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 - 김성중 소설집
김성중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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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이후 처음 말을 붙여준 사물이 다가올 때 우리가 소통한 세계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개그맨-내 의자를 돌려주세요.>

 

의자의 허리 받침이 툭 떨어졌다. 등받이는 멀쩡 하길레 그대로 썼는데 종일 의자에 앉아서 일하다보니 어느 순간 허리가 무척 아파왔다. 자리 구석에 팽개쳐진 허리 받침을 다시 테이프로 감았다. 찌지직 하고 테이프 뜯는 소리가 사무실에 쩌렁쩌렁 울렸다. 덕분에 내 의자가 고장 났소이다 우리 회사는 이까짓 의자 하나 못 사줍니까? 라고 본의 아닌 시위를 벌인 건 둘째 치고, 단단하게 테이프로 다시 고정하니 확실히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얼마 뒤 옆자리에 앉은 내 상사의 허리받침도 툭 하고 떨어졌다. 이 의자는 수명이 다하면 허리받침이 제일 먼저 떨어지는가 보다. 상사가 얼마 뒤 혼잣말이지만 분명히 들리도록 말한다. , 허리 아파... 나는 못 들은 척 키보드를 크게 두들겨 소리를 덮었다.

 

유년 이후 처음 말을 붙여준 사물이 다가올 때 우리가 소통한 세계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내 의자를 돌려주세요>에는 말 많은 도서관 의자가 등장한다. 궁시렁궁시렁 작가에게 말을 늘어놓으며 영감을 주었고, 그에게 쏟아낸 이야기들로 그를 먹고 살게 한다는 재미있는 설정이다. 작가는 사물과의 소통을 유쾌하게 풀면서도 글 쓰는 직업의 고독함을 숨김없이 뿜어낸다. 도서관 의자는 아주 진지하게 그런 작가의 궁둥이를 토닥인다. 포장마차의 파란의자로 넘어가면서 취기가 오른 작가는 의자에게 되레 사람 이야기를 듣는다. 의자도 세월을 보냈고, 여러 사람들을 본 모양이다. 현실을 아주 멀찍이 벗어나지 않은 공상은 때로 현실을 더 현실답게 만들어 주고 거기에 더해 감동을 주기도 한다. 참고로 말하자면, 의자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머리가 나오는 장면이 그런 짜릿한 감동을 준다.

 

공상으로 끝날 수 있는 사물과의 대화가 즐거운 건 작가의 상상력 덕분이었다. 나무를 사랑하는 공원 의자, 그 의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무의미한 것 같지만 그것 또한 우리가 소통하는 세계라고 생각하면 이야기가 다르다. 작가의 상상력은 그런 역할을 했다. 처음 말을 붙여준 사물이 언제였더라. 상상을 좋아하는 공상가들이라면 한번 쯤 고민해볼 만한 질문이다. 이 녀석이 말을 한다면 어떨까? 내 감정을 받아준다면 어떨까?

 

의자들을 돌아본다. 상사가 앉는 의자의 허리받침은 아직도 구석에 팽개쳐져 있다. 저 녀석은 내 의자를 부러워하고 있겠다. 친절하게 떨어진 부분을 테이프로 감싸준 내 의자를. 엉덩이를 의자 깊숙이 바싹 들이밀고 업무에 빠진다. 오늘도 내 무게를 감당하느라 고생이 많다. 나도 말을 걸어볼까? 그런 상상이 모락모락 떠오를 때 즈음 전화가 울리고 상사의 부름이 천둥처럼 들린다. 지랄하지마라! 나에게는 빚이 있다! 일을 해라! 의자와의 대화, 그 유쾌한 상상력이 현실로 사라진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내 의자를 돌려주세요라는 말을 언젠가 나도 외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지금은 의자에서 현실을 말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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