여하지는 않고 있지만, 아무튼 또 1828년에 완성되었던 톳토리(鳥取) 번사(藩士) 오카지마마사요시(岡島正義=江石梁-1784~1858) 편술(編述)의 타케시마 고 하<竹島 考 下>에는 안용복(安龍福)의 신분을 표시하는 요패(腰牌-인식표)의 내용이 실려 있는데, 그 요패(腰牌)는 군병(軍兵)이 소지했던 것으로, 그 표면에는 <동래(東萊)사노(私奴=賤民) 용박(用朴) 년(年) 32, 장(長) 4척(尺)1촌(寸), 면철자잠생자무(面鉄髭暫生疵無) 주경거오충추(主京居呉忠秋)>라고 되어 있고, 그 뒷면에는 <경오(庚午) 부산(釜山)좌자천1리(佐自川一里), 제14통(統)3호(戶)>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서 또 그에 대한 해석을 해보면, 일단 뒤의 내용은 내용 그대로이므로 이후에 설명하며, 앞의 내용 동래(東萊) 사노(私奴)에서, 동래란 것은 부산의 동래를 의미하며, 사노(私奴)는 그의 신분, 그리고 또, 년32는 나이가 32세, 장(長)은 키가 4척1촌(약123,4센티-誤寫 또는 誤記로 봄), 면철자잠생자무에서 면철(面鐵)은 얼굴색을 의미하는 것으로, 검푸른 색 또는 흑청(黑靑)이었다고 하며, 자잠생(髭暫生)은 구레나룻 또는 일반수염을 의미하는 것으로, 퍼석퍼석하고 듬성듬성 난 것을 의미하고, 그리고 또 자무(疵無)는 몸에 흉터 같은 것이 없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주경거오충주(主京居呉忠秋)는 그의 주인 되는 사람이 경성(서울)에 사는 사람으로, 이름이 오충추(呉忠秋)란 것을 의미했던 것이라고 한다.(이상은 본인의 해석임)
그리고 그 뜻은, 안용복(安龍福)은 군병(軍兵)이었고, 얼굴은 불그스레했으며, 머리카락은 듬성듬성했고, 몸에 상처는 없었다. 그리고 경오(庚午) 년에 33세였다고 했으며, 그래서 또 그 경오(庚午) 년은 겐로쿠(元綠)3년(1690년)이기 때문에, 그는 1657년생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또 신장은 4척1촌(약 124센티)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것은 어른의 키로서는 너무 작다고 생각되므로, 아마도 오사(誤寫)였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리고 그의 거주지는 그 자신의 증언에 의해서도 부산(釜山)의 좌백천1리(佐自川一里)였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당시의 부산은 동래 현에 있었던 조그만 어촌이었으며, 일본의 출장소라고 할 수 있었던 쓰시마 번의 倭館이 있었다)
그리고 안용복(安龍福)이 일본으로 연행되어왔을 때, 일본에서는 그 상황을 기록해두었었고, 그래서 또 타케시마 고(竹島考)에 따르면, 그는 맹성강포(猛性强暴-성격이 사납고 우악스러움)한 자라고 써두었었고, 그리고 또 인부년표(因府年表)에서는 <異客ノ内ヘ暴悪ノ者之有->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 異客ノ内ヘ暴悪ノ者之有는, 이객은 타향에서 온 사람 또는 타국에서 온 사람을 의미하며, 그래서 전체적인 뜻은, 외국에서 온 사람 중에 포악(暴惡)한 자가 있다로 해석함.
그래서 또, 강포(强暴)나 포악(暴惡)한 성격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국(異國)과의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교섭을 하는 등, 배짱이 두둑했던 인물로 생각할 수 있다. <竹島 考 下의 표지>
그리고 또 당시, 안용복(安龍福)은 일본어를 말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또 아마도 당시 그 부산(釜山)에 쓰시마 번의 왜관(倭館)이 있었고, 그래서 또 그 주변에는 조선과의 무역 등을 하기 위해서 설치해두었던 일본인 촌(村)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안용복(安龍福)은 그 상인들 또는 그 상인들에게서 일본어를 배웠던 조선인으로부터 일본어를 배웠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리고 또, 그의 언동(言動)에 대한 기록은 일본과 조선에 공히 남아있었지만, 그러나 그 자신이 직접 쓴 항해기록이나 체재(滯在)기록 같은 것은 없으며, 그 증언의 내용이란 것도 상당히 애매(曖昧)했기 때문에, 그래서 일본어로도 조선어로도 문자로서는 거의 남겨지지가 않았었다. 그리고 또 나중의 조선에서의 증언기록과 실제와는 다른 부분이 많이 있었고, 일본에서는 그를 조선의 사자(使者) 형식으로 대접했지만, 조선에서는 그를 영웅시했던 경향이 있었다.
