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사신 - 20세기의 악몽과 온몸으로 싸운 화가들
서경식 지음, 김석희 옮김 / 창비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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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책의 여운으로 인해 꼭 안아주었던 책들이 있다.

에밀 아자르(로맹가리)'자기 앞의 생'이 그러했고, 이번에 읽은 서경식의 '청춘의 사신'이 그러했다.

 

청춘의 사신은 '20세기의 악몽과 온몸으로 싸운 화가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20세기가 세계대전, 대량학살, 난민의 시대라는 어두운 그림자 속에 얼마나 광기에 사로잡혀 있고 억측이 심했는지, 그 가운데 서경식의 아픈 가족사도 20세기 희생자의 모습이기도 했다.

 

1971년 박정희 군사정권 때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서승, 서준식 두 형들은 17년 동안 투옥되었고, 그 사이 부모님들은 절망한 채 세상을 떠나셨다. 그 때가 그가 대학3학년 때 일이었다.

 

지하실에 처넣어진 기분을 느끼며 절망 속에 살아가던 그에게 지하실에 뚫린 작은 창이 되어준 존재가 그림들이었고, 미술 순례를 통해 그는 스스로를 살리려 발악했고 '청춘의 사신'에서 다룬 화가들은 대부분 20세기의 악몽과 온몸으로 사투를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이 책을 읽을 당시, 2014416일 진도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다. 아무래도 이 사건을 전국민이 겪으면서 분노하고 절망하고, 광기를 느꼈는데 무릇 20세기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세계대전 중의 상황들과 흡사하여 한편으론 공포감을 느끼기도 했다.

 

서경식이 20세기 화가들의 작품 속의 자신의 역사와 아픔을 투영해 그림을 재해석한 글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힘없이 죽어간 화가들의 삶의 이야기를 읽고 이 마음이 쉬 사라질까 책에서 나온 구절들을 남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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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의 사람조르주 루오 편에서

 

" 사악한 시대에 사악함을 숨쉬면서 살아가는 분별없는 인간들의 어리석은 상식과 논리의 한복판에 묻혀 있는 고독, 그런 상식이나 논리와 한치도 타협하지 않고 감연히 맞서는 초연함, 그리고 그 때문에 그를 조롱하고 박해하려 드는 인간들을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려는 그 정신의 정적(靜寂) 같은 것... 아마 이런 것이 루오의 그림 속에서 예수가 갖추고 있는 그 고고함의 내용일 것이다.(...) '그런 고독에 계속 시달리면 언젠가는 거기에 짓눌려 짜부라지지 않을까.(서준식 옥중편지)" (p42)

 

"예술을 칭찬하는 게 아니라면 나에 대해 말하지 말아달라. 나를 혁명이나 반항의 횃불처럼 그렇게 중요시하지 말아달라. 내가 한 일은 하찮으니까. 그것은 밤의 절규, 낙오자의 오열, 목멘 웃음이다. 세상에서는 날마다 나보다 가치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일 때문에 수없이 죽어가고 있다(조르주 루오, 인간과 작품머리말)" (p46)

 

역사의 천사파울 클레 편에서

 

파울 클레 편을 읽다보면 철학자 발터 벤야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독일에서 나찌가 대두하여 시시각각 바이마르공화국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을 때, 유대인, 좌익, 지식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고 그 세가지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던 벤야민은 빠리로 망명했고, 당시 의사이고 공산주의자였던 벤야민의 동생은 나중에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

 

1939년 가을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얼마 후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해 남프랑스 비점령지역으로 피신한 벤야민은 삐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영토로 탈출하여 미국행 배를 탈 계획이었으나 스페인 국경 경찰이 입국거부 통보를 하여 그날 벤야민은 미리 준비해둔 모르핀을 먹고 자살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망명자 W B의 자살에 부쳐라는 시를 썼다.

 

나는 듣는다, 당신은 자신에게 손을 댔다

살육자의 선수를 쳐서.

추방당한 지 8, 적의 번영을 본 뒤

넘기 어려운 국경의 변두리로 쫓겨나

듣자 하니 당신은 넘을 수 있는 경계를 넘었다.

(...)

이렇게 미래는 어둡고, 선의 힘은

약하다. 이 모든 것을 당신은 보았다

당신이 괴로워할 수 있는 육체를 파괴했을 때

(p103)

 

항의운동의 성화벤 샨 편에서

 

검사는 피고들의 병역기피 경력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이 나라를 사랑하고 있느냐” “병역기피는 비겁하다고 생각지 않느냐따위의 질문을 되풀이했다. 싸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난 이 나라에 와서 열심히 일했다. 무려 13년 동안이나 일했지만, 생각한 것처럼 가족을 편하게 해줄 수 없다. 은행에 저축도 할 수 없다. 아이를 학교에 보낼 수도 없다. 나는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 전쟁이란 무엇인가. 전쟁은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한테 서로를 죽일 권리가 있는가. 나는 아일랜드인을 위해 일했고, 독일인 친구와도 함께 일했고, 프랑스인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과도 일했다. 나는 아내를 좋아하듯 그들도 좋아한다. 왜 내가 그들을 죽이러 가야 하는가. 나는 전쟁을 믿지 않는다.”(p131)

