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페라도 - 할인행사
로버트 로드리게스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로드리게즈 감독의 화려함을 좋아한다.

황혼에서 새벽까지의 화려하고 유머러스하고 유쾌하기까지 한(흡혈귀가 등장함에도!) 뒷부분(앞부분은 타란티노의 작품), 패컬티의 공포, 스파이키드의 상상력, 포룸의 연출을 믿고 선택한 그의 데스페라도.

웃고, 즐기자는 영화다.

대체 무슨 말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터프하고, 단순하고, 유쾌하고 섹시한 기타맨과 역시 섹시하고, 도발적이고, 용감하고, 똑똑한 여인.

쉽게 죽어버리며 슬픔을 주기엔 너무 얄팍한 역할의 연기파 조연들.

첫 5분을 완전히 장악해버린 스티브 부세미도 좋았고, 으하하하 떠들다가 비굴하게 죽어나간 쿠엔틴 타란티노도 좋았다.

셀마 헤이엑은 또 한번 나의 눈을 완전히 빼앗아버렸다.

그녀는 정말 섹시해.

기타케이스를 들고(안에는 당연히 폭탄과 총이 가득하다) 실용성은 없으나 겉멋에 잔뜩 든 폼으로 총을 쏴대고, 표창을 휙휙 날려대고, 방탄재로 만들어진 차가 돌아다니고.


까마득한 거리의 건물을 서점주인노릇하던 여자가 폴짝 뛰어넘고, 남자는 뒤돌아서 뛰며 쌍권총까지 쏜다.

모조리 파리목숨처럼 죽어넘어가는데 꼬맹이 하나는 남녀주인공이 살려낸다.

이걸로 만족.

낄낄거리면서 즐겁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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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쉘로우 그레이브 (Shallow Grave, 1994)

감독 : 대니 보일

출연 : 케리 폭스, 크리스토퍼 엑슬레스톤, 이완 맥그리거

 

 

꽤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늦게도 본 영화.

세 주인공의 연기도 매우 좋았으며, 내용이며 연출도 좋았다.

설정은 이제 와서는 좀 뻔한 것이긴 했다.

94년 당시에는(10년 전이네) 설정 자체도 독특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집에 살고 있는 세 명에게 어느날 갑자기 돈다발과 시체가 생긴다.

시체를 처리하고, 돈을 가지기가 중심내용.

당연히 양심과 돈 사이에서의 번뇌가 나오고, 세 친구는 우하하 웃으면서 돈을 세등분을 해버리고 헤어지지도 않는다.(공포물이나 스릴러등에 나오는 자들은 대체 왜 쉽게 일을 해결하지 않느냐고!)

셋중에 그나마 가장 양심적이었던(가장 겁쟁이기도 했고, 가장 심약한 마음의 소유자)데이비드(크리스토퍼 엑클레스톤)의 변화에 따른 친구들의 반응이 스토리를 이어가는 큰 틀이 된다.

그리고 역시 그 돈을 찾는 무리들과, 세 친구를 의심하는(것 같은) 경찰들이 나온다.

'어쩜 이런전개가~!' 라고 할 필요 없게 당연히 상상할 수 있는 상황들을 만들어 가지만, 상상할 수 있는 상황들로 만들어낸 영화는 훌륭했다.

충분히, 관객을 경직시키고, 호기심을 유발하면서도, 눈을 질끈 감고 싶게 만들었다.


다른 영화와 다른 점은 주인공에게 동화되는 과정이 없었다는 것.

"꺄아, 이완(알렉스 역)이 멋져, 난 이완편." 이라는 느낌을 제외하고는 사실 주인공의 눈으로 영화를 느낄 수는 없었다.

세 주인공 모두에게 거의 비슷한 무게를 실은데다가, 주인공들은 모두 처음부터 관객들에게 쉽게 동화될 수 없는 '튀는'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피가 튀기는(그렇게 많이 튀기지는 않으나-_-;) 스릴러 무비치고 유쾌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주인공들의 고난에 동정심이 퐁퐁 솟을법 한데, 오히려 셋이 망가지는 모습에 어떤 통쾌함마저 느껴졌다.

