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시대 초국적기업의 실체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80
장시복 지음 / 책세상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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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시대 초국적기업의 실체 -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080

장시복 (지은이)

정   가 : 5,900원

2004-04-25

    아수라백작에 마주선 노동자 -《세계화 시대 초국적기업의 실체》

양솔규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리뷰 출처: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2004년 5월호

http://www.ynlabor.net

이 책의 서두는 의미심장한 에피그랩(epigraph)으로 시작한다.

당시의 어떤 학자들도 그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 한 이와 같은 크기를 지닌 어마어마한 괴물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그런데 그것은 존재하고 있었고, 그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 없었으며, 사람들의 사고를 신비의 세계로 몰아가는 경향에 비추어 볼 때, 이 초자연적인 존재의 출현이 전 세계에 일으키는 반향은 능히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그것을 우화로 돌리는 건 생각지도 말아야 한다  -쥘 베른, 《해저 2만리》

청바지 리바이스는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데님을 사고, 프랑스로 수송하여 청바지를 만들고, 벨기에에서 이 청바지들을 세탁하고, 영국에서 개발된 텔레비전 광고를 통해 독일에서 청바지를 판매한다. 단지 유럽만의 일이 아니다. 여기에, 한국의 공장과, 아시아의 하청기지를 대입하면 한국을 본국으로 하는 초국적기업의 사례가 만들어진다.

이미 '한국의 대표 자본'이라고 일컬어지던 현대, 삼성 등의 주식소유는 50% 이상이 외국자본이 잠식하고 있고, 제일은행 등 금융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추세와 더불어 자본이 노동자들에게 떠들어대는 협박도 세계적인 유사성을 띄고 있다.

전 IBM 사장이자 독일 전경련 회장인 올라프 헨켈은 1995년 가을에 '값비싼 독일 노동자'에 반대하는 뻔뻔스러운 선동을 계속했다. 그는 독일 노동자들의 임금이나 복지 비용이 너무 높기 때문에 독일 회사들은 매년 수십억 달러를 해외에 투자하고 있고 바로 이 때문에 자본과 함께 일자리도 해외로 빠져나간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일자리는 독일 최고의 인기 수출품이다. 《세계화의 덫》, 영림카디널, 278쪽

조중동 등의 언론에서는 독일인이 떠든 '글로벌한 논리'를 동일하게 구사하는 한나라당, 열린우리당, 전경련의 입장을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다. 요지는 이렇다. 해외자본유치와 투자촉진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해야 하고, 따라서 임금인상투쟁 등 노동조합의 권리요구는 '시대착오적인 공공의 적'이라는 것이다. 대세에 순응하지 않을 때는 굶어 죽는 것이고, 대세에 순응할 때 노예가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마주했던 '선성장 후분배'는 업그레이드되어 돌아왔다.

다른 한편으로 초국적기업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러한 초국적기업이 지배하는 세계적 자본축적 방식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는 한, '죽어라 일해도 살 수 없는 빈곤의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이해는 단지 출발선일 뿐이다. 사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있어 '초국적기업에 대한 이해'라는 출발선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후들 거리는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적 자본축적 방식에 대해 정면으로 저항한다는 것은 가당키나 한 일일까?

불행하게도 탈출구를 발견 또는 '창조'하는 것은 간단치 않다. '초국적기업'과 연관된 '국민국가', '세계화', '초국적기구' 등의 무시무시한 원시림에 직면하면 뇌는 하얗게 되면서 작동 중지된다. 게다가, 저항의 상상력을 가로막는 또다른 거인 '중국'이 등장하게 되면 무장해제 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만, 초국적기업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 아니 '창조'할 수 없는 한, 방어는 언제나 '구멍난 바가지' 신세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자명하다. 죽느냐 사느냐 그 갈림길에서 어차피 사는 길을 택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이해하고 싸우는' 방법말고는 없겠다. 더군다나 초국적기업에 대한민국 노동자들은 이미 충분히 마주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비로운 존재, 거역할 수 없는 힘이라고 여기지만, 거품을 거둬내고, 착시현상을 교정하고, 두 눈 부릅뜬다면, 누가 아는가? 노동자들의 '홈런'이 터질지도 모른다. 3경기 빈타에 허덕인다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슬럼프는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문제는 초국적기업이라는 현대의 종교, 거대한 괴물의 이마에 파열구를 내기 위해서는 '선구안'이 필요하다. 출발선은 초국적기업이다.

1. 초국적기업이란 무엇인가?

다국적기업이 지닌 모호함을 벗어나기 위해 초국적기업(transnational corporations)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즉 '한 국가의 관심 등을 초월'한다는 의미가 강조되고, 국적이 여럿이라는 오해를 피하게 해준다. 그러나, 기존의 초국적기업의 정의는 다국적기업과 대체로 유사하다. 따라서 초국적기업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초국적기업은 다섯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첫째, 거대한 규모를 가지고 본국의 기반을 바탕으로 자본축적을 세계적 규모에서 수행하며, 이러한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전략과 조직을 갖고 있는 기업이다.

둘째, 세계적인 활동을 전개하며, 이를 뒷받침해주는 전략과 조직을 보유한다. 이른바 '세계적 기업 조직 네트워크'를 구성한다.

셋째, '본국의 기반을 넘어서서' 세계적인 자본 축적을 하는 기업이다.

넷째, 초국적기업이라는 용어는 국민국가를 완전히 벗어난 자본의 세계적 축적 과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본국의 기반을 무시한 초국적기업은 존재하지 않으며 초국적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국민국가의 자본 축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다섯째, 초국적기업을 자본 축적 과정의 세계적 확장으로 파악하게 되면 '노동의 세계적 통일과 분열'을 분석할 수 있다.

2. 거대한 아수라백작의 탄생과 노동의 일상사

초국적기업은 전세계에 포진하고 있는 자신의 기업 네트워크간에 제조뿐 아니라, 조립, 판매 과정에서 활발한 기업 내부 거래를 한다. 이러한 기업 네트워크간 기업 내부 거래는 조세를 회피하게 되고, 그 결과 국민국가의 결정권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초국적기업은 단일 기업이라기보다는 '그룹 형태'를 띤다. 세계 물공급의 70%를 독점하는 '비방디'는 대한민국 청소년이 열광하는 컴퓨터 게임 '디아블로'와 '웤크래프트' 같은 게임과, 밥 말리, 너바나 등의 음악 CD를 생산하고, 영화 글래디에이터와 쉰들러 리스트를 만들었으며, 휴대폰 또한 만든다.

초국적기업이 이렇게 전세계에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전세계적 독과점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가 될 것이다. 자신들끼리 위협적 경쟁도 벌이지만, 또한 활발하게 협력도 한다. 99년 전세계 자동차 생산량 5,600만대 중, 도요타, GM, 포드, 폭스바겐, 크라이슬러 5개 회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54%였고, 현대, 피아트, 르노, 혼다 등 10대 기업의 생산 비중은 무려 80%에 달한다. 단지 자동차 산업뿐 아니라, 반도체, 타이어, 석유, 곡물 회사 등도 마찬가지이다.

80년대 들어 세계 경제의 구조적 위기가 심화되자 거의 전 산업에 걸쳐 초국적기업 간 대형 합병이 줄을 이었고, '합병의 도미노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의 공기업 사유화와 연관된 국제 인수, 합병도 이루어졌다.

물론, 경쟁이 격화된다고 해서 무조건 몸집을 부풀리는 게 능사는 아니다. 기술 제휴, 조달 제휴, 생산 제휴, 판매 제휴 등 다양한 전략적 제휴 또한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의 경우, 플래시 메모리의 경우 소니와 제휴하고, 인터넷 솔루션의 경우 야후와 제휴하며, 방위산업은 탈레스, 인터넷 게임은 배틀탑, 세탁기 부분은 미츠비시, 마케팅은 ALO-타임워너, 코펫 PC는 마이크로소프트와 제휴한다. 이러한 제휴를 고려하면 전세계 6만개가 넘는 초국적기업 간 거의 무한대의 제휴의 조합을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초국적기업은 73년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되고 변동환율제가 도입되면서 금융 변수들을 줄이기 위해 금융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 초국적기업 간 경쟁이 격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서로간 엄청난 출혈을 일으키는 금융 자본의 경쟁 속에서 파산도 줄을 이었다. 초국적기업이 금융 자본을 이용해 단기 수익을 노리면서 애초, 금융 불안정성을 벗어나기 위한 외환 시장 개입은 온데 간데 없고, 금융 불안정 심화의 한 주체가 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생산과 금융의 혼합, '아수라백작'은 이렇게 등장했다.

