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자기 역사를 말하다 - 현장에서 기록한 노동운동과 노동자교육의 역사 서해역사책방 16
역사학연구소 엮음 / 서해문집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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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2006년 1월호, 통권139호

<노동자, 자기 역사를 말하다 >

 

양솔규/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redstar@jinbo.net

노동자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혹자는 ‘계급투쟁을 배우는 계기’라고 대답할 것이고, 다른 이는 현재를 위한 길잡이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노동자의 어깨에 심대한 ‘역사적 짐’을 올려놓는 그 언사는 진정성과는 별개로 역사를 노동자로부터 멀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노동자에게 역사는 살아있는 역사이며, 살아가는 역사다. 다르게 얘기하자면 노동자에게 역사는 자신이 주인공이며 역사의 주체임을 가르쳐 주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고 우리 노동운동이 발전하지 않았는가? 단순한 양적 발전뿐 아니라 안정적인 조직이 있고, 부족하나마 교육도 진행된다. 위기가 얘기되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노동자들이 자동차도 몰고 다니고 심지어 외국여행이나 연수를 떠나기도 한다. 그런데도 노동자에게 역사는 당시보다 더욱 멀어진 듯 한 느낌은 왜일까?

이 책의 백미는 ‘2장 노동자, 역사 기록의 주체로 서다’이다. 책 제목과도 어울리는 이 장은 노동자가 역사를 어떻게 획득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면서 생생하게 밝히고 있다. 전노협 편집실에서 일하였으며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노동운동자료실 연구위원으로 있는 정경원 동지의 글은 노동자가 자기 역사를 쓰는 집단적 작업으로 ‘백서 작업’을 들고 있다. 필자 역시 전노협 백서의 작업과정에 참여하였으며,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의 백서작업과 발전산업노동조합 투쟁백서에 참여하기도 했다.

정경원 동지가 가르쳐 주는 해법은 이런 것이다.

①기록을 남길 때 수단에 얽매이지 말 것 ②백서작업의 기본은 자료수집이며 투쟁 과정에 조직적인 자료수집이 이루어져야 한다 ③가능한 주체 스스로, 최대한 주체를 추동해서 기록하자 ④백서는 과거의 기록과 미래의 평가뿐 아니라 현재적 의미를 지닌다.

변화를 위한 투쟁은 역사기록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통신계약직노조 백서작업과 발전노조 백서작업의 생생한 사례들에서 묻어나오는 것은 ‘역사기록 과정’이 곧 투쟁의 과정이었으며, 이 과정 속에서 투쟁시기만큼의 변화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지난하고 힘들었던, 때로는 끔찍했던 투쟁기억을 돌아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그 ‘돌아보기는 새로운 인식의 출발점’이기에 노동자의 자기 역사 쓰기는 변화의 과정인 것이다. 한통계약직노조 이운재 선전국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투쟁한 거에 대해서 글로 써달라고 해도 거부반응이 안 생긴다. 왜냐면 필요성을 공감했기 때문에.’ 단지 거부반응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를 노동자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몸에 베였다는 뜻이다.

‘투쟁 한복판에서는 투사였던 노동자들이 투쟁의 결과로만 판단해 자신의 능동적인 경험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리는 경우가 허다하고, 상처를 받았다고 하면서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돌아보기는 과정을 묻어두지 않기 위함이다. 돌아보기를 통해 스스로의 삶이 변화했음을,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자신이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즉 돌아보기는 행동의 주체인 노동자가 기록의 주체로,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을 새롭게 하는 주체로 서는 길이다.’(95쪽)

평가가 부담스러워 기록하지 않거나, 시간에 쫓기거나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아예 시도조차 평가에 대한 부담 때문에 차라리 건드리지 않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이 책에는 노동자교육과 관련하여 전노협 이전부터 노동자교육에 힘써왔으며 민주노총을 거쳐 노동자교육센터 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김진순 대표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또한 70년대부터 청계피복에서 노동운동을 해온 민종덕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위원의 인터뷰도 실려 있다. 말하자면 이 두 글은 노동자, 노동교육활동가의 일종의 생애사인 셈인데, 추상적인 역사적 흐름 속에서 두 인물이 어떻게 대응해왔고 어떻게 상황을 받아들였는지 재미있게, 의미 있게 읽을 수 있다. 두 글 모두 유경순 연구원이 기록했다.

또 다른 장은 현대 한국 노동운동사 연구 현황과 과제인데, 다소 어렵기도 하거니와 제목과는 조금 거리가 있고 견해의 차이가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짧막한 글들이기에 해방 이후, 70-86, 87년 이후 세 시기에 대해 참고하고자 할 때 읽어두면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지막 장은 노동자교육운동과 관련한 역사이다.

