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타협하기
그레고리 앨보 외 19인 지음, 리오 패니치.콜린 레이스 엮음, 허남혁 외 14인 옮김 / 필맥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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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소통> 2008년 7월호에 실릴 글

“자연과 타협하기” 위한 길찾기에 나서자.

 

양솔규(노동사회교육원 2기 졸업생, 회원)

연일 촛불이 타오르고 있지만, 고유가 행진도 계속되고 있다. 작년 이맘때쯤 유가가 1배럴당 70달러였던 반면, 지금은 147달러를 돌파했다. 두 배 이상 오른 것이다. 유가는 더 오를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급기야 7월 6일 오늘, 정부는 고유가에 대한 에너지 대책을 내놓았고 사실상 3차 오일쇼크를 선언했다. 또한 오늘 충남 태안에는 국내 최대 태양광 발전소가 가동되었다.

물론, 이러한 석유 고유가에 대해서 많은 전문가들은 국영기업, 헤지펀드의 책임 문제를 제기한다. 일명 ‘투기설’이다(윌리엄 엥달 등). 여기에 대해 폴 크루그먼 같은 학자들은 ‘투기설’이 엉터리라며 반론을 제기한다. 일명 ‘수급불균형설’이다.

어느 것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에너지 절약이니, 새로운 생활패턴이니 하면서 금방 대안적인 생활에 대해 얘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또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두 번씩은 괜찮은 ‘재생에너지, 기후변화’에 대한 뉴스 또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다. 적어도 이러한 문제가 먼 얘기가 아니라, 당장 피부에 와 닿는 얘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분명, 작년과는 매우 다른 상황임에 틀림없다. 이런 ‘고유가’ 시대의 전환적 사고가 실제 현실이 될지는 모르겠다. 이런 ‘고유가’ 상황 속에서도 국제자본은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신당이 만들어질 때, ‘녹색’과 ‘적색’의 결합 등을 많은 사람들이 얘기했다. 이에 대해 ‘녹색’과 ‘적색’의 결합이 불가능하다고 단정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당위적으로 결합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 쪽 색깔이든, 그렇다고 자기 색만 가지고 말하기도 참 껄끄러운 시절이기도 하다.

내일(7월 7일)부터는 일본에서 G8 정상회담이 열린다. 이 자리에는 탄소배출을 해온 선진국 G8뿐만 아니라, 새로운 탄소배출‘강국’(?) 중국, 브라질, 인도, 남아공 등도 참가한다. 이 회의에서 지구온난화와 관련해 논의가 진행될 것이라고 한다. 탄소배출 국제기준인 교토의정서는 2012년에 완료될 예정이기 때문에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논의가 진행중인 것이다. 공교롭게도 세계적으로 유가와 곡물가가 급등하면서 전세계 수억의 생존이 분초를 다투고 있다. 당연히 G8에게 수억의 생존보다도, 자본의 생존이 더 중요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어쨌든, 지구온난화의 문제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점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의 필요성이 확대되어 가고 있는 지금에 우리가 참고할만한 책이 있다. 좌파 잡지 Socialist Register 의 편집자 리오 패니치가 엮은 <자연과 타협하기>가 그것이다. “Socialist Register”는 각 해마다 한 주제에 따라 여러 필진들의 글을 모아 발행하는데, 2007년의 주제가 바로 ‘자연’ 및 ‘환경문제’였다.

이 책은 교육원 회원들이 참 읽기 힘든 책일텐데, 무엇보다 번역된 책이라는 점, 많은 필자들이 참여했다는 점, 그리고 생소한 환경문제에 대한 글이라는 점, 그리고 책의 분량이 만만치 않다는 점(518쪽) 때문이다.

그러나,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와, 생태환경문제를 자본주의와 연결시켜 이해하고, 대안사회를 반자본주의뿐만 아니라, 반환경파괴사회로 상정하고자 한다면, 이 책만큼 종합적인 현안 분석과 폭넓은 대안을 제시해주는 책도 드물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에는 17명이나 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필자들이 17개의 주제에 걸쳐 다양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 중에서 닐 스미스가 쓴 2장 “축적전략으로서의 자연”과 엘마 알트파터가 쓴 3장 “화석자본주의의 사회적, 자연적 배경”은 이 책의 문제의식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2장에서 닐 스미스는 자연이 자본에 실질적으로 포섭되는 현재의 국면에 대해 강조한다. 그는 맑스가 단순제조업에서 근대산업으로 넘어가면서, 노동자는 자본-임노동관계 뿐만 아니라, 노동과정 속에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주도권을 빼앗기는 과정을 분석한 것을 인용하면서, 이와 유사하게 자연도 자본에 형식적 포섭 단계에 있던 단계(예를 들어 식민지 자원 약탈)를 넘어 자연이 곧 자본축적전략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자연에 대한 금융화(석유펀드, 곡물 펀드, 광석 펀드 등)가 이를 주도하고 있고, 자연에 대한 변형(유전공학 등)과 자연과 관련한 (의제)상품과 시장의 출현(탄소배출권 시장 등)이 그것이다.

3장에서 앨마 알트파터는 이러한 자본주의와 화석에너지가 결합한 현대 자본주의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석유정점과 화석에너지의 위기에 따라 유지될 수 없고, 대안은 재생에너지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러한 대안을 만들어 나가는 데에 기술적 처방보다는 새로운 사회시스템, 예를 들어, ‘연대의 경제’ 혹은 ‘도덕적 경제’가 재생에너지와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앨마 알트파터의 주장은 얼마 전에 번역 출판되었던 그의 책 <자본주의의 종말>(동녘)의 요약본이라 할 수 있다.

각 나라의 실상에 대한 글들도 많이 있다. 5장 바버라 해리스 등이 쓴 글은 “영국의 재생가능에너지 정치”에 대한 글이다. 7장은 “중국의 초고속 발전과 환경위기”에 대한 글인데 필자인 데일 원은 우리나라 <녹색평론>(2007년 7-8월호)에서도 중국과 관련한 생태문제에 대한 글이 소개된 적이 있다. 중국 외에도, 6장 허리케인으로 인한 뉴올리언스 사태를 분석한 글, 8장 아프리카의 생태포퓰리즘과 관련한 글, 16장 녹색당 유럽의회 의원이었고, 예전 민주노동당 기관지에서도 글이 소개된 적이 있는 프리더 오토 볼프가 실패한 독일 녹색당 기획의 교훈에 대한 글도 소개되고 있다. ‘적색’과 ‘녹색’의 결합을 갈망했던, 또는 불가능하다고 봤던 진보신당의 당원들이나 ‘당’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한번 읽어보면 좋을 듯 하다.

주제별 분석으로는, 9장 세계를 먹여 살리기, 농업, 발전, 생태, 10장 물, 돈, 권력 등이 있다. 수돗물 민영화 등이 당장 현안이 되어 있고, 거의 해체상태에 놓여 있는 농업 문제는 한반도 식량문제를 야기할 것이라는 관측들이 있는 상태에서 서구와 세계농산물시장 등에 대한 이 장의 분석들은 보다 넓은 범위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위치짓게 한다.

13장 “더 많이 일하고, 팔고, 소비하기”라는 글에서 코스타스 파나요타키스는 맑스가 주장하는 자본주의 1차모순, 생태맑스주의자인 제임스 오코너가 주장한 자본주의 생산관계/생산력과 자본주의 생산조건간의 모순인 ‘2차모순’을 넘어 자본주의 소비주의 속에서의 강박적인 경제성장 추구를 ‘자본주의 3차모순’으로 개념화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현실분석보다는 대안 위주의 글들이 배치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도 많이 소개되어 있고,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필자들이 눈에 띄는데, 미셸 뢰비와 그레고리 앨보가 그런 사람들이다. 15장 “생태사회주의와 민주적 계획”이라는 글은 미셸 뢰비의 글이고, 17장 “생태지역주의의 한계-규모, 전략, 사회주의”는 그레고리 앨보의 글이다.