그렇다면, 초국적기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노동의 세계는 과연 어떠할까?

초국적기업이 생산입지를 옮기든, 노동력을 수입하든 간에, 한번도 만나본 적 없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는 수많은 노동자들은 자본 순환의 세계적 분할 과정에 편입된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이 대우받는 것은 아니다. 초국적기업의 피라미드형 네트워크는 노동의 피라미드형 네트워크를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된다. 위계화된 분절은 초국적기업의 자본 축적 전략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동하고 다시 정립된다. 이러한 위계화된 분절 속에서 전세계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경쟁할 수밖에 없다.

자본은 생산 공장을 다른 나라로 옮기겠다고 '노동 위협(Labour threat)'를 끊임없이 한다. 한국의 노동자들이 공장 이전 예정 지역, 예를 들어 중국이나 동남아의 노동자들과 경쟁 관계에 놓여져 있다는 것을 부각시킴으로써 노조의 임금 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을 포기하게 만든다. 이러한 노동위협은 'MBC 100분 토론'이나 한나라당, 전경련의 발표문, 조중동 신문의 사설에도 흔히 나타나고 있다. 전경련의 패널이 '대한민국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아니다. 법과 규제가 너무 많다. 임금이 너무 비싸다. 중국이나 동남아에서는 러브콜이 날라든다'면서 노동위협, 자본탈출을 선동한다. 노동자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자본가들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것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초국적기업의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생산의 유연화도 급속도로 진행된다. 생산의 유연화와 동전의 양면인 노동의 유연화는 노동자들간 경쟁을 격화시키고, 정규직에게는 비겁과 배신, 비정규직에게는 굴종과 포기를 강요한다. 선진국의 노동자들은 '고용불안정'에 신음하고, 노동조건은 급속하게 악화되고 있다. 대량감원과 비정규직화, 실질 임금의 급속한 하락 속에서 초강대국 미국의 노동자들은 '제3세계화'하고 있다. 후진국의 노동자들, 특히 여성노동자들은 빈곤선 아래의 최저임금과 극악한 노동조건, 멸시와 학대, 실종된 인권 속에서 일하고 있다. 그야말로 '산업혁명기'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3. 초국적기업과 국민국가의 관계

초국적기업이 전세계를 지배하면서 국민국가의 운명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몇 가지 논리를 살펴보자.

우선 '국민국가의 소멸론'이 급속하게 퍼지고 있다. 이 논리는 오마에(Kenichi Ohmae)가 주장하는 것인데, 투자, 산업, 정보기술, 개별소비자의 자유로운 이동은 국민국가의 역할을 필요 없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라이시(Robert Reich) 역시 국경이 사라진 세계 경제가 출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소멸론'과는 약간 다른 '국민국가 약화론'이라는 논리도 있다. 이 논리의 결론은 결국 초국적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고, 초국적기업의 생산, 판매 활동을 내버려둬야, 부를 창출할 수 있고, 정부는 보조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입장과 대별되는 것으로 '국민국가 재편론'이 있다. 이 재편론은 국민국가와 초국적기업의 관계는 영합(zero-sum)적이지 않으며 상호의존적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국민국가는 장기적인 경제발전의 관점에서 산업 정책을 사용해 경쟁력 있는 산업을 육성하거나, 사적 자본과 협의하여 정책을 수립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들은 초국적기업과 국민국가 어느 한 쪽을 강조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국민국가는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 자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국민국가는 '사회적 관계'이고, 자본주의 재생산을 보장하는 중요한 정치 형태의 공적기구라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과 자본간 관계와 자본 축적 방식의 조건에 따라 국가개입 형태는 여러 가지 형태(복지국가에서 신자유주의)로 변화할 수 있다.

저자가 말하는 것은 국민국가의 개입이 초국적기업에 의해 약화된 것이 아니고, 초국적기업의 세계적 자본 축적에 맞게 국민국가의 개입 형태가 변한 것이다. 따라서 국민국가는 초국적기업의 세계적 자본 축적을 강화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초국적기업과 국민국가는 대립적 관계가 아니며, 자본이 노동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국가 개입 형태가 변한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관계의 역전 없는 상태에서, 국민국가의 힘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국민국가에 대한 착시현상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4. 초국적기업, 저항을 만나다

저자는 또한, 초국적기업에 대한 분석이 목적하는 바, 즉 이러한 지배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즉 반세계화운동, 또는 '아래로부터의 세계화'의 성과를 언급하고, 구체적인 세 가지 입장을 검토하고 있다. 첫째로, 가장 영향력있는 대안으로 거론되는 국제 케인즈주의를 검토하면서 저자는 국제 케인즈주의가 대안을 설명할 때 국가 사이의 불평등을 고려하지 않고, '민주적 UN' 등에 대해서만 강조하며, 또한 국민국가가 정신만 차리면 현재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식의 국가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한다.

두 번째 입장으로, 지역으로 돌아가자는 입장을 검토한다. 이 입장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자급자족하는 수많은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고, 또 이 공동체들이 국민국가의 역할을 어떻게 대신할 수 있는지, 해답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아침이 오면 다시 꿈에서 깨어나야만 하는 슬픔에 빠지게' 된다.

세 번째 입장으로, 좌파 자율주의 그룹의 이론을 검토한다. 저자는 네그리(Negri)의 '제국' 이론은 반세계화 운동이 국민국가에 대항하는 투쟁인 동시에 초국적 기구에 대항하는 세계적 연대 운동이라는 점을 부정하고 있고, 보이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허구적인 '제국'과 싸우는 허망한 상태에 빠진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은 2004년 4월 25일에 발간된 따끈따끈한 책이다.

다분히 요약 발췌하는 식으로 서평을 써서, 난삽하게 되었지만, 변명을 한다면, 이 책은 서평하기 까다로운 경제학 서적이라는 점, 그리고 본문 172쪽(전체200쪽) 짧은 분량에 수많은 논의와 함께, 투명한 현실을 빼곡이 담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고려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만큼 이 책은 줄줄 읽히는 책은 아니다.(내용이 어려워서는 아니다.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서 속도가 나지 않는 것일 뿐)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각주가 150개 넘게 달려 있는 것을 보더라도 저자는 '초국적기업에 대한 이해'에 많은 욕심을 부리고 있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듯이 '혼란의 시대에 쏟아지는 주장에 파묻혀 우왕좌왕하는 것을 벗어나기 위해, 신비화를 벗어나기 위해' 꼭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내용을 간명하게 정리하고 있다. 따라서, 그간의 논의들을 '빠른 시간 안에' 따라잡기 위해서는 이만한 책이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 나름대로 재미있는 비유와, 문학적 표현들은 웃음을 머금게 한다. 불어나는 소인국 사람들의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를 이루는데 있어 저자의 활발한 활동을 기대한다.

이 밖에도 저자는 초국적기구들, 예를 들어 UN, IMF, 세계은행, WTO, 다자간 무역협정 등 다양한 초국적기구들이 초국적기업의 활동을 보장해주고, 또한 이러한 기구들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미국의 패권적 영향을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초국적기업은 거대한 세계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움직인다. 흔히들 네트워크하면 위계화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하지만, 그렇지 않다. 초국적기업의 네트워크는 본사와, 지역거점, 수많은 지사와 판매망 등의 촘촘하게 구성된 위계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네트워크를 뒷받침하는 것은 정보통신혁명과 교통의 발전이다.