어딘가 코믹한 요소가 있는 스릴러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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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1 - 솔로몬의 날개
에스더 & 제리 힉스 지음, 캐롤라인 가레트 그림, 이미정 옮김 / 이가서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서론은 생략하고. 우리는 상황에 절대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가장 큰 핵심이다. 상황에 지배를 받는 다는 것은 그 어떠한 사건이 일어나도 소위 평정심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굉장히 그럴 듯 했다. 어떠한 사건을 보며 가슴이 아프고, 화가 나는 것은 그 상황에 내가 지배를 받고 있다는 증거이며, 상황에 지배를 받으면서는 자유스러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초연하게 자신의 마음을 행복한 상상으로 기분 좋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억울하게 매를 맞고 있어도, 짓궂은 아이들이 가장 아끼던 새를 죽여버려도 언제나 슬픔에 감정을 맡기지 말고 행복할 수 있는 상상을 하라는.

이기적인 주장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내가 도저히 도울 수 없는 불의가 생겼을 때도 분노하지 않고 뭔가 좋은 생각을 하며 행복해하고, 또는 내가 직접 억울한 일을 당해도 행복해 하란 말인가. 복수도 하지 말라고 하니. 이 이기적인 부분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조건이 붙는다. 내가 행복한 생각을 하게 되었으면 주위사람들에게도 그 행복을 뿌려주라는. 그래서 그들도 그 방법이 옳음을 깨닫게 만들어 주라는.

그러나 글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남이 잘못한 것에 대해 내가 화를 내면 그들이 바뀌느냐고. 뒤집어서 말하자면 내가 행복해서 행복을 사람들에게 뿌려주면 정말 그들이 행복해지고, 또 그들도 스스로 행복을 만들 수 있을까? 그래서 세상사람들이 점차 다들 깨닫고 다들 행복해질까? 그래서 살기 좋은 세상이 될까? 솔로몬은 그렇다고 하지만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 좀 회의적이다. 행복을 뿌려주면 사람들이 변하고, 잘못된 일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은 모두들 무시한다는 것일까? 원래 나쁜 것을 훨씬 빨리 배우는 것이 사람이 아닌가?

또 솔로몬은 아주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언제나 행복하다면 그 행복은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것이 그것이다. 천국의 딜레마와도 일치한다. -천국은 신적인 존재가 항상 행복함을 가능하게 해 준다손 칠 수라도 있지만- 우리는 살면서 많은 좌절을 하고 시련을 겪고 아픔을 느낀다. 그리고 어느 날 기쁜 일이 생기고 일이 잘 풀리고 몸이 가벼워질 때 행복을 느낀다. 아픔이 크고 좌절을 많이 하면 한 만큼 그 다음에 찾아오는 행복이 큰 것이다. 흔히 말하듯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단' 것이다.

언제나 행복하다면, 그것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또 언제나 감사할 일만 찾는다는 것은 상황이나 스스로를 발전시키지 못한다. 무언가 불만이 있고, 잘못된 것에 대한 분노를 하고, 아픔을 이기고 싶을 때 우리는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일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래도 감사할 일을 찾아내고 행복해하는 것은 회피는 아닐까.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난 행복해' 라고 외친다고 진정 행복한 것일까? 스스로에게 그렇게 최면을 걸게 된다면 그것이 진정 행복이고, 또 옳은 것일까? 잘못을 저지르는 자들을 보며 그들의 편에서 대신 변명을 해주고 넘어가면 그것은 비겁함이 아닐까.

비관론자보다 언제나 낙관론자가 좋다. 우리가 흔히 예를 드는 '물이 반이나 남았네.'와 '물이 반밖에 안 남았네.'의 차이는 분명하다. 마인드 컨트롤. 필요하다. 그러나 솔로몬은 오버했다. 사람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제나 행복의 밸브를 열어둘 수 없으며, 자주 쓰러지고, 사람관계에서도 상처를 자주 받는 나약한 존재다. 그러나 그런 나약함이 있고 시련이 있기에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수영장의 바닥을 짚어야 위로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언제나 행복할 수는 없으며 언제나 행복할 수 있는, 언제나 행복한 사람은 바보다. 이래도 행복하고, 저래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을 혐오해보기도 하고, 좋지 않은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사람이 아닐까.

