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화, 현실인가 또 하나의 신화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3
구춘권 지음 / 책세상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노동사회교육원 4월 회보 양솔규 글
지구화 한 그릇 드실래요?

 

양솔규(노동사회교육원 회원)

 

지구화, 현실인가 또 하나의 신화인가 / 구춘권 / 책세상 / 2000년 / 3,900원, 142쪽

한미 FTA가 타결되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2007년 4월 2일), 각 뉴스 포털 사이트와 방송들은 FTA의 타결 소식을 급히 전달하고 있다. 어제 밤에는 민주노총 민주택시노조연맹 조합원이자 민주노동당 관악구위원회 당원인 허세욱 동지가 FTA를 막아내고자 54년을 함께 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지금 현재 허세욱 동지는 위독한 상태이다. 이제 우리 현실이 어떻게 변할 지, 각 산업별 득실은 어떻게 변할 지, 촌에 계시는 우리 할매, 할배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우리 고향은 이제 유지될 수나 있을런지, 만감이 교차하는 시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실은 한미 FTA가 되기 전부터 한국의 개방화 정도는 도를 넘고 있었다. 도를 넘고 있다는 점은 단지 양적인 부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속도의 부분 또한 의미하는 것이었다. 소위 ‘개발독재’ 시기로 일컬어지는 경제 개발 시기에 대한민국은 폐쇄적인 수출주도 보호 무역 정책을 가진 나라였다. 미국은 냉전 시대, 자신들의 동아시아 정책에 지정학적으로 한국이 중요했기 때문에, 한국의 경제 발전을 의도적으로 돕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폐쇄적이고 국가주도적인 경제체제는 외부 시장에 개방적이고 시장주도적인 경제체제로 ‘압축적’인 변화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계기는 김영삼 정권 시기의 세계화 전략과 그로 인한 ‘IMF 경제위기’였다.

배낭여행과 영어마을은 차라리 애교스러운 어린 것들의 유행일 뿐이다. 정작 무서운 것은 만성적인 실업과 저성장, 급격한 빈부의 격차와 저항의 붕괴, 교정의 불가능성이 아닐런지.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에서 보아 왔다. 이제 한국은 유럽식 사민주의의 길도, 영미식 신자유주의의 길도, 20세기 초의 사회주의의 길도, 일본식 길도 아닌, 남미식 종속적 신자유주의의 경로로 추락하고 말 것인가? 심히 걱정스럽다. IMF 이후 언제나 어려웠다고, 언제는 해뜰 날이었냐고 퉁명스럽게 내뱉을 지도 모르겠지만, 영화 매트릭스의 대사 한 꼭지를 인용한 우석훈 교수의 말은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괴물.”

이 책의 속지에는 “지구화의 패자와 희생자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적혀 있다. 과연 나는 세계화의 패자인지, ‘노동사회교육원’ 회원들은 세계화의 승자인지, ‘6시 내고향’이나 ‘전국 노래자랑’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패자인지, 승자인지 곰곰이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좋든 싫든, 세계화된 세계에 살고 있으며, 그 사회의 보다 나은 모습을 위해서 노력하고 기대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세계화에 대해서는 수많은 책들이 이미 나와 있다. “도둑 맞은 세계화(창비)”, “세계화와 싸운다(창비)”, “세계화 없는 세계화(시유시)”, “세계화 시대 초국적 기업의 실체(책세상”,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필맥)”, “아래로부터의 세계화(아이필드)”, “허울뿐인 세계화(따님)” 등등.