당연히 이 글들의 필자들은 ‘생태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앨마 알트파터는 3장에서 자본주의의 지속불가능성을 주장했지만, 4장에서 대니얼 벅은 ‘자본주의가 생태위기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이 다른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리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대안을 만들지 않는 한, 자본주의든 그 무엇의 체제든 간에 재앙에 가까울 것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책은 결코 쉬운 책은 아니다. 각주만 해도 60쪽이 넘는다. 17개의 주제들에 500쪽이 넘는 분량은 접근을 힘들게 한다. 생태주의 문제에 대한 글들을 엮었지만, 자본론과 관련한 언급들, 맑스주의의 주요한 이론가들, 역사가들부터 현실 정치인들까지, 환경과 관련한 제도의 문제에서, 좌파의 역사, 민주주의와 사회시스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론들과 개념, 분석과 사람들이 동원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환경생태문제를 이제 곁다리로 한번 언급해 보는 장식품 정도로 취급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바로 이 문제를 진지하게 대면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대안사회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힘들게라도 독서모임을 조직해서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

이미 자본은 기후변화와 에너지문제에 대해 기민하게 대응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자본주의의 지속을 위해 그들은 준비하는 것이다. 생태문제는 이미 시장화, 상품화 단계를 거치고 있다. 즉, 우리의 생존을 위해 고민해야 할 문제를 넘어, 자본의 새로운 축적의 영역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둬서는 수십억의 세계 민중에게 재앙이 될 것이라는 게 이 책이 우리에게 수많은 사례를 통해 제시하고 있는 교훈이다.

지역 사회에서도 이러한 요구와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태양의 시대’로 가는 ‘태양혁명’을 준비할 것인가? 아니면, ‘화석연료’ 중심 경제체제를 유지하면서 주는대로 먹고사는 20세기형 자본-노동타협 경제체제를 유지할 것인가? 생태 문제는 먹고사는 문제 다음에 고민해야 하는 차선의 문제가 아니다. 작금의 변화는 생태 문제를 이렇게 안일하게 바라봐서는 안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제 생태 문제는 바로 안전하게 ‘먹고 사는’ 문제이며, ‘분배’의 문제이며, ‘정의’의 문제이다. 따라서 ‘정치’의 문제이고, ‘경제’의 문제이다. 중산층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그 길목에 서 있다.

문제는 사람들과 어떤 꿈을 함께 꿀 것인가? 꿈의 상에 대한 것이다. 그 꿈은 단지 생태환경적으로 ‘올바른’ 것일 뿐만 아니라 ‘실현가능한’ 것이어야 하며, ‘사회경제적 대안’의 모습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상상력의 주체는 소수의 전문가들이 아니라, 생활 속에 뿌리박고 사는 우리들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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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구해근 지음, 신광영 옮김 / 창비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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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 소통> 2008년 1-2월호 (2008년 1월 8일)

‘막’ 형성된 계급에게 놓인 두 갈래 길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구해근 지음, 창작과비평사, 2002년

  양솔규(교육원 졸업생, 회원)

그리 길지 않은 한국현대사 속에서 숫자는 ‘역사적 투쟁’의 법칙성을 나타내 주는 것처럼 보였다. 예를 들면, 1960년의 4.19 혁명, 1980년의 5.18 광주민중항쟁과 같이 10-20년 단위의 년도가 그러하다. 작년은 1987년 6월항쟁과 7,8,9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난 지 20주년이 되던 해였다. 또한, 1996-97년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난 지 10주년이 되던 해였다.

사람들이 이러한 시간적 흐름을 단지 ‘표지’해 주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그것 자체에 어떤 주술적 힘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뭔가 극복 가능한 희망을 찾고자 하는 심리적 동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학자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숫자가 반복적인 ‘시간적 주기’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숫자적 의미로만 본다면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1997년의 노동법개악 반대 총파업 투쟁이 일어난 지 10, 20주년이 되는 해인 2007년은 뭔가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해봄직한 해였다. 그리고 그 내용은 거대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조직적, 정치적 주체형성과 투쟁의 고양을 의미했다. 하지만, 작년 한 해 그 어떤 주술적 힘도 벌어지지 않았다. 역사에는 비약이 없다는 점을 믿는다면, 우리 노동운동은 아직 이러한 발전을 이루어낼 만한 실천을 하지 못한 것일 테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한국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시작해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의 출발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대한 이해와 이에 기반한 풍부한 논의일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2007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주노총은 조직노동 외 계급적 대표성을 갖추기 위한 활동에 게을리 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역사에 대해 제대로 기록할만한 능력도, 의지도 없었고 그나마 기록된 자기 역사에 대해 그 구성원들과 나누고자 하지 않았다. 기껏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에서의 몇몇 정리만 있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회원들에게 책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구해근 하와이대학 사회학과 교수가 쓴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창작과비평사, 339쪽, 13,000원)이다. 이 책은 2001년에 구해근 교수가 영어로 쓴 책을 2002년에 신광영 선생이 번역을 해 출간되었다. 나는 이 책을 2004년 3월에 구입했는데, 몇 년 동안 읽지 않고 있다가, 2008년 신년에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저어했던 이유는 이 책이 1987년 이후의 노동운동사에 대해서 글의 비중상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1987년 이후의 역사가 중요하지 않아서라기 보다는, 한국 노동운동의 긴 역사를 ‘단절적’이기 보다는, ‘연속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구해근 선생의 특별한 시각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60년대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르는 긴 시간의 흐름을 ‘계급 형성’이라는 핵심 단어로 묶어 내고 있는 것이다.

구해근 선생의 ‘특별한 시각’은 바로, 책 제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영국의 맑스주의 역사학자 E.P. 톰슨의 기념비적인 저서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의 제목을 차용한 것과 같이 톰슨의 관점, 즉 계급을 역사주의적, 구성주의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관점을 수용한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계급을 “구조로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범주로도 보지 않”고 계급을 “사회적․문화적 형성으로서…다른 계급과의 관계 속에서만 정의될 수 있는 것…그 정의는 시간을 매개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계급은 (코카의 주장처럼) “항상 형성 또는 소멸의 과정 속에 또는 진화나 퇴화의 과정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한국의 노동계급의 현재의 상태를 고정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정치적, 문화적 계기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실체로 파악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시각 속에서 한국의 노동계급 형성을 살펴본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비교연구적 관점에서 대만이나 서구와는 다르게 나타나는 한국의 노동운동의 양상을 서술하고 그 원인을 밝히고자 한다. 

이 책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대한 모든 내용들을 섭렵하여 담고 있지 않다. 자세한 내용과 관련해서는 다른 역사적 자료들이나 논문들이 더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하기 때문에 더욱 강점을 지닌 책이 될 수 있었다.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주요한 테마로 보고, 이의 계기와 과정, 조건과 이를 돌파하는 계급형성의 힘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다. 

흥미롭게 볼 만한 점은 뒷부분에서 많은 외국의 노동분석가들과는 달리 구해근 교수는 한국의 경우 브라질, 남아공과는 다르게 ‘사회운동 노동조합주의’가 발전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구해근 교수는 그 원인을 첫째, 기업별 노조에 가해진 법적, 정치적 제약, 둘째, 낮은 실업수준과 적은 비공식 부문 규모, 셋째, 노조운동이 공장 특유의 문제에 몰두하면서 지역의 문제에 천착하지 않은 점 등으로 설명한다. 결국 한국의 노동운동은 그 운동의 폭발성, 전투성과는 상관없이 경제노조주의로 귀결되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IMF 이후, 현재의 조건 속에서 한국의 노동운동이 사회운동 노동조합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들이 이전과 달리 무르익고 있는가, 아닌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새로운 노동조합주의를 상상하면서, 과거의 우리 행동의 선택지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기업별 노조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었던 조건, 정당운동의 지체와 학출 활동가들의 조급함, 자본과 비교해서 “전략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의 불균형”을 초래한 원인들 등, 역사 속에서 배울 수 있는 수많은 오류와 실패들을 사심없이 지켜봐야만 할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노동운동이 더욱 힘든 구렁텅이로 밀려들어가고 있고, 수많은 비정규직들과 민중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하다. 80년대 말 형성된 한국 노동계급은 그러나 현재 ‘소멸’ 혹은 ‘퇴화’의 과정에 있을 지도 모른다. 