아무튼 또, 그 당시의 상황을 잠시 들여다보면, 그때 막부의 허락을 받아서 출어(出漁)를 했던 村川(무라카와)家와 大谷(오야)家는 매년 교대로 울릉도로 출어(出漁)를 하고 있었고, 타케시마 고(竹島 考)와 오야큐우에몽(또는 쿠요몽-大谷九右衛門)의 죽도도해유래기발서공(竹嶋渡海由来記抜書控)에 의하면, 1692년 3월에 무라카와(村川) 가(家)의 배가 울릉도로 향했는데, 그 섬에 도착해서 보니 미리 설치해두었던 어구(漁具)와 어선(漁船) 등이 없어졌다는 등, 누군가가 어업(漁業)을 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그러던 중 그들은 그곳에서 조선인들과 조우(遭遇)했고, 그 중에서 일본어를 아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사연을 물어본 즉, 그가 이렇게 말을 했었다고 한다.
<울릉도보다 북쪽에 있는 섬으로 나라(國主)님에게 올릴 전복을 따러왔다가, 난풍(難風)을 만나서 이 섬으로 표착(漂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섬에 전복이 많이 있기 때문에 따게 되었다...>
그 사람이 바로 안용복(安龍福)이었음은 두 말 할 것도 없지만, 그런데 그때 안용복(安龍福)은 그 울릉도보다 북쪽에 있는 섬으로 어로(漁勞)를 나왔다고 했으나, 그 위에는 섬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 그가 말했던 그 섬이란 당시 조선에서 발행했던 조선팔도고금총도(朝鮮八道古今総図)에 기록되었던 실재하지 않는 우산도(于山島)를 가리켰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랬으므로 또, 그가 그때 그렇게 말을 했던 것은, 울릉도에서의 어로(漁勞)행위를 감추기 위한 궤변(詭辯)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 조선팔도고금총람 圖> 아무튼, 그러자 무라카와(村川)家의 어부들은 그 섬이 일본의 영토이므로, 그래서 두 번 다시 오지 말 것을 그들에게 말하고는, 그 권익(權益)이 훼손된 증거로, 당시 조선인들이 만들었던 말린 전복과 누룩된장 등을 가지고 귀국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아래는 그 오야(大谷)家의 문서 원문과 그 해석에 대한 소개이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略) 内壱人は通しニテ 弐人共ニともども船に乗り 此方之舟へ参申候故乗せ申候 而何国之者と相尋申候へ ちやうせんかわてん国村之者と申候故 此嶋之儀公方様より拝領仕 毎年渡海いたし候 嶋にて候所に 何とて参候やと尋候へは 此嶋より北に当り嶋有之三年に一度宛国主之用にて 鮑取に参候 国元は二月廿一日に類舟十一艘出舟いたし 難風に逢五艘に以上五拾三人乗し此嶋へ三月廿三日に漂着、 此嶋之様子見申候へは 鮑有之候間 致逗留 鮑取上けしと申候(略) 村川市兵衛 舟頭平兵衛 同 黒兵衛「元禄六年酉四月朝鮮人召つれ参候時諸事控」
<해석> 그 섬에서 만난 조선인들 중에서 한사람은 일본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일본) 배에 태우고는 <도대체 어느 나라의 사람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가 <조선 사람>이라고 말을 했고, 그러자 또 우리가 <이 섬은 우리나라(일본)에서 허락을 해서 우리가 매년 출어(出漁)를 나오고 있는데, 당신들은 왜 이 섬으로 왔는가?>하고 묻자, 그가 또 이렇게 말을 했다. <여기보다 더 북쪽에 섬이 있어, 3년에 한 번씩 나라님에게 올릴 전복을 채취하러 오고 있다. 그리고 2월 21일에 배 11척을 이끌고 고향을 떠났지만, 그러나 오던 도중에 난풍(難風)을 만났고, 그 결과 5척 53인 이상을 태우고는 3월 23일에 이 섬에 표착했다. 그런데 또 이 섬에 도착을 해서 보니, 전복이 아주 많기에 채취를 했던 것이다>라고 말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문서에 의하면 <1693년 4월, 톳토리(鳥取) 번(藩) 오야(大谷) 가(家)의 배가 막부의 허가를 얻어서 21인을 태우고 울릉도에 갔을 때, 그곳에서 어로(漁勞)행위를 하고 있던 조선인을 만났다. 그런데 그 중에서 일본어가 가능했던 안용복(安龍福)이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러자 그가 말하기를 자신의 나이는 42세이며, 조선으로부터 배 3척 42인과 함께 그곳으로 왔다고 말을 했다. 그러자 그것이 염려되었던 오야 가의 사람들이 그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왔다>라고 기록을 해두었다.
