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신학이란 무엇인가 - 자유주의 신학의 재구성에서 포스트모던 해체까지
로저 E. 올슨 지음, 김의식 옮김 / IVP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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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올슨, <현대 신학이란 무엇인가>

“교리와 신학은 계시와 성경에 입각하여 자신을 끊임없이 비판해야 한다. 교리와 신학은 항상 상대적이고, 유한하며, 부분적이다.”
- 후스토 곤잘레스

“그러므로 교의의 내용과 진리는 교회의 합의에 근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서의 실제 내용에 대한 인식이 그 합의를 불러일으킨다. … 하지만 그 합의는 항상 계속해서 갱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서의 실제 내용의 특성 및 진리성과 관련된 성서 해석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수천 년 전 고대 근동에서 시작된 한 종교가 수많은 역사적 과정을 거쳐 20세기 한국에 도달하게 됐습니다. 바로 개신교입니다. 개신교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의 종교운동은 유럽으로 확산하고, 가톨릭·정교회 등으로 발전하고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로 이어졌고, 유럽을 통해 미국에서 형성된 개신교가 한국에 전해졌습니다. 보통 우리는 교리를 배울 때 이것이 성서와 사회적 맥락 속에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라고 생각하지 못하지만, 탁월한 교회사학자 후스토 곤잘레스나 20세기의 신학자 판넨베르크가 지적하듯, 하늘에서 떨어진 것만 같은 교리 역시 끊임없이 변화해왔습니다. 현대의 도래는 인간의 삶에 유례없는 변화를 초래했고, 기독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책, <현대 신학이란 무엇인가>는 현대화가 초래한 급격한 사회적 변동 속에서 기독교와 기독교 신학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근대 속에서의 현대신학의 여정(원제: The Journey of Modern Theology)을 그려내는 책입니다. 책의 저자는 신학자이자, 탁월한 ‘이야기꾼’이라고 할 수 있는 로저 올슨입니다. 로저 올슨은 이미 한국에 친숙한 저자입니다. 그는 복음주의 전통에 있는 신학자로, 이미 <20세기 신학>, <신학 논쟁>, <복음주의 신학사 개관>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소개되었습니다. 그는 정확하면서도 쉬운 언어로 신학을 풀어내는 이야기꾼인데, 그런 장점은 이 책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만큼 책은 쉽게 읽히면서도 많은 정보량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이야기할 때는 로저 올슨이 작고한 스탠리 그렌츠와 쓴 <20세기 신학>을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올슨이 공저한 <20세기 신학>은 내재와 초월이라는 고전적인 신학적 범주를 통해 20세기 신학을 조망했습니다. 그 책의 개정을 고려해서 쓴 이번 책은 내재와 초월이 아닌, 현대성에 대한 반응을 중심으로 신학을 서술합니다. 계몽주의의 토대 위에 합리주의, 회의주의, 과학주의, 세속주의, 역사주의, 낙관주의, 인간중심주의 등으로 나타난 현대성의 결과는 전통사회 위에 형성된 “전통적 기독교”를 서서히 침식해가는 산(酸, acid)이 되었습니다. 올슨은 현대성을 수용하든, 거부하든, 혹은 중재하든 이 거부할 수 없는 변화에 반응하는 일군의 움직임을 현대 신학으로 정의하고 논의를 이끌어갑니다.