구해근 교수가 결론적으로 얘기하듯이 한국의 노동운동은 아직 조직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약하고 허물어지기 쉬운 계급이다. 앞으로 이 계급이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계급조직을 갖추고 건설적인 미래상을 제시하면서 성숙한 노동계급으로 성장하는 길”이며, 또다른 길은 “협소한 노동조합주의에 몰두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분열되고 외부적으로는 고립되는” 길이다.

이 두 가지 갈래 길은 사실은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나타났으며, 미래의 순간순간마다 나타날 것이다. 그 갈래를 결국 선택할 주체는 한국 노동계급이며 그 선택 자체가 바로 계급을 고유의 모습으로 빚어내는 과정일 것이다.

이명박 시대가 시작되는 지금, 노동운동과 당 운동이 몰락과 쇄신의 갈래에 있는 지금, 우리는 지난 노동운동의 가장 빛나던 시대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선택을 위한 지혜와 결단력을 공급받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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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종말 동녘선서 99
엘마 알트파터 지음, 염정용 옮김, 이병천 감수 / 동녘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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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 16호 (2007년 12월) 원고


 연대적 경제와 재생가능 에너지 중심 사회를 향하여

양솔규 부산회원





필자는 요즘 이사할 집을 구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전세물량이 없는 속에서도, 가끔 깔끔하고 괜찮은 집이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집은 괜찮아도 ‘기름보일러’인 경우가 많다. ‘눈 딱 감고 2년만 살아봐?’ 하다가도 기름값이 오르는 걸 생각하면 그럴 자신이 없다.



2007년 겨울, 유가는 배럴당 97달러까지 치솟았다. 올해 초 60달러 선이었던 것을 상기해본다면 불과 1년 사이에 60%의 가격 상승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유가의 초고속 증가의 배후에는 초국적 금융투기자본이 도사리고 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아무리 수요의 증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가격상승폭을 설명하는 변수가 되기에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과 인도, 제3세계의 점증하는 수요 역시 무시할 수만은 없다. 중국과 인도의 에너지생산량 중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석탄에 비해서는 매우 낮은 편이다. 그러나 두 나라에서 석유의 수요는 엄청난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전세계적인 수요의 증가는 장기적인 석유가를 상승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러한 두 나라의 에너지수요의 급증은 다른 한편으로 심각한 환경문제를 야기한다.

이러나저러나, 기름값은 당분간 오를 것이고, 물가상승의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올 판국이다.




월드 워치(World Watch)의 2006년 판 ‘지구환경보고서’는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여 이례적으로 이슈가 아닌 ‘중국과 인도’라는 두 국가를 특집으로 구성했다. 만약 두 나라가 미국 수준의 자원 이용과 오염물질을 배출한다면 지구적 재난은 불을 보듯 뻔 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중국과 인도에게 이러한 자원 이용을 중단시킬 수 있을까? 현재, 중국의 석유자원 확보가 어려워진다면 세계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럴 경우 석탄 이용이 증가된다면 환경 리스크가 급속하게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2005년, 현대경제연구원)을 자본 측에서는 내놓고 있다.

초국적 금융자본이든, OPEC이든, 아니면 초국적 석유자본이든, 강대국이든, 이러한 자원 및 권력정보 독점체들이 사실을 아무리 왜곡하든 간에 분명한 사실은 화석연료의 사용은 ‘유한’하다는 점과, 수요와 공급 속에서의 가격 결정이 시장 속에서 이루어질 때, 힘없는 대다수 전세계 인민들에게는 재난과 빈궁만이 남을 것이라는 점이다. 2008년은 아무래도 석유와 석탄으로 대변되는 화석연료와 자본주의의 문제가 화두가 될 것이다. 바야흐로 ‘지구적 사회내부 관계 변혁’과 ‘지구적 사회-자연 관계 변혁’이 동시에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엘마 알트파터는 누구인가?



바로 이때, ‘생태 사회주의적(?)’ 시대인식을 담은 책 또는 ‘생태적 반자본주의 선언서’가 발간되었다.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정치학과 교수(현재는 은퇴)이자 비판적 사회과학 잡지 PROKLA의 편집위원인 엘마 알트파터(Elmar Altvater) 교수의 책, 『자본주의의 종말』(동녘, 2007)이 그것이다.1) 사실 엘마 알트파터는 세계적 명성에 비해서는 우리나라에 잘 소개되지 않았다. 1992년에 편역된 『위기와 조절』(창비)라는 조절이론적 접근 이론서에 논문 한 편이 번역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소셜리스트 레지스터(Socialist Register, 2002년호)에 실린 ‘성장 강박증(The Growth Obsession)’이라는 글이 신기섭 한겨레신문 기자의 블로그에 번역되어 있다.(http://blog.jinbo.net/marishin/)

1938년생인 그는 “소련에서의 환경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그는 1968세대로서 정치경제학 이론에 영향을 미친 독일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현재 그는 ‘ATTAC’과 ‘세계사회포럼’의 자문단이기도 하다.

독일녹색당의 이론적 지주라고 알려진 알트파터의 책이 주목되는 또 다른 이유는, 자본주의 이외의 대안부재론(TINA; There is no alternative)이 운위되는 신자유주의 시대, 따라서, (영미식) 자본주의 vs (라인형) 자본주의만이 유일한 가능성으로서 주어지는 시대에 ‘자본주의의 종말’을, 그것도 라인형 자본주의인 ‘독일’의 학자가 논한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삼위 일치된 자본주의의 귀결, 지경학적 세계화와 지정학적 신제국주의




먼저, 알트파터는 ‘역사의 종말’을 논한다. 역사의 종말은 후쿠야마가 언급한 것으로서, “1989년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진 후 이제는 자본주의 생산 방식이 영원하고 무한하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언술은 이미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물신적 특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실은 인류 역사는 두 가지 길로 향하고 있다고 한다. 첫째 길은 끝없는 자본주의의 길로서 또 다른 역사의 종말, 즉 파국이 놓여 있다. 두 번째 길은 확 트인 지대로서, 자본주의적 축적을 넘어서는 사회적 대안들이다. 필자와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두 번째 길이다.



“만약 역사가 계속되고, 수많은 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현재 실현되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정치적으로 계획되고…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최상의 세계로 부각된다면, 자본주의의 종말에 관해서도 숙고해 보아야 하며…검증해 보아야만 한다”(43쪽).



알트파터는 현실 자본주의의 사적 전유의 네 가지 형태를 제시한다. 첫 번째 전유 형태는 가치화이다. 원시적 축적 체제에 해당하는 이러한 가치화는 현재에도 일어난다. 두 번째 전유 형태는 절대적 잉여가치 창출이다. 세 번째 전유 형태는 상대적 잉여 가치 창출이다. 이 속에서 노동력과 (뿐만 아니라) 자연을 전유하는 효율은 새롭고 더 효율성이 높은 기술과 합리적인 조직을 통해 개선된다. 이러한 전유는 모든 시간적 공간적 경계를 넘어서려는 글로벌화 경향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며, 자본주의 지경학이 드러난다. 네 번째 형태는 지정학과 새로운 제국주의이다. 에너지 자원확보와 공급을 위해서는 글로벌 경쟁이라는 자본주의 지경학적 논리를 넘어 탈취, 절대적 잉여 가치의 확대, 글로벌 중심지로의 이전을 통한 전유 역시 요구된다. 이를 주도하는 것은 금융 자본이다.



