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미디어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4
김찬호 지음 / 책세상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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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출처: 민주노동당 부산시당 <진보부산 9호>


부산을 바꾸려면 이 책을 보라!



                                                                   양솔규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도시는 미디어다
/ 김찬호 지음 / 책세상 / 2002 / 4,900원 /178쪽

가뜩이나 통풍이 안 되는 방에서 무더운 여름밤을 보내다보면 답답하기만 한데, 집에 있는 모든 창을 열어두면 시끄러운 차소리 때문에 예민한 나로서는 여간 잠을 청하기가 힘들다. 이 도시를 두고 누구는 잿빛이다, 무겁다 하는 표현을 붙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런 낭만적 표현보다는 차라리 ‘재수없어!’, ‘짜증나’라는 말이 더 솔직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깔끔하게 조성된 고층 아파트를 가게 되면 괜히 주눅들고, 돈 없는 것에 대해 후회와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왜 이렇게 잘 사는 놈들은 편안하게 살고, 못 사는 놈들은 짜증내면서 살게 되는 것일까?
물론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우리가 민주노동당에 입당하고 활동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과연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궁극적으로 올 때까지’ 모든 행복과 가치는 유보해야만 하는 것인가? 소위 근본모순이 해결되는 그 순간에 와서야(그러니까 그 전에는 결코!) 비로소 행복의 활시위는 서서히 떠나게 되는 것인가? 그럼 이 도시의 팍팍한, 짜증나는 경관과 소음, 부딪힘과 낯설음은 감내해야만 하는 고통으로 남게 되는 것인가? 답답하기만 하다.

도시란 무엇인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자본의 필요에 의해 새로운 시공간적 구획이 시작되었고 이 속에는 인간, 노동자가 있었다. 있으나 없는 ‘빈 공간’은 무엇으로 꽉꽉 채워야만 했다. 도시는 자본주의가 만든 하나의 거대한 공장이다. 소위 근대 이전의 도시와 근대 이후의 도시는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난다. 정치적, 경제적 의미에서 다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대규모의 인구이동을 전제로 한 산업적 공간구획이 그 특징이라 하겠다. 노동력과 상품이 거래되고, 그 속에서 물질적 부가 끊임없이 쏟아져 내는 도시는 한편으론 빈곤을 생산하고 다른 한편으론 화려함을 생산한다. 근대 이전의 정적인 인간관계는 상품과 가치 중심으로 탈바꿈한다. 이른바 맑스식으로 말하자면 모든 굳어진 것은 사라진다(All That is Solid Melt Into Air).

예전부터 도시의 문제는 곧 계급적인 투쟁의 형태와 함께 전개되어 왔다. 직접적 공격일 수도 있고 이데올로기적 공격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도시는 그 모든 투쟁의 결과물이 각인된 거대한 화석이기도 하다. 승리자는 거대한 구조물로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며 패배자는 기억과 술자리에서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응축된 투쟁의 결과물이 도시인 것이다. 서울 올림픽 공원은 승리자에겐 기념물일 수 있지만 패배자에겐 무덤일 수 있다.

한국 자본주의 역시 초국가적인 도시 문제를 만들어 왔다. 이는 자연스럽게 어쩌다가 생긴 문제가 아니다. 종속적이고 유혈적인 산업화(소위 유혈적 테일러리즘에 기초한)는 서울을 정점으로 한 전 지역의 복속을 낳았고 이는 사회 곳곳에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다.

도시는 자본주의 이후에도 수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2차대전 이후 자본주의 황금기를 거치면서 체계적인 도시정비의 필요성이 생겨났고 이 과정에서 도시빈민과의 거대한 전투가 벌어졌다. 71년 경기도 광주대단지 투쟁, 80년대 올림픽을 앞두고 벌어진 상계동 철거투쟁 등이 대표적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른바 환경문제를 둘러싼 투쟁은 지역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송전탑 반대 투쟁, 댐 건설 반대 운동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도시의 구획을 둘러싼 운동의 특징은 한 마디로 ‘반대운동’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영속성은 보장되었고 도시의 재구획은 90년대 초중반에는 거의 완료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도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시민운동의 때늦은 (혹은 때이른) 붐과 함께 지역운동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다. 도시를 살리자는 것이다. 한국 사회 역시 단지 도시의 구획뿐만 아니라 그 속에 사는 인간들의 세대 역시 바뀌게 되면서 도시 출생 인구 비중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산업 역시 주도산업이 이미 성숙산업화 되면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제 한국 사회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인구구조, 성별 시스템, 도시, 산업구조, 산업의 성숙도, 교육수준 등에서 서구의 모습과 많이 닮게 된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반대’와 더불어 ‘반대’를 넘어선 참여, 목표에 있어서의 생태, 생활적 요구를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마을 공동체) 형성이 도시 재생, 주민운동의 중요한 축으로 등장하고 있다. 하버마스가 구분한 바 돈과 권력을 중심으로 한 ‘체계’와 구분되는 ‘생활세계’가 점차 주요한 전장이 되는 것이다. 개인 삶의 세계를 침범하는 ‘체계’에 맞선 투쟁, 그것을 신사회운동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 과정이 그렇게 간단하게 진행되지는 않는다. 주민들과 접촉하고 노력하는 것은 많은 준비를 필요로 한다. 즉 생활세계를 어떻게 재조직할 것인가는 새로운 생활세계의 상, 즉 개인적 생활태도(가치관)와 사회적 교류 방식의 변화를 전제로 해야 하고 이는 선험적으로 규정할 만큼 쉽고 단순하지가 않다. ‘체계 내’ 투쟁과 ‘생활세계 내’ 투쟁이 씨줄과 날줄처럼 동시에 필요하다. 이러한 투쟁에 민주노동당이 끼어들어야 한다는 점은 명백하다. 아니 90년대 초중반에 개입의 주도권을 놓친 것이 중요한 우리의 실책일 수 있다.