올슨은 현대성을 출현부터 이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난 19세기 신학의 변화를 상세하게 서술합니다. 보통 이런 내용은 쉽게 읽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올슨은 비교적 쉬운 언어로 이 변화를 읽어냅니다. 현대성이 전통적 기독교에 도전하고, 이로 인해 현대성을 통해 기독교를 재구성한 자유주의 신학, 그에 방어한 근본주의 신학, 또 이런 대립을 극복하기 위했던 중재신학을 물론이고, 신정통주의 신학의 등장 그리고 20세기 이후의 등장한 복음주의, 해방신학, 여성신학, 포스트모던 신학 등 여러 신학의 갈래를 포괄적으로 설명합니다. 서술의 범위가 단순히 개신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까지 포함한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이 현대 신학의 여정은 현대성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시작되어, 현대성을 해체하는 신학에 다다르게 되는데 올슨은 이 여정을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이 한국어로 된 현대신학 책 중에 가장 교과서적이며, 서술의 범위, 방식을 고려했을 때 가장 뛰어난 개론서라고 생각합니다. 올슨은 대상 독자를 목회자, 신학생과 성도로 설정합니다. 그만큼 친절합니다. 그러면서도 정보량이 많아서 배울 것이 많습니다. 또 이 책은 함께 읽으면 좋을 책입니다. 아마 제가 교회에 다니던 몇 년 전에 이 책이 나왔다면 독서모임 하면서 여럿이 읽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책의 유익은 신학적 사고를 확장하고 풍성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생각 이상으로 기독교의 전통은 넓고, 깊으며, 동시대적이기도 합니다. 그런 유익과 흥미를 가진 독자께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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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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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를 읽는 한 방법

“최근에서야 나는 소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질적 필요에 굴복하는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술적인 것, 무언가 흥미진진한 것 혹은 감동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나는 아버지의 말과 제스처, 취향, 아버지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던 사건들, 나 역시 함께 나눴던 한 존재의 모든 객관적인 표적을 모아보려 한다.” 20p.

1. 자기분석: 우리에게 소설가로 유명한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작업을 ‘자전적 소설’이 아닌 부르디외적 의미에서의 ‘자기분석auto-analyse’으로 규정한다. 문학사회학자와의 대담에서 에르노는 “부르디외 이전엔 아무도 저에게 그와 같은 파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습니다. 다른 형태의 사회적 고찰에서는 그와 같은 것을 결코 발견할 수 없었어요. 그것은 크나큰 차이를 낳았습니다”라고 회고하며, 70년대 부르디외를 접한 에르노는 아버지의 삶을 써야겠다고 결심한다(오늘의 문예비평 2020 가을호 에르노와 샤르팡티에 대담, 박진수 역).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삶을 사회적 시선으로 분석하는 <남자의 자리>다.

2. 계급횡단자Les Transclasses: 책에서 볼 수 있듯, 에르노는 사회적 상승 이동을 경험한 계급횡단자(혹은 탈주자transfuge)이다. 가난한 집안 출신이지만, 교사의 지위를 획득하고 부르주아 남성과 결혼함으로써 상류층에 편입한다. 아버지의 죽음 뒤, 그의 자리를 반추하는 <남자의 자리>는 상승 이동을 경험한 에르노의 다양한 사회적 시선이 응축되어있다. 에르노가 목격하고 되새긴 아버지의 삶은 농장의 고된 노동에서 자연을 향유하는 것이 불가능한, “대지의 어머니의 장엄함”을 느낄 수 없는 삶이며, 동시에 프랑스 문학 속에 구현된 동시대 부르주아와는 다른 삶이었다. 그 속에서 에르노는 아버지에게 배운 언어를 학교 선생님에 의해 교정 당하고, 또 공부하며 새로운 지식을 배울 때마다 그와 벌어지는 사회적 거리를 느끼게 된다.

3. 사회적 폭력: 에르노는 아버지의 죽음 뒤 사진을 통해 그의 삶을 하나하나 짚어본다. 교양이나 지식이라는 여유와 거리가 멀었던 그의 삶은 무지에 의해 누군가에게 폭력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지배 문화에 의해 상처를 받기도 했다. 제대로 된 철자를 알지 못해 벌어진 해프닝 속에서의 부끄러움, 처음 딸을 데리고 간 도서관에서 겪었던 문화적 상처, 그 미묘하면서도 지성적인 폭력의 경험을 에르노는 이 책 안에 형상화한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눈치, 미묘한 시선, 작은 제스처를 통한 폭력,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적 주눅’까지. 에르노는 “공부는 좋은 환경을 얻고 노동자와 결혼하지 않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었다고 표현하는데, 그렇게 자신의 계급에서 횡단한, 혹은 탈주한 삶을 통해 에르노는 아버지의 삶을 다시 볼 수 있게 되고 그 기록이 바로 <남자의 자리>다.

