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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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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안양천을 건너는데 다리 너머 충충하고 희부연 하늘과 아파트, 그리고 가로등에 층층이 시선이 꽂혔다. 무채색에 가까운 유화 같은 풍경. 우울에 잠긴 듯한 도시. 가다 멈춰서고 가다 돌아서서 멍하니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그런 색채를 띠는 과거를 누구나 하나쯤은, 혹은 그 이상을 마음 속에 품고 있을지 모른다. 황정은의 ‘계속해보겠습니다’를 보면 몇몇 장면에서 그런 풍경이 떠올라 멈칫, 하는 순간이 온다. 이를테면 소라, 나나가 나기 엄마인 순자에게 도시락을 얻어먹는 장면 같은 것.

 

고등학교 때,

 

한동안 점심을 못 먹은 적이 있다. 급식비를 내지 못해서,라는 이유로.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집에 부모가 없었고 돈도 없었으므로 뭘 사먹을 수도, 동생을 챙겨줄 수도 없었던. 점심시간이면 그저 조용히 교실을 나오는 것 외엔 도리가 없었다. 어느날 어찌 알았는지 친구 하나가 매점에 데려가 우유와 빵을 사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의 기억을 집안에서 공유해본 적은 없다. 단 한번도.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유년의 생채기.

 

소설에서,

 

자식들에게 무기력한 모습으로 일관하는 애자의 모습은 한편으로 처연하다. 비참한 사고로 남편을 잃기 전까지 남편에게 ‘전심전력’을 다한 터라 생의 의지가 휘발된 것인지. “언제고 그런 식으로 중단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므로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으로 세계를 채워야 한다고 애자는 말한다. 소라는 그런 애자와 가장 닮아 있다. 기대를 접고, 세계를 회피한다는 점에서.

 

그러므로 애초에 아기는 만들지 않는 게 좋다. 아기를 낳지 않는다면 엄마는 없지. 엄마가 없다면 애자도 없어. 더는 없어. 애자는 없는 게 좋다. 애자는 가엾지. 사랑스러울 정도로 가엾지만, 그래도 없는 게 좋아. 없는 세상이 좋아.

 

나나는 애자의 ‘전심전력’을 경계한다. 냉소로 일관하는 애자와 소라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인지. 아마도 어린 시절 나기가 나나의 뺨을 때리며 "남의 고통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 괴물"이 되지 말라고 가르친 덕분인지도.

 

사랑에 관해서라면 그 정도의 감정이 적당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윽고 괜찮아지는 정도. 헤어지더라도 배신을 당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불시에 사라지더라도 이윽고 괜찮아,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가 좋습니다.

 

나나의 시점으로 귀결되는 소설 말미에 나나는 나지막이 삶을 긍정한다. 인간은 덧없고 하찮지만,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버텨가고 있으니까. 다분히 극적인 끝맺음.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척 포즈를 취할 수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 마지막 문장에 찍힌 마침표에 마침내 도달할 때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가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것은 가슴 한켠의 응어리에 가닿아 묘한 파장을 낳는다. 계속해보겠습니다, 덤덤하게 내뱉는 이 한마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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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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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게 내 삶에 얼마나 밀착되어 있는 것인지,를 곱씹어 보게 된 건 아마 대학 시절 ‘상실의 시대’를 접한 이후였을 것이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저쪽에 있는 존재 따위가 아니었다.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 사실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상실의 시대 中)

 

직설적인 잠언식 문장이어서 지금 보면 매력은 덜하지만 당시에는 꽤 울림이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죽음에 대한 탐미적 시선이 돋보이는 소설이나 영화에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적어도 ‘환상의 빛’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까.

 

남편과 사별한 뒤 새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여자가 있다. 남편은 왜 죽었을까. 누군가의 죽음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는 일은 남겨진 자의 몫이 된다. 그러나 세상사가 그러하듯 그 이유는 모호하다. “사람은 혼이 빠져나가면 죽고 싶어지는 법”이라는 새 남편 다미오의 말에서 희미한 심정적 단서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 희미한 단서만큼이나 모호한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는 것은 빛이다. 어디엔가 가닿은 빛,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이들. 그 빛은 한순간 보는 이의 넋을 잃게 하면서 어떤 꿈을 꾸게 한다. 그 빛은 마음의 한켠에 자리한 헛된 희망이나 안도감, 죽음에 대한 충동 같은 것들을 비추기도 한다.