지금도 도시를 둘러싼 담론은 우리를 무수히 들었다 놨다 한다. 한전 이전이 실패하자 부산은 노무현의 균형정책이 실패했다고 떠들고 있고, 주공이 들어서는 경남에서는 기초단체들끼리의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이제 내년이면 지방자치체 선거이다. 선거에 목숨 거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계기로 도시 하드웨어의 전반적인 문제, 도시 삶의 양식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 좁은 운동의 토양을 넓히는 현대적 운동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당원동지들에게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전 이 책을 읽을 것을 권한다. 이 책에는 선거 공약과 관련한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우리가 도시와 사람들간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 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도 함께 담고 있다. 도시도 숨을 쉴 수 있다. 도시도 숨을 쉴 권리가 있다. 도시 속 시민의 주인됨은 도시 디자인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탈출구는 없다! 문제는 상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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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양의 시대로
이필렬 지음 / 양문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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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청구서를 보내지 않는다

 

                                                     양솔규(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리뷰 출처: 민주노동당 부산시당 소식지 <진보부산> 7호 http://busan.kdlp.org/


<다시 태양의 시대로> - 이필렬 씀/양문/2004년/1만원

마음 한 구석에 빈자리가 느껴지고 더 이상 예쁜 꿈을 꿀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나이. 그런 나이가 되어야 알 수 있는 ‘맛’이 있다. 간만에 만난 친구와 주고받는 술잔의 맛이 그러하며, 진한 육수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의 맛이 그러하다. 화창한 햇살이 내리쬐는 산행의 커피맛이 그러하며, 똑같은 일상을 벗어나 조용히 라디오를 켜고 앉아 읽는 책맛이 그러하다.

그런 나이가 되면 사람들은 꿈을 꾸기 마련이다.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나를 둘러싼 익숙하지만 힘겨운 짐들과 풍경들을. 그리곤 상상한다. 자연을 벗하며 사는 삶으로 돌아가는 꿈을. 이젠 내가 어제까지 접촉했던 하찮은 것들은 더욱 하찮아지고 결심은 굳어진다. 나 돌아갈래! 그 나이. 더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밀리고 밀려 내 등이 거대한 절벽에 맞닿은 나이. 그때서야 나타나 내 눈을 사로잡는 삶은 더 이상 어제의 삶이 아니다. 자본이라는 인공의 거대한 힘은 내 안에서 파괴된다.

그런 선택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닥치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꿈이 있다. 쭉 뻗은 아스팔트와 화려한 조명이 번쩍이는 도시를 동경할 만큼 순진한 나이가 아니라면, 오르지 못할 타워팰리스를 더 이상 쳐다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인생이 포기를 의미한다거나 인생의 마지막 정착지로 흘러 들어가는 노파의 힘겨운 발걸음도 아니다. 태양의 강렬한 빛이 내리쬐고, 굳은 발 뒷꿈치에 시원한 흙의 감촉이 전해지는데 우울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는 쉽게 떠날 수가 없다. 거창한 이유는 아니더라도 내 주위는 자기장처럼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당장의 결정도 쉽지 않고 자신감도 생기지 않는다. 우리의 삶과 몸은 인공에 둘러싸여 매연을 마시면서 병원이나 들락거리면서 시멘트처럼 굳어져야 하는 것인가?

이필렬 선생이 쓴 <다시 태양의 시대로>는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전해 준다.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곳에서 잃어버린 꿈, 삶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나갈 희망 말이다. 간단하다. 사람, 문명이 돌아가야 할 태양의 시대는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화석연료 시대는 단지 생태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유, 문화적 이유, 효율성인 이유 때문에라도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제 화석연료 고갈은 눈앞으로 다가왔고, 미국과 한국 등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새로운 대체에너지, 재생가능 에너지로의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 경제성? 석유와 석탄에 의존한 에너지의 가격은 상승하고 있고, 태양에너지, 풍력에너지의 가격은 하락하고 있다. 언제쯤? 2010년이면 태양광전기가 가스화력과 경쟁하고, 2030년이면 석탄, 원자력과 경쟁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추세로는 이 시기는 더 빨리 단축될 수 있다. 난방, 전기생산, 조리 등 태양을 이용한 에너지전환은 생태계와 민중의 생활(어쩌면 자본주의에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2004년 정부에서 제출한 2차 전력수급 계획을 보면 대부분의 전력소비 증가분을 화력과 원자력으로 채우고 있다. 석유에 의존하는 한국 경제는 에너지 소비에서 매우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미 독일, 일본, 영국보다 더 많은 에너지 소비량을 기록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많은 부분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독일은 2050년까지 에너지 소비를 현재의 60% 수준으로 줄일 계획을 가지고 있다. 또한 에너지 소비 구성에 있어서도 재생에너지의 비중을 70%로 채우고 원자력 의존은 2030년이면 없앨 계획이다. 야심찬 계획을 구상했다. 이미 많은 나라들과 초국적 석유회사들(예: Shell) 역시 태양광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한 지구 기후 재앙은 이미 초읽기에 들어갔다. 해수 온도의 변화는 강수와 기온의 급격한 변동을 가져오고 있다. 재생가능한 에너지는 우리에게 무한한 에너지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기후도 가져다 줄 것이다.
얼마 전 민주노총 공공연맹, 에너지대안센터,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 등이 모여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준비위’를 만들었다. 흔히들 노동과 환경이 대립되는 경우를 예로 들면서 두 부문의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관계를 상정하고들 한다. 물론 그런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러한 관점은 현체제를 패배적으로 인정하게 하는 효과를 생산한다. 노동과 환경, 두 부문이 만날 수 있는 지점은 현 체제의 ‘극복’에서이다. 자본주의 내 근본모순 중 하나로 노자간 모순 뿐 아니라, 자연/사회 모순을 상정하는 (제임스 오코너와 같은) ‘생태 사회주의’ 관점도 존재한다. 이러한 관점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눈에 보이는 위기를 극복하지 않고 나의, 가족의, 이웃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 어찌 저항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사는 이 땅, 이 공간을 우린 너무 일찍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멀리 떠나지 말자! 내가 있는 곳이 바로 저항의 중심! 부러운 그들의 삶을 차근차근 만들어 가자!

