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뒤흔든 열흘
존 리드 지음, 서찬석 옮김 / 책갈피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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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리드와 혁명의 불꽃-《세계를 뒤흔든 열흘》과 《레즈》

양솔규(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리뷰 출처 : 영남노동운동연구소(http://www.ynlabor.co.kr) 
 <연대와실천> 2005년 8월호 통권 134호


우리는 중국의 수많은 제국들이 명멸했다고 해서 그들의 역사를 기억의 저편에 묻어버리지는 않는다. 또한 로마가 멸망했다고 해서 그들의 역사를 잊어버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흐름 속에서 되살려 내고 비유하며 반추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영국의 맑스주의 역사가 홉스봄이 ‘단기 20세기’를 나누는 기준이 되는, 세계 역사상 최초로 ‘현실 사회주의 국가’를 탄생시킨 ‘러시아혁명과 소련(제국?)’만은 회자 대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마치 <역사유물론>지(誌)가 묶어 낸 ‘레닌에 대해 말하지 않기’처럼.

과연 러시아 아니 소련은 잊혀져 버렸단 말인가? 아니다. 역사의 연속선상에서 사라진 깊이만큼, 역사에 각인된 상처의 깊이만큼 소련은 침잠해 있을 뿐이다. 소련을 다시 되돌아보기 위해서는 15년의 세월이 너무 짧은지도 모른다.

《중국의 붉은 별(에드가 스노우)》,《카탈로니아 찬가(조지 오웰)》등과 함께 세계 3대 르뽀 문학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세계를 뒤흔든 열흘》(책갈피)은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이자 (정치가라고 하기엔 너무나 이상적인) 정치적 이상주의자인 존 리드가 러시아혁명의 격동을 페테르부르크에서 직접 겪고 난 후 쓴 책이다. 이 책은 1917년 러시아혁명에 관한 고전적인 텍스트이다. 1986년에 한국에서도 두레출판사를 통해 상당 부분이 생략된 채 소개된 바 있었다. 당시의 판매고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2005년의 이 책의 판매고는 그리 높지 않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21세기 한국은 아직 그것을 묻어두고 싶은 게다. 그러나 우리가 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와 병사들처럼, 또는 거대한 대륙의 농민들처럼 무언가 뒤흔들 계획을 세우고자 할 때 우리는 이 역사적 대사건을 다시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어쩌면 ‘혁명의 고양기’와는 거리가 먼 지금의 이 시기가 러시아혁명을 다룬 고전적인 이 책이 다시 등장하기에 더 적절한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20세기 세계의 광활한 영토를 거대한 대륙의 사회주의로 물들인 두 혁명, 러시아 혁명과 중국 혁명을 다루고는 있지만,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과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 다른 점은 무엇보다 초점에 있다.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에는 그들의 인구만큼이나 무수히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한다. 모택동, 주덕, 주은래 뿐만 아니라 이들의 부인들, 구추백, 진독수, 하룡, 팽덕회 등 당과 홍군의 무수히 많은 간부와 혁명가들이 곧 그들이다. 따라서 책 말미에는 ‘중국혁명 인물사전’과 비슷한 분량으로 인물 소개로 차 있다. 그런 만큼 마치 중국 고전 ‘삼국지’나 ‘수호지’처럼, 또는 PC 게임 ‘리니지’처럼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총출동하는 역동적인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무협지다.

반면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레닌이나 트로츠키 등 혁명가 인물들이 중심이기 보다는 ‘사건 그 자체’에 대해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대미문의 사건. 스노우는 러시아혁명의 전형을 앞에 두었으나 존 리드는 그렇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존 리드에게 초점은 혁명 그 과정에 놓여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약 100쪽에 달하는 방대한 후주와 부록은 바로 러시아의 정치세력들과 조직들, 러시아의 신문기사 등 자료들로 꽉 차있다. 이 후주와 부록이 독서의 속도를 가로막기는 하지만 이해를 배가시키기도 한다.

물론 이 책에도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들은 이름 없는 노동자, 병사, 농민들이다. 즉, 존 리드는 지도자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볼셰비키가 어떻게 노동자, 병사 등 대중들과 호흡하면서 혁명을 전진시켰는가를 다루고 있다. 모든 계급의 정파와 투쟁하기를 거부하지 않았으며, 또한 주장이 같은 자들과 연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볼셰비키. 그래서 코민테른은 존 리드에게 미국의 공산당 분열 이후 공산주의노동당과 공산당의 통합을 결정하고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합작을 강력하게 주문했던가.

20세기 영화사에 길이 남은 러시아의 영화감독 에이젠쉬타인은 이 책을 원작으로 삼아 혁명 10주년인 1927년 영화 ‘10월’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 ‘10월’은 스탈린의 비판으로 인해 재편집되기도 했고 존 리드의 책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금서(禁書)로 분류되었다.

헐리우드의 진보적인 배우이자 유명한 바람둥이 워렌 비티(Warren Beatty)는 1981년, 존 리드의 생애를 다룬 영화 《레즈》(Reds)를 제작했고 감독했으며 그 자신이 존 리드로 출연했다. 1967년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처음으로 접한 그는 영화 제작의 마음을 굳혔지만 그러나 영화화 하는 데에는 15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도 ‘빨갱이’에 관한 영화에 투자할 사람이 없었다. 어쨌든 그는 이 영화를 통해 82년 아카데미상 감독상, 촬영상,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지옥의 묵시록’, ‘마지막 황제’ 등을 촬영한 비토리오 스트라로가 촬영을 맡았고, 지금은 늙은 배우가 된 연기파 배우 잭 니콜슨이나 진 핵크만 등이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한다. 나이 든 무정부주의자 ‘엠마’로 분한 모린 스테이플턴은 이 영화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존 리드와 그의 부인 루이스(다이안 키튼)의 만남을 시작으로 해서 둘의 운명은 혁명의 기나긴 여정과 함께 한다. 진보적인 저널리스트인 리드는 좌파 노동조합 조직인 IWW(세계산업노동자동맹)의 활동에도 참여했고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부인 루이스와 함께 혁명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 러시아로 떠난다. 이들은 그 후 미국으로 돌아왔고, 존 리드는 1919년 이 책을 집필하였고, 루이스는 미국 전역에 사회주의 러시아 혁명을 설파하러 다닌다. 친공반전(親共反戰)적인 기사들로 인해 법정에 선 루이스는 신을 부정하는 빨갱이 나라 소련을 지지하며 여성의 투표권도 없고 기만적인 정치가 판치는 미국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다.