1930년대 최초의 사회주의 학교인 경성 고학당에 대한 글과, 70-80년대의 민중교육운동 속의 파울로 프레이리의 사상의 영향에 대한 글, 더 좁혀 90년대 초반 노동자대학에 대한 사례를 통해 사회 변화 속에서 실패 또는 (노동조합으로의)이전, 중단되고 만 노동교육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각 지역에서 노동교육에 대한 새로운 욕구들이 높아지고 있는 지금, 노동교육의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지은이들은 머리말에서 라다크의 격언인 ‘‘지혜’란 지금 여기에서 하고 있는 일을 나중에 지금의 아이들이 어떻게 평가할까 생각하는 것’을 들어 돌아보기의 중요성을 얘기하고 있다. 우리가 노동자의 역사 형성과 그 역사에 대한 교육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역사는 다른 누군가가 죽이려고 해야 죽일 수 없고, 살리려고 해야 살릴 수 없는, 노동자들 스스로 해야만 하는 작업이며, 그것이 세상을 만들고, 기억하는 유일하게 올바른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노동자에게 역사는 자기 역사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역사책들에는 역사의 주인이자 주체인 노동자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며, 노동자들은 역사를 고리타분한 먹물들의 전유물로 여기거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기억해보자. 80년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던 ‘노동자의 역사’, ‘노동의 역사’ 등의 책들은 내용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당시의 학문적인 성과를 체계적인 정리, 쉬운 문체, 짧은 분량으로 많은 청년 노동자들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켰다. 그러나 이제는 서울 주변의 헌책방이나 부산 보수동 골목으로 숨어들었고 그마저도 이제는 ‘헌책방의 헌책’으로 Kg당 얼마씩의 가격으로 팔려나가는 형편이다.

 


역사학연구소 지음, 󰡔노동자, 자기 역사를 말하다󰡕, 2005.11, 서해문집, 14,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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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사유의 기호 - 승효상이 만난 20세기 불멸의 건축들
승효상 지음 / 돌베개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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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기억의 정치를 보증한다
.

승효상, 《건축, 사유의 기호》, 돌베개, 2004, 18,000원


*리뷰 출처: 민주노동당 부산시당 소식지 진보부산 10호 8월호 http://busan.kdlp.org/
건축, 기억의 정치를 보증한다.

                                                                     양솔규(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가끔 여러 분야에 일을 하는 사람들의 글, 즉 글과는 별로 상관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쓴 글을 읽다가 화들짝 놀랄 때가 많다. 소위 ‘글발’이 글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보다 훨씬 더 뛰어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반대로 ‘글 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글이 지식전달과 감동은 고사하고 고치며 읽어야 할만큼 초보적 훈련도 되지 않은 것을 볼 때도 있다. 건축가 승효상의 글발은 장난이 아니다.

필자의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다. 승효상이 중앙일보에 건축과 관련한 글을 연재하면서 책을 펴냈다면, 건축가 서현 역시 동아일보에 글을 연재하였고 책을 펴냈다. 서현이 다룬 주제들은 대개 서울이나 광주, 부산 등 한국의 거리에 대한 에세이였다.

얼마 전 한 당원이 자기 동생에게 선물할 책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불현듯 나는 서현의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를 추천했다. 건축에 대한 문외한(門外漢)인 내가 건축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볼 계기를 준 책이었다. 하지만 곧 도서 추천을 후회하게 되었는데 책 추천이라는 게 그렇게 심오한 행위는 아니지만 자기 경험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들었다. 어쩌면 책을 권한다는 것은 책 한 권을 뛰어 넘어 삶의 변화를 권하는 것은 아닐까. 일종의 책임감이 드는 것이다. 더더군다나 ‘건축’이라는 가깝고도 먼 주제에 대한 책이라면 더더욱.