<추천사이트>
* 에너지 대안센터 http://energyvision.org/
* 환경수도 프라이부르크 http://haeseong.hs.kr/HMC/freiburg/main.htm

<추천도서>
* 환경 수도, 프라이부르크에서 배운다 / 이후 /김해창
* 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 / 존 벨라미 포스터 지음, 김현구 옮김 / 현실문화연구
* 생태적 경제기적 / 프란츠 알트 / 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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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힘 - 1870년 이후의 노동자운동과 세계화
비버리 실버 지음, 백승욱.안정옥.윤상우 옮김 / 그린비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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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출처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2005년 11월호 (137호) 
양솔규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 redstar@jinbo.net

비버리 J.실버 / 그린비 / 2005.8월/15,900원

도전과 응전의 파노라마,《노동의 힘》

 

9월 4일, 현대차비정규노조 조합원 류기혁 동지가 노동조합 사무실의 옥상에서 자결하였고, 9월10일에는 화물연대 조합원이자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활동하던 김동윤 동지가 신선대 부두 앞에서 분신하였다. 김주익․곽재규 열사, 이현중, 이해남 열사 등과 박상준, 최복남, 고성학 동지 등 화물운송 노동자들의 죽음에 이어 도대체 끊이지 않고 있는 이 죽음의 행렬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강승규 비리 사건으로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가 사퇴하였고, 울산 북구 선거 패배 후 민주노동당 김혜경 대표와 최고위원회가 사퇴하였다. 혹자는 ‘사퇴정국’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짧은 만개와 때이른 조락이 낳은 불안한 기운이 여러 사람들의 얼굴빛을 어둡게 한다.

부산 서면에서 열린 김동윤 열사 추모 촛불집회를 마치고 참담하고 허탈한 마음을 안고 지하철에 올랐다. 부산대 앞에서 전두환 아들이 운영하고 있는 서점(리브로)에 들려 새로 나온 신간들을 살펴보려 했지만, 인문사회과학 신간 코너는 새학기를 맞아 어느새 대학교재 코너로 바뀌어 있었다. 경영경제 도서나 예술, 컴퓨터 실용서들은 버젓이 자신의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지만 인문사회과학은 어느새 답답하고 돈 안되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나보다.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책을 뒤지던 중, 최근에 나온 책 하나가 눈에 띄었다. 비버리 J. 실버가 지은 ‘노동의 힘’이 그것이다. 표지에는 멕시코의 예술가 디에고 리베라의 프레스코 벽화 <Industria de Detroit o Hombre y Maquina, 디트로이트 산업 혹은 인간과 기계>가 전면에 그려져 있다. 이 표지 그림으로서는 도저히 ‘노동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왼쪽 옆에 관리자인지 자본가인지가 안경 너머 매서운 눈초리로 일하는 노동자들을 ‘꼬나보고’ 있고, 노동자들의 눈동자는 보이지 않는다. 정신없이 작업에만 매달려 있는 모습들. 더군다나 노동운동의 위기를 말하고, 노동 연구의 위기라 말하고 있는 이 시기. 신자유주의 광풍을 힘겹게 맞이하고 있는 한국의 노동운동과, 일시적인 ‘열사정국’이 아니라 ‘열사의 시대’ 아니, ‘죽음의 시대, 절망의 시대’라 할 수 있는 바로 이 땅에서 ‘노동의 힘’을 선언하기에는 도무지 자신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이 책을 꺼내봤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역자 중 한 사람인 백승욱 선생은 최근 중국 노동의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저작들과 논문들을 발표하고 있고,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같은 세계체제론자들의 책들을 번역했는데, 그 긴요성을 간취하는 뛰어난 능력에 걸맞게 좋은 책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이 책은 1870년 이후의 노동자운동을 세계노동운동집단 데이터베이스에 기반해 몇 가지 개념을 가지고 분석하고 있다. 그 개념이란 첫째, 맑스식 노동소요와 폴라니식 노동소요이다. 맑스식 노동소요는 ‘역사적 자본주의의 발전이 과거의 노동계급을 해체시키는 와중에 의도치 않게 낳은 결과로서 출현해 잇달아 형성, 강화되어 가는 새로운 노동계급의 투쟁’을 뜻한다. 폴라니식 노동소요는 전지구적인 경제적 전환 탓에 해체되어 가는 노동계급이 벌이는 저항을 뜻한다. 둘째, 노동소요에 대응하는 자본의 방식은 공간 재정립과 기술 재정립, 제품재정립, 금융적 재정립으로 나눌 수 있다. 재정립을 통해 자본은 노동소요를 무력화시키고 안정적인 자본 축적 구조를 만들고자 하지만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다는게 저자의 생각이다. 셋째, 노동의 힘은 연합적 힘과 구조적 힘(시장교섭력, 작업장교섭력)으로 나누고 있다.

저자가 주목하는 바는 전세계 노동운동이 위기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재정립을 통해 노동소요를 파괴하고 피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최종적’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본이 가는 곳에 갈등이 따라간다’는 주장을 저자는 책 한 권을 통해 증명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저자들은 먼저 20세기 자본주의의 선도산업인 자동차산업에서의 노동소요와 자본이동을 다루고 있다. 자동차산업의 노동소요는 자본의 공간재정립에 따라 지리적으로 변화되어 왔다. 미국에서 서유럽으로, 다시 제3세계(브라질, 한국, 남아공 등)로 이동해온 이러한 자동차산업 노동소요는 이제 최종적인(?) 거대한 노동소요의 진원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바로 세계의 생산기지 중국이 그러한데, 아직 현상적으로는 조용하지만 그 거대한 대륙이 요동칠 시간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자동차산업 내부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보통 린생산(Lean Production)이라고 부르는 일본식 생산방식이 전세계로 확산되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바로 기술재정립의 과정이다. 그런데 일본의 린생산방식(이중적 린생산)보다는 ‘인색한 린생산’ 방식으로 변형되었고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90년대 후자의 방식을 도입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재정립은 오히려 노동의 강력한 작업장교섭력을 증대시켰다.