단지 크기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우리가 초국적기업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괴물'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새로운 존재가 '신비한 힘', 또는 '현대적 종교'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신비는 우리가 익숙한 '일자리 창출', '국가경쟁력' 논리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다. 국가경쟁력 향상과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해외자본을 적극적으로 유치해야 한다는 논리가 첫 번째 논리라면, 역으로 한국자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노동력 비용이 싼 해외로 공장을 이전해야 한다는 논리가 두 번째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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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
전순옥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

전순옥 (지은이)

*리뷰 출처: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2004년 3월호

http://www.ynlabor.co.kr

양솔규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2000년을 넘어서면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비전', '전망', '뉴(New)' 등등의 수식어를 붙인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미디어가 혼돈과 불안을 부추길수록 '미래'를 예측하는 일에 모두가 몰두했다. 이러한 현상과 더불어, 앞의 현상보다는 훨씬 값지고 의미있는, '과거'를 정리하는 작업 성과물들 역시 꾸준히 출판되었다. 흔히들 역사를 10년, 100년 단위로 끊어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역사는 그런 식으로 단절되지 않는다. 역사는 '십진법'과 '오진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역사는 현재를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살아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끊어질지 모른다. 그것은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살아있는 사람들이 쥔 '칼자루'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1000년이 주는 효과는 대단한 것인가 보다. 아무래도, 100살까지 사는 사람은 쉽게 상상할 수 있지만(모두의 소원?), 천년을 누리는 삶은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방법은 있다.

89년 겨울, 90년 봄, 수많은 '운동권 잡지'들은 80년대를 '평가'했다. 그리고 딱 10년 뒤, 99년 겨울, 2000년 봄, 운동권 잡지들은 '평가'를 중단했다. 대신 '전망'만을 내놓았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2000년 들어 노동운동을 정리하는 작업은 꾸준히, 아니 폭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90년대 후반, 마산의 김하경 선생은《내사랑 마창노련》을 내놓았다. 2000년대 들어서는 더욱 빨라졌는데, 강인순·이옥지 선생이《한국여성노동자 운동사 1, 2》를 발간했다. 오장미경 선생의《여성노동운동과 시민권의 정치》, 구해근 선생의《한국노동계급의 형성》등도 출판되었다. 단위노조나 투쟁사업장들 역시, 예전에 비해서는 "기록"에 대해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얼마 전에는 70년대 노동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5인의 구술을 묶어 낸《숨겨진 한국 여성의 역사》가 출간되었다. 이 책에는 전순옥 선생과 함께 해온 최순영, 박순희, 이총각, 이철순, 전향자의 눈물겹지만 행복했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최근에는 노동운동의 주인공 옆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그녀'들, 노동운동가 가족과 부인의 이야기를 조주은 선생이《현대 가족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내놓기도 했다.

2004년 2월말, 또하나의 저작이 우리 앞에 다가왔다. '전태일 열사의 누이'이자, 그 자신이 70, 80년대 여성 노동운동의 산 증인인 전순옥 선생의《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가 출판된 것이다(한겨레신문사).

나는 70년대에 태어났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의 주인공인 여성노동자들의 수혜를 받은 '자식'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나는 나를 '키워준 시대', '나를 양육한 사회적 존재들'에 대해 나는 익숙해야 당연하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익숙치 못하다. 무엇보다도, 70년대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더더군다나 "운동"이라는 것을 접한 이후에는 나에게 70이라는 숫자는 80 또는 87에 비해 매우 '먼' 세월, '기호'였다. 게다가 나는 불행히도 '젠더(gender)' 또는 '여성적 관점'에 대해 무지하다. 이는 '서평'을 하는데 있어 치명적인 약점이 될 것이다.

사실, 이 책의 서평을 쓰는 것은 몹시 부담되는 일이다. 저자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전태일 열사의 누이'이자 '이소선 어머니의 딸'(어쩌면 평생을 따라다니는 이 수식어가 다른 누구보다도 전순옥 선생에게는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한국노동운동사 중 70년대 1차 사료들에 입각한, '오랜 참여관찰(?)'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누누이 언급될 중요한 저작이라는 점에서, 각오할 만한 가치가 있다. 또한, 자신이 '시다'였고, 한국 노동운동의 '중심'에 있었으며, 이제 '연구자'로 돌아온 그녀에게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외국에는 때때로 존재하는 '현장노동자 출신 학자'가 한국에 등장했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다시 한번 이소선 어머니와 전순옥 선생에게 빚을 질 '영광(?)'을 얻게 되었다.

저자는 79번의 개인 인터뷰(70년대 노동운동의 주인공들, 또는 사용자)를 했으며, 4번에 걸쳐 총 28명이 참가하는 집단토론을 했다. 또한 전화, 팩스 등을 이용한 27차례의 추가 인터뷰를 했고, 저자의 동지이기도 했던 인터뷰 대상자들에게서 많은 자료를 기증받거나,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또한, '남성'들 역시도 조사대상이었는데,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사람들(김영삼, 최장집, 김승호, 김문수, 이태호, 김영대, 장기표, 김세균, 김금수 등등) 역시 저자의 조사대상이었다. 이러한 조사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이소선 어머님'의 칠순잔치였다고 한다.

저자의 관심사항은 남성 중심의 유교적 문화 속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어떻게 해서 민주노동조합운동을 태동시켰고, 독재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었는지, 그리고 이러한 여성노동자들의 운동이 무시당하고 잊혀지고,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는가 이다.

책을 쓰는 작가나 역사가들은 전태일이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바로 그 사람들, 전태일에게 가장 고무받고 동기를 부여받은 그 사람들이 남한 사회에 공헌한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저서들은 예외 없이 민주노동운동의 탄생 시기를...그의 죽음 이후 거의 20년이 지나서라고 보고 있다. 360

이 책 10장의 소제목은 "보이지 않는 존재"이다. 또한, 앞서 소개한, 70년대 선배 여성노동운동가들의 구술을 묶은 책의 제목은《숨겨진 한국여성의 역사》이다. 한국 노동운동사 속에서 70년대 경공업 여성 노동자운동이 정당하게 자리매김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반론이다.

동일방직 지부장이었던 이총각은 다음과 같이 구술한다.

남한 노동운동이 1987년 이후 엄청나게 진보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외부인들은 그 모든 일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났다는 인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오늘날 노조 지도자들이 누리는 안락한 생활은 그들 자신이 노력한 결과가 아니라 이전 세대가 투쟁해 온 결과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1970년대 노동자들의 희생은 모두 잊혀져버렸다. 363

저자는 70년대 여성노동자 운동을 '경제주의적 투쟁'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거부감을 표시한다. 전두환 정권이 YH, 청계피복 등 70년대 민주노조를 파괴하려고 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탄압으로 인해 70년대 민주노조들이 이루었던 공적들이 심각하게 잠식당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전통적인 농업사회의 가족에서 벗어난 70년대 도시의 여성 노동자들은 전통적인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조건들로 변화했고, 이 속에서 여성들은 '남성의 권위를 사실상 넘어서는 집단적인 세력'으로 스스로 위치를 잡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남한 남성 노조운동가들은 박정희 시대 내내 자랑할 만한 성과를 이룬 것이 거의 없었'고 따라서 '그런 사실을 공식적인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학생운동가 출신 활동가들은 '과학적인 원칙'을 반대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70년대의 역사를 지워버렸다는 것이다.

80년대 학생 출신 운동가들의 '관념적, 기계적 평가'와 '딱지 붙이기'를 통해 70년대의 역사가 심각하게 파손되거나, 의도적으로 '선별된 전승'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단순하게 70년대 민주노조들을 '경제주의적 투쟁으로 매몰'되었다는 평가에 의심을 품어볼만 하다. 경제주의적 투쟁과 정치주의적 투쟁의 선은 때때로 불분명하며, 중첩적이다. YH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 전후의 논의과정, 김경숙의 죽음과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 대구를 거쳐 터져나온 부마민중항쟁, 박정희 암살 등 연결되는 일련의 과정은 개발독재 시대에 노동운동이 자신의 정치적 역할을 감수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간에 70년대 노동운동은 박정희 정권과 끊임없이 대면해야 했다. YH 노동자들은 이미 그 사실을 간파했고, 따라서 농성장소를(미대사관, 조흥은행, 공화당, 신민당 중) 신민당 당사로 선택했던 것이다(337쪽).