다른 어떤 미디어보다 책이 주는 장점은 장르와 시공간을 뛰어 넘어 모든 부분을 다룰 수 있다는 점이다. 공간을 바탕으로 하는 미술이나, 시간을 기반으로 하는 음악, 영화 등 직접적 감각에 의존해야만 하는 장르조차도 책을 통해 우리는 그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공급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2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직접적 감각의 체험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어떤 감동과 울림은 때때로 말과 글을 통해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어느 부분보다도 건축은 직접적 체험과 그에 대한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 건축계의 대부라 할 수 있는 건축가 김수근의 수제자로서, 한국의 현대건축계를 버티고 서 있는 건축가 승효상은 그 누구보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독창적인 자기세계를 구축해 오고 있는 사람이다. 직접적 체험이 무엇보다 중요시될 수밖에 없는 ‘건축가’라는 직업을 가진 이가 책을 펴냈다. 그것도 건축에 관한 책이다. 건축가의 글은 어떤 모습을 지닌 것일까? 삶의 직접적 체험을 기반으로 하는 건축(가)에 대해 2차적인 책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전달한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책은 승효상이 자신의 ‘관습과 타성을 씻고 버려 건축의 본질에 가깝게 가려는 데 큰 자극’을 받았던 건축물과 건축가의 삶에 대해 다룬 책이다. 승효상의 화두는 이런 것이다. ‘토탈 이클립스’라는 영화에서 랭보가 베를렌에게 했던 말, ‘당신은 시를 어떻게 쓰는지 알지만 나는 시를 왜 쓰는지 안다.’ 건축의 궁극적 목표, 목적, 왜 건축을 해야만 하는 지에 대해 끝없는 탐험을 승효상은 하고 있는 것이다.

승효상에 의하면 건축에 대한 일반의 상식은 건축이 예술의 한 분야거나 기술의 한 분야로 포함시키지만, 이는 망상이라는 것이다. 굳이 건축을 인접학문 속에 분류한다면 ‘인문학’에 가깝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적 상상력과 논리력, 역사에 대한 통찰력, 사물에 대한 사유의 힘, 이웃의 삶에 대한 애정과 존경 속에서 작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건축이 단순한 기술적 공학이 아님은 물론, 일반 대중의 삶과는 동떨어진 뭔가 고색창연한 예술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삶이 공간을 기반으로 하고, 건축은 또한 공간, 즉 장소와는 뗄레야 뗄 수 없으며 건축의 존재의의는 인간의 삶의 영위에 있기 때문이다.

사회혁명만 혁명이 아니다. 흔히 건축의 3대 혁명을 이야기한다. 첫째는 2,000년 전, 로마인들이 발명한 콘크리트이다. 재료적 혁명. 이를 통해 재료의 의지보다는 작가의 의지가 중요해진 것이다. 둘째는 고딕양식의 완성이다. 전형적인 고딕양식인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을 기억해보자. 이를 통해 벽은 새로운 기능, 창문을 담당할 수 있었고 건축은 ‘중력에서 해방’되었다.
세 번째 혁명은 바로 파리의 ‘뽕삐두 센터’이다. 각종 배관과 설비가 모두 외관에 드러난 상태의 센세이셔널한 건물. 사회당 미테랑 대통령의 야심찬 문화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던 뽕삐두 센터는 바로 ‘하이 테크놀로지’의 혁명이었고, 그 자체보다는 ‘하이 테크놀로지’를 만든 ‘정신’이 곧 ‘큰 기술’이었다. ‘우리가 가졌던 종래의 건축개념을 뒤집어 우리가 믿었던 신념들을 다시 반추하게 만들었으며 동시에 우리 시대 삶의 방식을 새롭게 제시’했던 그 ‘정신’이 곧 혁명이라는 것이다.

도시와 주거, 지역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의 도시정치. 민주노동당이 숙명적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 우리의 환경이다. 이 외부 환경을 어떻게 바꾸는가 하는 것은 민주노동당의 과제임과 동시에 미래의 환경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세계에서 가장 밀집된 건축현장이 있으나 건축의 정신과 건축의 목적은 사라진 곳, 재산증식에 철저하게 복무하는 건축물들만이 ‘생존할 수 있는’ 곳, 대한민국. 아파트(부동산) 투기 문제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APEC을 대비해 만드는 누리마루가 부산시민의 뇌리에 뿌리박히는 것. 이는 APEC에 대한 정당성, 도시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의탁, 한나라당과 성장연합의 주도권이 확고해지는 기제가 된다. 소위 ‘기억의 정치’는 도시 건축물 속에서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한나라당에게는 ‘누리마루’가 ‘기억의 정치’의 기제이다. 부산시민의 바램과 열망을 모아 일체감을 갖게 하고 그 상징을 누리마루에 고스란히 유폐하는 것, 생각보다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도시 곳곳에 프린트된 누리마루의 경관은 내년 선거 때까지 유지될 것이다.