존 리드는 사회당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만 반대파에 밀려난다. 반대파를 결집해 공산주의노동당을 만들었지만 코민테른은 공산당과의 합당을 결정한다.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돌아오기로 약속했지만 혁명정부는 그를 돌려보내지 않았고 그 시각, 루이스는 경찰의 미행과 침입 등을 감수하고 있었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무정부주의자인 엠마는 함께 10월 혁명에 열광했으나 이후 빈곤과 질병을 타파하지 못하는 혁명정부, 민주주의가 질식되는 모습, 무정부주의자들의 투옥과 사형 등을 지켜보며 소련에 대한 희망을 버린다.

존 리드는 엠마의 이러한 회의에 대해 강력하게 볼셰비키와 혁명을 변호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도 이 역사적 사건의 결말에 대해 불길한 감정이 싹튼다. 아내와 미국에 남겨둔 동지들을 만나기 위해 그는 목숨을 건 여정을 시작한다. 철길을 통해 핀란드의 국경을 넘지만 그는 투옥되고 이곳에서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 병에 걸리고 만다.

루이스는 존 리드가 투옥된 사실을 듣고 ‘산넘고 바다건너’ 목숨을 걸고 찾아가지만 이미 존 리드는 핀란드의 교수들과 포로 교환을 통해 모스크바로 후송된 뒤였다. 결국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된다. 영화 포스터의 사진은 그들의 극적인 해후를 담고 있다. 하지만 존 리드는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혁명이 일어난 지 3년이 지났으며,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펴낸 지 1년 만에 그는 루이스의 곁을 떠나고 만다. 그의 나이 겨우 33세였다. 혁명의 와중에 멋지게 퍼지는 ‘인터내셔널가’ 노래 소리는 이 영화의 백미이기도 하다. 그 울림만큼이나 진지한 역사적 사건은 그렇게 미국과 헐리우드를 뒤흔들어 버렸다.

존 리드의 역을 맡은 워렌 비티는 할리우드에서도 유명한 진보적인 배우이다. 베트남전 참전 반대운동을 하기도 했다. 헐리우드를 통해 미국 정치계, 민주당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그는 99년에는 대통령 출마설이 나돌기도 했다.

때문에 미국 대선 때마다 그의 행보는 뉴스거리였으며, 클린턴 정부 시기에는 클린턴과 민주당의 우경화, 고어 대통령 후보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워렌 비티의 현실 정치에의 참여적인 모습은 존 리드와 많이 포개져 있다. 존 리드는 저널리스트 또는 (글의) 예술가로서 혁명에 기여하며 남기를 바라는 루이스의 간절한 바램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노동당의 승인을 위해 조국인 미국을 등지고 소련으로 잠입한다. 존 리드는 스스로 혁명가가 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세계의 진보와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그 어떤 기여를 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물론 워렌 비티는 존 리드가 품었던 이상이 민주당을 통해 실현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는 않을 것이지만. 미국이라는 하나의 제국에서 소련(제국)의 부활을 점치는 것은 당분간은 힘들 것이다.

불타오르기도 전에 식을까봐 미리 두려워하는 우리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러시아혁명과 존 리드의 생애를 다룬 《세계를 뒤흔든 열흘》, 《레즈》는 시대는 어떻게 불타올라야 하는가, 무엇을 통해 혁명은 불타오르는가를 생생하게 드러내 준다.

혁명은 가능한가? 모르겠다. 혁명은 그 자체로 선인가? 모르겠다. 하지만. 혁명은 필요한가? 그래! 레닌이 만든 불꽃이라는 신문의 이름을 달고 나온 ‘록그룹 이스크라’의 외침, 그대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 각자의 대답이 궁금하다. 어쩌면 혁명은 꿈꾸는 것을 포함하는 미완성의 상상을 전제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이상성의 불꽃은 후퇴하는 현실 속에서 더욱 빛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존 리드를 잘 알던 노인의 음성이 흐른다.

"당신 애가 혁명을 이어받을지도 모르죠. 왜 그랬냐고? 에디슨이 왜 했는지 아는가?
......기억은 희미하지만 그는 앞에 굉장한 것이 있댔지. 생사를 걸만한 것이......
그가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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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생산방식은 가능한가? 한울아카데미 738
조형제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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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출처: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2005년 7월호 133호

http://www.ynlabor.net

《한국적 생산방식은 가능한가?》-Hyundaism의 가능성 모색

양솔규(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redstar@jinbo.net

개인적으로 나는 ‘한울 출판사’를 아주 싫어한다. 단순하지만 분명한 이유가 있다. 가격이 너무 비싸다. 잘 팔리지 않는 도서들을 발간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수지타산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지만 풍족한 재력을 지니지 못한 나로서는 기분이 나쁘다. 게다가 다른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에 비해 품도 별로 팔지 않는 것 같아 비싼 가격에 비해 디자인도 단순하기 그지 없다. 인문사회과학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는 이 출판사에 고운 시선이 갈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한울 도서들을 정기적으로 체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많은 사회과학 도서들이 어쩔 수 없이(?) 이 출판사에서 발간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다가 도발적인 제목의 이 책을 발견했다. 조형제 교수는 울산대 사회학과 교수인데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자동차산업분야 전문가이기도 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동차산업에 대해 내가 아는 바는 거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순간 이 책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한국 최대의 수출품인 자동차, 한국 최대 단위노조인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인정을 하든 안 하든, 하고 싶든, 안 하고 싶든 여전히 중요할 수밖에 없는 단위인 현대자동차에 올인하기로 했다.

낭패다.
되도록 쉬운 책, 되도록 읽기 편한 책을 고르려고 했으나 운명은 그렇게 정해졌나보다. 책을 받아 드니 재생지를 써서 그런지 부피에 비해 아주 가볍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내용은 가볍지 않다. 조형제 교수가 《경제와사회》, 《산업노동연구》, 《한국사회학》 등에 실었던 본인의 글을 모아 놓은 책이다. 논문 모음집이라니! 자동차 산업과 관련한 생소한 용어들 하며 논문 특유의 딱딱한 틀거리를 따라가려니 안 그래도 일상에 머리가 아픈데 고문이 따로 없다. 그래도 여러 사람이 쓴 글을 엮은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조형제 교수의 문제의식은 이렇다. 새롭게 성공의 신화를 쓰고 있는 “현대자동차는 포드나 도요타와 구분되는 의미에서 자동차산업의 또 다른 최고의 관행을 구현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를 분석하기 위해 여러 가지 요소들을 다각도로 살펴본다.