 

눈에는 비치지 않지만 때때로 저렇게 해면에서 빛이 날뛰는 때가 있는데, 잔물결의 일부분만을 일제히 비추는 거랍니다. 그래서 멀리 있는 사람의 마음을 속인다,고 아버님이 가르쳐주었습니다. 대체 사람의 어떤 마음을 속이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그러고 보면 저도 어쩌다 그 빛나는 잔물결을 넋을 잃고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풍어 같은 걸 해본 적이 없는 이 근방 어부 나부랭이들의 흐리멍덩한 눈에 한순간 꿈을 꾸게 하는 불온한 잔물결이라고, 아버님은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다미도 가구도 빈틈없이 제자리로 돌려놓았을 텐데도, 어쩐지 모습을 바꾼 낯선 방에 드러누워 있는 것 같았습니다. 수명이 다해 미세하게 깜박거리고 있는 형광등을 보면서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보는 듯한 안도감에 휩싸였습니다. 안도감이란 아마 그때의 그런 마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보세요, 또 빛나기 시작합니다. 바람과 해님이 섞이며 갑자기 저렇게 바다 한쪽이 빛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쩌면 당신도 그날 밤 레일 저편에서 저것과 비슷한 빛을 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시선이 가슴 저리게 시리다. 그 멍한 시선이 이 소설집 전반의 정서를 이룬다. 그 시선이 ‘봄도 한창이어서 짙은 초록으로 변한, 거칠어지기도 하고 잔잔해지기도 하는 소소기 바다’, ‘꽃비처럼 흩날리는 밤벚꽃’, ‘늦가을 저물녘에 흩날리는 낙엽’, ‘아타미 바다 한가운데에 모여 있는 아침 해의 조각’ 같은 것들에 가닿을 때면 내 마음도 어쩔 수 없이 흔들린다. 그 잔상이 오래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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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가의 오후 열린책들 세계문학 122
페터 한트케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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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줄곧 한 작가의 시선을 따라간다. 별다른 사건 없이. '작가(소설에서 주인공을 특정하는 말)'는 거리를 걷고 주변사물과 풍경, 사람들을 바라본다. 시선이 닿는 대상은 상념을 낳고 사유는 확장된다. 이런 구성에서 줄거리가 있을 까닭이 없다. '작가'는 무엇을 관찰하고, 관찰한 것에서 무엇을 끄집어낼까. 페터 한트케는 '작가'의 시선으로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작가의 일상과 내면을 묘사한다. 그걸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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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거짓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시공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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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격랑이 몰아친 뒤 조각난 사랑의 잔해. 다름 아닌 우리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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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 Stories (Paperback) - Stories
레이몬드 카버 지음 / Vintage Books / 198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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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에 관심이 없던 내가 이 책을 구입하게 된 건 순전히 카버 때문이었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제발 조용히 좀 해요'를 읽고 나서 카버의 매력에 빠진 후 '대성당' 번역본이 나오기만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던지.

'대성당'을 구입하여 책 표지를 넘길 때의 그 황홀한 설렘이란. 다 읽고 나서는 허한 기분에 '이젠 무얼 읽나..' 하는 망연자실함마저 들었다.

다음 번역본이 나오기까지 카버를 놓고 싶지 않아서 원서를 읽어보기로 했다. 

우선은 그의 단편집 중 분량이 좀 적은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 를 읽어보기로 하고 알라딘에서 책을 구입했다.

문장들 사이에서 오는 긴장감은 원문에서 훨씬 더 잘 느껴지는 것 같았다. 쉬운 어휘를 사용하여 만든 그의 문장들은 간결하지만 울림이 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간결함. 이 매력을 어떻게 형용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카버에게 중독되면 텍스트를 보는 눈이 달라진다. 어떤 글이든 눈에 거슬리는 것투성이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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