알트파터가 보기에 현대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 사회 구성체’, ‘화석 에너지원’, ‘유럽 합리주의’가 결합된 삼위 일치된 체제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처음부터는 아니지만(나무) 불가피하게 화석 에너지(석탄)에 의존하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수백 명의 ‘에너지 노예들’과 결합해 노동 잠재력을 몇 배로 증가시켰다. 점차 자본주의는 자연의 적으로 변해갔다. ‘가능한 모든 세계들 중 최상의 세계’인 자본주의는 ‘역사의 종말(최종적 승리)’에 이르러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자신의 생활의 기반을 파괴시킨다. 이러한 삼위 일치된 자본주의는 경제와 사회적 과정의 ‘가속화’를 불러오며, 자연의 파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향한다. 시간 단축의 가속화는 공간을 압축하고 뛰어 넘는다. 질주논리적인 가속화 신드롬은 화석에너지원을 통해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 또한 유발시켰다. 화석 에너지가 없다면 애덤 스미스의 약속은 지켜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막스 베버와 좀바르트는 이를 두고 ‘자본주의와 화석 에너지 체제의 악마의 결혼식’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삼위 일치화 덕분에 인류는 놀랄 정도로 부를 증가시켰다. 이 체제는 성장을 물신화하는 체제이다. 산업혁명 이후 성장은 더 이상 노동력 공급과 토양에 의존하지 않고, 산업 노동의 생산성 증대에 의존하게 되었다. 포드주의-소비사회는 이러한 양상을 대표한다.

하지만 엄청난 불평등 역시 만들어냈다. 화석에너지 소비에 있어서도 미국과 서유럽은 다른 대륙을 능가하며, 온실 효과 가스 배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화석에너지원의 장점(시공간적 제약을 넘는다는 점) 중 하나는 화석 이차 에너지인 전기와 내연 기관의 연료를 통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대규모의 전기 생산뿐 아니라 소규모의 장난감, 주방용 기구, PC 등에 투입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이후 태양에너지원으로의 전환에 있어서도 고려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화석에너지원은 엄청난 단점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지구대기의 온실가스 문제를 야기하는 폐쇄된 에너지체제라는 점이다.



내부의 모순과 외부의 충격



알트파터는 페르낭 브로델의 생각에 주목한다. 브로델은 자본주의의 종말에 대한 조건으로 첫째, 내부의 모순의 첨예화와 둘째, 외부로부터의 격심한 충격, 셋째, 동시에 내부에서의 신빙성 있는 대안들이 생겨날 때 가능하다고 본다. 알트파터가 보기에 첫 번째는 바로 금융 세계화가 준비하고 있는 모순의 폭발이며, 두 번째는 유한한 화석에너지 공급의 파탄과 온실 가스로 인한 지구기후의 변화이다.



글로벌화된 자본주의에서 금융 분야는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된 후에도 미국은 달러 세뇨리지2)의 장점을 누린다. 금융위기 이후 많은 나라들은 달러 보유를 통해 외환보유고를 늘려왔다. 이는 자국의 소비를 억제하고 미국의 소비 지수를 높게 하며, 미국의 적자를 낮은 비용으로 메울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만일, 유로화를 통한 외환보유가 이루어지면, 다시 말해 외환보유의 다각화를 추구하게 되면 미국에게는 불리해질 수 있다. 현재 미국의 달러는 점차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3)

또한 금융 자본이 요구하는 수익률은 실물 경제가 지속적으로 뒷받침할 수 없다. 따라서 금융 시장의 위기 추세는 항시적이다. 세계적 규모에서 금융 자본이 요구하는 민영화, 탈규제, 자유화는 또한 신자유주의 지배의 도덕적 토대를 허물고 있다.



자본주의의 외부적 충격은 화석 에너지원의 고갈과 온실가스로 인한 지구기후 변화에 기인한다. 이러한 화석 에너지원의 고갈로 인한 자원 확보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역사의 종말’ 이후 전쟁이 점차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자원과 자원의 수송지역을 둘러싼 갈등은 점차 확대될 것이다. 군사적 수단을 이용한 석유 소비의 한계를 늘리려는 ‘석유 제국주의’의 시도는 테러리즘을 불러온다. 공급 카르텔인 OPEC과 수요 카르텔인 메이저 석유 회사들은 석유 매장량을 부풀리고, 기후학자들은 에너지소비와 지구 온난화의 연관성을 축소시키며, 선진국들은 온실 가스 배출 기준을 낮추는 등의 시도를 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결국 외부적 충격의 크기를 증가시킬 뿐이다.



연대적 경제와 지속가능한 재생에너지 체계



따라서 우리는 페르낭 브로델이 얘기하는 세 번째 조건을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알트파터는 연대 경제와 지속가능한 태양에너지 체계만이 신빙성 있는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한 사회는 오직 혁명적 과정 속에서만 자본주의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사회 형태를 극복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한 대안들을 숙고하고 운동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종말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현실 사회주의와는 달리 역사적인 파열을 겪으면서 자체적으로 붕괴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안을 만드는 사회운동은 자본주의의 시장이 내세우는 행동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본주의 질서는 무엇보다 ‘등가성’에 기초한다. ‘상호성’은 비록 등가성 원리와는 차이가 나나 모순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상호성’은 다양한 결합을 생각해볼 수 있다. 등가성의 안전 장치가 될 수도 있지만 부패와 결합될 수도 있다. ‘재분배’ 원리를 캘리니코스는 글로벌 시대에도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저자는 이 원리는 소규모 사회에 적합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알트파터는 등가성과 상호성의 원리에 대립하는 ‘연대의식’과 ‘공평성’의 원리를 내세운다.

이미 에밀 뒤르켕은 ‘유기적 연대 의식’ 속에서 집단 의식과 사회적 결속이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연대 의식들은 모두 도덕적인데, 노동운동의 국제적 연대 의식도 도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E.P 톰슨 역시 시장 경제 외부의 ‘도덕 경제’라는 개념을 말한다.



“연대적 경제는 사회운동이 시간과 공간을 탈환하려고 노력하면서 이루어지는 성과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공간-시간의 절멸을 통한 ‘탈영토적 운동’에 맞서 사회운동은 어떤 의미에서 영토운동이 된다. 이전의 갈등의 장은 노동-자본-국가라는 말하자면 삼 주체의 코포라티즘적 관계였던 반면에 ‘사회 영토적 대결’에서는 전혀 사정이 다르게 되었다. 왜냐하면 첫째 테마들이 이전과는 달리 국민 국가와 관련되어 있지 않으며, 둘째, 정규적 계급 관계 밖에서 대결이 일어나기 때문이며, 셋째, 대결의 새로운 형태, 즉 중앙집권적이 아닌 차이 속의 동일성 추구가 일어난다. 넷째, 새로운 사회 주체들도 개혁과 혁명의 변증법에 따라 움직인다. 바꿔 묻자면, ‘연대의식인가, 야만인가?’ 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러한 야만의 목록에는 화석에너지를 둘러싼 강대국간의 전쟁이라는 절멸의 계기까지 포함된다. 야만은 오직 지속 가능한 사회로 이행함으로써만 물리칠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다섯째, 새로운 것의 자율적인 공간과 새로운 시간 리듬을 획득하고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섯째, 자본주의적 여건 내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에 대한 숙고만으로는 부족하고, 이를 넘어서야 한다.