생산방식과 작업조직

조형제 교수에 의하면 현대자동차는 생산기술의 유연성은 높아지고 있으나 이에 상응하는 작업조직의 유연성이 높아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는 한편으론 현대자동차 회사측이 유연자동화가 진행될수록 노동의 역할이 낮아진다고 보는 시스템합리화론 입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립적 노사관계로 인해 노동에 투자하는 것이 위험부담이 높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동화에 기반한 생산기술의 유연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도요타 미야타 공장과의 비교를 해보면 현대 아산 공장은 미야타 공장을 벤치마킹 했음에도 불구하고 승진체계와 임금체계의 한계로 인해 작업자들의 창발성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현대 에쿠스 공장은 자기완결형 직렬 라인을 설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볼보의 우데발라 공장과 같은 셀 생산방식은 도입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에쿠스 모델이 주력 모델도 아니었고, 고급 노동력 확보가 어렵지도 않았으며(노동시장적 요소) ‘노동의 인간화’를 위한 노동조합의 압력도 없었다. 또한 투자부담 및 생산관리 기술의 부족에도 원인이 있었다.

인적자원관리와 노사관계

현대자동차는 보다 유연한 생산방식을 추구하지만 그에 걸맞는 인적자원관리 방식을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대립적 노사관계 때문이다. 노사간 불신은 회사 측의 교육훈련에 대한 투자를 기피하게 만든다. 직능자격제도의 도입을 노동자 단결 와해의 우려 때문에 노동조합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98년 정리해고 투쟁 이후 최고경영진의 교체와 연이은 99년의 호황으로 인해 필요성 역시 감소하면서 숙련형성을 위한 제도 개편보다는 의식교육에 치중하게 된다.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기업지배구조가 변화하게 되고 주식시장의 단기적 평가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경제시스템 속에서 숙련형성을 위한 교육훈련의 가능성은 더욱더 힘들어질 것이라는 게 조형제 교수의 예측이다.

80-90년대 한국노동운동의 중요한 축이었던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를 비교해 보자면, 현대자동차 노조는 생산합리화에 효율적으로 대응하면서 현장 통제력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 반면, 현대중공업의 경우 그렇지 못함으로써 현장 통제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는 조선산업과 자동차산업의 기술적 특성 등의 구조적 요인도 영향을 주었겠지만 이보다는 당사자의 행위 양식의 차이로 인한 귀결이라는게 조형제 교수의 판단이다. 하지만 자동차 노동운동이 작업장 참여를 외면하는 점을 한계로 지적하고 있다.

부품산업과 산업구조조정

모듈화가 진전되면서 대규모 모듈 부품업체들을 중심으로 부품공급시스템이 변화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일본업체들의 적기조달 시스템에(JIT) 근접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와 현대모비스의 비용절감 압력은 부품업체들의 기술개발 및 임금지불 능력을 고갈시킨다. 결국은 수평적 협력은 약화되고 수직적 위계가 급속하게 강화되고 있다. 자동차전문 그룹으로 분리된 현대자동차는 시장 독점자로서 부품업체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고 있다.

과제

조형제 교수가 제시하는 과제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고숙련의 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노동과정에 참여하는 작업조직을 실현해야 한다.
둘째, 노동자들의 숙련을 향상시키고 생산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교육훈련 제도를 대폭 확충할 필요가 있다.
셋째, 대립적 노사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쉬운 사안, 예컨대 교육훈련 투자와 같은 부분부터 협력해 나가야 한다.
넷째, 부품업체와의 진정한 동반자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다섯째, 현대자동차의 경영능력 혁신이 요구된다.

조형제 교수는 현대자동차와 관련하여 세 가지 비교 연구(미야타 공장, 우데발라 공장, 현대중공업), 그리고 숙련형성과 교육훈련제도, 노사관계, 생산합리화에 대한 노조의 대응, 부품공급시스템, 산업구조조정 등 산업연구 측면에서 거의 모든 부분을 다루고 있다.

사실 조형제 교수는 자동차 분야 뿐만 아니라 관련지어 산업도시에 대한 연구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산업도시의 재구조화와 거버넌스 :피츠버그와 디트로이트의 비교>(국토연구 2004 제43권), <울산 지역 노사관계의 현황과 과제 :지역노사정협의회의 가능성 탐색>(울산발전 통권 제6호 2004. 여름), <울산의 지역경제와 노사관계>(울산발전 통권 제2호 2003.4), <지역경제의 혁신 모델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관계를 중심으로>(경제와사회 통권57호 2003), <울산 지역의 산업구조조정과 테크노파크 건설>(울산대 사회과학논집 10,1. 2000년8월) 등이 그것이다.

사실 운동권의 ‘한 이론 하는’ 교수들은 너무(?) 많지만 지역에 천착하면서 지역 노동운동(혹은 자동차산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연구를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울산의 활동가들은 관점의 차이를 떠나 조형제 교수의 글을 무리를 해서라도 읽어볼 기회를 갖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가능하다면 많은 동지들과 함께 형식을 갖춰 읽어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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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 - 무엇이 문제인가
신장섭.장하준 지음, 장진호 옮김 / 창비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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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 재벌 부활 프로젝트?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 창비 / 13000원 / 신장섭, 장하준

양솔규(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리뷰 출처: <연대와실천> 2005년 4월 통권 130호