한편, 당시 조선은 그 울릉도에 공도(空島)정책을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곳에는 전복과 미역 등이 지천이었던 보고(寶庫)였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아무튼, 그 후에 그 두 사람은 요나고(米子)에서 2개월에 걸쳐서 조사를 받았고, 그러자 그 후에 요나고에서는 막부의 명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사이에 그 두 사람에게는 외출이 금지되었으며, 술도 하루에 3병 이하로 지급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 막부로부터 그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라는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에 그들은 일시(一時) 톳토리(鳥取)로 이송되었으나, 그러자 또 그 사이에 안용복(安龍福)이 소란을 피웠으므로 동네의 구경은 금지되었다.
< 山陰道> 그 후, 그들은 산인도우(山陰道)를 통해서 나가사키(長崎)로 호송되었으며, 그러자 또 그에는 의사와 조리사 등, 약 90명의 수행원이 동행했고, 도중의 식사에서는 1즙7채(一汁七菜-국 한 가지와 일곱 가지 나물 또는 야채)를 제공하는 등, 그들은 외국의 손님대접을 받았다.
그런 한편, 막부는 쓰시마 번에 그 두 사람을 인수한 후, 조선으로 돌려보내라고 명령을 내렸던 한편, 조선 정부에 그들 월경(越境)에 대한 항의를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쓰시마 번은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라는 막부의 견해에 기초해서 그들 두 사람을 죄인 취급을 했다. 그리하여 그 두 사람의 신병을 인도받았던 쓰시마 번은 나가사키(長崎)에서 재차 그들을 취조(取調)했고, 그 중에 모았던 증언들을 정리했던 <조선인구상서(朝鮮人口上書)>에는, 안용복(安龍福)이 어로(漁勞)를 위해서 9명을 데리고 울릉도로 건너갔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오야 가의 심문(尋問)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아무튼 또, 그 후에는 앞의 기술(記述)과 같으므로 설명은 생략하며, 어쨌든 그 후에 또 안용복(安龍福)은 조선에서도 취조(取調)를 받았으며, 그러자 또 그 조선 측의 사료(史料)인 <변예집요(邊例集要) 권17>에 의하면 <안용복(安龍福) 등은 물고기를 거래하는 배에 물건을 싣고 이동하다가 표풍(漂風)을 만난 후 울릉도에 도착했다. 그러자 배에서 내려서 숨으려고 했지만, 그러나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의 하선(下船)이 늦어졌고, 그 사이에 또 일본인들이 그곳에 도착해서 8명이 칼과 조총(鳥銃)으로 위협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은 일본으로 끌려가게 되었다>라고 기록이 되어있다.