독일이나 브라질 등에 있는 협동조합, 공익재단, 자유 교환시장, 소액 신용기관과 같은 제3 섹터라 불리는 분야들이 연대적 경제의 일부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 지역을 넘어서 연대적 경제의 주도권은 국가적, 세계적 차원에서 보완하고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정부와 국가적 차원만이 아니라 글로벌 금융 시장에 대한 개혁 역시 필요하다. 이는 “지역, 지방, 국가 경제와 세계시장의 기관들을 새로운 형태로 결합”하는 것이다. 연대적 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영역들을 연결시키는 것과 집단적 조직 형태와 행동 전략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양산하는 탈취 전략에 맞서 영토를 재탈환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연대적 경제는 공간(재탈환된 영토)을 통해 태양에너지 사회와 연관된다. 그런데, 재생 가능 에너지와 에너지 소비 절약이 자본주의와 조화를 이룬다 할지라도(마치 독일처럼), 그 장점을 드러낼 수 없다. 재생 에너지는 더디며 가속화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재생 가능 에너지 체제로의 이행의 길 중 선택 가능한 길은 재생 가능 에너지를 투입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 화석 에너지원, 유럽 합리주의의 삼위일체화를 저지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태양에너지와 화석에너지 사이의 방화벽이 무너지고, 열린 에너지 체제가 만들어진다. 이제 생산과 소비, 즉 경제는 태양에너지의 변환 체제처럼 조직되어야만 한다. 또한 에너지 체제의 변경은 생산 방식뿐만 아니라 생활 방식의 변화도 요구한다. 또한 에너지 노예의 수를 줄이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러한 과제는 단기간 내에 이행될 수 없는 과제이기는 하지만, 곧 닥쳐올 석유 채굴의 정점(피크 오일; peak oil)을 방향 전환의 기회로 이용해야만 한다.



저자의 논리적 주장을 요약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300쪽이 넘는 분량에 게다가 압축적인 내용은 읽어나가기에 쉽지만은 않다. 더군다나 오타와 번역상의 문제까지 겹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책 내에는 수많은 역사적, 이론적, 실천적 쟁점들이 섞여 있고, 검토해봐야 할 내용들이 무궁무진하다. 권력의 문제부터, 국가의 문제, 발전과 생태, 민주주의의 문제까지.

저자에게 글로벌 금융자본주의는 이전의 자본주의와는 단절적인 시기로 규정하는 듯하다. 저자는 현행 자본주의의 유지는 곧 파국으로 끝난다고 단정 지으면서도, 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우울한 파국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희망에 찬 새 지평의 시작, ‘대전환’의 계기로 그려나가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람시의 전망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지평의 중심에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이 존재한다. 저자에게 사회운동은 이전의 포드주의-사회 코포라티즘적 체제내화된 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의 종말’을 넘어선 근본 변혁을 꿈꾸는 운동으로 설정된다. 저자는 ‘사회주의’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탈자본주의의 세계, 즉 사회주의의 체제 구성 요소를 생각할 때 우리는 재생 가능 에너지체계를 필수적으로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만약 이러한 지구멸렬을 피하는 방법으로서 사회주의가 고려된다면, 이는 생태 재앙의 시급성으로 인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것이다.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오늘 당장, 아니면 아무리 늦어도 내일은 화석 에너지 체제에 대한 대안들을 만들어 내는 데 착수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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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화, 현실인가 또 하나의 신화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3
구춘권 지음 / 책세상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노동사회교육원 4월 회보 양솔규 글
지구화 한 그릇 드실래요?

 

양솔규(노동사회교육원 회원)

 

지구화, 현실인가 또 하나의 신화인가 / 구춘권 / 책세상 / 2000년 / 3,900원, 142쪽

한미 FTA가 타결되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2007년 4월 2일), 각 뉴스 포털 사이트와 방송들은 FTA의 타결 소식을 급히 전달하고 있다. 어제 밤에는 민주노총 민주택시노조연맹 조합원이자 민주노동당 관악구위원회 당원인 허세욱 동지가 FTA를 막아내고자 54년을 함께 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지금 현재 허세욱 동지는 위독한 상태이다. 이제 우리 현실이 어떻게 변할 지, 각 산업별 득실은 어떻게 변할 지, 촌에 계시는 우리 할매, 할배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우리 고향은 이제 유지될 수나 있을런지, 만감이 교차하는 시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실은 한미 FTA가 되기 전부터 한국의 개방화 정도는 도를 넘고 있었다. 도를 넘고 있다는 점은 단지 양적인 부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속도의 부분 또한 의미하는 것이었다. 소위 ‘개발독재’ 시기로 일컬어지는 경제 개발 시기에 대한민국은 폐쇄적인 수출주도 보호 무역 정책을 가진 나라였다. 미국은 냉전 시대, 자신들의 동아시아 정책에 지정학적으로 한국이 중요했기 때문에, 한국의 경제 발전을 의도적으로 돕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폐쇄적이고 국가주도적인 경제체제는 외부 시장에 개방적이고 시장주도적인 경제체제로 ‘압축적’인 변화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계기는 김영삼 정권 시기의 세계화 전략과 그로 인한 ‘IMF 경제위기’였다.

배낭여행과 영어마을은 차라리 애교스러운 어린 것들의 유행일 뿐이다. 정작 무서운 것은 만성적인 실업과 저성장, 급격한 빈부의 격차와 저항의 붕괴, 교정의 불가능성이 아닐런지.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에서 보아 왔다. 이제 한국은 유럽식 사민주의의 길도, 영미식 신자유주의의 길도, 20세기 초의 사회주의의 길도, 일본식 길도 아닌, 남미식 종속적 신자유주의의 경로로 추락하고 말 것인가? 심히 걱정스럽다. IMF 이후 언제나 어려웠다고, 언제는 해뜰 날이었냐고 퉁명스럽게 내뱉을 지도 모르겠지만, 영화 매트릭스의 대사 한 꼭지를 인용한 우석훈 교수의 말은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괴물.”

이 책의 속지에는 “지구화의 패자와 희생자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적혀 있다. 과연 나는 세계화의 패자인지, ‘노동사회교육원’ 회원들은 세계화의 승자인지, ‘6시 내고향’이나 ‘전국 노래자랑’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패자인지, 승자인지 곰곰이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좋든 싫든, 세계화된 세계에 살고 있으며, 그 사회의 보다 나은 모습을 위해서 노력하고 기대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세계화에 대해서는 수많은 책들이 이미 나와 있다. “도둑 맞은 세계화(창비)”, “세계화와 싸운다(창비)”, “세계화 없는 세계화(시유시)”, “세계화 시대 초국적 기업의 실체(책세상”,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필맥)”, “아래로부터의 세계화(아이필드)”, “허울뿐인 세계화(따님)” 등등.

그러나 이 책의 강점은 당연히 “짧고, 값싼” 책이라는 사실에 있다. 또한, 수많은 ‘반세계화’ 교과서가 외국의 필자들이 쓴 반면에 이 책은 한국 사람이 썼다는 점도 장점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책의 경우 일차적인 목적이 ‘반세계화’를 말하고자 한다기 보다는, 세계화(또는 지구화 Globalization)라는 것이 어떤 경로를 밟으면서 등장했는지, 그 탄생의 역사를 요약해서 설명하는데 일차적 목적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이 짧다고 해서 쉽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의 변화를 책 100쪽으로 요약하는 것은 저자로서는 당연히 쉽지만은 않으며 또한, 독자의 입장에서도 마치 꿈을 꾸듯이 100년을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1쪽에 1년씩! 우리가 이러한 부분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든 적게 가지고 있든 간에, 어쨌든 간 우리의 나머지 삶을 ‘지구화된 세상’은 지배할 것이다. 그렇다면 좀 알아 두는 게 필요하다. 이 짧은 책으로 먼저 예습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자기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주워  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하면서 복습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우리에게는 물론 자본주의 역사, 또는 세계화를 둘러싼 다른 여러 가지 책들을 함께 보는 것도 필요하며, FTA에 대해 분석해 놓은 책들도 역시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운동 진영에서도 반FTA와 관련하여 괜찮은 책 네 권 정도는 내놓았다. “투자자-국가직접 소송제(녹색평론사)”,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녹색평론사)”, “한미 FTA 이미 실패한 미래(사회운동)”, “한미 FTA 국민보고서(그린비)” 등. 물론 FTA 맹신도들이 매일매일 수 백 권의 책과 매스컴, 정부관료, 정당 대변인의 입을 통해 쏟아놓는 양에 비해서는 ‘새 발의 피’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이 책이 살핀 지구화는 바로 ‘포드주의적 축적체제’의 ‘경제적’ 위기에 대해 ‘정치적 개입’이 대단히 무력하게 되면서 나타난 과정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시장’의 전지전능함을 믿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지니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구화는 수익성 위기를 겪은 전 세계 자본가(특히 금융 자본)들의 ‘위로부터의 정치적 전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노동자, 민중들의, 즉, ‘아래로부터의 정치적 전략’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적 지구화’의 핵심은 네 가지이다. 첫째 국제금융시장이 규제되어야 한다. 둘째, 지구적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셋째, 대안적 지구화는 환경적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넷째, 경제적 지구화를 규제하기 위해서 민주주의적인 전지구적, 지역적 국제협력기구가 필요하다. 한미 FTA의 타결로 인해 우리는 이러한 대안적 지구화를 해 나갈 지렛대나 무기(예컨대 국가의 힘)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너무 걱정만 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FTA이든, 지구화된 초국적 금융 체제이든, 어떠한 체제든 간에 실물 자본주의와 유리되어, 또는 사회를 초월한 체제는 영원할 수가 없다는 것이 자본주의 역사, 또는 인류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위기가 기회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좀 더 근본적으로 핵심에 다가서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지식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라는 그람시의 경고를 상기하자. 지구화라는 현실을 분석하면 할수록 비관주의에 빠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낙관주의를 고수해야 한다……노동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등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모든 사회운동은 대안적 지구화의 희망이다. 전 지구적 연대만이 개별 국가들로 하여금 대안적 지구화의 길로 들어서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사회교육원의 회보가 이제 출발한다. 보라. 우리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어 나가고 있지 않은가? 어설플지도 모르지만 진지하게 탐색하는 다수를 소수가 어찌할 수는 없다. 다수의 깊음을 어쩌겠는가? 아무쪼록 회원 여러분께서 ‘책 한 그릇’으로 FTA 체결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을 삭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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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
에릭 포너 지음, 박광식 옮김 / 알마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 4월호 기고.