IMF 경제위기가 터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한국 자본주의의 전대미문의 상황 전개에 대해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낙관적인 기대는 끝도 없이 추락하는 상황 속에서 산산이 부서졌고, 국정을 책임지는 관료들과 대통령 김영삼에게 분노의 화살을 마구 쏟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마냥 분통만 터뜨리기에는 상황은 너무 안 좋았다. 당장 노동자의 목을 정확하게 겨누며 진행되는 구조조정과 노동시장에서 비껴난 실업자군, 생존의 사각지대에서 몸부림치던 노숙자 및 빈민들은 넘쳐나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은 뭔가 해보아야 될 일이었다.
운동권에서는 그동안 잘 이야기되지 않았던 얘기들이 회자되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사회적 안정망을 얘기했고, 실업자동맹(운동)을 얘기했다. 모라토리움(파산)을 선언해야 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자본의 위기는 곧 노동의 기회라고도 했다. 지나고 보니 노동의 기회이기는커녕 노동의 위기이면서 자본의 기회인 것으로 판명났다. 실업극복과 관련된 수많은 단체들이 생겨났으며 일주일이 멀다하고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김대중은 해외자본 유치를 선동했고 TV에는 ‘한국을 사달라’는 광고가 연일 등장했다. 나(한국)를 사주는 사람에게 모든 걸 내주겠다는 식의 요염한 구애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대출이 되지 않아 도산하는 중소기업들의 더 처절한 구애가 있었다. 또다른 한편에서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빈곤의 바다가 울부짖는 끔찍한 비명들이 있었다.
변할 수 없는 현실이 있었다. 한국이라는 작지만 거대한 배가 파산했고,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진행되면서 더 이상 이전의 한국과 지금의 한국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져 버렸다.
경제관료들, 정치인들, 재계 자본가들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도 널리 퍼진 시각은 이제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든 걸 개방하고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춰 빡세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불 가릴 것 없고, 예전의 ‘좋았던(?)’ 기억들은 다 잊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과거의 것은 모두 철밥통으로 낙인찍혔고 전면적인 개혁의 칼날은 포청천의 작두처럼 정의의 상징이 되어 목전으로 날아들었다. 과연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한국 경제에 불가결한 요소였는가? 위기는 한국 경제의 내재적 원인 때문이었는가?

사상 유례없는 출판시장 불황에도 불구하고 작년 사회과학 분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중 하나는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의 저자중 한 사람인 장하준의 《사다리 걷어차기》였다. 또한 두 공저자인 장하준, 신장섭은 <대안연대회의>에 관여하고 있으며, 2004년 8월에는 <투기자본감시센터>가 만들어졌는데 여기에도 <대안연대회의>의 주요 인사들 뿐만 아니라 민주노총, 사무금융연맹의 주요 간부들도 참여하고 있다. 그만큼 한국 사회의 반신자유주의 대항 담론으로서 폭넓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들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 경제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거론되던 것에 대한 논박이다. 위기의 원인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왔던 한국의 발전주의 국가는 사실은 위기 이전에 해체되었기 때문에 위기의 원인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위기의 또다른 한축이라고 비판받고 있는 ‘재벌’ 역시 위기의 원인이 아니다. ‘재벌’은 미국 경제사가인 거셴크론이 제시한 후발국의 추격전략에 따르자면 자본의 부족 속에서 그나마 한국이 취할 수 있었던 합리적인 조직형태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기의 진짜 원인은 무엇인가? 한국은 이미 김영삼 정부 시절, 자본자유화와 산업정책 포기를 통해 이전의 한국 발전주의 국가 모델에서 벗어났다. 이러한 전환은 곧 지구화의 과정에서 대규모 해외투자를 추구하던 재벌에게 기회를 가져다주었고, 단기자본의 대규모 유입이 도래되었다. 위기는 단기부채의 급속한 증가에 기인한 것이었으며, 이를 직접적으로 추동한 것은 발전주의 국가의 후퇴와 자본 자유화, 재벌의 공격적인 상품시장의 지구화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둘째, IMF 경제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한국 경제를 급속하게 영미식 신자유주의 모델로 변화시켰다. 이전 한국 경제의 주요 축, 추격모델의 축이었던 ‘국가-은행-재벌’ 시스템은 해체되었다. 이를 통해 ‘주식회사 한국’으로 표현되는 한국 시스템의 강점은 사라졌고, 해외자본의 급속한 유입, 통제하지 못하는 정부, 성장 동력 형성을 위한 장기투자에 인색한 은행 및 금융권으로 변모했다. 재벌은 이전에 자원을 집중시키던 내부거래 관행들(무기들)을 빼앗겼다. 따라서 저자들이 보기에는 ‘제2의 추격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전 모델의 강점을 살리는 방식, 즉 국가의 재활성화, 기업그룹의 강점 활용, 해외 자본 통제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즉 해외자본의 급속한 유입으로 인해 한국 경제를 제어할 방법과 주체가 없는 현재의 신자유주의경제에 대한 비판적 해석을 가능하게 해주는 풍부한 사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일면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반성없이 일방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의 일련의 흐름들에 대해 비판적 재고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제2의 추격 시스템’의 구축을 위해서는 국가의 재활성화를 통해 해외자본을 견제하고, 산업정책 등의 재가동이 필요하다는 점 역시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들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결론은 재벌에 이르게 된다. 왜 하필 재벌인가? 마치 ‘자유기업센터’가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전경련의 오른팔이라면 이들과 대안연대회의는 제도주의 경제학으로 무장한 전경련의 비주류 왼팔쯤 되는 것이다.

먼저 비판할 점은, 저자들은 재벌의 합리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합리성을 강제하는 요소는 전지구화된 상품시장과 금융시장이며 이 구조 속에서 재벌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선험적인 전제는 역사적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대우그룹의 엄청난 규모의 분식회계는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중소기업과의 원하청 불공정거래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기업총수와 그 가족의 비정상적인 기업지배구조는 재벌을 여타의 기업그룹들과는 차별적이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은 마치 재벌을 보편적인 기업그룹의 한 형태로 강조하고 있다. 그동안 비난받아 왔던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에 대해서도, 다각화가 부정적이었다는 실증은 없으며, 이는 강점으로 봐야 하며, 최적의 다각화란 없고 과도한 다각화가 있었다면 재벌이 알아서 줄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재벌이 재벌일 수 있는 이유는 단지 다각화뿐만 아니라, 극소수의 주식소유를 가지고 총수와 가족들이 수많은 기업을 좌지우지하는 행태이다. 정부가 재벌에게 또다른 (재벌)기업을 헐값으로 넘기던 수많은 은밀한 거래들도 과연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저자들은 기업의 투명성 제고와 비민주성 제고를 재벌의 강점인 ‘고위험부담과 시장확대 능력’을 훼손하는 것으로 본다. 저자들이 우려하는 집중투표제는 의무화되지 않았으며, 정관을 통해 배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의미가 없다. 저자들이 재벌의 강점으로 보는 고위험부담과 시장확대 능력은 그에 걸맞는 위험 감시 시스템과 합리적 투자를 전제로 하는데, 재벌이 합리적이라면 왜 대우부도와 같은 사태가 발생했는가?