우리는 앉아 있기보다는 자주 쓰러지더라도 일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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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전쟁 낮은산 키큰나무 1
루이 페르고 지음, 클로드 라푸앵트 그림, 정혜용 옮김 / 낮은산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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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루이 페르고. 프랑스 소설. 제목은 단추전쟁. 여러 가지로 생소한 느낌이 드는 책이다. 제목은 동화 같은데 페이지 수는 360여쪽에, 빽빽하게 작은 글자다. 사실 필자는 프랑스 소설을 좋아라 하는 편인데다 제목이나, 표지도 맘에 들어서 얼른 집어들었으나, 이 '단추전쟁'이 과연 한국 땅에서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 있을까 심히 염려가 된다. 아이들을 타깃으로 하기엔 두껍고, 어른들을 타깃으로 하기엔 그들의 수준에 미치지 않는 유치한 제목 아닌가. 게다가 단추전쟁이라 쓰인 빨간 제목 위엔 꼬맹이들이 어설프게 깎은 나무 막대기를 꼬나 쥐고 웃으며 서있는 그림까지 박혀있음이야. 어른들이란 다들 옆구리에 끼고 다닐 책으로 누구에게나 자랑스레 표지를 보여주면 '오옷, 그거 어렵지 않나요? 책 좀 읽으시나봅니다.' 소리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가.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고뇌가 제목부터 팍팍 풍겨 나오면 더욱 좋고.

까놓고 말하자면 단추전쟁은 롱쥬베른느와 벨랑이라는 작은 두 마을의 어린 아이들(대략 8세에서 12세정도)의 전쟁이야기이다. 거창하게 전쟁이라 표현했으나, 당연히 사상자도 없으며, 부상이래 봐야 머리가 좀 깨지고, 엉덩이를 맞아 피가 좀 나는 정도이다. 아니다. 가장 중요한 단추! 그래, 포로가 된 아이는 옷의 단추란 단추는 모두 빼앗겨버린다. 그리하여 훗날 사람들이 이 어린 영웅들의 전쟁을 단추전쟁으로 일컬었으니. 더 이상의 줄거리는 직접 읽어보시고.

주인공들은 엉망진창인 맞춤법과 속어, 비어를 구사한다. 처음 전쟁을 일으킨 계기인 벨랑 아이들의 욕은 '물렁좆' 이었으며, 이 말이 뜻하는 바를 한참 고민하던 롱쥬베른느 아이들의 답장은 벨랑마을의 성당 문에 '벨랑 놈드른 모두 거시기 터리나 글쩌기고 인는 놈드리다!' 라고 쓴 것이었다. 사실 아이들이 주인공인 소설이라고 해서 굳이 아이들이 어려운 단어들을 제멋대로 발음하고, 맞춤법을 틀릴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무언가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좀 더 현실과 가깝게 쓰기 위함도 있었을 테고, 좀 더 유머러스한 표현을 위하여 그랬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아이들이 기존세대의 어른들처럼 위선적이고 체면만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그들은 사물의 본질을 내다보았지 그것을 조금 더 품위 있게 표현하려고 애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자신의 명예가 짓밟히는 것도 참지 못했다. 정녕 아이다움이다. 틀린 맞춤법이라는 기교 한가지로 이렇게 여러 가지 장점들을 끌어낼 수 있다니, 찬탄해 마지않는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전하고 독일에 대한 복수심이 높아지던 제 3공화정이다. 작품에서도 '독일 놈 같은 놈'은 최고의 욕에 속한다. 또 1905년 국가가 교육시스템을 장악하게 된 이후이며 당시 프랑스사회에서는 종교가 삶을 장악하고 있었다. 롱쥬베른느의 주민들은 정치적 입장은 공화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성당의 종소리에 맞추어 삶을 살아간다. 작가는 작품의 곳곳에서 까마귀를 불길한 징조로 나타내고 있는데, 이 까마귀가 가리키는 것이 바로 독재적으로 군림하고 있는 카톨릭이다.

또한 작가는 시몽선생이나, 아이들을 항상 매로만 다스리며 대화를 단절시킨 부모들 역시 강하게 비판하였다. 곳곳에서 아이들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부모가 등장하며, 이는 평범한 일상화로 그려지나 아이들이 배신자를 상대로 보여준 폭력적인 처벌로 하여금 폭력의 도미노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 결과는 부모에게 매를 맞은 아이들은 거짓맹세를 하고 지키지 않으며, 처벌받은 배신자는 어른들에게 사실을 고해바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배신자의 부모에게 손해배상을 해주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아이들에게 더욱 잔인하다가, 손해배상문제가 해결되자 눈에 띄게 너그러워진다. 작품의 마지막 줄 '우리도 어른이 되면, 부모 부모들처럼 그렇게 멍청해질까?' 역시 이런 짐작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리고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책을 고르고 있는 필자를 포함한 어른들 역시 본질을 보지 않고 위선적이지 않은지 생각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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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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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책이니 서론은 생략하겠다.