4. 에르노와 함께: 나는 에르노는 읽는 한 방법으로 부르디외를 이야기했다. 말년의 그는 자신이 만든 자본, 하비투스, 장(field) 개념을 통해 자신의 삶을 분석했다. 그것이 유작 <자기분석을 위한 개요Esquisse pour une auto-analyse>이다. 부르디외는 사회적 삶을 이해하는 다양한 사고의 도구를 제공했고, 에르노 역시 이에 빚진 사람이다. 얼마 전에 출간된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 역시 이런 관점에서 극단까지 밀어붙인 자기분석의 결과이고, 에두아르 루이의 <에디의 끝> 역시 그렇다. 부르디외의 자기분석은 계급적 상황에 한정되었다면, 에르노, 에리봉, 루이를 통해 자기분석은 여성과 퀴어의 경험으로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에르노를 읽는 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에르노는 에르노이기도 하다.

“물론 들었던 단어와 문장에 최대한 가깝게 써야 하는 이런 작업에서 글쓰기의 행복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때때로 볼드체로 강조했던 문장들은 독자들에게 중의적인 의미를 나타내거나, 내가 모든 형식에서 거부했던 향수, 감동, 조롱을 공모하는 쾌락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저 그 단어와 문장이 아버지가 살았던 세계이자 내가 살았던 세계이기도 한 곳의 한계와 색깔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어떤 단어를 다른 단어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다,” 40~41p.

최근에서야 나는 소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질적 필요에 굴복하는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술적인 것, 무언가 흥미진진한 것 혹은 감동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나는 아버지의 말과 제스처, 취향, 아버지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던 사건들, 나 역시 함께 나눴던 한 존재의 모든 객관적인 표적을 모아보려 한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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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체계들 - 일반이론의 개요 한길그레이트북스 169
니클라스 루만 지음, 이철.박여성 옮김, 노진철 감수 / 한길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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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체계들>이 출간된 다음 해, 루만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껏 제가 집필한 모든 것은 이론 생산의 0-시리즈였습니다. 최근에 출간된 사회적 체계들을 제외하고요.

Was ich bisher geschrieben habe, ist alles noch Null-Serie der Theorieproduktion — mit Ausnahme vielleicht des zuletzt erschienenen Buches “Soziale Systeme”(AuW: 142).

 

사상사가 오카모토 유이치로는 사회학의 패러다임이 프랑스의 뒤르켐이냐, 독일의 베버냐에서 프랑스의 부르디외냐, 독일의 루만이냐로 옮겨갔다고 평가한다. 생소하지만, 니클라스 루만은 사회학의 연구 대상으로서 사회적 체계를 제시함으로써 자신만의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구축한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사회학자이다. 빌레펠트 대학에 임용될 때 그는 연구대상: 사회이론, 연구 기간: 30, 비용: 없음이라는 내용의 연구계획서를 제출하는데, 그는 평생 15,000쪽에 달하는 70권 이상의 저서와 450편 이상의 학술 논문을 남겼고, <사회적 체계들>은 이 방대한 학술 세계의 중심 저작이다.

 