열린우리당에게는 ‘민주공원’이 있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정통성을 토대로 만들어진 그 공간은 소위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수구 대 개혁의 구도로 허위 전화되면서 ‘누리마루’보다는 약하지만 더 오랫동안 남아 있을 수 있다. 이 역시 역사성을 토대로 부산시민의 일체감을 조성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에겐 도시정치의 상징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아니 우리의 상징성은 그들과는 달라야 한다. 역사적 조형물, 이벤트의 기념물이 아니라 도시 생활, 부산 시민의 삶을 오롯이 담을 수 있는 그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쌓여 나갈 때에만, 도시는 좌파의 강력한 상징을 기억하고자 할 것이다. 바로 뽕삐두 센터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 종래의 개념을 뒤집고 신념을 다시 반추하는 것, 이를 통해 삶의 방식을 새롭게 제시하는 것, 건축과 정치가 만나는 지점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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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미디어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4
김찬호 지음 / 책세상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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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출처: 민주노동당 부산시당 <진보부산 9호>


부산을 바꾸려면 이 책을 보라!



                                                                   양솔규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도시는 미디어다
/ 김찬호 지음 / 책세상 / 2002 / 4,900원 /178쪽

가뜩이나 통풍이 안 되는 방에서 무더운 여름밤을 보내다보면 답답하기만 한데, 집에 있는 모든 창을 열어두면 시끄러운 차소리 때문에 예민한 나로서는 여간 잠을 청하기가 힘들다. 이 도시를 두고 누구는 잿빛이다, 무겁다 하는 표현을 붙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런 낭만적 표현보다는 차라리 ‘재수없어!’, ‘짜증나’라는 말이 더 솔직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깔끔하게 조성된 고층 아파트를 가게 되면 괜히 주눅들고, 돈 없는 것에 대해 후회와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왜 이렇게 잘 사는 놈들은 편안하게 살고, 못 사는 놈들은 짜증내면서 살게 되는 것일까?
물론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우리가 민주노동당에 입당하고 활동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과연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궁극적으로 올 때까지’ 모든 행복과 가치는 유보해야만 하는 것인가? 소위 근본모순이 해결되는 그 순간에 와서야(그러니까 그 전에는 결코!) 비로소 행복의 활시위는 서서히 떠나게 되는 것인가? 그럼 이 도시의 팍팍한, 짜증나는 경관과 소음, 부딪힘과 낯설음은 감내해야만 하는 고통으로 남게 되는 것인가? 답답하기만 하다.

도시란 무엇인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자본의 필요에 의해 새로운 시공간적 구획이 시작되었고 이 속에는 인간, 노동자가 있었다. 있으나 없는 ‘빈 공간’은 무엇으로 꽉꽉 채워야만 했다. 도시는 자본주의가 만든 하나의 거대한 공장이다. 소위 근대 이전의 도시와 근대 이후의 도시는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난다. 정치적, 경제적 의미에서 다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대규모의 인구이동을 전제로 한 산업적 공간구획이 그 특징이라 하겠다. 노동력과 상품이 거래되고, 그 속에서 물질적 부가 끊임없이 쏟아져 내는 도시는 한편으론 빈곤을 생산하고 다른 한편으론 화려함을 생산한다. 근대 이전의 정적인 인간관계는 상품과 가치 중심으로 탈바꿈한다. 이른바 맑스식으로 말하자면 모든 굳어진 것은 사라진다(All That is Solid Melt Into Air).

예전부터 도시의 문제는 곧 계급적인 투쟁의 형태와 함께 전개되어 왔다. 직접적 공격일 수도 있고 이데올로기적 공격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도시는 그 모든 투쟁의 결과물이 각인된 거대한 화석이기도 하다. 승리자는 거대한 구조물로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며 패배자는 기억과 술자리에서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응축된 투쟁의 결과물이 도시인 것이다. 서울 올림픽 공원은 승리자에겐 기념물일 수 있지만 패배자에겐 무덤일 수 있다.

한국 자본주의 역시 초국가적인 도시 문제를 만들어 왔다. 이는 자연스럽게 어쩌다가 생긴 문제가 아니다. 종속적이고 유혈적인 산업화(소위 유혈적 테일러리즘에 기초한)는 서울을 정점으로 한 전 지역의 복속을 낳았고 이는 사회 곳곳에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다.

