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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싱턴의 유령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1월
평점 :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집 『렉싱턴의 유령』을 읽었다. 최근에 읽은 하루키의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의 연장선에서 택하게 된 책인데, 앞부분을 흥미롭게 읽다가 어느 순간 흥미를 잃어 한동안 방치해 두는 바람에 시간이 좀 걸렸다.
표제작인 「렉싱턴의 유령」은 뭐랄까, 전통적으로 유령이 등장하는 고딕소설의 형식을 따르는 듯하지만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소설은 아니다.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다. 화자인 '나'는 케이시라는 건축가 친구에게 일주일간 렉싱턴에 있는 자신의 집을 봐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곳에서 머무는데 첫날 밤 1층 거실에서 파티를 벌이는 유령의 존재를 느낀다. 나는 그 일이 있은 후 약 반 년 뒤에 케이시를 만나 기묘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흥미로운 소재로 술술 읽히긴 하나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헐겁고 느슨한 감이 있다. 화자가 케이시의 집에 머무는 동안 일어나는 에피소드와 후반부에 케이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유기적으로 맞물리지 않고 따로 논다는 느낌이었다. 피아노 조율사 제레미는 소모적으로 쓰였고 나와 케이시가 알고 지내게 된 배경이나 케이시가 재즈 레코드 컬렉션을 갖추게 된 계기 등도 이야기 전개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한 가지 궁금한 것. 케이시가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 죽음과 삶의 희미한 경계에 대해 말할 때 언급되는 '깊은 잠'의 이미지와 정서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빅슬립』 결말 부분과 오버랩되던데 거기서 모티프를 얻은 것일까.
「렉싱턴의 유령」을 비롯해 소설집 작품 전반에 상실과 공허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다. 그게 누군가에게는 매력적으로 읽힐 수 있다. 이 소설집에도 하루키 자신만의 기호가 인장처럼 곳곳에 새겨져 있는데 때로는 그게 불필요해 보이거나 작위적으로 보여 위화감이 들기도 한다. 신비화되거나 과한 자기연민에 사로잡힌 인물들을 보는 것도 이제는 식상하지 않나 싶었다. 최근 작품들은 본 게 없어서 어떤지 모르지만 과연 또 다른 작품들을 보게 될까.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