‘에릭 the Red’을 위하여, ‘USA the Red’를 위하여

 

양솔규(전진부산 회원)

에릭 포너(Eric Foner),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 알마, 2006년 11월

가만히 ‘역사’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세상이 내 마음대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 같다. 내가 원하는 대로 또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세상이 만들어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게만 된다면야 ‘운동’이니 ‘혁명’이니 하는 말은 사전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맑스는 ‘브뤼메르 18일’에서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에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넘겨받아 직접 맞닥뜨리게 되는 환경에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라고 썼다. 내 안에 ‘역사’가 있는 것이며 ‘애미애비’를 전제하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나 엥겔스, 그람시와 같은 고전적 맑스주의의 흐름에서 ‘미국’이라는 사회는 매우 특이한 조건을 가진 사회로 보였나보다. 이들 사회는 전(前)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없는, 봉건적 조건이 거세된 순수한 의미의 자본주의로 여겨졌다. 말하자면 위대한 ‘역사적 전통’은 없는 대신에 선조로부터 내려온 ‘납덩어리’ 같은 부담도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의식과 계급전선이 왜곡되지 않고 투명하게 드러날 것으로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 시대에 있어서는 영국과 독일 등이 혁명의 도화선이 될 것으로 보였는지 모르겠으나, 조만간 미국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였다. 예컨대 새로운 시대의 준거점은 유럽이 아니라 미국으로 보였다.

하지만, 20세기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미국 자본주의의 ‘순결함’은 사회주의 이행의 모범정답을 제시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은 한계로 작용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매우 아이러니하다.

과연 미국은 ‘사회주의’를 거부하는가? 사회주의로 가기에는 너무나 편안한 사회인가? 아니면, ‘실천의 동력’이 없는 것인가? 생산력이 아직도 불충분한 것일까? 최종적인 질문을 던져보자면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

여기 이와 관련한 ‘글’이 있다. <에릭 포너,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 알마, 2006년 11월> 사실 ‘서평’란에 ‘책’이 아니라 ‘글’이라고 한 이유는 이 책의 모든 내용이 ‘미국 사회주의’와 관련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02년 미국에서 출판되었고 한국에는 2006년에 번역되었다. 이 책에는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에 대한 글뿐만 아니라, 역사가의 의미, 남아공에 대한 에세이, 러시아에 대한 글, 미국 흑인과 헌법 등 다양한 역사학자로서의 고뇌가 담긴 수필들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미국의 역사에 대해 쉽게 그리고 고급 해석을 바라는 독자들이 읽기에는 더없이 좋은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의 운동과 관련해서는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는가’를 제외하고는 약간은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만이 아니라, 미국의 역사, 저항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른 책들 역시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전제로 소개를 하고자 한다.

위의 질문은 예전부터 오래된 질문이기도 했다. 또한 나름 많은 학자들이 대답을 내놓기도 했다. 또한, ‘미국의 사회주의’의 ‘형성’이라는 실천적 문제는 ‘전진’ 동지들의 역사적 임무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미국의 (사회주의의 역사를 포함한) 역사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미국의 미래가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하는 점은 단지 미국에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수출주도 개방경제 체제인 한국이 외부의 조건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현실이며, 더군다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미국이라는 나라는 (남미가 미국의 앞마당이라면) 한국을 자신의 ‘베란다’ 정도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네그리 식 표현대로라면 미국 신자유주의의 확산의 결과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 변화했고, (제국=미국은 아니지만) 미국의 미래는 어쩌면 제국의 흥망성쇠를 가늠하는 결정적 열쇠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네그리는 지구 어느 곳이든 자신이 존재하는 곳이 곧 제국의 중심이라고 말했지만(실천의 의미를 부여해준다는 점에서는 고맙고 고무적인 발언이기는 하나), 내가 보기에, 또는 초국적 자본의 경영자가 보기에 그렇다고 본사를 부산이나 칸쿤에 가져다 놓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두 번째 이유는, 이게 더 중요한 이유일 수 있는데, 미국으로의 길이 어쩌면 우리의 앞날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맑스는 “자본”에서 “더 발전된 국가는 덜 발전된 국가들에게 그들의 미래상을 보여 준다”라고 했다. 물론 이러한 언급을 기계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당연히 없지만 말이다. 우리가 미국식의 사회로 변할 것이라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일이기도 하다. 미국 이외의 나라에게는, 그리고 초국적 자본의 지배블록 밖의 노동자계급에게는 이것은 하나의 재앙이 될 터인데, 그러한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이 제시하는 강력한 궤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미국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바로 이러한 점이 에릭 포너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저자인 ‘에릭 포너(Eric Foner)’는 말하자면 미국의 ‘에릭 홉스봄’ 같은 역사학자인 것 같다.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이면서 존경받는 역사학자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하지만 또한 미국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꽤나 정치적 보수주의자들로부터 민감한 인물인 것 같다. 마치 ‘강정구 교수’에 대해 한국 우파들이 난리를 치는 꼴이라고나 할까? 그에 대한 별칭이 ‘빨갱이 에릭 Eric the Red’ 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을 보면 에릭 포너가 단순한 학자라기보다는 정치적으로 실천적인 지식인이라는 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뉴레프트 리뷰나 먼슬리 리뷰 같은 잡지에 글을 실어 오기도 했다.

그에게 쏟아졌던 비판, 아니 언어폭력을 들어보자면,

“미국을 망치고 있는 1백인 가운데 75번째 인물”(버나드 골드버그, 언론인)

“소련 체제의 노골적인 옹호자이며 미국에 대해서는 앙심을 품은 역사학자”(존 패트릭 디긴스, 뉴욕시립대)

“단연 눈에 띄는 역사가이며 급진 분파 및 여론의 빨치산”(시어도어 드레이퍼, 역사학자)

또한 그에 대한 찬사를 들어보자면

“지난 20년 사이 가장 많은 저술을 발표한, 독창적이면서 영향력 있는 미국 역사가”(워싱턴 포스트)

“에릭 포너의 책은 미국의 모든 학교에서 읽어야 하는 필수적인 저작”(냇 헨토프, 언론인)

“에릭 포너는 다른 역사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다.”(스티븐 한, 펜실베니아대 교수)

그는 미국 역사학자 단체인 미국역사학자기구(OAH), 미국역사학회(AHA), 미국역사가협회(SAH), 세 단체의 회장을 모두 지낸 단 두 명 중 한 명이다. 그만큼 미국 역사학계와 미국 사람들에게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인 것 같다.