저자들은 중소기업과 재벌과의 관계가 상호대립적이지 않으며, 협력적인 관계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이는 전경련의 중소기업인 조사나, 민주노동당의 중소기업인과의 대화 과정에서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내부 거래 메커니즘이 크게 약화된 재벌은 해외자본의 공세에 무기력하게 대응하는 ‘힘 없는’, ‘불쌍한’ 상태로 보인단다. 과연 재벌에게 다시 힘을 실어주면 이들이 해외자본과 피터지는 싸움을 할 것인가? 그 결과 승리의 전리품들을 노동자 민중에게 나누어 줄 것인가? 저자들이 주장하듯이 재벌과 중소기업의 관계가 협력적인 것이라면, 해외자본과 재벌과의 관계는 협력을 넘은 연합의 상태 아닌가?
소유구조든 자본동원이든 저자들이 전제하는 이러한 재벌의 합리성은 그러나 수많은 재벌 기업과 하청 중소기업의 노동자들에게는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인 노동자 통제와, 권리박탈의 물질적 조건일 뿐이다.

두 번째로, 저자들은 재벌의 책임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 삼성자동차, 대우 구조조정 과정에서 든 막대한 비용, 금융구조조정 과정에 투여된 막대한 돈은 누구의 돈인가? 단지 정부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보여준 관리에 있어서의 무능력만을 지적하지만, 일차적 책임은 재벌에게 있음을 저자들은 지적하지 않는다. 저자들은 재벌의 실책은 정부의 무능력에 비하면 미미한 정도일 뿐이며, 구조조정의 성과는 재벌의 강점에 비하면 미미할 뿐으로 본다. 저자들에게 남은 것은 재벌의 부활뿐이다.

세 번째로, 저자들의 재벌 옹호 관점은 반신자유주의적일 수는 있으나, 노동배제적 관점이기도 하다. 해외 자본과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비판한다고 해서 곧 우리가 무조건 차용할 수 있는 관점은 아닌 것이다. 저자들은 성장동력 신장을 얘기하고 있지만 노동자, 서민 경제가 파탄나고, 거시 경제 성장과 서민 경제 부문의 연관이 파탄난 지금 이 시점에서 노동자, 서민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저자들이 98년말부터 시작된 경제위기의 극복의 진정한 원인으로 얘기하는 케인즈주의적 거시경제정책 패키지는 그러나,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몫으로 자신의 목을 겨누는 칼날에 불과했다. 저자들은 말한다. 재벌을 약화시킨다고 해서 중소기업이 잘된다는 보장이 있는가? 바꿔 말할 수 있다. 재벌의 확장능력이 강화된다고 해서 국민경제가 건강해지고 노동자 서민이 행복해지는가?

네 번째로, 저자들은 여전히 성장 중심주의적 사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제2의 추격시스템? 무엇 때문에? 왜? 라는 질문은 없다. 저자들에게 재벌 체제의 복구는 목적 없는, 이유 없는 자본의 이윤 추구와 마찬가지로, 확장, 추격을 위한 것이다. 이왕 ‘체제 이행’이 필요하다면 어떤 이행인지에 대한 성찰을 제공하는 것이 배운 사람의 기본적인 소양이어야 되지 않은가?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그동안 서로 논쟁을 벌이며 대립각을 세우던 <참여연대>와 <대안연대회의>의 담론들을 광범위하게 수용해 왔다. 두 단체의 논자들은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각급 조직의 각종 토론회에 참석해 왔다. 이러한 어정쩡한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한편으론 이들이 제공하던 담론들의 강점이 존재했다. 이 두 단체간의 논쟁은 한국 경제의 장기적 전망과 관련된 시스템의 구축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다. 즉, 현재의 시점을 넘어 미래를 바라보는 정치한 주장들을 제기했다는 점이다.

현재의 ‘분배요구’에 머물러 있는 민주노동당의 담론은 그 자체로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비전을 제시하는 측면에서는 한계가 있다. 자금 동원 및 장기 투자, 성장과 관련한 입장과 전망, 재벌 구조 개혁 및 기업지배구조, 산업의 재편, 노사관계 변동 등에 대해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시스템적인 담론 구축이 필요하다. 여기에 더해 이러한 시스템적인 담론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이행 전략과 맥을 같이 해야 한다는 점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쉽지는 않겠지만, 따라서 순식간에 마련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임에는 분명하다. 언제까지나 주류담론과 비주류담론의 격돌에서 비껴나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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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에서 룰라까지 - 중남미의 재발견, 개정판
송기도 지음 / 개마고원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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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에서 룰라까지 - 중남미의 재발견


서평 출처 : 영남노동운동연구소(http://www.ynlabor.co.kr)
            <연대와실천> 2005년 2월호


칭찬받아 마땅한 하루 정복! 중남미 참고서
『콜럼버스에서 룰라까지』


양솔규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이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을 알고자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앎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하더라도 내용이 너무 어렵다면 그 욕구는 금방 사라지고 말 것이다. 가뜩이나 힘든 노동과 활동에 지쳐 있는데,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일요일 오후에 ‘어려운’ 책을 인상 쓰면서 볼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물론 필요하면 죽도록 고생하면서 봐야 하지만 말이다.) 사람들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이유로는 ‘재미’를 찾기 위해서이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라든지, 흥미 있는 사실들을 섭렵하기 위해서라든지 등등은 모두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취하기는 일상 속에서는 쉽지 않다. 일단 외국 저자의 책을 번역한 경우에는 생소한 문체 때문에 글 읽기가 쉽지 않다. 설사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번역을 했다손 치더라도 너무 전문적인 내용일 때가 많다. 그렇다고 판타지 소설이나, 통속적인 수필집들은 ‘재미’는 있을지 모르지만 남는 게 없다. 누구 말처럼 ‘노동운동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따라서 ‘뭔가 있어 보이’면서도 ‘재미있고 쉬운’ 책이 필요하다. 왜 그런 책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필수적이고도 전문적인 내용을 쉽고도, 재미있게 글을 쓰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이다.