전순옥 선생의 분석대상은 70년대 노동운동이며, 특히 청계피복노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동일방직, 원풍모방, YH노동조합이 아니라, 왜 하필 청계피복노조일까? 첫째로,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한국 노동운동의 새로운 신호탄이었고, 열사의 주요 활동 공간이 청계천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청계피복노조는 70년대를 넘어 80년대에도(비합법시기를 포함해서) 활동을 계속 유지해 왔다는 점이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셋째, 청계피복노조는 구로동맹파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구로의 주요 활동가였던 심상정은 구로동맹파업을 지지·엄호해줄 수 있는 본부로 청계피복노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요청했고, 청계피복노조는 기꺼이 제공해 주었다. 구해근,《한국노동계급의 형성》, 창비, 183쪽). 청계피복노조에는 당시 학출 활동가, 광범위한 지식인 집단, 교회조직, '민주단체', 노동운동가들이 매개된 일종의 활동가 네트워크 센터의 역할 또한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후, 청계피복 노조는 구로에 있던 여타 조직과 함께 '정치적 노동조합주의'를 내세웠던 '서노련'에 참가했다. 이러한 사실은 70년대 노동운동의 대표조직이었던 청계피복노조가 80년대에도 꾸준히 활동영역과 이슈를 넓혀 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70/80년대, 경제주의/정치주의 등등으로 구분, 평가되는 선들의 가운데에서 '역사 매개자'(?)의 역할을 담당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해준다. '서노련' 내에서 청계피복노조 혹은 70년대 활동가들이 어떤 위상을 가졌는지,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비판과 그로 인한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86년 5월, 집회장에 올려진 집체극에서 예수를 배반한 가롯 유다에 '이소선 어머니'를 비유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마음 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다(371쪽). 어쨌든 전순옥 선생이 주요하게 복원시키고자 했던, 70년대 노동운동의 정당한 평가에 있어 '청계피복노조'만큼 적당한 사례는 없었을 것이다.

구해근 선생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왜곡된 성문화에 기초한 시각과 근시안적 역사관, 이 두 요소로 인해 한국 노동운동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주변적이고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실제로 1980년대 중반까지 민주노조운동에 활동적이었던 대다수 여성들은 산업현장을 떠났다. 그들 대부분이 주부가 되었지만, 대부분 평범한 가정주부를 거부하고 계속해서 여러 형태의 사회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계급불평등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노동계급의 강한 정체감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70년대 노동운동과 80년대 초중반까지의 노동운동이 일정하게 새로운 불씨를 잉태하고,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70년대 노동운동에 대한 정당한 위치지움 또는 격상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87년 7,8,9 노동자대투쟁의 역사적 의미를 퇴색시킬 수는 없다. 구해근 선생의 언급처럼, 70년대와 80년대를 총체적으로, 장기적 관점으로 보면서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 '단절적 면' 역시 쉽게 부정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양자는 경쟁적 관계가 아닐 것이다. 70년대 운동이 80년대 운동에 스며드는 그런 관계가 아닐까? 마치, 어머니의 영향을 부인하는, 혼자 커온 듯이 말하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아들'처럼. (하지만, 아들에게는 아들 나름대로의 인생이 있다.)

또 다른 문제로, 많은 페미니즘 시각의 연구에서는 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이 '여성을 위한 성(gender)에 관련한 쟁점'에 제대로 개입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강인순 선생은 여성노동자 운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목적으로 한 연구에서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열악한 노동조건하에서, 또 최저생활이 보장되지 못해 생존만이 중요했던 상황에서 남녀를 막론하고 노동자이기에 인간다운 대우를 받지 못하는 존재조건은 여성노동자들로 하여금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의식조차 잊게 하였던 것이다.《한국여성노동자운동사1》, pp.29-30.

이러한 평가에 대해 오장미경 선생은 "본질적인 질문에 정면승부하기보다는 그것을 살짝 비켜간 듯한 느낌을 준다. 단지 '환경적 탓'만이 이유였을까? 우리 사회에서 여성주의 의식이 형성되지 못한 좀 더 깊이 있는 구조적·심리적 분석과 설명을 해냈어야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전순옥 선생은 이러한 페미니즘 시각의 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에 대한 비판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반박하는 명확한 설명은 없는 것 같다. 다만, 남성 중심 어용 노동조합이자 국가 통제기관인 한국노총과의 대결, 섬유노조와의 대결 과정은, 그 자체가 여성노동자들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이었으며, 70-8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의 독자적 행보를 잉태한 '산파'였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또한, 전순옥 선생은 페미니스트들이 70년대 사건들을 분석하고 있지 않고, 서구에서 나온 페미니즘 모델들을 이용하는 것을 언급한다. 간접적으로 이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여기에도 오장미경 선생의 강인순 선생의 《한국여성노동자 운동사》에 대한 비판이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힘주어 주장한 '여성노동자 운동사' 서술의 필요성을 반감...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여성노동자'에 관한 역사이지, '여성주의적' 관점에 입각하여 쓰여진 역사라고 하기 어렵다...'누락되고 배제된 여성의 역사를 채워넣고 복원하는 작업'이지 '새로운 관점에서 기존의 역사서술을 비판, 수정하는 젠더사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는 없다.《기억과전망》, 2003, 겨울호, p.321.

여성노동자운동의 복원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시각의 비판에 대한 '반증'도 전순옥 선생의 연구에서 중요한 목적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노동운동에서 성 의제(gender issue)가 제기되지 않는 한, 이 사회의 실질적 평등의 길로 나가는 것은 매우 요원하다. 계급적 문제는 '순수하게 계급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책장을 넘기다보면, 70년대 노동운동의 치열함과, 순수함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70년대 노동운동이 교회와 맺은 깊은 인연 때문일 수도 있는데, 온정주의적인 분위기와 정신적 충만함 같은 것은 전순옥 선생의 문장과 잘 어울린다. 하지만, 영어로 쓴 박사논문을 다시 우리말로 옮겨서 그런지, 문장이 매끄럽게 못한 부분은 흠이다.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는 그동안 묻혀있던 많은 자료들이 인용되고 검토됨으로써 우리에게 70년대의 역사적 사실들을 한층 흥미롭게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특히, 저자가 발로 뛰면서 찾아 낸, 한국노총 섬유노련 김영태의 '반동적 행위', 그리고 이를 국제노동계에 알렸던 민주노조의 대응, 국제노동계가 취했던 행동들과 박정희 정권의 위기의식, 김재규의 재판 녹음기록 등은 이 책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70년대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이 책 이외에도《동일방직노동조합운동사》나《원풍모방 노동조합 활동과 투쟁》,《해태제과 8시간 노동을 위하여》, 청계피복과 YH노동조합운동사 등은 아직도 주변을 찾아보면 많이 남아 있는 책들이다. 이 책들에는 70년대 노동운동이 지녔던 민주성과 대중적인 실천들, 짜임새 있는 교육프로그램과 조직의 치밀함, 여성노동자들의 고통뿐만 아니라 열망과 연대감에서 오는 동료애 등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지금은 절판된, 민종덕 청계피복노조위원장이 이소선 어머니의 구술을 받아 쓴,《어머니의 길》(돌베개, 1990)도 소중한 우리 운동의 역사 기록물이다.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노동운동에 대한 기록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여러 가지 관점에서 우리 노동운동을 조명하면 할수록 그 빛은 더욱 화려할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노동열사들이 제 몸을 던지기도 했고, 많은 노동운동의 선배들이 지금도 산 채로 제 몸을 던지기도 한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하지만, 노동운동은, 인간해방의 가치는 그럴 수 없다. 한국 노동운동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싶은가? 천수를 누리는 길, 있다. "실천의 기록과 전파, 공유와 토론을 통한 계승" 바로 이것뿐이다.