그러나 19세기의 섬유산업의 노동소요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산업에 노동소요의 역사적 임무를 넘겨줄 운명에 처해 있다. 노동-자본 갈등의 장소가 부문간으로 이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부문이 21세기의 노동소요를 책임질 것인가? 이를 포착하기 위해 저자는 ‘제품재정립’이라는 용어를 도입했다. 이는 바로 ‘혁신적이고 더욱 이윤이 높은 새로운 생산라인과 산업으로 자본을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한 제품의 후기 단계(경쟁이 격화되면서 이윤율이 낮아짐)는 새로운 제품 산업의 시작과 겹쳐진다. 바로 지금의 시기는 자동차산업과 새로운 산업이 겹쳐지고 있는 시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산업이 자동차산업의 계승자가 될 수 있을까? 저자는 반도체산업, 생산자서비스 산업(도시 시설관리. 바로 SEIU가 행했던 건물관리인을 위한 정의 캠페인을 상기하라. 이는 젊은 활동가들을 흥분시키는 캔 로치 영화 “빵과 장미”에 잘 묘사되어 있다.), 운송과 교육산업을 검토한다. 결론적으로는 21세기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은 20세기의 자동차산업보다는 19세기 섬유산업과 비슷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도체산업은 섬유, 자동차와는 달리 고용성장의 원천이 아니며, 고소득 국가에 집중되었고, 자동화되고 있다. 교육과 생산자서비스는 제조업과 달리 공간재정립이 힘들다. 그렇다고 이러한 산업들에서 우리가 자동차산업과 같은 폭발적 전투력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21세기 노동의 ‘구조적 힘’이 침식되는 것만큼 우리는 19세기 섬유노동자들이 그랬듯이 ‘연합적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이 힘은 ‘지역’을 근간으로 한다. 바로 도시 시설관리나 교육산업과 마찬가지로 지역 차원의 연합적 힘이 필요하며 이는 젠더, 시민권, 계급 등의 여타 다른 범주들의 동원과 협력, 수용이 필수적이다.

최근의 상황에 대해서는 저자는 ‘금융적 재정립’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전세계적인 경쟁의 압력은 무역과 생산에서 이탈해 자본이 금융과 투기로 옮겨지게 만들었다. 현재의 과잉축적된 금융적 재정립은 사회협약의 붕괴와 기존의 조건의 후퇴에 대항하는 폴라니식 노동소요의 전세계적인 확산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금융적 재정립은 곧 노동운동의 위기를 불러왔고, 19세기의 금융적 재정립과 유사한 패턴을 보이고 있다.

마이크 데이비스는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에서 미국 노동의 힘이 거세당하는 과정과 원인을 추적하면서 결국 자신의 대안을 제3세계 노동자에게 찾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약 20여년이 지난 지금, 혹 우리는(아니 나는) 우리의 대안을 ‘중국 노동자’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만큼 중국이 세계노동정치에 주는 함의는 대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활동가는 이 책의 저자 실버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거대한 노동소요의 물결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마틴 하트 랜즈버그 역시 <중국과 사회주의>(한울)에서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투쟁이 유발되고 있으며 이는 중국 자본주의의 복고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도 마찬가지로 노동소요의 거대한 진원지로 중국을 파악하고 있다. 그에 따른 광범위한 중국 노동자들의 폴라니식 노동소요가 분명한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맑스식 노동소요는 분명치 않은 것 같다. 어찌되었든, 결국 자기대안은 자기가 마련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유일하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중국의 노동소요가 전세계 노동계급의 재생의 힘이 될 지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국을 찾은 중국 공회의 간부가 공산당의 발전주의이데올로기를 읊는 것을 보면서 황망했던 기억이 있다. 수많은 중국 인민들과 더 많은 전세계 노동자들이 슬기롭게 자신의 힘을 낙관하지도, 비관하지도 않으면서.

 

이제 21세기의 노동이 마주한 거대한 전환점에서 우리는 우리 노동운동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 파악 하에서만이 정확히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와 한계, 전략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효과적으로 우리 자신의 힘을 이용해야 한다. 실버의 ‘노동의 힘’은 바로 ‘노동의 힘’을 증대시켜줄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하게 해주는 책인 것이다. 우리가 자본이 이윤을 위해 추구하는 재정립이라는 도전에 끊임없이 응전하는 이유는 그것이 나의 삶의 본질적인 회복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나의 구성요소이자 내가 그 일부분인 공동체의 본질적인 회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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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조직, 그리고 민주주의
김재훈.조효래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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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조직, 그리고 민주주의》


/한울/조효래,김재훈/22000/2005년 9월

리뷰 출처: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10월호 136호

양솔규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흔히 회자되듯이 노동운동의 위기는 현실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운동’ 자체의 위기(토대?)이기도 하거니와 더불어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사상, 정체성, 지향점을 나타내고 재정립해 나가는 노동연구의 위기(상부구조?)이기도 하다. 이미 배출된 노동관련 연구자들 외에 새롭게 성장하거나 준비된 연구역량이 거의 바닥난 상태이기도 하거니와 그나마 있는 연구자원 조차 정부․자본에 급속하게 편입되어가고 있는 상태이다. 현장과 대학의 새로운 세대들은 집단적 미래 설정보다는 개인적 미래 설정에 더 관심이 많은 듯 하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눈부신 성장을 보였다는 것은 분명하고 이에 세계의 진보적인 지식인 집단과 노동형제들이 한국의 노동운동에 주목했던 것도 명확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 공세에 힘겹게 대응하고 있는 지금의 전세계 노동운동은 한국의 노동운동에 힘겨운 만큼 공세기와는 다른 새로운 기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지하듯이 ‘계급정치의 영역에서 대항권력에 의해’ 규제되어야 하는 시장은 그러나 노동의 성찰적 실천의 부재 속에서 ‘자본의 자기전복적이고 파괴적인 결과’를 양산해 내고 있다. 그야말로(노동사회를 포함하여) 사회를 자본 자신의 얼굴 그대로 구조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힘겹게 싸우고 있는 화물연대 노동자들과 완성차 비정규직 조합원들, 중소사업장 노동자들은 그 결과물이며,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 양극화의 문제 역시 그러하다.