실제 에릭 포너의 글을 읽어보면 그다지 급진적이거나 위험한 사람 같지는 않다. 설마 이 사람이 권총이나 석궁을 들고 부시 대통령이나 대법관을 공격할 것 같지는 않다. 물론, 한 권의 책이 지배계급에게는 더 위험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한국에는 이 사람의 책이 처음으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마크 C. 칸즈가 쓴 “영화로 본 새로운 역사 2(소나무 출판사, 1998)”에 ‘역사학자 에릭 포너와 영화감독 존 세일즈와의 대화’라는 글이 번역되어 있다. 또한, 이 책을 번역한 손세호(현 평택대 미국학과 교수) 선생이 87년 ‘서양사론’에 쓴, 에릭 포너의 책인 “Nothing But Freedom(1983)”에 대한 서평이 4쪽 적혀 있을 뿐이다. 이 책에서 에릭 포너는 자신의 전공분야인 남북전쟁 이후 재건시대(Reconstruction Era)에 경제적 자원획득, 노동력 통제, 토지분배 등등의 문제에 있어 흑인노예와 농장주들의 투쟁 과정에 천착했다. 그리고 이들 간의 관계를 맑스주의적인 계급론에 입각해서 분석하고 있다.

또한, ‘진보저널 읽기모임(http://journal.jinbo.net/)’에서 먼슬리 리뷰에 실린 특집글을 번역했는데 (미국의 세기의 사회주의 잡지: 먼슬리 리뷰) 여기에 에릭 포너에 대한 언급이 딱 한 단어로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외국의 이론, 책, 주장들을 수입해서 매우 잘 버무리는 한국의 극성스러운 지식사회의 풍토를 생각해보면, 왜 ‘에릭’ 홉스봄이 알려진 만큼 ‘에릭’ 포너는 잘 안 알려졌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전진’이 꼭 ‘에릭’을 좋아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긴 요즘 ‘전진’과 ‘에릭’의 가는 길이 다르기는 하다.) 홉스봄이 영국에 국한되지 않는 세계사적 또는 유럽다국적 역사를 정리했다면, (영토로 보면 비슷하지만) 포너는 공간적으로 미국에 한정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 다르게 보자면, 한국의 진보적 서양사학자들이 게으르며, 특히 미국사 교수들이 너무나 ‘미국적’ 시각을 가져서인지도 모르겠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한국의 역사는 영국보다는 미국과의 상호작용이 너무나도 많았음에도 말이다. 오히려 김동춘 선생의 책(『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창비, 2004)이나 백승욱 선생(『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그린비, 2005) 같이 사회학자들의 분석들이 좀 더 대중적이거나 진지한 것 같다.

 

독일의 사회학자 좀바르트가 똑같은 질문을 던진 지 80년이 지났다고 한다. 그런데 에릭 포너가 보기에는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지금도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별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다고 한다.

첫째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너무 탈역사적으로, 추상적으로 취급하거나 상대방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마치 사회구성체 논쟁이 떠오르지 않는가?
둘째로, ‘부정의문문’에서 탐구를 시작했으니 대답이 탈역사적인 대답밖에는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질문’이 정확치 않은 바는, 유럽의 ‘사민당, 혹은 노동당’이 사회주의 정당 혹은 사회주의 정치라고 할 수 있는가와 관련이 된다. 사실은 이 질문은 미국에는 ‘사민당’, ‘노동당’이 없는 현실, 민주당과 공화당의 양당제라는 현실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에릭 포너가 보기에는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 라는 질문보다는 ‘왜 미국에서 사회주의가 한때 세력을 얻었다가 퇴장했느냐’ 혹은 ‘왜 유럽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주의적 전환이 일어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이 역사적 질문이며, 해답 가능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서유럽 사민주의는 포너가 보기에는 ‘마르크스주의 원론과 근본적으로 배치’되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의 좌파 정당들은 사회주의보다는 자유주의와 평등주의를 퍼뜨리는데 더 많이 이바지했으며,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추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미국 예외론’적 질문,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는 없는가?’라는 질문은 흔들리고 만다. 그렇다고 ‘미국 예외론’을 버리는 것이 자본주의 국가는 모두 똑같다는 것(사회과학적으로는 수렴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통적 양상을 가지고 ‘미국 예외론’을 설명하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계급운동이 노조 중심의 경제주의나 사회민주주의적 개량주의의 한계 안에 갇혀 있는 현상’은 미국에서 뚜렷한 바와 똑같이 유럽도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이무어 마틴 립셋의 “미국 예외주의(후마니타스, 2006)”와 비교해볼 수도 있다. (트로츠키주의에서 네오콘의 1세대로 전향한) 립셋의 ‘미국 예외주의’는 뛰어난 저작이기는 하지만, ‘미국인들의 자민족 중심주의 혹은 노골적인 우월주의 정치선전’에 빠져들게 만든다는 비판이 있다. ‘우리는 다르다’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자만심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튀는 행동(예를 들어 전쟁수행)의 알리바이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사회주의의 운명과 관련해 여러 가지 해석을 살펴보자.

첫째, 미국 노동자들이 현재의 조건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투쟁에 나서기보다는, 서부 이주 등 노동이동을 택한다는 이른바 ‘변경 테제’가 있다.(프레드릭 잭슨 터너) 일리가 있는 설명이기는 하나, 포너가 보기에는 ‘사회적 유동성은 정치적 안정성을 높이기보다는 해치는 교란 요인’일 수도 있기 때문에 위의 테제는 설명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둘째, 미국인들의 국민성 자체가 계급의식이나 사회주의는 물론 다른 급진주의에도 적대적이었다는 설명이다.(루이스 하츠, ‘일치’학파) 미국인들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따라서 로크식 개인주의 관점이 지배하게 되었고, 따라서 ‘봉건주의가 없으면 사회주의도 없다’는 식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식화에는 흑인이나 여성 등의 집단은 아예 분석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이러한 미국의 ‘통합성’에 대한 서술은 신노동사가 등장하면서 깨지게 되었다. 또한, 남부지역은 ‘봉건적’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여러 면에서 ‘전부르주아적’이었다는 것이다. 하츠의 논리대로라면 미국 남부는 사회주의의 온상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또한 미국 독립전쟁은 로크식 개인주의보다는 공화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포너가 보기에는 비자유주의적 사고방식 때문에 사회주의로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특정 형태의 급진적 관점이 끈질기게 살아남으면서 사회주의가 해야 할 역할을 대신했다는 것이다.