도시는 자본주의 이후에도 수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2차대전 이후 자본주의 황금기를 거치면서 체계적인 도시정비의 필요성이 생겨났고 이 과정에서 도시빈민과의 거대한 전투가 벌어졌다. 71년 경기도 광주대단지 투쟁, 80년대 올림픽을 앞두고 벌어진 상계동 철거투쟁 등이 대표적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른바 환경문제를 둘러싼 투쟁은 지역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송전탑 반대 투쟁, 댐 건설 반대 운동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도시의 구획을 둘러싼 운동의 특징은 한 마디로 ‘반대운동’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영속성은 보장되었고 도시의 재구획은 90년대 초중반에는 거의 완료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도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시민운동의 때늦은 (혹은 때이른) 붐과 함께 지역운동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다. 도시를 살리자는 것이다. 한국 사회 역시 단지 도시의 구획뿐만 아니라 그 속에 사는 인간들의 세대 역시 바뀌게 되면서 도시 출생 인구 비중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산업 역시 주도산업이 이미 성숙산업화 되면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제 한국 사회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인구구조, 성별 시스템, 도시, 산업구조, 산업의 성숙도, 교육수준 등에서 서구의 모습과 많이 닮게 된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반대’와 더불어 ‘반대’를 넘어선 참여, 목표에 있어서의 생태, 생활적 요구를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마을 공동체) 형성이 도시 재생, 주민운동의 중요한 축으로 등장하고 있다. 하버마스가 구분한 바 돈과 권력을 중심으로 한 ‘체계’와 구분되는 ‘생활세계’가 점차 주요한 전장이 되는 것이다. 개인 삶의 세계를 침범하는 ‘체계’에 맞선 투쟁, 그것을 신사회운동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 과정이 그렇게 간단하게 진행되지는 않는다. 주민들과 접촉하고 노력하는 것은 많은 준비를 필요로 한다. 즉 생활세계를 어떻게 재조직할 것인가는 새로운 생활세계의 상, 즉 개인적 생활태도(가치관)와 사회적 교류 방식의 변화를 전제로 해야 하고 이는 선험적으로 규정할 만큼 쉽고 단순하지가 않다. ‘체계 내’ 투쟁과 ‘생활세계 내’ 투쟁이 씨줄과 날줄처럼 동시에 필요하다. 이러한 투쟁에 민주노동당이 끼어들어야 한다는 점은 명백하다. 아니 90년대 초중반에 개입의 주도권을 놓친 것이 중요한 우리의 실책일 수 있다.

지금도 도시를 둘러싼 담론은 우리를 무수히 들었다 놨다 한다. 한전 이전이 실패하자 부산은 노무현의 균형정책이 실패했다고 떠들고 있고, 주공이 들어서는 경남에서는 기초단체들끼리의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이제 내년이면 지방자치체 선거이다. 선거에 목숨 거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계기로 도시 하드웨어의 전반적인 문제, 도시 삶의 양식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 좁은 운동의 토양을 넓히는 현대적 운동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당원동지들에게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전 이 책을 읽을 것을 권한다. 이 책에는 선거 공약과 관련한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우리가 도시와 사람들간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 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도 함께 담고 있다. 도시도 숨을 쉴 수 있다. 도시도 숨을 쉴 권리가 있다. 도시 속 시민의 주인됨은 도시 디자인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탈출구는 없다! 문제는 상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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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양의 시대로
이필렬 지음 / 양문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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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청구서를 보내지 않는다

 

                                                     양솔규(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리뷰 출처: 민주노동당 부산시당 소식지 <진보부산> 7호 http://busan.kdlp.org/


<다시 태양의 시대로> - 이필렬 씀/양문/2004년/1만원

마음 한 구석에 빈자리가 느껴지고 더 이상 예쁜 꿈을 꿀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나이. 그런 나이가 되어야 알 수 있는 ‘맛’이 있다. 간만에 만난 친구와 주고받는 술잔의 맛이 그러하며, 진한 육수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의 맛이 그러하다. 화창한 햇살이 내리쬐는 산행의 커피맛이 그러하며, 똑같은 일상을 벗어나 조용히 라디오를 켜고 앉아 읽는 책맛이 그러하다.

그런 나이가 되면 사람들은 꿈을 꾸기 마련이다.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나를 둘러싼 익숙하지만 힘겨운 짐들과 풍경들을. 그리곤 상상한다. 자연을 벗하며 사는 삶으로 돌아가는 꿈을. 이젠 내가 어제까지 접촉했던 하찮은 것들은 더욱 하찮아지고 결심은 굳어진다. 나 돌아갈래! 그 나이. 더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밀리고 밀려 내 등이 거대한 절벽에 맞닿은 나이. 그때서야 나타나 내 눈을 사로잡는 삶은 더 이상 어제의 삶이 아니다. 자본이라는 인공의 거대한 힘은 내 안에서 파괴된다.

그런 선택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닥치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꿈이 있다. 쭉 뻗은 아스팔트와 화려한 조명이 번쩍이는 도시를 동경할 만큼 순진한 나이가 아니라면, 오르지 못할 타워팰리스를 더 이상 쳐다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인생이 포기를 의미한다거나 인생의 마지막 정착지로 흘러 들어가는 노파의 힘겨운 발걸음도 아니다. 태양의 강렬한 빛이 내리쬐고, 굳은 발 뒷꿈치에 시원한 흙의 감촉이 전해지는데 우울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는 쉽게 떠날 수가 없다. 거창한 이유는 아니더라도 내 주위는 자기장처럼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당장의 결정도 쉽지 않고 자신감도 생기지 않는다. 우리의 삶과 몸은 인공에 둘러싸여 매연을 마시면서 병원이나 들락거리면서 시멘트처럼 굳어져야 하는 것인가?

