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 입은 남자
이상훈 지음 / 박하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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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관련된 것이라면 ‘지루한’, ‘따분한’ 같은 형용사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 분들께는 [한복 입은 남자]를 살며시 손에 쥐어주면 된다. 소설이 역사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역사로 들어가는 좋은 안내자는 될 수 있다. 이 작가는 이제껏 우리가 보지 못했고 가보지도 못했던 세계로 인도한다. 그리고 어떠한 역사소설도 이르지 못한 역사의 지평을 펼쳐 보인다. 그것도 무척이나 친절하면서도 매끈한 문체로.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내 마음의 깊은 곳 어딘가를 이 소설이 울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 울림의 한 조각이라도 다른 분들과 나누고 싶어 조악한 솜씨로나마 글을 시작해 본다.

 

다큐멘터리 피디 진석은 한 전시관에서 다빈치의 비행기 설계도와 똑같은 비차모형물을 보게 된다. 왜 한국 전시관에 다빈치의 설계도를 베낀 모형물이 버젓이 있단 말인가! 의아해하는 진석 앞에 엘레나 꼬레아라는 이탈리아 여성이 나타난다. 할아버지에게 조상이 한국에서 왔다는 말을 들은 엘레나는 조상들의 흔적을 찾으러 틈만 나면 한국을 방문해왔다는 것이다. 진석은 엘레나에게서 그녀 조상의 비망록을 건네받는다. 비망록에는 엄청난 역사적 사실이 숨겨져 있었다. 비망록의 주인공은 장영실이었다.

 

작가는 역사에서 사라진 장영실을 불러온다. 나는 그동안 장영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을까. 장영실은 그저 몇 가지 사실의 조각으로만 내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던 것 같다. 자격루를 만든 과학자. 세종의 총애를 받아 노비 출신으로서는 기적적으로 높은 자리에 올랐으나, 세종이 타는 가마를 잘못 만들어 벼슬에서 물러난 사람. 부끄럽지만 이게 전부다. 작가는 진석의 입을 통해 의문을 제기한다. 세종이 자신의 수족과도 같던 장영실을 그렇게 하루아침에 내칠 수 있었을까? 종3품까지 지낸 장영실의 묘가 그저 가묘로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게 합당한가? 어디서 언제 죽었는지 기록이 전무한 이유는 무엇인가? 작가의 이런 의문은 타당하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무엇보다 조선 최고의 성군이었던 세종이 겨우 가마가 부서졌다는 사실을 꼬투리 삼아 장영실을 파직시켰겠는가. 진석은 세종이 장영실을 나라 밖으로 빼돌리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 있을 거라고 추측한다.

 

장영실의 비망록에서 그 의문의 열쇠는 세계 원정에 나섰던 명나라의 장군 정화가 쥐고 있다. 장영실은 조선 출신 환관을 통해 정화 대장을 만난다. 평소 천문 관측을 통해 지구가 둥글다는 생각을 해왔던 장영실은 정화 대장을 통해 세상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에 관해 듣게 된다.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크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고 하지, 그러나 세상의 밖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들이 많이 있어.” 그러나 정화 대장은 명나라 중신들의 탄핵을 받아 대항해를 계속할 수 없는 처지에 몰리게 된다. 그 즈음 조선에서 장영실의 처지도 비슷했다. 장영실에 대한 세종의 총애를 질시하는 무리들이 장영실을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미던 참이었던 것이다. 세종은 장영실을 살리기 위해 정화 대장의 마지막 항해를 지원해주면서 장영실을 그 항해에 동행하도록 하려고 했다.

 

장영실과 정화 대장은 10년을 항해한 끝에 교황청에 도착해 교황을 만난다. 당시 유럽 전역에 대한 교황의 영향력이 막강했기에 교황의 허가를 받는 편이 유럽을 돌아다니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도 노비 출신이라고 천대 받고 견제 받던 장영실은, 그러나 로마 교황청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교황청이 장영실의 존재를 두려워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온 장영실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장영실과 정화 대장이 교황을 알현했다는 기록은 역사에 남지 않았다. 아니, 교황청은 그 사실을 결코 역사에 기록할 수 없었다.

 

비록 역사의 공식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장영실과 정화 대장이 유럽에 끼친 영향은 상상을 초월한다. 정화 대장의 항해지도는 유럽항해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또 장영실은 천문학자 토스카넬리에게 갑인자 인쇄술을 전수하는데, 몇 년 뒤 구텐베르크 성서가 세상에 나온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다빈치에 관해 말해야 한다. 장영실과 다빈치. 두 천재가 만나는 대목은 가슴이 뭉클해질 만큼 정겹다. 장영실은 초대받아 가게 된 다빈치의 아버지 집에서 돋보기로 개미를 관찰하고 있는 소년 다빈치를 만난다. 다빈치가 쥐고 있는 돋보기를 통해 고국에서의 까마득한 세월을 불러낸 장영실은 다빈치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본다. 더구나 다빈치가 서자 출신이라는 이유로 집안에서 찬밥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동질감을 느낀 장영실은 다빈치를 제자로 삼는다. 그리고 이제 두 천재의 만남이 얼마나 대단한 일들을 이뤄냈는지 보게 된다. 우리가 가끔 마주친 적 있는 다빈치의 비행기 설계도. 바로 이 설계도의 뒤에 있는 숨은 조력자는 다름 아닌 장영실이었다. 장영실은 자격루의 원리를 전수해 다빈치가 자명종을 자명종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역사를 바로 보지 못할 때, 우리는 현재와 미래를 부분적으로만 이해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나아갈 길을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끄집어내었는데도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학자들을 향해 엘레나는 말한다. “어떤 진리도 처음에는 부정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진리 그 자체가 변화하진 않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의 발표가 시발점이 되어 서양 위주의 역사관이 바뀌어 나가길 고대합니다.” 우리 내면에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있는 서양 위주의 역사관. 이 역사관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우리는 늘 서구인들 뒤를 졸졸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복 입은 남자]이야 말로 방황하는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줄 통로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복 입은 남자]를 읽으면서 역사의 빈틈 사이에서 헤맸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그 빈틈 사이에서 내가 찾고 있던 것이 바로 이런 이야기였던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역사는 그저 지나간 이야기일 뿐이라고 여긴다. 심지어 지나긴 이야기는 우리와 아무 관련도 없지 않느냐고 따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을 보라. 이 소설은 역사가 우리의 현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교과서가 거부한 역사를 작가는 기어코 발굴해 낸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장영실이란 수백 년 전 인물이 내 가슴 속에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경험을 했다. 그 뿐인가. 이 소설을 통해 15세기 조선과 명, 이탈리아 역사에 대한 인식이 풍요로워졌음을 느낀다. 나는 조선의 강산과 사랑하는 이들을 그리워하며 흘러내리던 장영실의 눈물을 마음에 오래도록 담아둘 것이다.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크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고 하지, 그러나 세상의 밖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들이 많이 있어.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는 얘기지. 그래서 내가 목숨을 걸고 세상 끝까지 항해를 하는 거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아 이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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