이러한 때에 조용히(?) 노동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연구자 두 사람이 자신의 논문들을 모아 ‘시장’에 내밀었다. 김재훈 교수와 조효래 교수가 낸 『노동과 조직, 그리고 민주주의』(한울, 2005.9)는 두 연구자가 공동집필한 것은 아니지만 공통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한국 노동운동과 노동연구의 현재 상태와 과제들에 대해 나름대로 정면으로 맞이하면서 쓴 책이다. 두 연구자는 시장의 폭력이 제도적으로 규제되어야만 하는데, 이를 규제할 수 있는 것은 계급정치의 영역에서 중층적으로 형성되는 대항권력이며 이는 곧 ‘조직화된 노동의 힘’이라고 보고 있다. 이 ‘조직화된 노동의 힘’은 안으로는 작업장 민주주의와 노조민주주의, 밖으로는 사회적 민주주의 혹은 실질적 민주주의의 확장과 제도화를 추구하는 이중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며 이는 곧 대항권력의 확장과 ‘조직화된 노동의 힘’의 ‘사회적 힘으로의 전화’를 가져오는 동인이라 할 수 있다. 두 연구자는 노동연구의 쟁점부터 정리하고, (생산직, 사무직)노동의 ‘현재적 상태’를 분석한 후, 조직과 민주주의를 분석하고 있다.

저자들은 영화 ‘올드보이’의 주인공 오대수의 질문과 이우진의 답변에 빗대어 ‘“왜 시장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고 묻기보다는 “시장의 야만성을 규제하기 위하여 노동은 어떻게 조직화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분석의 시기는 1997년 경제위기 이후이다.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전임자 임금지급이 금지되는 2007년이 곧 새로운 노동체제로의 이행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저자들은 전망하면서 한국의 97-2005년까지 9년을 분석대상으로 삼아 2007년 이후 노동체제를 보다 내실 있게 맞이하기 위한 쟁점과 고민을 풀어내고 있다.

이 책에 실린 10개의 절대로 만만치 않은 논문들은 그동안 각종 학술지(경제와사회 등)와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사회과학연구총서(한울)에 실렸던 글들이다. 또한 《연대와실천》에도 6개의 글(조효래 4개: 1,5,8,9장, 김재훈 2개: 6,7장)이 소개되기도 했었다(연대와실천 이번호에 김재훈의 논문 6장 수록). 열 개의 논문 중 5개는 조효래(1,5,8,9,10장), 5개는 김재훈(2,3,4,6,7장) 선생이 쓴 글이다.(이하 존칭 생략)

‘1장 노동조합 조직연구의 동향과 쟁점’은 그간의 한국 노동연구의 동향을 살펴보고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조효래에 따르면 이전까지의 노동조합 내부정치에 대한 분석들이 이념형과 유형화에 의존해왔지만 각 유형들에 대한 인과적 변수(예를 들어 외부적 환경의 변화, 내부 조합원, 간부, 상급조직 간부의 인식, 노동조합운동의 가치, 조합목표 정의방식, 의사결정과정과 그 통로 등)에 대한 연구가 심도있게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분석한다.

앞으로의 노동조합 조직연구에서 해명되어야 할 과제들은 첫째, 노동조합 조직의 여러 수준들의 기능과 역할이 어떻게 분화되고 내부통제와 조정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둘째, 단위노조와 상급노조 수준에서 노동조합 리더십의 가치와 태도,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에 관한 연구이다. 셋째, 내부 균열구조와 조직적 분파들의 선거경쟁에 대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 넷째, 조합원들의 참여수준과 형태에 대한 분석이다.

‘2장 노동력 재생산연구의 동향과 쟁점’은 97년 이후 노동계급의 노동력 재생산구조가 어떤 변화를 겪어 왔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핵심으로 가지고 출발하고 있다. 앞으로의 연구과제로는 첫째, 소득과 자산의 계급 간 불평등 구조와 변화과정이 연구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둘째, 계급간 소득지출의 불평등을 연구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본다. 셋째, 거시적 수준의 분배 및 복지제도에 대한 연구과제이다. 넷째, 기업 내 노동조건의 변화가 노동력 재생산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이다.

‘3장 생산직 노동자의 노동력 재생산구조’에서 김재훈은 생산직 노동자의 노동력 재생산구조를 가계소득구조와 소비구조의 측면에서 분석하였다. 심각한 고령화 수준, 유일한 대안인 초과노동 수용, 국가복지나 기업복지 대신 시장복지 대안 선택, 노동계급 내부의 이질화의 심화가 바로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김재훈은 이러한 노동력 재생산의 특징들은 노동체제의 특징과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변수로 두고, 따라서 ‘초과노동과 집합적 소비재 부담의 악순환’은 기업규모별 계급 내부의 이질감과 불신감을 증폭시키고, 노동력 재생산의 차이가 ‘산별노조 전환을 통한 노동체제의 전환’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4장 생산직 노동자의 고령화와 초과노동’은 금속노조를 사례로 하여 고령화와 초과노동이 노조에 미치는 효과를 분석하고 있다. 금속노조의 각 지회들을 고령화와 초과노동을 두 축으로 놓고 평균을 상회하는 곳과 평균 이하인 곳을 교차시켜 네 가지 지회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연구 결과를 보면, 노동력 재생산의 차이가 연대의 수준을 낮추는 효과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나 ‘최저임금제’로는 한계가 많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적용대상이 적어 조합원 동원이 어렵거나(최저임금제), 소득극대화를 위한 수단(노동시간 단축)으로 변용되기 쉽다는 것이다. 김재훈은 따라서 생활임금제로 초점을 맞추어야 포괄 지회가 넓어질 수 있고, 동원 수준을 높일 수 있으며 초과노동의 동기를 약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다.

