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턴 록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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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칠한 잔교의 은색 페이트가 번쩍거리고 크림색 집들은 연한 빅토리아풍 수채화처럼 펼쳐지는 런던 인근의 해변 도시 브라이턴. 휴일이면 놀이시설과 경마장을 찾는 인파로 북적이는 관광 명소다. 초여름의 햇살, 시원한 바닷바람, 휴가를 즐기는 인파 속에 유난히 초조해 보이는 남자가 있다.

헤일은 <메신저>라는 신문사에서 일을 한다. 그가 하는 일은 정해진 경로를 따라가며 은밀하게 카드를 숨기고, 사람들은 카드를 찾아 상금을 받는다. 신문에는 그가 언제 어디에 나타나는지 광고가 실린다. 카드를 찾아 상을 요구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차례로 해변 도시를 돌아다니는 게 헤일의 일이다.

오늘 브라이턴에서 일을 끝내면 내일은 다음 도시로 떠나야 한다.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그에게 한 소년이 다가왔다. 그를 '프레드'라 부르는 소년은 그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다. 그의 피부는 희고 매끄러웠으며 아직 솜털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눈은 노인의 눈처럼 매정했다. 헤일은 그가 자신을 죽일 것이란 걸 깨달았다.

혼자 있으면 안 된다. 그는 자신과 같이 있어줄 사람을 찾는다. 그의 부탁을 들어준 것은 아이다였다. 아이다는 무언가에 겁먹고 있는 헤일이 신경 쓰였다. 손을 씻으려고 호텔 화장실을 다녀온 시간은 잠깐이었다. 씻지 않아도 된다고 그녀를 붙잡는 헤일에게 호텔 앞에서 기다려 달라 하고 들어갔다 온 그 잠깐의 시간 동안 그가 사라졌다. 그리고 호텔에서 떨어진 곳에서 헤일은 죽은 채 발견된다.

그를 죽인 것은 핑키였다. 조직의 우두머리인 카이트가 살해당하자 그를 따르던 17살의 소년 핑키가 조직을 맡게 된다. 그리고 카이트의 살해를 지시한 콜레오니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정보원인 신문 기자 찰스 헤일을 죽였다. 헤일의 사인은 부검 결과 자연사로 판명되고 그의 범죄는 그렇게 덮이는 줄 알았다.

아이다는 뭔가 이상했다. 자신에게 같이 있어달라 사정하던 헤일이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죽었다는 게 이해가 안 갔다. 외롭게 죽어간 헤일을 위해, 잠시지만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줬던 그를 위해 사건을 추적해보기로 한다.

실수는 또 있었다. 헤일이 예정대로 식당을 다녀간 것처럼 꾸미려 했는데 테이블을 담당하던 웨이트리스 로즈가 식당에 다녀간 건 헤일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핑키는 어떻게든 로즈의 입을 막아야 했다. 그래서 핑키는 로즈와 사랑에 빠진 척한다.

'천국 대신 지옥을 선택한 살인자와 세속의 정의를 믿는 아마추어 탐정. 살인자와 사랑에 빠진 목격자.' 매력적인 주인공 설정에 겉으로는 아름다운 바닷가 휴양지지만 그 뒤로는 경마장을 중심으로 한 범죄의 소굴이었다는 배경까지 더해져 <브라이턴 록>은 스릴 넘치는 한편의 서스펜스 누아르일 거라 생각했다. 악의 본성을 탐구한 걸작 미스터리라는 얘기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살인의 문>을 떠올리며 책을 펼쳤다.

편하게 누워 책을 펼쳤던 나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브라이턴 록>은 그렇게 만만하게 읽을 책이 아니었다. 책의 줄거리는 간단한다. 조직의 복수를 위해 살인을 한 어린 보스와 살인자를 사랑하게 된 목격자 소녀, 이를 추적하는 30대의 쾌활한 아마추어 탐정의 이야기다.

 

"사람은 변해요." 로즈가 말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사람은 변하지 않아. 나를 봐. 이제껏 조금도 변한 적이 없잖아? 그건 브라이턴 록 막대 사탕 같은 거야. 끝까지 깨물어 먹어도 여전히 브라이턴이라는 글자가 보이는 막대 사탕 말이야. 그게 인간의 본성인 거야." 그가 로즈의 얼굴에 대고 구슬픈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숨에서 달콤한 와인 냄새가 났다.

"고해성사... 회개." 로즈가 나직이 말했다.

"그건 종교적인 것일 뿐이야." 여자가 말했다. "내 말 들어. 우리가 상대해야 할 것은 이 세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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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절대악 핑키. <브라이턴 록>'악의 본성'을 탐구한 걸작이라 높게 평가받는다. 그런데 나는 책을 읽으면서 핑키가 정말 절대악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1930년대에는 이 정도면 절대악이었을까.

소설을 읽으며 핑키가 안타까웠다.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나 부모의 보살핌을 기대할 수조차 없었다. 학교라고 편한 곳은 아니었다. 그에게 우두머리 카이트는 그나마 핑키가 친절을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조직 간의 다툼으로 살해되었다.

핑키는 양아버지 같았던 카이트의 복수도 하고 싶고 조직이 와해되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냉정한 사람으로 보이려 하지만 아무리 어른인 척, 강한 척해도 아이는 아이처럼 느껴졌다.

 

얼마 전에는 시간이 짧으면 회개 말고도 생각할 것들이 많아서 회개할 여유가 없다는 걸 깨달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상관없이..... 난 평화를 누릴 만한 복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 걸 믿지도 않아. 천국은 말일 뿐이지. 하지만 지옥은 믿을 수 있는 것이야.

나의 세포는 시멘트로 된 학교 운동자, 난롯불이 거진 세인트판크라스역 대합실에서 죽어 가던 남자, 프랭크의 집 내 방 침대, 그리고 내 부모의 침대로 이루어져 있지. 그의 마음속에서 격렬한 분노가 일었다. 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깐이라도 천국을 볼 기회를 갖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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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악의 탄생은 이런 것이 아닐까. 태어날 때부터 악인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신뿐이 사람이 한 번 빠진 구멍에 걷잡을 수 없이 계속 빠져드는 것. 내가 있는 곳이 지옥이니 난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체념 속에 갇히는 것. 저자의 의도와는 다른 악의 본성에 대해 생각해 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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