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 교사들과 함께 쓴 학교현장의 이야기
엄기호 지음 / 따비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엄마와 선생님.

인간의 숭고한 직업을 고르라면 이 두 직업이 주저 없이 나오지 않을까. 엄마와 선생님이 첫째, 다음이 개그맨. 다음은 작가. 아니, 작곡가? 이쯤에서 아빠. , 그만 닥치자.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학생들의 가치관에 대단한 영향력을 끼친다. 한창 가치관이 파릇파릇 형성될 시기의 학생들을 마주 대하기 때문이다.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는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싶은' 교사들의 투쟁을 응원한다. 저자는 응원과 함께 교육의 여러 문제들을 보여준다. 저자가 지적하는 문제들이 심각하고 많기는 하지만, 대게는 굉장히 일상적인 것들이다. 기원 전 학교에서도 선생님과 학생들 간의 충돌은 지금과 비슷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세대 간의 갈등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요즘 애들 참 싸가지 없다.” 는 낙서는 기원 전 에도 있었다.

  

 저자는 그들의 갈등을 서당 훈장님이 말씀 하시듯 나긋나긋 중저음으로 말해준다. (본인 주장과는 사뭇 달리) “선생님, 질문이 있습니다!” 라고 묻기가 망설여지는 말투다. “이래야 하는 거 아닐까요? 어느 철학자가 정의하기를이런. 머리 아프다. 낡은 서당의 쾌쾌한 냄새가 묻어 난다. 혼날 까봐 조심스레 읽다보니 저자가 학창 시절 무척 모범생이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저자도 이점을 밝힌다.) 뜬금없는 소리지만 모범생들은 좋은 선생님이 되기 어렵다. 우리 같은 철없는 문제아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래 애들은 다 그래요. 그렇게 심각한 일도 아니라고." 문제아가 답한다.

 

 그러나 생각이 깊은 사람의 말을 계속 듣다 보면 야금야금 그 사람 말에 빠진다. 여러 현역 선생님들의 고민, 그들이 겪는 <교육 현장> 이야기와 저자의 쾌쾌하지만 깔끔한 정리들을 자꾸 듣다 보면 저 선생님들이 마치 종교 투쟁을 하듯 외로운 길을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투쟁에 참여는 못할지언정 응원 메시지는 던져야 최소한의 예의가 아닌가. , 벌써 철든 기분이다!

  

 이야기가 교사들 간의 갈등까지 이르면 속이 쓰리다. 괜한 일 만들지 말자는 교사와 교육에서 의미를 갖고 열정적으로 일하려는 교사간의 갈등이다. 교육에 헌신하고자 하는 누군가에게 충실한 샐러리맨으로 변모할 ''을 주는 건 교육에 있어서 여러모로 손해다. "그럼 네가 해볼래?" 라고 묻는다면 솔직히 바로 대답할 자신이 없다. 누군들 사서 고생하고 싶어 할까. 샐러리맨으로, 직업 선생님이 되고자 하는 교사의 마음도 충분히 공감 된다. 그들이 <교육현장>에 있다는 이유로 교육의 짐을 전부 떠넘기기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훌륭한 교사는 학교가 두렵다. 학생을 마주 대하며 그들의 가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런 두려움을 느끼는 것 자체가 우리 학생들에게도, 나아가 국가 전체에도 고마운 일이다. 그것을 참고 노력하는 이들을 응원하기도 힘든 상황이라니 슬픈 일이다. 넙죽 절 받아도 모자랄 판에 학생과 학부모부터 동료 교사까지 응원은커녕 방해만 한다면 그들의 기분이 얼마나 주옥같을까.

 

그래, 그냥 닥치고 진도나 빼자.”

 

 이 순간부터 우리 문제아들은 영원히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으로 성장 할지 모른다. 이해하고 다듬어 주려 무진 애를 써도 알까 말까한 아이들의 생각은 삐뚤어진 채 남겨진다. 이건 우리 미래에 있어서 심각한 일이다.

 정책상 선생님들을 독려하기 위해 성과급 제도가 제안된다.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겠지만 하는 만큼 벌이가 되는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열성이라는 건 슬픈 일이다. ‘하는 만큼 버는구조에서 교육자들이 어느 때보다 섬세한 청소년기 학생들을 순수한 마음으로 대하는 게 가능할까? 모두가 설리번 선생님과 같을 수는 없다. 성과급? 글쎄. 독려하려면 전체를 확 다 올리는 게 낫지.

 

 훈장 선생님 포스를 내는 저자는 마지막에 '타자를 아는 것이 가르침과 배움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수업이 다 끝난 뒤, "선생님, 하나도 모르겠어요." 라는 질문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교육 현장>에 필요하다고 피력한다. 훈장님께 죄송스럽지만 이것은 지나친 이상주의다. 그 과정이 가르치는 이에게 일방적으로 너무 힘이 드는 불균형한 실천이다. 쌤 죽어. 그럼에도, 현역 선생님들께 더 죄송스럽지만 그 이상주의와 불균형한 실천에 찬성한다. 성공적인 이상적 교육을 꿈꾼다면 방법 또한 이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때로는 그것이 낭만적이다. 엄마를 품듯 평생 마음에 품고 고마움을 느끼는 존재가 될 가능성은 여전히 선생님에게 가장 많다. 직업 선생님이 아닌 교육자로서의 선생님을 응원하는 사람들, 이 중요한 문제를 마주하는 것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훌륭한 교사들에게 항상 고마움을 품는다. 나는 직접 교사와 관련된 일도 하지 않을뿐더러 학교 다니는 애도 없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조심스레 말한다. 숭고한 직업을 가진 분들, 두려워하지 말아주시기를. (오지랖 넓게 덧붙이자면 숭고한 선생님의 범위에서 대학 교수는 제외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