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집이 마음에 들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집주인 때문에 호시탐탐 눈독들이던 앞집 단독주택에 이사가서 지금 집주인에게 빅엿을 날리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집주인을 만나기 전까진 머리 속에선 내내 너희 집 안사고 그 가격으로 앞집 전세로 갈꺼다 하면서 '교양없고 몰상식하게' 계약서를 갈기갈기 찢어 집주인 면전에 확 뿌리며 썩소를 날리는 상상을 하거나, 집주인 집에 찾아가 내가 확 불질러 버릴테니 영감에게 맛있는 사식을 넣어달라고 하거나, 그래도 분이 안풀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에 가장 잔인하게 복수할 수 있는 온갖 방법들을 상상하며 제 풀에 지쳐 새벽에 잠들었는데...

오늘 낮에 엄마와 영감은 부동산에서 재계약으로 가닥을 잡았단다.

울 엄마는 바로 그 집 이사갈 가격이면 차라리 지금 집을 사는 가격이고, 아무리 가까워도 한번 이사에 몇백은 깨지고, 단독은 열효율이 안좋아 난방비가 많이 나온다 등등 지금 집에 사는 게 제일 낫다고 하며

엄마 왈, 집주인을 위해 지금 이 집에서 살아주는 게 아니라 현재 전세 물량도 없을 뿐더러 지금 나오는 집들도 지금 집보다 낫다는 보장이 없기에 나를 위해 이기적으로 생각해도 재연장이 최선이라는 엄마의 말씀..

이거 이거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인데... 푸줏간 주인 대신 집주인으로만 바꼈을 뿐.. 소위 사회적경제를 지원하는 내가 국부론에서 묘한 위안을 얻게 되는 이 아이러니란... 

세월호 사건을 겪으며 마음 둘 곳이 없어 거의 매일매일 퇴근하고 심어댔던 씨앗들은 지난 밤 빗방울로 싹이 많이 올라왔고, 상추와 깻잎은 한번 솎아 먹었는데도 무성하게 잎이 다시 올라온다. 

오늘 저녁 내가 끓인 된장국과 생협에서 사온 땅두릎은 눈물날 것만큼 맛있었고, 영감은 집주인을 만난 후 퇴근해서 여전히 기분 나빠하고 있을 나를 위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딸기와 꼬깔콘을 사다놨다.

친구랑은 전화통화로 우리끼리 세입자의 서러움을 토로하는 장을 마련하자는 둥, 나중에 땅콩주택 지어 같이 살자는 둥 온갖 수다를 쏟아내고 나니

집주인 집에 가서 불지르고 싶은 마음은 차일피일 미룰 수 있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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