이필렬 선생이 쓴 <다시 태양의 시대로>는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전해 준다.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곳에서 잃어버린 꿈, 삶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나갈 희망 말이다. 간단하다. 사람, 문명이 돌아가야 할 태양의 시대는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화석연료 시대는 단지 생태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유, 문화적 이유, 효율성인 이유 때문에라도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제 화석연료 고갈은 눈앞으로 다가왔고, 미국과 한국 등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새로운 대체에너지, 재생가능 에너지로의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 경제성? 석유와 석탄에 의존한 에너지의 가격은 상승하고 있고, 태양에너지, 풍력에너지의 가격은 하락하고 있다. 언제쯤? 2010년이면 태양광전기가 가스화력과 경쟁하고, 2030년이면 석탄, 원자력과 경쟁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추세로는 이 시기는 더 빨리 단축될 수 있다. 난방, 전기생산, 조리 등 태양을 이용한 에너지전환은 생태계와 민중의 생활(어쩌면 자본주의에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2004년 정부에서 제출한 2차 전력수급 계획을 보면 대부분의 전력소비 증가분을 화력과 원자력으로 채우고 있다. 석유에 의존하는 한국 경제는 에너지 소비에서 매우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미 독일, 일본, 영국보다 더 많은 에너지 소비량을 기록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많은 부분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독일은 2050년까지 에너지 소비를 현재의 60% 수준으로 줄일 계획을 가지고 있다. 또한 에너지 소비 구성에 있어서도 재생에너지의 비중을 70%로 채우고 원자력 의존은 2030년이면 없앨 계획이다. 야심찬 계획을 구상했다. 이미 많은 나라들과 초국적 석유회사들(예: Shell) 역시 태양광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한 지구 기후 재앙은 이미 초읽기에 들어갔다. 해수 온도의 변화는 강수와 기온의 급격한 변동을 가져오고 있다. 재생가능한 에너지는 우리에게 무한한 에너지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기후도 가져다 줄 것이다.
얼마 전 민주노총 공공연맹, 에너지대안센터,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 등이 모여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준비위’를 만들었다. 흔히들 노동과 환경이 대립되는 경우를 예로 들면서 두 부문의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관계를 상정하고들 한다. 물론 그런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러한 관점은 현체제를 패배적으로 인정하게 하는 효과를 생산한다. 노동과 환경, 두 부문이 만날 수 있는 지점은 현 체제의 ‘극복’에서이다. 자본주의 내 근본모순 중 하나로 노자간 모순 뿐 아니라, 자연/사회 모순을 상정하는 (제임스 오코너와 같은) ‘생태 사회주의’ 관점도 존재한다. 이러한 관점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눈에 보이는 위기를 극복하지 않고 나의, 가족의, 이웃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 어찌 저항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사는 이 땅, 이 공간을 우린 너무 일찍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멀리 떠나지 말자! 내가 있는 곳이 바로 저항의 중심! 부러운 그들의 삶을 차근차근 만들어 가자!

<추천사이트>
* 에너지 대안센터 http://energyvision.org/
* 환경수도 프라이부르크 http://haeseong.hs.kr/HMC/freiburg/main.htm

<추천도서>
* 환경 수도, 프라이부르크에서 배운다 / 이후 /김해창
* 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 / 존 벨라미 포스터 지음, 김현구 옮김 / 현실문화연구
* 생태적 경제기적 / 프란츠 알트 / 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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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힘 - 1870년 이후의 노동자운동과 세계화
비버리 실버 지음, 백승욱.안정옥.윤상우 옮김 / 그린비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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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출처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2005년 11월호 (137호) 
양솔규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 redstar@jinbo.net

비버리 J.실버 / 그린비 / 2005.8월/15,900원

도전과 응전의 파노라마,《노동의 힘》

 

9월 4일, 현대차비정규노조 조합원 류기혁 동지가 노동조합 사무실의 옥상에서 자결하였고, 9월10일에는 화물연대 조합원이자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활동하던 김동윤 동지가 신선대 부두 앞에서 분신하였다. 김주익․곽재규 열사, 이현중, 이해남 열사 등과 박상준, 최복남, 고성학 동지 등 화물운송 노동자들의 죽음에 이어 도대체 끊이지 않고 있는 이 죽음의 행렬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강승규 비리 사건으로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가 사퇴하였고, 울산 북구 선거 패배 후 민주노동당 김혜경 대표와 최고위원회가 사퇴하였다. 혹자는 ‘사퇴정국’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짧은 만개와 때이른 조락이 낳은 불안한 기운이 여러 사람들의 얼굴빛을 어둡게 한다.