얼마 전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다시 세계사회포럼이 열렸다. 전세계 운동권이란 운동권들은 모두 모였단다. 이번 세계사회포럼에서 단연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사람은 브라질 대통령 ‘룰라’가 아니라, 베네주엘라의 대통령 ‘차베스’였다. 이를 계기로 다시 한 번 한국에 남미 바람이 불었다. 몇 년 전부터 불고 있는 남미 바람은 단지 이국적인 정서의 한때 유행이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 광풍에 대한 저항의 구심으로 성장하고 있는 남미의 ‘좌파 바람’ 때문이었다. 90년대 후반의 유럽 좌파 바람이 힘없이 지나가고 나자 공허한 가슴을 남미의 좌파세력이 채워 주고 있는 것이다. 세계사회포럼이 여러 번 개최되면서 한국 사회단체나 노동조합 기관지 등에서도 사람들의 다양한 참관기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고, 국제연대와 사회포럼에 대한 분석글들과 비판들이 발표되기도 한다. 어떤 젊은 활동가들에게는 이러한 전세계적 연대의 흐름이 열광적인 대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아저씨 활동가들에게는 ‘생뚱맞은’ 철없는 아이들의 유행처럼 보이기도 하는 듯 하다. 어쨌든 간에, 이런 새로운 흐름은 속도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일관된 추세가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일년에 엄청난 숫자의 유학생이 가고, 그것의 몇 십 배의 배낭여행족들이 떠나고, 그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여행객들이 해외로 떠나는 이 시점에, 우리 노동운동은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일반 여행객들보다야 훨씬 지적이고, 수준 있게 놀아야 되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쌍심지를 키고 배타적인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그게 뭐 대순가?’, ‘우리 이야기나 하자’고 말하기도 한다. 직접적으로 ‘그 나라가 우리의 대안이냐?’하면서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엄마가 아빠 역할은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엄마가 아빠가 될 수 있는 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너무 당연한 말을 자기만 아는 거대한 진리인 양 얘기하면 정말 할 말 없다. 창원만 알면, 울산만 알면, 서울만 알면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창원 사람이 보는 서울, 서울 사람이 보는 울산, 울산 사람이 보는 창원이 더 정확할 수가 있다. 그리고 세상은 내 눈에 보이는 사람들 0.01%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 99.99%가 함께 사는 곳 아닌가? 우리는 우리를 제대로 알고, 얘기를 나누고, 어깨를 나누고, 우리의 길을 좀 더 (특수한 길이 아니라) 보편적인 길로 만들기 위해서 서로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분은 이러실 지도 모르겠다.‘배우려면 앞서가는 놈들을 배워야지. 뒤쳐진 걸 배워서 뭐하게?’ 하지만, 남미는 뒤쳐진 곳이 아니다. 20세기 최초의 혁명은 남미 멕시코에서 일어났으며, 21세기 벽두 변화의 가장 큰 진원지 역시 남미라고 할 수 있다. 산업화, 이념정당, 민주화투쟁, 노동자대투쟁, 노동자 정치세력화, 게릴라 투쟁, 무장봉기, 혁명, 선거를 통한 혁명, 게다가 미국 영토를 침범한 역사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우리보다 못하지 않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외국어는 스페인어이며,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배우는 언어도 스페인어이다. 미국의 안마당이라 일컬어지는 곳에서 변화를 일구고 있는 남미를 어떻게 쉽게 무시할 수 있겠는가. 친구를 사귈 때는 편견을 버리는 게 좋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생활 속에서 터득한 진리 아닌가.

또다른 분은 이러실 지도 모르겠다. ‘기껏 다른 거 대충 공부했더니 이번엔 남미야?’ 맞다. 아직도 진도가 한참 남았는데, 다른 걸 공부하자면 열 받는게 당연하다. 그런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좋은 참고서 하나 나왔기 때문이다. 이 책 『콜럼버스에서 룰라까지』는 거의 눈으로 보는 무협지, 또는 중남미 발‘시사주간지’수준이다. 우리가 스페인 말을 아나, 포르투갈 말을 아나, 당연히 모른다. 그런데 이 책만 있으면 라틴 아메리카 전 나라를 한번씩 훑게 된다. 게다가 동료들한테도 잘난 척 할 수 있는, 이빨 세울 수 있는 풍부한 이야기 거리들이 넘쳐 난다. ‘너 △△가 뭔지 알아? 그게 말이지. 이래저래 된거야. 알아 짜샤!’ 아주 손쉽게 3시간 만에 업그레이드 된다. 그렇다고 이 책에 나오는 내용들이 간단한 것이냐? 아니다.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중남미 전문가인 송기도 교수의 글들은 아주 꼼꼼하게 체크한 고급 정보들로 짜여져 있다. 오죽하면 작년 11월 APEC 정상회담 참석과 브라질, 아르헨티나를 순방하기 위해 출국하기 전 노무현 대통령이 이 책을 꼽아 읽었겠는가? 쉽고 간결하고, 그러나 고질의 책을 고를 시간도 능력도 그에게는 없었을 것이고, 비서진 중 하나가 추천을 했겠지만 말이다.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또다른 중남미 전문가가 남미를 둘러본 후 기행문을 책으로 엮어 출간을 했었다. 워낙 학문적으로 좋은 글들을 많이 쓰는 사람이고, 제목도 아주 그럴 듯해서 잔뜩 기대를 품고 읽어 봤는데, 영 책이 읽히지를 않았다. 학문적인 글에 비해, 기행문은 기대 이하였다. 하지만, 송기도 선생의 책 『콜럼버스에서 룰라까지』는 정말 괜찮은 책이다. 아버지(또는 어머니)와 초중고등학생, 아들, 딸이 함께 읽어도 손색이 없다.

내용을 상세하게 전달하고 싶지만, 책 읽는 재미를 서평자가 빼앗는 것은 월권이 될 것 같아 그만 두도록 하자. 다만 간단한 목차와 저자의 목소리를 소개하고자 한다.
1부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본 중남미의 역사이다. 이 역사에는 쿠바 등 중남미와 미국, 식민지배와 독립, 분열과 중남미 통일단결을 위한 노력들 등이 포함된다. 세세한 사건들보다, 현재의 남미를 이해할 수 있는 핵심적인 내용들을 역사적으로 해부하고 있다. 말하자면 친구를 이해하기 위한 호구조사라고나 할까?