 

 

나찌의 신경을 건드리다오토 딕스 편에서

 

결핍이나 손상이나 고통을 나만큼 많이 본 사람은 또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딕스는 인간의 소름끼치는 건망증을 때려부수기 위해이래도 잊겠느냐는 듯이 전쟁터나 상이군인의 비참함을 끔찍하게 표현한 작품을 많이 그렸다. 그 작품들은 조국을 위한 죽음이라는 숭고한 관념에 어긋나고 국방의 결의를 해친다는 이유로 나찌를 비롯한 극우세력의 눈엣가시가 되었다.(p143)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고요함파블로 피카소 편에서

 

고통은 일정한 한도를 넘으면 표현할 수 없다. 어떤 표정의 일그러짐도, 어떤 아비규환도, 어떤 호소도, 어떤 눈물도, 어떤 미친 듯한 웃음도 그 고통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인간의 모든 능력에는 한계가 있는데 고통의 능력만은 한계를 모르는 듯하다. (...) 이런 고통의 불가능한 영역, 즉 감각이나 감정으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에서 펼쳐져 있는 고통, 그것이 바로 게르니까의 고요함이다.”(반체제의 예술) (p.165)

 

헌금함후지따 쯔구하루 편에서

 

198917일 쇼오와 천황이 사망함에 따라, 근대 일본의 침략책임이라는 문제에 일본인 스스로 매듭을 짓는 사상적 작업은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때 일본의 거의 모든 매스컴은 이구동성으로, 전쟁책임의 범위에서 아시아 침략을 제외하고 영국과 미국에 대한 책임만으로 축소하면서, 그것조차 일부 광신적인 군부에 책임을 떠넘기는 논조를 펼쳤다. 천황의 침략 책임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모두 일본 밖에서 나온 목소리인 것처럼 보도되었다. 서로 똘똘 뭉쳐서 이 문제를 애매한 상태로 남겨두려 하는 일본 사회의 강고한 국민적 공모관계가 꼴사납게 드러난 것처럼 여겨졌다. (p201)

 

나도 원칙적으로는 전쟁화를 전면 공개하는 데 찬성한다. 다만 그것은 정치에 의해 봉인되어 있는 명작을 해금하라고 외치기 위해서가 아니다. “순전히 예술적 관점에서보았을 때에도 일본 전쟁화에는 예술적 가치가 모자라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이제부터라도 화가 오따꾸들의 전쟁책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책임을 회피하는 국민적 공모관계가 점점 공고해지고, “우리나라 역사를 자랑하라는 탁한 목소리까지 줄기차게 들려오게 된 현재의 일본 사회에서 전쟁화가 과연 내가 말하는 의미에서 정당하게평가될지, 자신은 없다. 어떠면 일본인들은 또다시 전쟁화 앞에 헌금함이라도 놓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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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천황이 죽었을 때 일본의 매스컴이 보였던 행태와 작금의 한국의 매스컴이 다를 게 무엇이며, 재난구호라는 명분으로 가해자와 관계된 사이비민간단체나 정부방침에 따라 움직이는 언론의 모금운동과 전쟁화 앞에 헌금함이 다를 게 무엇이며,

 

조국을 위한 죽음이라는 숭고한 관념에 어긋나고 국방의 결의를 해친다는 이유로 예술가들을 박해했던 나찌와 국기에 대한 경례를 안하면 다 빨갱이로 몰아가고, 일본의 극우세력의 움직임에 독도는 우리 땅으로 국민적 공모관계를 몰아가며 모든 책임을 회피하는 지금의 한국과 나찌와 전쟁 후 반성없는 일본과 다를 게 무엇이며,

 

세계대전의 기운이 흐르던 당시, 미래는 어둡고 선의 힘은 약하고, 그래서 절박함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벤야민과 세상에서는 날마다 나보다 가치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일 때문에 수없이 죽어가고 있는(조르주 루오)’ 2014년 지금과 사악한 시대에 사악함을 숨 쉬면서 살아가는 분별없는 인간들의 어리석은 상식과 논리의 한복판에 묻혀 있는 고독했던 20세기와 지금 21세기는 무엇이 달라졌나?

 

딕스가 얘기하는 인간의 소름끼치는 건망증을 때려 부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책을 덮으며 나를 괴롭히는 질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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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복지국가를 만드는 사람들
    from 경계에서 2015-06-09 14:52 
    J에게 물었다. 당신은 독재자가 된다면 무엇을 하고 싶어?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휘둘리지 않는 법을 J는 이미 터득했다. "의자왕처럼 삼천궁녀를 거느리고 싶어."날 허탈하게 만들어 대화가 심각해지는 것을 피하는 J만의 방법이다.그거 말고 하고 싶은 게 있을거 아냐? 바꾸고 싶은 게 있다든지...그의 생각이 궁금했다.J는 계속 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무심히 한마디 내뱉었다."실패하더라도 다시 쉽게 일어설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우린 잠시 침묵이 흘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