엘리자베스(이후 리즈)양의 심리묘사는 탁월하였다. 리즈는 무지하고 철없는 그녀의 동생들을 지켜보며 경멸도 하였으나 그들에 비교해 더 지각이 있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도 굉장한 인물이다. 자신을 특히 총애하는 아버지의 단점을 보지 않으려 눈을 감고, 외모만으로 남자를 평가해버리기도 한다. 다시씨를 좋아하게 된 후에도 자신이 받을지 모르는 상처를 미리 두려워하며 그것을 숨기고 다른 여러 가지 이유를 스스로에게 들이대며 단념하겠다는 혼잣말을 해댄다. 자신의 판단이 항상 옳을 거라 생각하고 남의 판단과 어긋나면 그것을 맘속으로나마 경멸하는 그녀이다.

이렇게 단점만 읽어보면 주인공 리즈는 그저평범한 잘난척쟁이 정도로 느껴진다. 그러나 사실 나는-아마도 이 책을 읽은 독자중의 8할도 포함될 거라 믿으며-리즈에게 끌렸으며 그녀가 행복하길 기대하며 책장을 넘겼고, 또 그녀가 싫어하는 상대는 즉각적으로 같이 뒷담할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였다.

그럴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물론 리즈의 단점을 덮어줄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그녀의 인간적인 부분들과, 그녀의 장점과 현명함이었을 것이다. 처음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그녀는 결국 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며-THANKS TO어린 왕자- 자신의 천사 같은 언니 제인을 진심으로 공경할 줄 알았고, 비록 샬롯의 결정을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친구에 대한 진정한 걱정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잘못을 깨닫고 자존심을 세우기 전에 진심을 담아 사과할 수 있는 그녀의 장점 역시 리즈를 매력적이도록 만들어준다.

여기까지는 작가의 의도라고 확신하나, 독자들이 리즈의 단점을 눈감아주는 데에 더욱 호의적인 이유는 또 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사실 주인공의 파워라는 점도 무시하지는 못하겠다. 만약 서술자가 전지적 작가가 아니라 리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단연코 작가의 선택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이 씌어질 당시의 시대에 대한 나의 몰이해에서 비롯한 생각이라는 것도 부인하지 않겠다. 우리나라 고전에서도 작가가 직접 개입하여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자주 있어왔다. 이것은 지금 현대작가들의 작품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일이나,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톨스토이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하다. 오스틴역시 자신의 목소리를 작품 속에서 자주 들려주며, 어느 정도 주인공들을 차별한다. 완벽한 악인으로 그려진 인물은 없었으나-그래서인지 위기감이 별로 없다- 오스틴은 명확히 선을 그어두고 배역들의 자리를 결정하였다. 리즈와 그녀의 사랑 다아시, 제인, 빙리씨, 가드너부부, 베넷씨등은 선 이쪽 편에 있으며, 베넷부인, 콜린즈씨, 위캄씨등은 선 저쪽 편에 서있는 등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다룰 때에도 선의 이쪽인지 저쪽인지를 살펴 묘사하였다. 이것은 소설을 쓰는데 있어서 여러 기법중 한가지를 오스틴이 선택한 것이겠지만 사건과, 인물들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냉정히 바라볼 기회가 적었던 것도 사실이다. 마치 내가 리즈인양 동화되어 읽을 수 있었던 점에서는 좋았으나-사실 리즈의 심리는 2004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나의 심리와도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으니, 여전히 '인간들이란-쯧.' 이라 해야할 일인지 제인 오스틴의 뛰어난 심리묘사와 리즈의 편에 서도록 서술한 부분에 찬양해야 할 일인지 알 수 없으나 역시나 간과할 수 없는 그녀의 장점이다-말이다.

이러니저러니 말은 많았지만 역시 오스틴의 '사실은 별반 특별하거나 긴박하지도 않은' 소재와 배경 속의 이야기는 전혀 지루할 틈을 주지 않으며, 오스틴이 구사하는 심리묘사며 대화며 하는 것 역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든다. 블록버스터급의 악역과, 해리포터같은 상상력과 참신한 소재는 오스틴에게 다 필요 없는 것이었나 보다. 오스틴은 진부한 상황 속에서 정말 매력적인 인물들을 창조해내고, 그들의 성격을 제대로 표현할 줄 알았다. 제인 오스틴은 뛰어난 필력을 지닌 작가였고, 난 당연히 그녀의 다음 작품을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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