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트 위의 세 남자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24
제롬 K. 제롬 지음, 김이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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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영국은 모든 것이 과도했다. 증기 기관의 발명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양모산업이 발달하자 소비 시장을 확보하기 위한 식민지가 전세계에 개척돼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 불리우는 식민지 벨트가 형성됐다. 안으로는 철도 산업으로 교통이 발달하고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고 독서 대중이 형성되고 젠트리 계급이 자리잡았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찰스 디킨스, 브론테 자매 등이 활동한 것도 이 시기였다. 풍부해진 부의 대부분은 상류층에 집중되며 도시빈곤층의 참혹한 삶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사회적으로는 낙관적인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그 시기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힘있는 나라였으니 어느 정도는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인구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대기근을 겪은 아일랜드를 제외하고.)

제롬 K. 제롬의 <보트 위의 세 남자>는 이 시대에 템즈 강을 배로 유람하는 세 남자의 이야기다. 원제는 <보트 위의 세 남자(개는 말할 것도 없고) Three Men in a Boat (To Say Nothing of the Dog>이다. (코니 윌리스의 <개는 말할 것도 없고>와 이 작품은 깊이 연관돼 있다.) 초간은 1889년. 최초에는 지역사를 곁들인 비교적 진지한 여행 가이드로 기획됐다. 주인공은 작가 자신이라고 짐작되는 J, 그리고 그의 친구인 조지와 해리스다. 그들은 폭스테리어 몽모렌시를 데리고 템즈강 상류를 향해 2주 동안 여행하는 계획을 세운다. 책은 이들이 여행하면서 겪는 여러 소동을 그리면서 간간히 추억담과 지역사를 곁들이는데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코믹 소설이 됐고, 결과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유머를 분석하려는 건 우스꽝스러운 시도지만 그래도 이 소설의 유머의 핵심를 꼽아 보자면, 그것은 화자의 태도에 있는 것 같다. 앞으로 소설을 이끌어 나갈 화자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사람인지는 자신이 무릎 염증을 제외한 모든 병에 걸렸다고 진지하게 믿는 첫 대목에서부터 분명해진다. 그는 엄살꾼에 게으름뱅이에다가 허풍쟁이에다 위선자인데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친구들을 탓하기 일쑤다. 게다가 여행을 함께 가는 두 친구 역시 그와 마찬가지다. 말만 그럴듯하지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는 이들의 템즈 강 유람은 준비부터 삐걱이는데, 계획대로 진행돼도 고달플 이들의 여행에 생각지도 못 한 문제들이 계속 나타난다.

소설은 발간 당시에도 크게 성공했는데 이후로도 영화로도 몇 번이나 만들어졌다. 이 작품을 오마주하거나 패러디하거나 확장한 문학 작품들도 있다(고 위키피디어에 나와 있다). 코니 윌리스의 소설도 그 중 하나. 그만큼 <보트 위의 세 남자>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는 뜻일 것이고. 다만 그 유머가 현대의 동아시아를 살아가는 '지금 여기'의 독자들에게는 잘 먹히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유머는 슬픔이나 질투나 분노 같은 감정과는 달라서 그것을 공유하는 데는 정녕 많은 조건이 필요하니까. 우리가 몬티 파이튼 쇼나 윌로 씨의 몸짓 대신 컬투쇼나 한심좌에 더 끌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니면 그저 우리가 웃음에 좀 인색하거나, 더 말초적이고 빠른 웃음에 익숙해진 건지도.

노를 저어 강을 유람하는 여행이 빅토리아 시대에만 가능했던 건 아니다. 지금도 팬들은 소설 속의 인물들이 갔던 길을 따라 배를 타고 여행하는 '성지순례'를 한다. 이들이 출발한 런던에서 도착지인 옥스포드까지의 거리는 60마일. 기차로는 한 시간이 걸린다. 배를 타고 여행하다가도 싫증이 나면 당장 여행을 포기하고 기차를 잡아타고 런던으로 돌아올 수 있을 정도의 거리다. (여행 마지막에 이들은 바로 그런 선택을 한다.) 그 길을 이들은 2주에 걸쳐 느리게, 노를 젓거나 밧줄로 배를 끌며 천천히 나아간다. 이 소설을 읽는 데 필요한 건 그 정도의 속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그러나 그 속도는 평화롭고 부유했던 빅토리아 시대에나 가능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책을 덮고 뒤늦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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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안쪽
밀로라드 파비치 지음, 김동원 옮김 / 이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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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산 책을 엊그제야 다 읽었다. 살 마음은 진작 들었지만 읽는 마음을 먹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시간을 넘는 인연도 필요했을 테고.


<바람의 안쪽>은 우리나라에 소개 된 파비치의 두 번째 작품이다. 첫 번째는 <카자르사전>이라는 이름으로 나머지 모든 내용은 같고 마지막 문단만 다른 남성판, 여성판의 두 권으로 나왔다가 나중에 열린책들에서 합본으로 나온 <카자르사전>이다. <바람의 안쪽>은 황금가지의 환상문학전집의 한 권으로 나온 적이 있다. 황금가지판은 원전 번역이었나 문장이 읽기 어려웠다. 그 책을 읽고서는 나도 남들처럼 옮긴이를 원망했으나, 지금은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 번역자가 귀한 것을 안타까워 할 따름이다.


이 책은 영어판의 중역이다. 중역은 한 개의 필터 대신 두 개의 필터를 끼고 세계를 조망한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즉 중역본을 읽을 때 우리가 읽는 것은 누구도 완벽하게 생략되지 않은 세 명(혹은 그 이상의) 저자다. 그럼에도 이처럼 원전 번역을 읽기가 어려운 수준이라면 중역을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될 터이다.


이 소설에서 파비치는 17세기의 레안드로스와 20세기의 헤로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그리스 신화에서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에게서 이름을 따온 두 주인공은 각자의 비극적 사랑으로, 그 끝의 뒤바뀐 죽음(즉 레안드로서는 헤로의 방식으로 죽고, 헤로는 레안드로스의 방식으로 죽는다)으로 이어져 있다. 그러나 이 환상적인 우화보다 더 마음을 끄는 것은 그의 독특하고 환상적인 문장이다. 비록 중역의 오염을 의심하더라도 그의 문장이 주는 기쁨은 여전하다.


그의 또다른 대표작인 <차로 그린 풍경>이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중역이라도 감사히 여기며 읽을 테니.




덧) 그러나 17세기 세르비아의 가난한 석공이 빵 이름을 열거하며 ‘턴오버’, ‘팝오버’ 같은 이름을 들먹이는 건 보고 싶지 않다. 비록 원전 번역의 해당 부분이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문장으로 이어져 있었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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