‘5장 사무전문직 노동자의 구성과 상태’에서는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의 계급상태 변화를 추적하고 이러한 변화가 사무전문직 노동조합운동에 갖는 함의를 분석하고 있다. 97년 경제위기 이후 사무전문직 노동자 내부구성에서의 변화를 보면 여성 비중의 급격한 증가와 평균연령 상승, 임시일용직의 급격한 증가, 고학력화 현상 속에 학력과 고용형태의 상관관계 약화, 상용직의 고령화와 젊은 층의 비정규직화로 요약할 수 있다. 근속기간, 노조유무, 고용형태별로 상대적 임금격차가 97년 이후 급격하게 확대되고 있고 노동시장 분절과 양극화가 심각해지고 있다. 조효래는 따라서 여성과 비정규직을 노조운동의 중심으로 조직하는 것이 노조운동의 역동성뿐 아니라 장기적 생존을 위해서도 무엇보다 필요하며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역설하고 있다.

‘6장 노동시장 분절과 노동조합 조직변화’는 《연대와실천》본 호에 실려 있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김재훈은 산별전환의 다섯 가지의 경로 중 소산별전환 후 대산별 단계전환론은 소산별노조 유지론에 머물 가능성이 높으며, 결국 기업별연맹체계의 경로와 대산별체제의 경로 간 경쟁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또한 김재훈은 전략적 산업군내에서 업종노조내의 수직적 통합보다는 수평적 통합전략이 더 현실성이 있다고 보고, 제조업 산별노조로서 조직 확대와 발전을 꾀하는 것을 장기적으로 추진해볼 필요가 있다고 제언한다. 즉 금속산업과 화학섬유간 제조산별노조로의 확대는 불확실한 환경과 목표의 불명확함 속에서 하나의 준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7장 산별노조의 조직자원과 조직유형’은 금속노조를 사례로 하여 노동조합의 조직능력을 구성하는 조직자원을 분석하고 조직의 유형적 특징을 밝히고 있다. 김재훈에 따르면 금속노조의 조직능력은 기업별노조의 특징이 강한 조직자원들에 의해 제한되고 있으므로 상대적으로 동원 수준이 높은 전략적 자원에 의존하는 ‘전략적 자원 동원형’으로 유형화할 수 있다. 이는 조직전환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산별노조로의 발전 속도를 늦추게 만든다는 것이다. 김재훈은 대공장노조 조직전환은(외연적 확대전략)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대공장노조의 리더십에 그 관건이 달려 있기에 금속노조는 이와는 별개로 각 지회들이 양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제도적 조건을 마련하는 ‘내포적 발전전략’을 구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산별노조로서 금속노조의 정당성과 중소지회의 제도적 안정성, 조직의 견고성을 높일 수 있다. 또한 대규모 지회에 걸린 부하를 줄이고 거대지회의 영향력을 낮출 수 있다. 이는 규모별 갈등의 가능성을 최소화하는데 도움을 주며 미전환 대규모 사업장의 전환에도 간접적으로 유인하는 효과가 있다.

‘제8장 산별노조 지부의 조직과 운영 - 경남 1, 2 지부의 사례’는 2003년 경남 1, 2지부가 통합되어 경남지부로 되기 전에 쓴 논문이다. 금속노조 경남 1, 2 지부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공히 대기업 지회의 영향력이 지역지부의 활동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조효래는 기업별 노조의 관행의 극복이 시급하며 지역지부의 집행력을 강화하는 것, 대기업노조의 산별 전환을 가속화하는 것이 산별노조 전환의 성공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보고 있다.

‘제9장 기업별노조의 조합민주주의’는 부산, 울산, 경남지역의 금속연맹 소속 단위 노동조합 및 금속노조 지회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토대로 기업 수준의 노조민주주의의 실태를 분석한 논문이다. 선거경쟁 측면에서는 대체로 양당제적 구조가 정착되어 있으며 조직운영과 의사결정 측면에서는 조합의 의사결정이 다수조합원들의 의사에 따라 집행부가 결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조합원들은 보고 있다. 또한, 기업수준의 조합원 참여는 높은 편이지만 그 참여는 헌신과 희생을 수반하지 않는 소극적 참여라는 점을 보여준다. 금속 조합원들의 상대적으로 높은 ‘집합주의적 지향’에도 불구하고 이는 이데올로기적 헌신에 기초하기 보다는 ‘도구적, 경제적 지향’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금속산업의 노동조합 민주주의는 여전히 활성화되어 있으나 점차 실리적 태도와 도구적 참여의 성격이 강화되고 있다. 또한 실리적 목표에 한정된 단체교섭 선호에 기초한 노동조합 선거는 높은 참여도에도 불구하고 계급적 연대와 사회적 수준의 참여라기보다는 사업장 수준의 실리적 목표에 한정되어 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전투적 경제주의’ 정체성이 유지되고 있으며 노동조합 선거는 이념과 전략에 따른 경쟁보다는 전술상의 차이로 수렴되고 있다.

‘제10장 산별노조 전임간부의 리더십과 가치지향’은 금속노조, 금융노조, 보건의료노조 전임간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토대로 한 논문이다. 세 노조의 전임간부들은 비교적 개별적 단체교섭 등보다는 전체 노동자들의 사회적 지위와 정치세력화와 같은 사회적 수준의 기능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또한 사회주의적 지향, 변혁적 지향을 가진 간부의 비중도 높은 편이다. 그러나 세 노조 각각을 비교해 보면 차이 또한 나타나고 있다. 금속과 보건에 비해 금융노조 간부들은 보다 정치적으로 온건하며 실리적, 도구적 지향이 강하며, 직업적 전문성을 강조하는 경력 지향적 리더십이 보다 높게 나타난다. 반면 금속과 보건은 이념적 헌신에 기초한 리더십이 다수이다.