"기록하지 않는 것, 노동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2004.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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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 지구를 뒤덮다 -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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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20일

노동사회교육원 회보 <연대와 소통> 창간호 원고

  

오늘, 슬럼과 마주친 지구

 

양솔규(노동사회교육원 회원)

 

<슬럼, 지구를 뒤덮다>, 마이크 데이비스, 돌베개, 2007년 7월

창원 터널을 빠져나와 남산동으로 향하는 길에 우리를 반기는 것은 높게 치솟은 아파트들이다. 그것도 <통일>이니 <두산>이니 하는 사원기숙사가 아니라, 새로 지어진 상업적인 아파트들이다. 창원 도시가 외곽으로 확장되고 있고 주거공간은 상품이 되었다. 도시는 행복해지는 것일까?

창원을 처음 봤을 때 이 도시는 너무 ‘행복’해 보였다. 길가에 심어진 푸른 잔디와 2층 빨간 벽돌 양옥집들이 평지에 가지런히 정렬한 모습은 공업도시의 이미지라기보다는 차라리 미국 영화에 나오는 중산층들의 마을 모습과 흡사했다. 또한, 군데군데 있는 공원들의 잔디와 분수대, 그리고 ‘평지’는 서울이나 부산과는 질적으로 다른 행복을 계획하는 도시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그러하기에 어쩌면 “슬럼”이라는 단어가 ‘창원’ 아니,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한국의 도시들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2003년 UN 인간정주위원회에 따르면, 한국은 슬럼 인구수로는 세계 12위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눈에 띄지 않는 셋방살이”가 새로운 슬럼을 형성하고 있다. 판잣집이 아니라고 슬럼이 아닌 게 아니다. 홍콩이나 도쿄, 서울과 같은 글로벌 메가도시(Mega City)에도 슬럼은 곳곳에 형성되고 있다.

우리에게는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창비, 1994)로 잘 알려진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 가 쓴 책 <슬럼, 지구를 뒤덮다>(원제: Planet of Slums)가 번역 출간되었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1946년에 태어났다. 정육점 직원, 트럭 운전수(그 유명한 팀스터 노조) 등으로 일했으며, 미국 신좌파 학생 조직인 SDS(민주사회를위한학생연맹) 등에서도 활동했다. 영국의 뉴레프트리뷰(신좌파평론) 편집진으로 일하며, 맑스주의적 환경주의, 도시사회학, 역사학 등을 공부하는 학자이다.

마이크 데이비스가 유명한 이유는, 단지 현장활동가와 연구자의 이력을 거치면서 형성된 이론과 실천의 접합 때문만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대단히 성실하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방대한 각주와 자료 목록은 그의 지적 성실함을 반영해 준다.

슬럼(slum)은 간단히 말하면 도시빈민 주택지구를 말한다. 우리로 치면, 달동네, 판자촌이라고 보면 되겠다. 옛날 서울의 상계동, 사당동, 봉천동 등에 거대하게 형성된 동네를 연상하면 된다. 그런데, 슬럼이 어쨌다는 것일까? 이 책의 부제는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이후 슬럼은 세계 도시의 ‘대세’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2007년 혹은 2008년은 세계사적인 시각에서 보면 획기적인 분수령이 되는 시기이다. 바로, 전 세계 인구 중 농촌 인구보다 도시 인구가 더 많아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도 20세기는 거대한 농촌인구를 간직하고 있었다. 특히나 인도, 중국, 남미, 동남아 등 수많은 ‘남반구’의 농촌은 거대한 대지의 크기만큼이나 압도적인 세계 인구를 ‘논’과 ‘밭’에 ‘저장’하고 있었다. 캘리니코스는 데이비스를 인용하면서, 자본주의 출현 이후 1950년 전까지 진행된 첫 번째의 도시화의 물결은 북반구(서구)에 주로 해당된 반면, 현재의 2차 ‘도시화’는 남반구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문제는 20세기 전체에 걸쳐 도시화의 속도가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도시화의 속도가 빨라진 것은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20세기 전반기 남반구를 장악하고 있던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 인민들이 도시로 몰려드는 것을 두려워했고, 온갖 장치를 이용해 도시 진입을 봉쇄했다. 그러나 2차 도시화는 탈식민지 시대, 신자유주의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힘들고 고된 농민들이 일자리가 많은 도시로 몰려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도시가 그들의 미래를 보장해준 것일까? 아니다. 마이크 데이비스에 의하면, “‘과잉도시화’의 추동력은 빈곤 재생산이지 일자리 공급이 아니다……도시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힘은…현저히 약화되었지만, 시골에서 사람들을 ‘밀어내는’ 전 지구적 동력들은 도시화를 지속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농촌에서 살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도시로 가는 것이다. 도시화는 곧 산업화라는 등식은 ‘2차 도시화’의 물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들이 정착하는 곳은 전 세계 도시의 빈민촌, 즉 ‘슬럼’이다. 슬럼을 부르는 명칭은 나라에 따라, 도시마다 다양하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 인도 뭄바이의 ‘촐’, 터키 이스탄불의 ‘게체콘두’, 미얀마 양곤의 ‘뉴필즈’ 등이 그것이다. 우리에게는 ‘달동네’ 라는 용어가 이에 해당될까? 빈민들이 도시 내에 안정적으로 머물 수 있는 곳은 더럽고, 불편하고, 토양과 식수는 오염되어 있고, 자연재해에 노출되어 있는 그런 곳밖에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빈민 지역도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안전하지는 못하다. 권력을 쥔 사람들에게 ‘가난한 자들의 저항의 사령부’가 될 지도 모르는 슬럼은 그들에게 더럽고, 위협적이다. 올림픽이나, 미인대회, 월드컵 등 국제행사를 앞두고 그들은 슬럼을 쓸어버린다. 또는 반란의 씨앗을 없앤다는 이유로, 개발 독점권을 얻기 위한 이유로 쓸어버리기도 한다. 불도저가 밀고나간 그 자리엔 중산층을 위한 주거단지가 세워진다. 한국의 88년 올림픽을 앞둔 철거는 ‘세계 슬럼 퇴거 사건사’에 2위로 기록되어 있다. 퇴거주민 수는 80만 명에 달했다. 베이징은 2008년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의 전철을 밟고 있다. 현재 진행형으로 말이다.
슬럼은 재난과 동거한다. 쓰나미가 몰려왔을 때, 빈민과 중산층은 동일한 피해를 입지 않았다. 위험요소의 노출 정도와 건물의 견고함 정도는 계급에 따라 다르다. 지진도 공평하게 작용하지는 않는다. 층진(層震)이라는 신조어도 그래서 생겨났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슬럼에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것은 ‘화재’이다. 특히 개발업자 등이 인위적으로 일으키는 방화를 ‘뜨거운 철거’라고 부른다. “들쥐나 고양이를 등유에 흠뻑 적신 후에 불을 붙여 말썽 많은 슬럼가에 풀어놓는” 방식이다. 방화는 개발업자에게 가장 손쉬운 해결방법이다.
신자유주의의 대리기구인 IMF와 세계은행이 추진하는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강요된 민영화는 제3세계의 빈민들에게 재앙으로 다가왔다. 교통의 사유화는 교통요금의 폭등을 가져왔고, 빈민들은 그나마 빠듯한 수입을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교통요금에 부담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배변권(排便權) 및 물 공급과 관련한 것이다.