루만이 독일에서 일반 문법이 될 정도로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는데도 명성이 부족한 이유는 그가 사회를 비판하는 사회학이 아니라, 사회를 기술하는 사회학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루만은 프랑크푸르트 학파 2세대의 대표주자이자, 근대를 미완의 기획이라고 규정한 계몽의 적자 하버마스와의 논쟁을 통해 이름을 알린다. 하버마스는 진보·이성·계몽·비판의 전통으로 수놓아진 독일의 철학적 전통 위에서 루만의 이론을 사회공학이라고 규정하며 질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하는데, 루만은 이에 담담히 자신의 이론을 설명할 뿐이며, 이는 루만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이론적 명제를 정치적 명제로 치환하지 않고자 했던 그는 학자로서 사회적 체계 개념을 통해 서구 철학·이론 전통의 고색창연한 가정을 가장 급진적으로 전복시킨다. 그는 스펜서-브라운의 형식논리학, 폰 푀르스터의 급진적 구성주의, 마투라나의 인지생물학, 후설의 현상학, 파슨스의 사회적 체계, 사이버네틱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베버의 사회학을 통해 독창적 사회학을 구축한다. ‘체계가 주는 경직적 이미지와는 다르게, 루만은 체계에 이미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도 부르는) 포스트 구조주의에서 중요한 차이에 대한 개념을 68 이전에 선취한다.

 

행정 관료로 활동하던 루만은 지금껏 사회 현실을 설명했던 방식이 잘못되었으며, 구유럽적인 방식이라는 판단과 함께 복잡성이 갈수록 증대하고 있는 현대사회를 설명한 개념 도구로 체계를 창안한다. 체계란 환경(정의되지 않은 모든 것)의 복잡성이 감축되어 창발하는 것으로 환경과의 차이·구별을 통해 나타난다. 루만의 사회적 체계는 인간이 아닌 소통으로 구성되는데, 사회적 체계란 인간 사이에 소통이 발생할 때 그때그때 현재화된다. 체계는 실체가 아닌 작동이며, 소통과 차이의 연속이다. 체계는 자기준거적으로 구별된 자신 고유의 소통을 이어가면서 사회에서의 고유한 기능을 수행해낸다. 루만은 이러한 체계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의 정치·종교··경제·교육체계 등을 일관되게 분석하는데(사진 2), 사회를 분석하는 일반이론으로서 체계를 제안하는 것이 이 책, <사회적 체계들>이며 이 이론은 높은 완결성을 갖는 이 시대의 마지막 일반이론이자, 거대이론이다.

 

이 책은 이미 <사회체계이론>이라는 이름을 번역된 바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지금껏 제대로 인용된 적이 없었다. 그만큼 문제적이었다. 루만에게 사회체계(Gesellschaftssystem, Societal System)와 사회적 체계(Soziales System, Social System)은 다른 개념인데, 이전 번역은 그것을 살리지 못했다. 이제 사회적 체계들(Soziales Systme, Social Systems)’이라는 이름으로 정확히 번역되었다. 루만의 <사회이론 입문>에서는 한 한국인 제자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바로 노진철 선생님이다. 이 책은 2010년대부터 적극적으로 루만 연구를 진행 중이신 이철 선생님과 박여성 선생님의 번역과 더불어 노진철 선생님이 3년간 진행한 강독을 통해 번역된 책으로 믿고 볼 수 있는 번역이다.

 

루만의 방대한 이론 세계를 설명하기에는 분량이 부족하다. 이 책은 인류 지성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책이며, 사회() 이론이 도달한 가장 높은 고봉으로 이를 직접 응시하기 위해서라도 직접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은 인류 지성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책이며, 사회(학) 이론이 도달한 가장 높은 고봉으로 이를 직접 응시하기 위해서라도 직접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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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페미니즘, 서로를 알아 가다
양혜원 지음 / 비아토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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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양혜원 씨는 ‘학적인‘ 글을 쓰기보다는, 지극히 ‘개인의 경험에 긴박된‘ 글을 쓰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게 단점이다. 나는 지금 한국 기독교와 페미니즘에 기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양혜원 씨의 글은 그런 교착상태에서 하나의 갱신도 하지 못한다. 내 천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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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두크나이트님의 "이렇게 까지 쓰고 싶진 않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양혜원 씨는 ‘학적인‘ 글을 쓰기보다는, 지극히 개인의 경험에 긴박된 글을 쓰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게 단점 같습니다. 저는 지금 한국 기독교와 페미니즘에 기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양혜원 씨의 글은 그런 교착상태에서 하나의 갱신도 하지 못한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의 천견입니다만,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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