부산 서면에서 열린 김동윤 열사 추모 촛불집회를 마치고 참담하고 허탈한 마음을 안고 지하철에 올랐다. 부산대 앞에서 전두환 아들이 운영하고 있는 서점(리브로)에 들려 새로 나온 신간들을 살펴보려 했지만, 인문사회과학 신간 코너는 새학기를 맞아 어느새 대학교재 코너로 바뀌어 있었다. 경영경제 도서나 예술, 컴퓨터 실용서들은 버젓이 자신의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지만 인문사회과학은 어느새 답답하고 돈 안되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나보다.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책을 뒤지던 중, 최근에 나온 책 하나가 눈에 띄었다. 비버리 J. 실버가 지은 ‘노동의 힘’이 그것이다. 표지에는 멕시코의 예술가 디에고 리베라의 프레스코 벽화 <Industria de Detroit o Hombre y Maquina, 디트로이트 산업 혹은 인간과 기계>가 전면에 그려져 있다. 이 표지 그림으로서는 도저히 ‘노동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왼쪽 옆에 관리자인지 자본가인지가 안경 너머 매서운 눈초리로 일하는 노동자들을 ‘꼬나보고’ 있고, 노동자들의 눈동자는 보이지 않는다. 정신없이 작업에만 매달려 있는 모습들. 더군다나 노동운동의 위기를 말하고, 노동 연구의 위기라 말하고 있는 이 시기. 신자유주의 광풍을 힘겹게 맞이하고 있는 한국의 노동운동과, 일시적인 ‘열사정국’이 아니라 ‘열사의 시대’ 아니, ‘죽음의 시대, 절망의 시대’라 할 수 있는 바로 이 땅에서 ‘노동의 힘’을 선언하기에는 도무지 자신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이 책을 꺼내봤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역자 중 한 사람인 백승욱 선생은 최근 중국 노동의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저작들과 논문들을 발표하고 있고,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같은 세계체제론자들의 책들을 번역했는데, 그 긴요성을 간취하는 뛰어난 능력에 걸맞게 좋은 책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이 책은 1870년 이후의 노동자운동을 세계노동운동집단 데이터베이스에 기반해 몇 가지 개념을 가지고 분석하고 있다. 그 개념이란 첫째, 맑스식 노동소요와 폴라니식 노동소요이다. 맑스식 노동소요는 ‘역사적 자본주의의 발전이 과거의 노동계급을 해체시키는 와중에 의도치 않게 낳은 결과로서 출현해 잇달아 형성, 강화되어 가는 새로운 노동계급의 투쟁’을 뜻한다. 폴라니식 노동소요는 전지구적인 경제적 전환 탓에 해체되어 가는 노동계급이 벌이는 저항을 뜻한다. 둘째, 노동소요에 대응하는 자본의 방식은 공간 재정립과 기술 재정립, 제품재정립, 금융적 재정립으로 나눌 수 있다. 재정립을 통해 자본은 노동소요를 무력화시키고 안정적인 자본 축적 구조를 만들고자 하지만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다는게 저자의 생각이다. 셋째, 노동의 힘은 연합적 힘과 구조적 힘(시장교섭력, 작업장교섭력)으로 나누고 있다.

저자가 주목하는 바는 전세계 노동운동이 위기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재정립을 통해 노동소요를 파괴하고 피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최종적’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본이 가는 곳에 갈등이 따라간다’는 주장을 저자는 책 한 권을 통해 증명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저자들은 먼저 20세기 자본주의의 선도산업인 자동차산업에서의 노동소요와 자본이동을 다루고 있다. 자동차산업의 노동소요는 자본의 공간재정립에 따라 지리적으로 변화되어 왔다. 미국에서 서유럽으로, 다시 제3세계(브라질, 한국, 남아공 등)로 이동해온 이러한 자동차산업 노동소요는 이제 최종적인(?) 거대한 노동소요의 진원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바로 세계의 생산기지 중국이 그러한데, 아직 현상적으로는 조용하지만 그 거대한 대륙이 요동칠 시간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자동차산업 내부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보통 린생산(Lean Production)이라고 부르는 일본식 생산방식이 전세계로 확산되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바로 기술재정립의 과정이다. 그런데 일본의 린생산방식(이중적 린생산)보다는 ‘인색한 린생산’ 방식으로 변형되었고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90년대 후자의 방식을 도입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재정립은 오히려 노동의 강력한 작업장교섭력을 증대시켰다.