북경의 어느 지역의 경우 화장실 하나를 6,000명 이상이 이용하기도 한다. 콩고의 킨샤사는 하수처리 시설이 전혀 없고, 나이지리아 나이로비에는 ‘날아다니는 화장실’이나 ‘스커드 미사일’에 의존하는데 이는 배설물을 담은 비닐봉지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들은 여성들에게는 더욱 위협적인데, 배변을 위해 밤을 기다린 여성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성추행과 강간이다. 도시 배변이라는 ‘사업’을 초국적 자본과 신자유주의 기구들은 ‘성장 산업’으로 주목하고 있다. 가나의 유료 공중화장실은 90년대 후반 민영화되었고,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다. 도시 슬럼에는 그 밖에도 매매혈(賣買血)과 아동 매춘, 아동 강제노동, 장기 판매 등이 비공식적 경제의 일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깨끗한 물은 가장 저렴한 약이자 가장 중요한 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HO에 따르면, 2025년에 500만의 제3세계 아이들이 물을 구하지 못해 질병으로 죽어갈 것으로 예측했다. 이런 점에서 최근 한국의 운동사회 내에서 ‘물’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는 것은 시류에 적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비참한 빈곤과 불평등을 가속화한 것은 80-90년대 진행된 국가의 후퇴와 공공부문 지출 축소 및 신자유주의 정책인 것은 명백하다. 농촌은 몰락하고, 실업률은 상승하며, 이에 따라 여성 및 아동들이 비공식 또는 불안정한 노동에 투입되었고, 보건 서비스는 민영화되면서 이용권을 상실했다. 중국의 국영기업이 민영화되면서 생긴 엄청난 수의 면직노동자(laid-off)와 호구에는 잡히지 않는 떠돌아다니는 민공조(民工潮)들의 수가 몇 억이다. 중국과 인도 역시 신자유주의 정책이 휩쓸고 있다. 단기적으로 먹고 살기 위해 선택하는 길은 장기적으로는 계급적 지위를 영속화하는 길이 되었다. 이에 반IMF 폭동 또는 총파업 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베네주엘라 카라카스에서 89년 일어난 폭동, ‘카라카소(Caracazo)’ 동안 최소 400명이 목숨을 잃었다.

1990년대에는 거대한 제2세계(현실 사회주의 국가들)가 자본주의로 편입됨에 따라 빈곤의 규모도 급증했다. UN에 따르면 1990년대 초 이러한 국가들에서 극빈층 인구는 1,400만 명에서 1억 6,800만 명으로 높아졌다. 푸틴 정부 하 러시아의 옛 아파트단지는 슬럼 상태가 되었고, 이는 “2차 세계대전 레닌그라드가 포위당할 당시의 상황”을 환기시킨다고 한다.
이제 도시는 “성장과 번영의 중심이 된 것이 아니라, 미숙련, 무방비, 저임금의 비공식 서비스업 및 무역에 종사하는 잉여 인간의 처리장”이 되었다. 곧 수동적 프롤레타리아화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비공식 부문에서 ‘활동’ 실업 상태로 존재하는 것뿐이다. ‘활동’ 실업이란 불완전고용과 위장 실업을 말한다. 그러나 증가하는 슬럼가에서 생계를 위해 온 가족이 나서면서, “‘비공식 부문’은 성장하지만 비공식 부문 내에서의 소득은 감소”하고 만다.

도시 슬럼은 이제 펜타곤과 전쟁 연구소 등 세계적인 공안기관들의 타깃이 되었다. 이들은 MOUT(도시화 지형에서의 군사작전) 개념을 정립하면서, 신세계질서의 가장 위협적인 곳으로 거대슬럼을 꼽는다. 도시 빈민과의 저강도 세계전쟁을 위한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전자(서구 도시)는 ‘방어’해야 할 ‘조국’의 도시들이고, 후자(제3세계 슬럼)는 ‘자유’ 세계 전체의 건강과 번영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악당들’을 지원하는 소굴”이다. 

마이크 데이비스의 이러한 슬럼 분석은 다소 패배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배변권조차 보장받기 위해 목숨을 감내해야 하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도대체 저항은 어떻게 시작될 수 있고, 누가 저항할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지금 준비중인 이 책의 속편에서 슬럼 기반 투쟁의 역사와 미래를 연구할 것이라고 한다. 혹 여기에는 88년 상계동과 사당동 투쟁이 다뤄질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저자는 “인간 연대의 미래는 도시 빈민이 전지구적 자본주의 내에서의 최악의 주변성을 전투적으로 거부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물론 도시 빈민과 슬럼의 주민, 비정규노동자 및 실업자 등이 반드시 겹치는 동일한 집단은 아닐 테지만 상당부분 겹치거나, 겹쳐지는 ‘추세’라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세계 슬럼에는 획일적 주체나 일방적 경향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각양각색의 무수한 저항운동이 존재”한다. 이미 지배자들은(대표적으로 랜드 연구소) 이미 이를 간파하면서 세계 빈곤의 도시화가 ‘반란의 도시화’의 원인이라고 단정한다. ‘잉여인간’, ‘활동 실업’, ‘퇴축’과 같은 저자의 매력적인 신개념 속에서 저항의 실마리보다는 비참한 파국적 결과가 더 많이 느껴지지만 말이다.

20세기는 맑스주의의 예언과는 달리 도시혁명이 아닌, 수많은 농촌의 인민들을 근거로 한 민족해방투쟁과 사회주의를 가져왔지만(마치 중국혁명기 구추백, 이립삼의 노선처럼), 21세기의 판도는 이와는 다를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계급적 구성도, 지정학적 구성도 달라졌기 때문이며, 마이크 데이비스에 의하면 시장 안의 진정한 유목민(비공식 경제의 빈곤한 ‘수동적 프롤레타리아트’)이 급속하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제 어쩌면 지배층들이 예상하는 데로 ‘좌절과 분노’에 휩싸인 ‘비대칭 전투’가 예상 전투 지역인 카불, 라고스, 킨샤사, 마닐라, 북경, 뭄바이, 리우데자네이루, 모스크바, 방콕, 자카르타 등에서 벌어질 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전투는 시작되었을 지도!

아직 저자가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은 슬럼이라는 지정학 속에서의 전투상과 전력 분석은 저자의 차기작에 맡겨 두고, 일단, 우리는 우리가 전지구적 지정학 속에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일단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저자의 말대로 “슬럼이 대세”이기 때문이다. 반빈곤 투쟁과 반신자유주의 투쟁, 반자본주의 투쟁이 신자유주의 빈곤화라는 직조 속에서 교차하고 있다. 따라서, 투쟁의 지평이 넓어지고 있으며, 또한 투쟁의 성격이 그야말로 국제주의적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이 책을 통해 느껴보는 것도 굉장한 경험이 될 것이다. 마치 지구를 한바퀴 돌면서 ‘슬럼 관광’을 하게 만드는 이 책은 동시에 미래의 국제주의적 투쟁을 예행연습하는 효과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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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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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소통> 제2호(2007년 11.12월호) 서평글 (2007.11.6) 
양솔규

연대감은 굶주림의 숙명을 이긴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Jean Zigler) 지음, 갈라파고스, 2007년, 201쪽

우리는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을 통해 만들어진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무한한 생산력의 발전을 토대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정체를 토대로 하는 이전 사회와 다르다고 배워왔다. 참으로 자본주의의 무한한 생산력은 물질적 궁핍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보였다. 맑스 역시도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이 곧 해방의 조건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러한 풍요로운 전지구적 자본주의 아래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2005년 현재, 10세 미만의 어린이가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으며, 비타민 A 부족으로 인한 시력 상실이 3분에 1명 꼴로, 한 해 700만 명에게 일어난다고 한다. 세계 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 5,000만 명이 심각한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고 한다.

현재, 지구에는 1분에 250명이 태어나는데 그 중 197명이 제3세계에서 태어난다. 그 중 많은 수는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에 묻히게 된다. 프랑스 철학자 레지 드브레는 이를 “나면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힌 아이들”이라고 표현한다.

반대로, 전 세계에서 수확되는 곡물의 4분의 1이 부유한 나라의 소들이 먹고 있다. 굶어죽은 아이들과 살찐 소라는 이러한 끔찍한 이분법이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살찐 소를 비롯한 육류소비는 주로 선진국에서 이루어지는데, 영양과잉 상태의 선진국 국민들은 살을 빼기 위해 다시 다이어트를 시작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진다. 우리가 채식주의자들의 주장의 타당성을 반박하기 힘든 것은 이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아의 참상, 그리고 기아를 ‘구조적’으로 양산하고 있는 사회적 구조에 대한 고발을 충실하게 하고 있는 책이 바로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인 장 지글러(Jean Zigler)가 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이다. 그는 1999년까지 스위스 연방의회의원(사회당)을 지냈으며, 실증적인 사회학자로 현재는 제네바 대학 교수이기도 하다.