셋째, 미국 노동계급의 분열로 인해 사회주의 가능성이 없어졌다는 분석이 있다. 이 분석은 라이히, 고든 등의 분석인데 한국에도 번역되어 있다.(『분절된 노동, 분할된 노동자』, 신서원, 1998년. 노동시장론 등에서는 매우 중요한 저작이다.) 이들을 사회적 축적구조론자라고 일컫는데, 이들이 보기에는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하나의 거대한 단일 계급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종에 따라, 종족에 따라, 성별에 따라, 숙련에 따라 점차 여러 ‘노동계급들’로 분열되고 있다는 것이다.1) 한국  또한 이러한 분열이 노동시장 내 분절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또한 다양한 인종적 배경이 계급의식을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포너가 보기에는 이러한 사실은 분명 존재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나타나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보편적인 원인을 가지고 ‘미국 예외론’의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종족적 소속감이 특정 상황에서는 강력한 저항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넷째, 어쩌면 이 질문은 기각 여부와 상관없이 매우 중요할 수 있는데, AFL-CIO(미국노총)의 문제이다. 현재 미국의 총연맹은 ‘역사적인 분열’을 거쳐 두 개로 나눠져 있지만, 어쨌든 간에 미국노총은 그동안 흑인, 여성, 신이민자들 등이 노동운동에 참여할 수 없는 구조였거나, 노조 지도부가 계급투쟁보다는 자본과 타협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현실을 봐도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다. 말하자면 좌파들의 전통적인 주장이기도 한데, 에릭 포너가 보기에는 그렇다면 ‘잘못된 지도부’를 왜 조합원들이 선택하는 것인가? 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고에는 지도부를 제외한 나머지 조합원이나 미국 노동자들은 한결같이 단결돼 있고 전투적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는데 이를 뒤엎는 사례도 얼마든지 많다는 것이다. 예전 98년 당시 한국에서도 이런 식의 주장이 떠돌 때, 상당히 진위가 의심스러웠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다섯째, 미국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공짜로 주워졌기 때문에, 즉 미국 정치체제의 성격으로 인해 사회주의가 성공하지 못했다는 설명이 있다.(셀리그 펄먼) 하위적 요소로는 승자독식 대통령선거 제도 등이 양당제를 고착화시킨 점도 들 수 있다. 또한 미국 정치는 뉴딜 정책에서 보듯이 개혁 요구에 상당히 수용적이었으며 따라서 노동자들이 사회주의라는 정치적 ‘오버’를 할 필요가 없었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또한 사회당과 IWW에 대한 탄압에서 보듯이 직접적 탄압도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설명들을 모두 묶어서 포너는 다른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양상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미국보다 더한 탄압들도 있었으며(독일이나 스페인), 다른 설명들도 너무 지엽적이라는 것이다.

위와 같은 설명들이 대체로 ‘외재적’이었다면 사회주의 운동 ‘내재적’으로 실패의 요인을 따져볼 수도 있겠다. 여기에는 IWW, 사회당, 공산당 등의 역사적 분석이 필요하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 사회당의 노동계급과의 상대적 거리감과, 원칙성이(유럽과 다른 반전의 원칙을 고수) 미국 사회당을 몰락시켰다는 점. 미국 공산당은 유럽 사민주의 정당처럼 전시 국가 방위에 협조했다가 노동계급으로부터도 멀어지고 탄압에도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원칙이냐, 생존이냐 하는 점이 중요할 수 있다. 일종의 선택이 필요한 시기가 있는 것이다. ‘역사적 인정투쟁’을 선택하고 장렬하게 전사할 것이냐, 현실의 운동과 대중을 지키기 위해 잠시 ‘유연과 눈가림’을 할 것이냐? 언제나 투쟁에 있어서 다가오는 딜레마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 대해서는 설사 다소 주관적인 영웅심이나 다소 패배적인 느낌이 들지도 모르지만 두 개의 탁월한 저서 마이크 데이비스의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창비)와 리차드 O 보이어, 모레이스의 『알려지지 않은 미국 노동운동이야기』(책갈피)를 볼 필요가 있다. 또는 아주 최근에 나온 존 리드 평전(아고라, 2007)이나 워렌 비티가 주연한 영와 ‘레즈’를 참고할 수도 있다.

마지막 결론을 보자.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 하는 질문에는 바로 시간적으로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는 식의 논리가 깔려 있다. 유럽이 걸어간 사회주의 정당(사실은 사회주의를 포기한 사민주의)길을 미국이 따라와야 하는데 왜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마치 토끼가 지나간 길을 거북이가 따라와야 하는데 왜 거북이는 그 길로 안지나 갔을까? 묻는 것이다.

포너가 보기에는 토끼는 그 길로 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세히 보면 신자유주의 시대에 미국화가 진행되면서 유럽이 미국의 길을 뒤따라오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거북이가 저 앞에 있고, 토끼가 거꾸로 따라오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대중정치, 대중문화, 대량소비가 유럽보다 미국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아래서 사회주의적 정치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느냐 하는 딜레마를 미국 사회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부딪쳤다는 것이다. 계급이념 소멸에 관해 유럽은 미국의 사례를 보고 타산지석으로 삼으라는 메시지다. 그렇게 본다면,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왜 없는지 따지기 전에 너네들은 있었는지, 그리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미국처럼 되지 않으려면 뭘 해야 하는지 잘난 척 하지 말고 따져봐야 할 일인 것이다. 예전 90년대 초반 신경영전략이 대우조선을 뒤덮으면서 노동조합 활동이 힘들어졌을 때, 현대중공업 활동가들에게 대우조선 활동가들이 ‘너네들도 준비해라, 곧 닥친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한 공장에서 어쩐다고 될 일인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쩌면 중공업 활동가들은 당시 내부 준비를 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현재의 ‘세계혁명’의 출발이자 완성은 ‘미국혁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직된 미국 노동계급에게 이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고, 미국 내 다양한 내부 식민지들의 노동계급의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하고 있는 인종, 계급, 성, 정체성에 착목해야 할지도 모른다. 또는 포너의 기대처럼 유럽과 미국의 새로운 급진적 흐름이 부상할 지도 모른다. 또한 이러한 흐름이 미국 역사에서 되풀이 되는 그저그런 흐름으로 끝날 수도 있다.

우리의 상황은 어떨까? 아니, 우리는 유럽이 미국에게 던지는 약간은 오만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지도 못했다. 계급의 조건만을 보자면야 미국이나 한국이나 매한가지이며, 역사적 전통으로 따져 봐도 미국보다 나은 상황은 아닌 것 같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형성되었는가? 어쩌면 그럴 수도,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단일한가? 이 질문도 난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질문, ‘미국의 사회주의’를 따져보는 것은 우리에게는 학문적 관심이 아니다. 이미 이러한 제목을 가진 책들이, 논문이, 연구서들이 한국에도 나와 있고, 외국에도 나와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에릭’의 힘을 빌려 ‘전진’의 지렛대는 무엇이어야 하며, ‘전진’이 피해가야 할 것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따져봐야 하는 점이다.

과연 ‘전진’이 부르는 사회주의는, 그 애매하기 짝이 없는 ‘민주적 사회주의’는 사민주의인가? 그 이상인가? 우리의 사회주의는 역사적 조건을 충족시켜 가고 있는 중인가? 우리를 옥죄고 있는 노동시장과 정치제도는 어떻게 바꾸어야 하며, 한국 노동계급(들)의 역사적 배경인 한국전쟁, 북한, 기업별 노동조합, 계급정치와 의식의 후진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미국 노동계급, 또는 사회주의에 대한 질문에 순진한 호기심을 머금기에는 현실의 과제는 너무나 크기만 하다.

역사적 법칙을 그야말로 법칙으로 인식하고 있는 자는 단지 ‘열심히’만 살면 될지 모르지만, 법칙이 ‘실천’을 매개로 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또한 그 ‘실천’의 귀결은 ‘승리의 필연성’ 못지않게 ‘실천의 패배’로 역사화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악몽처럼 인식해야만 한다. 필연성이 가능성으로 전환되지 못하면 ‘승리의 필연성’은 ‘실패의 가능성’이 될 것이다. 봄에도 눈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패배의 가능성을 인식하는 것은 실천적으로 매우 중요할 것 같다. 그 악몽이 현실화되었을 때는 주체와 역사에게 치명적인 상황이 될 것이다. 이는 맑스가 가르쳐 준 무서운 잠언이기도 하지만, 미국 역사가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책의 원제는 Who Owns History?, 누가 역사를 소유하는가 이다. 노동계급이 역사를 소유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부르주아지가 역사를 소유한다는 것이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같이 사이좋게 역사를 소유할 수는 없다. 중간은 없다. ‘전진’은 이 먹고 먹히는 길에서 작은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한국의 노동계급이, 운동이, 얼마나 많은 성취를 이룰 지는 우리 같이 힘을 합쳐보아야 할 것이다. 포너는 미국의 사회주의의 운명에 대해 좀 더 기다려봐야 한다고 했다.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소심할 필요도 없지만, 잘난 척 할 필요도 없다. 가보는 것이다. 나는 ‘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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