조합 내부로 보면 본조 및 지역간부와 기업지부 간부 간 인식 격차가 존재하기도 한다. 이는 곧 기업별 노조체제에서 산별로 전환하면서 직접적인 조합민주주의를 어떻게 정치적, 전략적으로 조율된 민주주의로 발전시킬 것인가, 그리고 이를 누가(중간간부) 담당할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 보건과 금속의 경우 사업장 지부 간부들의 간부기피현상은 산별노조의 조합민주주의 형성과 관련해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상당히 많은 내용들을 검토하고 있으며 가볍지 않은 주제들을 다룬 학술적인 글이기 때문에 지역 동지들이 선뜻 읽기 쉬운 글은 아닌 것 같다. 또한 주로 금속노조를 중심으로 한 연구가 많다. 하지만 그 외에도 사무전문직 노동자의 상태, 보건과 금융노조에 대한 연구 역시 포함되어 있으며 조합민주주의나 노동력재생산의 문제 등 전체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에게 해당되는 포괄적인 주제들 역시 많이 다루고 있다. 때문에 지역의 동지들과 (살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비 연구층들이 한국의 노동자의 현재 상태를 파악하고 앞으로의 전망을 고민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글들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한울출판사의 책이 대개 비싸다는 점이 걸리기는 하지만 술렁술렁 넘어가는 책보다는 우리에게 밀접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권하고 싶다. 산별전환을 지겹도록 얘기했고, 2007년이 이제 불과 얼마 안 남은 이 시점에 특별한 관심이 필요로 하지 않겠는가? 비록 재미는 떨어지는 머리 아픈 논문들이기는 하나 우리에게 이만큼 다가온 ‘친절한 연구서’에 조금은 가까이 해야 하지 않겠는가? 머리의 작동은 점차 느려지기 마련이고 시간은 뒤로 흐르지 않는다. 2007년은 2년만큼이나 우리를 늙게 만들 것이고 오늘은 결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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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뒤흔든 열흘
존 리드 지음, 서찬석 옮김 / 책갈피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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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리드와 혁명의 불꽃-《세계를 뒤흔든 열흘》과 《레즈》

양솔규(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리뷰 출처 : 영남노동운동연구소(http://www.ynlabor.co.kr) 
 <연대와실천> 2005년 8월호 통권 134호


우리는 중국의 수많은 제국들이 명멸했다고 해서 그들의 역사를 기억의 저편에 묻어버리지는 않는다. 또한 로마가 멸망했다고 해서 그들의 역사를 잊어버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흐름 속에서 되살려 내고 비유하며 반추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영국의 맑스주의 역사가 홉스봄이 ‘단기 20세기’를 나누는 기준이 되는, 세계 역사상 최초로 ‘현실 사회주의 국가’를 탄생시킨 ‘러시아혁명과 소련(제국?)’만은 회자 대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마치 <역사유물론>지(誌)가 묶어 낸 ‘레닌에 대해 말하지 않기’처럼.

과연 러시아 아니 소련은 잊혀져 버렸단 말인가? 아니다. 역사의 연속선상에서 사라진 깊이만큼, 역사에 각인된 상처의 깊이만큼 소련은 침잠해 있을 뿐이다. 소련을 다시 되돌아보기 위해서는 15년의 세월이 너무 짧은지도 모른다.

《중국의 붉은 별(에드가 스노우)》,《카탈로니아 찬가(조지 오웰)》등과 함께 세계 3대 르뽀 문학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세계를 뒤흔든 열흘》(책갈피)은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이자 (정치가라고 하기엔 너무나 이상적인) 정치적 이상주의자인 존 리드가 러시아혁명의 격동을 페테르부르크에서 직접 겪고 난 후 쓴 책이다. 이 책은 1917년 러시아혁명에 관한 고전적인 텍스트이다. 1986년에 한국에서도 두레출판사를 통해 상당 부분이 생략된 채 소개된 바 있었다. 당시의 판매고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2005년의 이 책의 판매고는 그리 높지 않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21세기 한국은 아직 그것을 묻어두고 싶은 게다. 그러나 우리가 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와 병사들처럼, 또는 거대한 대륙의 농민들처럼 무언가 뒤흔들 계획을 세우고자 할 때 우리는 이 역사적 대사건을 다시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어쩌면 ‘혁명의 고양기’와는 거리가 먼 지금의 이 시기가 러시아혁명을 다룬 고전적인 이 책이 다시 등장하기에 더 적절한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20세기 세계의 광활한 영토를 거대한 대륙의 사회주의로 물들인 두 혁명, 러시아 혁명과 중국 혁명을 다루고는 있지만,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과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 다른 점은 무엇보다 초점에 있다.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에는 그들의 인구만큼이나 무수히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한다. 모택동, 주덕, 주은래 뿐만 아니라 이들의 부인들, 구추백, 진독수, 하룡, 팽덕회 등 당과 홍군의 무수히 많은 간부와 혁명가들이 곧 그들이다. 따라서 책 말미에는 ‘중국혁명 인물사전’과 비슷한 분량으로 인물 소개로 차 있다. 그런 만큼 마치 중국 고전 ‘삼국지’나 ‘수호지’처럼, 또는 PC 게임 ‘리니지’처럼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총출동하는 역동적인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무협지다.

반면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레닌이나 트로츠키 등 혁명가 인물들이 중심이기 보다는 ‘사건 그 자체’에 대해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대미문의 사건. 스노우는 러시아혁명의 전형을 앞에 두었으나 존 리드는 그렇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존 리드에게 초점은 혁명 그 과정에 놓여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약 100쪽에 달하는 방대한 후주와 부록은 바로 러시아의 정치세력들과 조직들, 러시아의 신문기사 등 자료들로 꽉 차있다. 이 후주와 부록이 독서의 속도를 가로막기는 하지만 이해를 배가시키기도 한다.

물론 이 책에도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들은 이름 없는 노동자, 병사, 농민들이다. 즉, 존 리드는 지도자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볼셰비키가 어떻게 노동자, 병사 등 대중들과 호흡하면서 혁명을 전진시켰는가를 다루고 있다. 모든 계급의 정파와 투쟁하기를 거부하지 않았으며, 또한 주장이 같은 자들과 연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볼셰비키. 그래서 코민테른은 존 리드에게 미국의 공산당 분열 이후 공산주의노동당과 공산당의 통합을 결정하고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합작을 강력하게 주문했던가.