그러므로 또, 안용복(安龍福)은 오야(大谷) 가(家)의 심문(尋問)에서는 위세(威勢)를 부풀리기 위해서였던지, 배 3척에 42인이 울릉도로 갔었다고 했으며, 그러나 또 나가사키(長崎)에서는 9인이라고 증언을 했고, 조선에서는 또 6인이라고 진술을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밀항(密航)을 은폐할 목적이었던지, 그들은 어로(漁勞) 중이었던 데도 불구하고, 그 섬에 표착을 해서 숨으려고 했지만, 그런데 마침 그때 일본인들이 나타나서 총과 칼로 위협을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고 진술을 했다. 그리고 또한, 가지고 있던 요패(腰牌)에 의하면 그때 안용복(安龍福)은 36세였지만, 그러나 역시, 허세를 부리기 위해서 42세라고 말을 했던 것이었다.
아무튼, 그리고 또 그 안용복(安龍福)이 조선으로 송환되고 3년 후였던 1696년 1월에, 막부는 조선과의 장기간의 교섭을 끝내고, 톳토리(鳥取) 번에 <울릉도에의 도항을 금지한다>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그런데 또 그때,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안용복(安龍福)은, 그해 5월에 승려(僧侶)를 포함한 10명을 데리고서 울릉도와 우산도(于山島)의 조선 영유(領有) 소원(訴願)을 호우키(伯耆)에 내기 위해서 일본으로 향했지만, 그러나 또 다시 난풍(難風)을 만나서 오키(隱岐)에 표착했다. 그러자 오키(隱岐)에서는 그 3년 전에 안용복(安龍福)이 오야 가에 연행되었던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들을 다시 취조했다. 그리고 취조가 끝나자 안용복(安龍福)은 징세(徵稅) 공무원으로 위장하여, 선수(船首)에 조울양도감세장신안동지기(朝鬱両島監税将臣安同知騎)라고 쓴 깃발을 세우고는 그 소원(訴願)을 위해서 스스로 호우키로 향해갔다.
< 당시, 안용복이 내걸었다는 기에 대한 것을 일본인들이 기록한 자료> 그리고 또, 안용복(安龍福)은 오키에서 취조를 받았을 때는 자신의 이름이 안용복(安龍福)이라고 일본어로 말을 했지만, 톳토리(鳥取)에서는 자신의 이름에다 동지(同知=同知中樞府事-조선시대에 중추부에 속했던 종이품의 벼슬)라는 관명(官名)을 붙여서 사칭(詐稱)했고, 일본어로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또 아무튼, 톳토리 번에서는 그가 제출했던 소장(訴狀)에 대한 것을 막부에 문의했던 바, 에도(江戶)에서는 <외국인에 대한 것은 나가사키(長崎)에서...>라는 반신(返信)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타고 왔던 배를 타고 조선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또 참고로, 아래는 당시 오키(隱岐)의 무라카미(村上) 가(家)에서 그를 취조했을 때, 안용복(安龍福)의 모습에 관한 것을 기록했던 것이다.
一、安龍福 午歳四十三 冠ノヤウナル黒キ笠水精ノ緒 アサキ木綿ノウハキヲ着申候 腰ニ札ヲ壱ツ着ケ申候 表ニ通政太夫 安龍福 年甲午生 裏ニ住東莱 印彫入 印判小サキ箱ニ入 耳カキヤウジ小サキ箱ニ入 此弐色扇ニ着ケ持申候
<해석>
1. 안용복 43세 관(冠) 같은 검은 갓에 수정(水晶) 서(緖-갓끈) 색(色)이 엷은 목면(木棉-솜) 상의를 입었다 허리에 패(牌)를 하나 차고 있다 패의 앞면에는 통정태부(通政太夫)
※ 위 통정태부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생각되며, 통정대부는 조선시대의 정삼품 문관의 품계였고, 고종2년(1865)부터는 종친과 의빈(儀賓)의 품계로도 썼었다고 함. 그리고 의빈(儀賓)은 부마도위(駙馬都尉) 등, 왕족의 신분이 아니면서 왕족과 통혼한 사람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함.
안용복(安龍福) (갑)오(甲午)년 생 뒷면에는 동래(東萊) 거주(居住)라는 인(印)이 새겨져 있다 인판(印判-도장)은 작은 상자에 넣어져있다 귀이개와 이쑤시개가 작은 상자에 넣어져있다 그것들을 2색(色)의 부채에 달아서 가지고 있다
<안용복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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