인물 비평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송기도 선생답게 2부는 인물을 통해서 본 현재의 중남미 정치사회사에 대한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브라질 노동자당 출신 대통령 룰라, 룰라와 함께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를 주도하고 있는 아르헨티나 키르츠네르. 피노체트 군부 쿠데타 이후 최초로 정권을 잡은 사회당 출신 라고스 칠레 대통령, 반미와 남미 통합을 추진하는 베네주엘라의 차베스 등 좌파적인 정권들의 지도자. 또한 신자유주의를 추진하는 ‘우파 정권’이긴 하나, 남미 역사의 큰 획을 그은 두 나라의 대통령, 즉 500년만에, 국가 건설 이후 최초로 탄생한 페루의 인디오 출신 똘레도 대통령과 1910-1917년 멕시코 혁명 이후 71년만에 최초로 정권교체를 이룩한 멕시코 비센떼 폭스 대통령 등을 통해 현재 한반도의 지구 반대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남미의 ‘거대한 전환’을 실감할 수 있다.

이 책을 보면 우리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중남미에 대한 이미지의 근원과 오류들을 파악할 수 있다. 사실 어떤 공부라는 것이 기능적으로 특정 부문과 관련 있는 내용만 쏙 뽑아 본다는 것은 자칫 ‘숲은 못 보고 나무만 보는’ 오류를 범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남미를 보는 재미있는 망원경과 같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말한다.

아직까지도 중남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기’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미국이 씌워준 안경을 쓰고 코끼리를 쳐다보고 이해하던 수준에서 이제 코끼리의 다리라도 직접 만질 수 있는 수준이 됐으니, 한 단계 나아졌다고는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미국이라는 ‘창’을 통해 그들을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 눈으로 직접 보고 느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해방과 민주화를 위한 중남미인들의 험난한 투쟁을 차가운 머리가 아니라 뜨거운 가슴으로 함께하고 이해할 때, 그들도 우리를 열린 가슴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 책은 그 첫 시작이다.

이 책은 세계사회포럼에 가는 사람들, 또는 세계사회포럼에 ‘가고 싶은’ 사람들, 아니 세계사회포럼에 ‘못가는’ 사람들이 읽어야 하는 책임에 틀림없다. 독자들은 이 책을 다 읽을 때쯤이면, 318쪽밖에 안 되는 이 책의 분량을 아쉬워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책값은 단돈 만원밖에 안 되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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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김동춘 지음 / 창비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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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동춘
제목: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가격: 13000원
출간일: 2004년 11월
출판사: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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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출처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2005년 1월호 통권 127호
http://www.ynlabor.co.kr

이천년대 제국의 모자이크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양솔규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redstar@jinbo.net

최근 눈에 두드러질 정도로 미국의 문명과 그에 대한 비판조의 저서들이 봇물같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번역된 외국 저서들도 많지만 국내의 미국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도 여럿이 끼어 있을 정도로 미국에 대한 관심과 우려는 하루를 넘기기가 무섭게 증폭되고 있다. 노엄 촘스키의 《불량국가》,《숙명의 트라이앵글》외에도《키신저 재판》,《네오콘 Neo-Con》,《불쌍한 백인들》이 최대의 출판 불황 속에서도 어느 정도의 판매부수를 올릴 수 있었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다고나 할까?

최근에는 좀 더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분석서들이 출간되고 있다. 지난《연대와실천》2004년 7월호에도 소개된 바 있던 이매뉴얼 월러스틴의《미국 패권의 몰락》외에, 전세계 동시출판, 동시대박을 일으킨 네그리․하트의《제국》, 토드의《제국의 몰락》, 찰머스 존슨의《제국의 슬픔》이 잇달아 출간되었다.

알다시피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미국 대선에서 부시가 재선되었고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파병과 국회의 연장안 처리의 과정이 진행되었으며, 이 속에서 한국의 모든 개인과 세력들은 싫든 좋든 자신의 입장을 어떤 논리 하에서든 정리해야만 했다. 참고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중적인 도서들과 학문적인 도서 사이, 압도적 다수인 미국 국적의 저자들과 한국 도서 소비자 사이에는 일정한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지금 소개하려는 김동춘 교수의《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창비, 2004.11)은 시류에 편승하지 않으면서도 핵심을 간취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적절한 책이 될 듯싶다. 흥미 위주의 가십거리를 모아 놓은 저널리즘적인 책들은 재미는 있으나 미국과 미국 패권 속에 돌아가는 세계의 핵심 동력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반대로 학문적인 책들은 분과 학문적 그리고 이론적 관점은 물론이거니와 사전지식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가독성을 떨어뜨리고 만다. 하지만 미국에 대한 관심, 미국과 관련한 서적들의 ‘수요’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미국’, 특히 격동의 80년대가 지나고 90년대를 지나 2000년대를 지나고 있는 이 시점의 미국에 대해 우리가 무관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운동권의 한 정파로 존재하는 ‘낡은 시각’, 소위 민족해방파 또는 NL의 관점으로는 세계의 중심이자 세계자본주의의 심장부 미국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정치, 군사적 시각으로 한정된, 그것도 좁은 한반도로 한정된 시각, 주의주의적이고 감정적인 시각으로는 미래의 변화 동력을 끌어내기엔 역부족이다.

잘 알다시피 김동춘 선생은 노동운동과 분단문제에 천착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진정성 있는 학자이다. 학문적으로 많은 중요한 저서들을 출간한 바 있고, 시민운동과 노동운동, 학술운동에서 꽤 중요한 발언들을 해 온 분이다. 그런데 이 책의 성격은 김동춘 선생이 이전에 출간한 학문적인 책들과는 사뭇 다르다. 김동춘 선생도 책머리에서 밝혔듯이 선생은 미국 전문가도 아니고, 이론적 해명보다는 시사적인 쟁점을 중심으로, 그리고 비판적 시각에서 미국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데 집필에 중점을 뒀다고 밝혔다. 따라서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가 2004년의 학문적 성과 10대 도서로 선정을 한 것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하지만 그러하기 때문에 이 책은 연구소《연대와실천》에 소개될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