그러나 19세기의 섬유산업의 노동소요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산업에 노동소요의 역사적 임무를 넘겨줄 운명에 처해 있다. 노동-자본 갈등의 장소가 부문간으로 이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부문이 21세기의 노동소요를 책임질 것인가? 이를 포착하기 위해 저자는 ‘제품재정립’이라는 용어를 도입했다. 이는 바로 ‘혁신적이고 더욱 이윤이 높은 새로운 생산라인과 산업으로 자본을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한 제품의 후기 단계(경쟁이 격화되면서 이윤율이 낮아짐)는 새로운 제품 산업의 시작과 겹쳐진다. 바로 지금의 시기는 자동차산업과 새로운 산업이 겹쳐지고 있는 시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산업이 자동차산업의 계승자가 될 수 있을까? 저자는 반도체산업, 생산자서비스 산업(도시 시설관리. 바로 SEIU가 행했던 건물관리인을 위한 정의 캠페인을 상기하라. 이는 젊은 활동가들을 흥분시키는 캔 로치 영화 “빵과 장미”에 잘 묘사되어 있다.), 운송과 교육산업을 검토한다. 결론적으로는 21세기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은 20세기의 자동차산업보다는 19세기 섬유산업과 비슷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도체산업은 섬유, 자동차와는 달리 고용성장의 원천이 아니며, 고소득 국가에 집중되었고, 자동화되고 있다. 교육과 생산자서비스는 제조업과 달리 공간재정립이 힘들다. 그렇다고 이러한 산업들에서 우리가 자동차산업과 같은 폭발적 전투력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21세기 노동의 ‘구조적 힘’이 침식되는 것만큼 우리는 19세기 섬유노동자들이 그랬듯이 ‘연합적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이 힘은 ‘지역’을 근간으로 한다. 바로 도시 시설관리나 교육산업과 마찬가지로 지역 차원의 연합적 힘이 필요하며 이는 젠더, 시민권, 계급 등의 여타 다른 범주들의 동원과 협력, 수용이 필수적이다.

최근의 상황에 대해서는 저자는 ‘금융적 재정립’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전세계적인 경쟁의 압력은 무역과 생산에서 이탈해 자본이 금융과 투기로 옮겨지게 만들었다. 현재의 과잉축적된 금융적 재정립은 사회협약의 붕괴와 기존의 조건의 후퇴에 대항하는 폴라니식 노동소요의 전세계적인 확산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금융적 재정립은 곧 노동운동의 위기를 불러왔고, 19세기의 금융적 재정립과 유사한 패턴을 보이고 있다.

마이크 데이비스는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에서 미국 노동의 힘이 거세당하는 과정과 원인을 추적하면서 결국 자신의 대안을 제3세계 노동자에게 찾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약 20여년이 지난 지금, 혹 우리는(아니 나는) 우리의 대안을 ‘중국 노동자’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만큼 중국이 세계노동정치에 주는 함의는 대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활동가는 이 책의 저자 실버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거대한 노동소요의 물결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마틴 하트 랜즈버그 역시 <중국과 사회주의>(한울)에서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투쟁이 유발되고 있으며 이는 중국 자본주의의 복고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도 마찬가지로 노동소요의 거대한 진원지로 중국을 파악하고 있다. 그에 따른 광범위한 중국 노동자들의 폴라니식 노동소요가 분명한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맑스식 노동소요는 분명치 않은 것 같다. 어찌되었든, 결국 자기대안은 자기가 마련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유일하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중국의 노동소요가 전세계 노동계급의 재생의 힘이 될 지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국을 찾은 중국 공회의 간부가 공산당의 발전주의이데올로기를 읊는 것을 보면서 황망했던 기억이 있다. 수많은 중국 인민들과 더 많은 전세계 노동자들이 슬기롭게 자신의 힘을 낙관하지도, 비관하지도 않으면서.

 

이제 21세기의 노동이 마주한 거대한 전환점에서 우리는 우리 노동운동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 파악 하에서만이 정확히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와 한계, 전략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효과적으로 우리 자신의 힘을 이용해야 한다. 실버의 ‘노동의 힘’은 바로 ‘노동의 힘’을 증대시켜줄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하게 해주는 책인 것이다. 우리가 자본이 이윤을 위해 추구하는 재정립이라는 도전에 끊임없이 응전하는 이유는 그것이 나의 삶의 본질적인 회복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나의 구성요소이자 내가 그 일부분인 공동체의 본질적인 회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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