초국적 식량자본은 과잉생산과 가격덤핑으로 제3세계의 식량 가격과 생산을 교란시킨다. 또한 초국적 식량자본은 시카고 곡물거래소를 통해 전세계 식량의 유통을 장악함으로써 이윤과 기아를 동시에 극대화(?)한다. 또한 초국적 식량자본이 생산하는 식량은 그 자체가 초국적 금융자본의 투기대상이기도 하다. 카지노 자본주의는 ‘밥’을 미끼로 번성한다.

부유한 나라들은 가격보장이라는 이름으로 식량을 대량으로 폐기처분하거나 농산물 생산을 제한하기도 한다.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세계225명의 대재산가의 총자산은 1조 달러가 넘는다. 이것은 전세계 가난한 자들의 47%(25억 명)의 연간수입과 맞먹는 수치이다. 빌 게이츠의 자산은 가난한 미국인 1억 600만 명의 총자산과 맞먹는다.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기아의 책임은 초국적 기업과 제국주의, 부패한 정치집단 및 독재자에게 있으며, 가장 큰 피해자는 어린이와 민주주의이다.

장 지글러는 또한, 북한의 기아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1995년 이후 기아로 인해 북한에서 죽은 인구는 200만 명에 달하는데 이 중 대다수가 어린이들이라고 한다. 장 지글러는 미국 등의 봉쇄 정책의 야만성에 대해서도 언급하지만, 김일성과 김정일의 ‘기아’를 무기로 한 강제노동수용소와 식량원조를 이용한 군사화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운다.

살인적인 세계 경제구조는 ‘구조적 기아’를 양산하고 있다.

이러한 ‘기아’를 ‘산아제한’의 수단으로 여기는 ‘멜서스주의자’들이 아직도 활개를 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기아’를 통해 인구가 감소함으로써 자연적 법칙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주장하는 것은 진실을 회피하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84년 기준으로 FAO의 평가에 따르면, 84년의 식량생산을 가지고도, 120억 명을 하루 2,400-2,700칼로리를 공급하며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한다. 하물며 2007년의 생산량으로는 몇 백억 명을 먹여 살릴 수 있지 않겠는가!

장 지글러는 1970년 칠레 인민전선의 첫 번째 행동강령을 언급한다. 15세 이하 모든 어린이에게 하루 0.5리터의 분유를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강령은, 그러나 칠레의 커피와 우유의 생산과 유통을 장악하고 있던 초국적 식품자본 ‘네슬레’는 아옌데 정부의 정상적인 가격하의 분유 구입 요구를 거부한다. 더구나 미국정부와 다국적기업, CIA 역시도 이를 조장한다. 1973년 결국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에 의해 아옌데 인민전선 정부는 무너지고, 아이들의 영양상태는 인민전선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

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Burkina Faso)라는 나라가 있다. 83년 젊은 군인 네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킨다. 대통령은 토마스 상카라 대위이며, 그의 동지들은 블레이즈 콤파오레, 앙리 총고, 장 밥티스테 링가이 등이다. 부르키나파소는 60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나라인데, 상카라가 집권한 당시, 절대 다수가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다. 상카라는 자주관리정책, 인두세 폐지, 개간 가능한 토지 국유화 등을 하면서 4년 만에 자급자족과 민주적 운영이 가능하게 부르키나파소를 변모시켰다. 하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프랑스와 코트디부아르, 가봉, 토고 등의 프랑스 꼭두각시 정권들은 상카라의 동지였던 블레이즈 콤파오레를 부추겨 상카라와 그의 동지들을 제거한다. 결국 부르키나파소는 이전의 사회로 돌아가고 만다.

상카라는 저자인 장 지글러와의 만남 속에서 39세까지 살다 간 혁명가 체 게바라를 언급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비관했다고 한다. 결국 상카라는 그의 우려처럼 39세의 나이를 넘기지 못하고 죽고 만다.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전쟁의 이면에는 제국주의와 초국적 자본이 벌이는 자원전쟁(석유, 다이아몬드, 곡물 투기 등)이 있으며, 이러한 전쟁은 다시 기아를 급증시킨다. 또한 아마존 등의 환경파괴는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사헬 지대의 사막화를 확대시키면서 경작지의 면적을 줄인다. 더군다나 중국, 인도 등의 산업화 가세로 인한 에너지 수요 폭증은 이러한 현상을 강화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결국, 에너지 위기와 지구 온난화, 중국, 인도 등의 산업화와 전세계 경제의 요동, 전지구적 ‘슬럼’의 확대와 ‘기아’의 심화,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장 지글러는 하지만 이러한 ‘기아’의 문제를 해결불가능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기아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각국이 자급자족 경제를 스스로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인적인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엎어야 한다.

장 지글러는 인도적 지원이 효율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FAO와 WFP가 지원하는 대상국이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구호단체는 크메르 루주 등 학살정권을 지원한 아픈 과오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원조보다는 개혁이 먼저라고 주장한다. 혁명적 행동은 인도적 구호를 뛰어넘는다고 주장한다. 그 과정에서 인프라 정비를 해야 한다.

기아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장 지글러는 이윤지상주의, 시장만능주의, 신자유주의와의 전면전을 선포하고, 기아에 대한 투쟁을 가로막는 행위자로 WB, IMF, WTO를 지목한다. “잘못된 것 안에 올바른 삶은 없다”는 아도르노의 말을 인용하며, 장 지글러는 말한다.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에 행복의 영토는 없다”고. “배고픔의 숙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부족한 것은 연대감이며, 국제공동체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하는 진짜 의지이다”라고.

따라서, “식량권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인권으로서, (망명자의 피보호권처럼) 새로운 국제 법규로서 시급히 도입되어야 한다”고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추동력은 유약한 UN에서 찾을 수 없다고 본다. 희망은 사회운동, 비정부조직, 노동조합 등 전지구적 민간단체에 있으며, 이들의 “연대만이 워싱턴 합의와 인권 사이의 대립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짧은 분량(201쪽)에다가, 아들에게 설명하는 방식의 쉬운 문체로 되어 있다. 하지만, 중요한 지적은 모두 담고 있다. 아울러, 『슬럼, 지구를 뒤덮다』(창비, 마이크 데이비스),『초국적자본, 세계를 삼키다』(창비, 존 매들리),『세계의 빈곤, 누구의 책임인가?』(이후, 제레미 시브룩)을 본 책과 함께 읽으면, 더 깊은 이해와 풍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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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가는 시내버스
안건모 지음 / 보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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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노동자의 새벽을 위해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 / 안건모 / 보리 / 2006년 / 8500원, 310쪽


내가 버스운전사 안건모씨를 처음 본 것은 김용만, 김국진이 진행하던 MBC 느낌표 ‘칭찬합시다’ 프로에서였다. 그때가 언제였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린 학생들에게도 꽤 인기가 있던 ‘기사 아저씨’의 모습이 생각이 난다.

그 뒤로 언제 다시 안건모씨를 보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한겨레신문에 실리는 글은 꽤 재미있게 읽었던 거 같다. 불규칙하고 바쁜 생활 때문에 꼼꼼히 챙겨 읽지는 못했지만, 버스운전을 하면서 느끼는 소소한 일상을 재미있게 전달해 준다는 느낌은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나는 버스 관련 공부를 하게 되었고 마침 떠오른 것이 안건모씨가 지은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였다.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전인 6월 1일, 나는 KTX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로 향했다. 열차 안에서 쏟아지는 졸음을 지우기 위해 안건모의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를 다시 붙잡았다. 한참 재미있게 읽고 있자, 열차는 벌써 서울역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서둘러 짐을 챙겨 개찰구를 나오고 있는데, 내 옆에 ‘안건모’씨가 있는 것이 아닌가? 여행을 다녀오는지 가방은 큼지막하게 부풀어 올라 있고, 특유의 뿔테 안경에, 개량한복 비슷한 윗옷, 튼튼해 보이는 운동화(등산화)를 신었다. 운동권스러운 실용적인 ‘패션’인 것으로 봐서는 맞는 거 같기도 한데. ‘에이, 설마 이런 우연이 있을라구’ 하다가 ‘밑져야 본전인데, 말이나 걸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안건모씨 아니세요?”