선생이 연구년을 이용해 미국에 가 있는 동안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 책은 전쟁 중인 나라에 대한 참여관찰의 결과로서 나온 책이다. 각주의 대부분은 미국 언론의 기사들로 채워져 있다. 소득도 낮을뿐더러 비영어권 국가인 것은 물론, ‘악의축’과 같은 악마의 피가 흐르는 불량국민이기 때문에 미국에 갈 수 있는 비자조차 얻을 수 없는 이 땅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미국 보수언론의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고, 세계 자본주의 중심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알 턱이 없다. 미국 언론들 역시 자국민들에게 왜곡되고 편향된 정보만을 공급하는데 수억 만리 떨어져 있는 이곳에서는 오죽하랴. 따라서《연대와실천》은 다른 어떤 책보다도 이 책을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이라크전쟁으로 시작한다. 냉전이 끝난 곳에서 군수자본, 금융자본, 석유자본, 신보수주의 정치가들의 이해에 따라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가상의 적, 허깨비 적을 만들어 놓았다. 9.11은 사그러들던 군수자본과 전쟁분위기를 다시 한번 일으켜 세웠다. 중동전체에 대한 독점적 패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목적, 직접 이라크로 건너가 막대한 이윤의 유전에 빨대를 꽂으려는 충동, 한 놈만 열나게 패서 세계를 줄 세우려는 조폭적 의지가 합쳐진 전쟁이 바로 이라크 전쟁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은 20세기 미국 역사에서는 거의 항구적인 상태에 있었다. 전쟁은 평화상태의 짧은 예외가 아니라 반대로 평화는 전쟁상태의 짧은 예외 기간일 뿐이었다. 미국은 냉전 체제하에서도 끊임없이 저강도 전쟁, 작은 전쟁을 벌여 왔다. 작은 나라들은 미국의 밥이었다. 사실은 세계의 많은 국가에 미군이 주둔해 있고, 따라서 미국민들의 안전은 당연히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다. 착한 흥부 미국은 놀부한테 뺨을 내밀고 제발 주걱으로 때려달라고 한다. 마지못해 놀부가 뺨을 살짝 건들면 선한 흥부 미국은 순간 람보가 되고, 코만도가 되고, 터미네이터가 된다. 폭탄을 퍼붓고 총질을 가하는 동안 금고엔 자본이 쌓여 가는 것이다.

이렇게 미국을 조폭으로 이끄는 충동은 바로 군-산-정 복합체에서 시작된다. 냉전 이후 수요가 떨어져야 마땅한 미국 군수자본들은 전쟁을 의도적으로 부추긴다. 덩달아 신보수주의자들은 미국적 가치, (가짜) 자유, 기독교적 가치를 수출한다는 명목으로, 야만적인 세계를 문명화한다는 명목으로 침략을 합리화한다. 세계 군비지출 중 미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2000년에 36%로 5년 전보다 5%나 증가했다. 이라크전쟁의 명분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찾는다는 것이었지만 세계 무기시장에서 판매되는 거의 대부분의 무기들은 미국 군수산업에서 생산된 것이다. 이란과 이라크 전쟁 당시 둘은 서로 미국제 무기를 들고 서로를 겨누기도 했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하에서 자국 내 공공성은 실종되고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고, 자국의 헌법정신에 맞지 않는 침략전쟁을 일삼는 전쟁광, 자본가 대통령 부시를 왜 미국의 국민들은 재선시켜 주는가? 미국민들은 무엇보다도 정치선전을 일삼는 상업미디어에 포위되어 있다. 90년대 들어 대규모 기업간 M&A는 미디어, 문화산업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대 미디어자본들은 광고주들인 거대 산업자본, 금융자본의 이해와 일치될 수밖에 없다. 전쟁이 시작되면 진실은 죽어버린다. 그리곤 거짓말들이 세상을 채운다. 그리고는 세계의 중심엔 미국이 있다고 믿는다. 중심부 밖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관심하다. 이스라엘 국민이 팔레스타인의 공격으로 숨지면 90%가 방송되지만, 팔레스타인 국민이 숨지면 겨우 5%만 방송될까 말까 한다. 미국민 중 20%만이 외국 여행을 했다. 미국민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선택된 백성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두가 ‘하느님 나라’의 백성일까?

더욱 심각한 것은 평온해 보이는 미국 내에서도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소위 말해서 노동자에 대한 계급전쟁이다. 당연히 승리자는 자본이고, 패배자는 노동자, 특히 비백인인 흑인과 히스패닉계 노동자들, 빈곤 여성들, 동성연애자 등 소수자들이다. 시장은 패배자들에게 자선을 베풀지 않았다. 그렇다고 국가가 나서서 책임지지도 않는다. 전태일의 청계천 공장이 뉴욕의 스카이라인과 공존하는 나라, 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굶어죽는 국민들이 즐비하고 이를 방치하는 정부가 호령하는 나라 그곳이 바로 미국이다. 정부를 비판하면 빨갱이로 몰던 매카시즘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부시의 친자본정책과 전쟁에 비판적이면 ‘반역자’로 몬다. 미국은 절대로 자유의 나라가 아니다. 사상의 자유는 억압되고, 계급적, 인종적, 성적 차별, 아니 차별보다 심한 분리와 폭압이 존재한다. 아프가니스탄 전쟁포로들을 국제법이든 국내법이든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쿠바의 관타나모 기지 안에 기약 없이 가둬두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법치국가는 사전에만 존재한다. 로렌스 브릿에 의하면 히틀러, 무쏠리니, 프랑코 체제 등을 종합하면 14가지의 파시즘의 특징들을 조합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중 미국 사회는 현재 11가지의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미국의 꿈은 헐리우드에만 존재한다.

미국에 대한 비판적 분석서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미국의 패권, 헤게모니는 위기의 상황에 처해 있다고 분석한다. 정치, 경제적 위기, 지도력의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다. 사실은 아시아나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유일한 라이벌 유럽의 많은 국가들의 많은 세계시민들은 미국을 우려하며 심지어 미국을 증오한다. 지배의 핵심은 힘과 동의라고 했던가? 힘만으로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 제국에 걸맞지 않은 미국의 오만한 지도력은 점점 더 많은 적들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땅에서 미국의 표준이 아니라 우리의 표준을 만드는 것이다. 미국을 아는 것은 세계자본주의를 아는 것이며, 바꿔 말하면 한국을 아는 것이기도 하다. 거울을 통해서 우리의 등을 들여다보는 것, 이 책의 목적이기도 하다. 냉전과 미국의 패권 속에 놓여 있던 한국 땅에서 새로운 흐름을 창출하는 것, 이것이 김동춘 선생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조각조각 흩어진 미국의 단면들을 모아 하나의 모자이크로 만들었다. 비록 추한 모자이크 작품이긴 하지만 한번 감상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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