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사체로 죽더라도 선탠하고 싶어
고철구 지음 / 혜화동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TV 속 로데오 챔피언 케빈 하워드는 자기 입이 닿는 신체 부위를 천천히 먹어 치웠다. 먹는 속도가 느려 고양이 몸단장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좀 있다 보면 손목이 없고, 한참 있다 보면 팔뚝이 사라졌다. 3일째 되는 날, 전기 공급이 끊겨 더 이상 TV를 볼 수 없었다.

미국 오클라호마주 남쪽 끝에 붙은 작은 마을 델머에서 작은 식료품 가게를 하는 티모시는 창문과 출입문에 판자를 덧대며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참혹하지만 현실 같지 않았다.

삼억 미국인이 좀비가 돼 버렸다. 미국인들은 좀비를 피해 캐나다로 멕시코로 떠났다. 델마 사람들도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티모시는 떠나지 않았다. 빈 마을에는 소 울음소리만 가끔 들리고, 지평선 너머로 주유소가 터지는지 폭발음 뒤에 불꽃이 올랐다.

지평선이 부옇게 뜬 밤, 홀로 술을 마시던 티모시는 벽장 안에서 총을 꺼냈다. 총구를 입에 무는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뿌..빠빰..뿌..뿌..빰..’

오래전 그의 곁을 떠났던 아내 새라가 좀비가 되어 돌아왔다.

<변사체로 죽더라고 선탠하고 싶어>는 좀비가 나타난 세상에서 미국의 티모시, 탈북자 끗년과 일문 일금 형제의 이야기가 단편소설처럼 묶여 있다. 티모시와 아내 새라의 이야기, 탈북자 로사와 그녀의 할미의 할미의 할미의 할미...인 종가의 이야기, 그리고 닮은 곳 하나 없는 형제 일문과 일금의 이야기다. 공통점이라곤 없어 보이는 이들은 ‘좀비’로 인해 하나로 모인다.

처음 이 책의 표지와 제목을 봤을 때는 <킹덤>이나 <워킹데드><나는 전설이다>처럼 좀비와 처절하게 싸우는 인간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좀비는 등장하나 인간을 공격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서로 죽이는 이야기도 아니다.

여느 좀비 소설을 생각하고 책을 펼쳤는데 책의 프롤로그에서 밀수꾼 김팔봉이 3박 4일을 끙끙거리다 산파 끗년 할멈의 도움으로 8미터짜리 긴 똥을 싸고, 할멈은 이 똥을 동이라 속여 팔아 그 돈으로 막내손녀 끗년을 탈북 시켰다는 이야기에 당황했다. 이 소설 뭐지.

미국이 좀비로 인해 지도에서 사라지고, 좀비의 체액이 만병통치약이라 소문나고, 좀비들이 쿵짝짝 쿵짝짝 왈츠를 춘다. 티모시는 좀비가 출몰한 세상이 참혹하지만 현실 같지 않았다 하는데,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은 황당무계한 상상이지만 현실 같다.

작가는 다큐멘터리 만드는 일을 오래 했는데, 논픽션이 힘들어 픽션의 세계로 도망쳐 퇴근 후 소설을 조금씩 썼다고 한다. 쓰다가 깨달았단다. 소설 속 세상도 논픽션이었다고, 세상이 논픽션인데 소설이라고 픽션일 리 없어고.

이 소설은 좀비처럼 살아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고, 죽어도 죽은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미국 시골 마을에 사는 사람이든, 옛날 옛날 조선시대에 사는 사람이든, 목숨 걸고 국경을 넘은 탈북자든, 우애 좋은 형제이든 그들에게 놓인 삶을 가볍지 않다. 하지만 소설은 무거운 듯 무겁지 않다. 풍자와 해학 넘치는 저자의 입담이 깔깔대고 훌쩍거리며 비극과 희극을, 현실과 상상을 오가게 한다.

“미국은 지도에서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그럭저럭 먹고, 그럭저럭 입고, 그럭저럭 자며, 그럭저럭 행복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럭저럭 살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