“맞는데요. 누구시죠? 어디서 본 듯한”

안건모씨는 부산에서 전날 시청자미디어센터 주최 강연을 마치고 하룻밤 묵고 KTX를 타고 올라오는 길이었다. 마침 나 역시 그 열차를 탄 것이었다.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

제1장에는 시내버스, 알고나 탑시다 라는 주제로, 손님들이 시내버스 운전사나, 시내버스 체계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을 여러 가지 일화를 섞어서 소개하고 있다.

버스 운전사들이 싫어하는 유형의 손님들, 졸음운전에 얽힌 사연들(교대제), 시간에 쫓겨 안절부절하는 손님들과 기사, 불친절한 기사와 그럴 수밖에 없는 시내버스의 사정. 돈 내는 여러 가지 유형의 손님들, 잔돈 거슬러가지 않는 손님들과 공돈버는 회사 등이 소개되어 있다.

제2장의 제목은 시내버스를 타는 사람들이다. 정말 시내버스를 타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기사들과 연관되는 우리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버스일터 모임의 고문변호사였던 정연순 변호사, 한화그룹 해고 노동자 명님, 상희, 미정, 할머니와 같이 사는 정희씨 등. 그 중 안건모의 단골손님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는데, 아무래도 이런 ‘안건모의 단골들’이 있었기에 그가 MBC 칭찬합시다에 출연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단골은 반가운 단골도 있지만, 보기 싫은 단골도 있단다. 술취한 사람, 돈 안 내는 사람 등. 이런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한마디 외침은 ‘또라이’다. 하지만 달님이나 현지 같은 안건모 팬클럽도 있는 듯 하다. 회사 차 번호 전체를 외우고 안건모의 차 1774호를 3,40분씩 기다리는 팬들 말이다. 이 책에 나온 사람들의 뒷날 후기까지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안건모의 ‘팬관리’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는 듯하다. 그래서 재미있고 더 마음이 따뜻해진다.

3장 삶이란 곧 싸움이다와 4장 시내버스를 정년까지는 본격적으로 시내버스의 문제점들에 대해 ‘참여관찰’한 장편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사업주와 어용 노동조합이 매년 차고치는 고스톱 비슷한 임금인상 투쟁과 요금인상, 그리고 파업. 이 신기한 ‘교감’에 대해 안건모와 버스일터는 용감하게 ‘들이’ 댄다. 사고가 나서 ‘자부담’을 요구하는 사측에 맞서, 구상권 청구할 수 없다는 단협 조항을 들이 대거나, 취업규칙을 어겼다는 사측에 맞서 근로기준법을 들이 댄다. 연월차 적치하지 않는 사측에 맞서고, 이렇게 10년의 ‘바위치기’를 통해 버스 현장도 서서히 변화된다. 급기야 버스 현장 최초로(?) 조합장 선거에 ‘민주파’를 출마시켜 선거다운 선거를 해보기도 하고 (물론 낙선했지만) 8억 가까이 되는 상여금을 꿀꺽하려는 사측에 맞서 일인시위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측도 만만치 않다. 징계와 해고 위협, 블랙리스트 심지어 테러로 맞선다. 하나씩 떠나가는 동료들(그래봤자 레미콘, 택시, 마을버스, 관광버스 등 ‘발통’ 노동시장이 한정되어 있지만), 힘빠지는 사람들. 익숙한 풍경들이다.

재미있는 내용으로는 버스 기사들의 “삥땅”이 있다. 워낙에 저임금이다 보니 오래전부터 버스 사측과 개별 노동자들은 ‘삥땅’이라는 관행을 유지해 왔단다. 임금은 박하게 줄테니 알아서 ‘돈통’에서 빼가라는 것이다. 버스 노동자들의 저임금이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안건모에 따르면 이것은 하나의 덫이기도 했단다. 항상 삥땅은 해고, 징계의 위협이 되어 돌아왔고, 노동자들은 순종했다. 몇 백원 커피값 벌려는 노동자에게 상여금, 밀린 임금, 퇴직금을 모두 포기하게 만드는 ‘건수’이기도 했다. 포기할래? 경찰서갈래?

교통카드 등이 만들어지면서 이러한 ‘삥땅’의 문화가 사라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 전에 CCTV가 만들어지면서 사라졌다는 것이 맞을 듯하다. 흩어져 홀로 노동하는 노동과정의 특성상 이러한 감시시스템은 정말 사측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는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CCTV는 결국 노동자에게는 배차간격 무시와 난폭운전을 유도한다.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의 글들은 한겨레신문과 작은책에 실린 글, 전태일문학상에 출품했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무엇보다 쉬운 글들이 ‘손님’들을 맞이한다. 모두가 한 번씩 경험해 봤고, 모두가 한 번씩은 생각해봤음직한 얘기들을 조리있게 설명한다. 알라딘에 가면 이 책에 대한 서평도 상당히 많이 나오는데, 부분적으로는 ‘시내버스’가 그처럼 우리 삶과 밀접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산에는 지하철이 있어 버스의 수송분담률이 낮기는 하지만 여전히 버스는 서민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운송수단 중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버스 노동자들의 노동과 서비스가 직접적으로 우리 삶에 밀접하기도 하다. 하지만 여태껏 나는 버스 노동자들에 대해 아무 것도 알고 있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노동자는 하나라고 말은 하지만, 그저 그런 미조직 노동자로 무의식 속에 방치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너도나도 하나씩 자가용을 끌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버스 노동자의 새로운 출발에 금속이나 여타 노동자들이 도와줄 기회를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버스 기사의 얼굴을 유심하게 보게 되었다. 내가 운행지를 물을 때도, 거스름돈을 받을 때도, 앞차가 꾸물거릴 때도, 그의 표정을 살피며 책 속의 한구절 한구절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6월 초, 마창에서는 버스 파업이 있었나보다. 또 7월부터는 마산창원도 버스 준공영제를 실시한다고 한다. 또한 변형근로제의 일종인 Shift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되풀이되는 파업-요금인상과 버스 준공영제, 그리고 일련의 제도변화는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단다. 전면 공영제와 공공성 강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사관계의 무법천지를 바꾸는 길만이 요금과 임금의 인상 경로를 차단시킬 수 있고, 노동자와 승객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 안건모의 책을 보다 보면, 누가 버스를 거꾸로 가게 하는지, 그렇다면 누가 버스를 제대로 가게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과연 그날이 올까? 13만이나 되는 버스 노동자들이 7만의 어용 노조를 뒤엎고 민주노조의 깃발을 꽂을 수 있을 것인지, 흥분되는 순간이 기대된다. 한국노총이 복수노조 유예를 노사정 합의한 순간, 한국노총에 항의 농성하러 간 버스 노동자 3인은 아직도 실형을 살고 있다. 집행유예로 나올 것으로 예상한 버스 노동자 동료들은 과연 마련했던 고기와 술을 그날 밤 어떤 기분으로 먹고 마셨을까? 하지만 닭 모가지 비틀어도 새벽이 온다고 했던가? 이런 고전적인 글귀가 아직도 어울리는 까닭은 버스 현장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최호철이 그린 표지그림을 보며, 그림 속의 조는 소님과 손을 흔드는 기사, 장을 보는 차창 밖의 사람들을 보며, 이러한 아름다운 일상이 꿈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되는 날을 기대해본다. 버스 노동자는 프로다. 프로 기사(노동자)에게 영광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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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7-02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날 만났던 안건모입니다. 뒤늦게 리뷰를 쓴 분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때 인사를 드렸는데 성함은 잊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은 월간 작은책 이라는 진보 월간지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노동운동에서 언론 운동, 문화운동으로 바꾼 셈이지요. 노동자들 소식을 전하는 책입니다. 사이트에도 들어 오셔서 구경하시고 구독 신청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혹시 지금 작은책 독자님인지도 모르겠네요.
www.sbook.co.kr
02-323-5391

안건모 2009-07-03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양솔규 님 맞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