20세기 영화사에 길이 남은 러시아의 영화감독 에이젠쉬타인은 이 책을 원작으로 삼아 혁명 10주년인 1927년 영화 ‘10월’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 ‘10월’은 스탈린의 비판으로 인해 재편집되기도 했고 존 리드의 책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금서(禁書)로 분류되었다.

헐리우드의 진보적인 배우이자 유명한 바람둥이 워렌 비티(Warren Beatty)는 1981년, 존 리드의 생애를 다룬 영화 《레즈》(Reds)를 제작했고 감독했으며 그 자신이 존 리드로 출연했다. 1967년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처음으로 접한 그는 영화 제작의 마음을 굳혔지만 그러나 영화화 하는 데에는 15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도 ‘빨갱이’에 관한 영화에 투자할 사람이 없었다. 어쨌든 그는 이 영화를 통해 82년 아카데미상 감독상, 촬영상,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지옥의 묵시록’, ‘마지막 황제’ 등을 촬영한 비토리오 스트라로가 촬영을 맡았고, 지금은 늙은 배우가 된 연기파 배우 잭 니콜슨이나 진 핵크만 등이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한다. 나이 든 무정부주의자 ‘엠마’로 분한 모린 스테이플턴은 이 영화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존 리드와 그의 부인 루이스(다이안 키튼)의 만남을 시작으로 해서 둘의 운명은 혁명의 기나긴 여정과 함께 한다. 진보적인 저널리스트인 리드는 좌파 노동조합 조직인 IWW(세계산업노동자동맹)의 활동에도 참여했고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부인 루이스와 함께 혁명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 러시아로 떠난다. 이들은 그 후 미국으로 돌아왔고, 존 리드는 1919년 이 책을 집필하였고, 루이스는 미국 전역에 사회주의 러시아 혁명을 설파하러 다닌다. 친공반전(親共反戰)적인 기사들로 인해 법정에 선 루이스는 신을 부정하는 빨갱이 나라 소련을 지지하며 여성의 투표권도 없고 기만적인 정치가 판치는 미국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다.

존 리드는 사회당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만 반대파에 밀려난다. 반대파를 결집해 공산주의노동당을 만들었지만 코민테른은 공산당과의 합당을 결정한다.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돌아오기로 약속했지만 혁명정부는 그를 돌려보내지 않았고 그 시각, 루이스는 경찰의 미행과 침입 등을 감수하고 있었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무정부주의자인 엠마는 함께 10월 혁명에 열광했으나 이후 빈곤과 질병을 타파하지 못하는 혁명정부, 민주주의가 질식되는 모습, 무정부주의자들의 투옥과 사형 등을 지켜보며 소련에 대한 희망을 버린다.

존 리드는 엠마의 이러한 회의에 대해 강력하게 볼셰비키와 혁명을 변호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도 이 역사적 사건의 결말에 대해 불길한 감정이 싹튼다. 아내와 미국에 남겨둔 동지들을 만나기 위해 그는 목숨을 건 여정을 시작한다. 철길을 통해 핀란드의 국경을 넘지만 그는 투옥되고 이곳에서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 병에 걸리고 만다.

루이스는 존 리드가 투옥된 사실을 듣고 ‘산넘고 바다건너’ 목숨을 걸고 찾아가지만 이미 존 리드는 핀란드의 교수들과 포로 교환을 통해 모스크바로 후송된 뒤였다. 결국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된다. 영화 포스터의 사진은 그들의 극적인 해후를 담고 있다. 하지만 존 리드는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혁명이 일어난 지 3년이 지났으며,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펴낸 지 1년 만에 그는 루이스의 곁을 떠나고 만다. 그의 나이 겨우 33세였다. 혁명의 와중에 멋지게 퍼지는 ‘인터내셔널가’ 노래 소리는 이 영화의 백미이기도 하다. 그 울림만큼이나 진지한 역사적 사건은 그렇게 미국과 헐리우드를 뒤흔들어 버렸다.

존 리드의 역을 맡은 워렌 비티는 할리우드에서도 유명한 진보적인 배우이다. 베트남전 참전 반대운동을 하기도 했다. 헐리우드를 통해 미국 정치계, 민주당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그는 99년에는 대통령 출마설이 나돌기도 했다.

때문에 미국 대선 때마다 그의 행보는 뉴스거리였으며, 클린턴 정부 시기에는 클린턴과 민주당의 우경화, 고어 대통령 후보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워렌 비티의 현실 정치에의 참여적인 모습은 존 리드와 많이 포개져 있다. 존 리드는 저널리스트 또는 (글의) 예술가로서 혁명에 기여하며 남기를 바라는 루이스의 간절한 바램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노동당의 승인을 위해 조국인 미국을 등지고 소련으로 잠입한다. 존 리드는 스스로 혁명가가 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세계의 진보와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그 어떤 기여를 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물론 워렌 비티는 존 리드가 품었던 이상이 민주당을 통해 실현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는 않을 것이지만. 미국이라는 하나의 제국에서 소련(제국)의 부활을 점치는 것은 당분간은 힘들 것이다.

불타오르기도 전에 식을까봐 미리 두려워하는 우리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러시아혁명과 존 리드의 생애를 다룬 《세계를 뒤흔든 열흘》, 《레즈》는 시대는 어떻게 불타올라야 하는가, 무엇을 통해 혁명은 불타오르는가를 생생하게 드러내 준다.

혁명은 가능한가? 모르겠다. 혁명은 그 자체로 선인가? 모르겠다. 하지만. 혁명은 필요한가? 그래! 레닌이 만든 불꽃이라는 신문의 이름을 달고 나온 ‘록그룹 이스크라’의 외침, 그대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 각자의 대답이 궁금하다. 어쩌면 혁명은 꿈꾸는 것을 포함하는 미완성의 상상을 전제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이상성의 불꽃은 후퇴하는 현실 속에서 더욱 빛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존 리드를 잘 알던 노인의 음성이 흐른다.

"당신 애가 혁명을 이어받을지도 모르죠. 왜 그랬냐고? 에디슨이 왜 했는지 아는가?
......기억은 희미하지만 그는 앞에 굉장한 것이 있댔지. 생사를 걸만한 것이......
그가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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