그러나 이 책의 강점은 당연히 “짧고, 값싼” 책이라는 사실에 있다. 또한, 수많은 ‘반세계화’ 교과서가 외국의 필자들이 쓴 반면에 이 책은 한국 사람이 썼다는 점도 장점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책의 경우 일차적인 목적이 ‘반세계화’를 말하고자 한다기 보다는, 세계화(또는 지구화 Globalization)라는 것이 어떤 경로를 밟으면서 등장했는지, 그 탄생의 역사를 요약해서 설명하는데 일차적 목적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이 짧다고 해서 쉽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의 변화를 책 100쪽으로 요약하는 것은 저자로서는 당연히 쉽지만은 않으며 또한, 독자의 입장에서도 마치 꿈을 꾸듯이 100년을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1쪽에 1년씩! 우리가 이러한 부분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든 적게 가지고 있든 간에, 어쨌든 간 우리의 나머지 삶을 ‘지구화된 세상’은 지배할 것이다. 그렇다면 좀 알아 두는 게 필요하다. 이 짧은 책으로 먼저 예습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자기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주워  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하면서 복습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우리에게는 물론 자본주의 역사, 또는 세계화를 둘러싼 다른 여러 가지 책들을 함께 보는 것도 필요하며, FTA에 대해 분석해 놓은 책들도 역시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운동 진영에서도 반FTA와 관련하여 괜찮은 책 네 권 정도는 내놓았다. “투자자-국가직접 소송제(녹색평론사)”,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녹색평론사)”, “한미 FTA 이미 실패한 미래(사회운동)”, “한미 FTA 국민보고서(그린비)” 등. 물론 FTA 맹신도들이 매일매일 수 백 권의 책과 매스컴, 정부관료, 정당 대변인의 입을 통해 쏟아놓는 양에 비해서는 ‘새 발의 피’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이 책이 살핀 지구화는 바로 ‘포드주의적 축적체제’의 ‘경제적’ 위기에 대해 ‘정치적 개입’이 대단히 무력하게 되면서 나타난 과정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시장’의 전지전능함을 믿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지니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구화는 수익성 위기를 겪은 전 세계 자본가(특히 금융 자본)들의 ‘위로부터의 정치적 전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노동자, 민중들의, 즉, ‘아래로부터의 정치적 전략’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적 지구화’의 핵심은 네 가지이다. 첫째 국제금융시장이 규제되어야 한다. 둘째, 지구적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셋째, 대안적 지구화는 환경적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넷째, 경제적 지구화를 규제하기 위해서 민주주의적인 전지구적, 지역적 국제협력기구가 필요하다. 한미 FTA의 타결로 인해 우리는 이러한 대안적 지구화를 해 나갈 지렛대나 무기(예컨대 국가의 힘)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너무 걱정만 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FTA이든, 지구화된 초국적 금융 체제이든, 어떠한 체제든 간에 실물 자본주의와 유리되어, 또는 사회를 초월한 체제는 영원할 수가 없다는 것이 자본주의 역사, 또는 인류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위기가 기회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좀 더 근본적으로 핵심에 다가서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지식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라는 그람시의 경고를 상기하자. 지구화라는 현실을 분석하면 할수록 비관주의에 빠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낙관주의를 고수해야 한다……노동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등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모든 사회운동은 대안적 지구화의 희망이다. 전 지구적 연대만이 개별 국가들로 하여금 대안적 지구화의 길로 들어서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사회교육원의 회보가 이제 출발한다. 보라. 우리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어 나가고 있지 않은가? 어설플지도 모르지만 진지하게 탐색하는 다수를 소수가 어찌할 수는 없다. 다수의 깊음을 어쩌겠는가? 아무쪼록 회원 여러분께서 ‘책 한 그릇’으로 FTA 체결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을 삭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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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
에릭 포너 지음, 박광식 옮김 / 알마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 4월호 기고.

‘에릭 the Red’을 위하여, ‘USA the Red’를 위하여

 

양솔규(전진부산 회원)

에릭 포너(Eric Foner),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 알마, 2006년 11월

가만히 ‘역사’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세상이 내 마음대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 같다. 내가 원하는 대로 또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세상이 만들어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게만 된다면야 ‘운동’이니 ‘혁명’이니 하는 말은 사전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맑스는 ‘브뤼메르 18일’에서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에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넘겨받아 직접 맞닥뜨리게 되는 환경에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라고 썼다. 내 안에 ‘역사’가 있는 것이며 ‘애미애비’를 전제하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나 엥겔스, 그람시와 같은 고전적 맑스주의의 흐름에서 ‘미국’이라는 사회는 매우 특이한 조건을 가진 사회로 보였나보다. 이들 사회는 전(前)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없는, 봉건적 조건이 거세된 순수한 의미의 자본주의로 여겨졌다. 말하자면 위대한 ‘역사적 전통’은 없는 대신에 선조로부터 내려온 ‘납덩어리’ 같은 부담도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의식과 계급전선이 왜곡되지 않고 투명하게 드러날 것으로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 시대에 있어서는 영국과 독일 등이 혁명의 도화선이 될 것으로 보였는지 모르겠으나, 조만간 미국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였다. 예컨대 새로운 시대의 준거점은 유럽이 아니라 미국으로 보였다.

하지만, 20세기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미국 자본주의의 ‘순결함’은 사회주의 이행의 모범정답을 제시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은 한계로 작용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매우 아이러니하다.

과연 미국은 ‘사회주의’를 거부하는가? 사회주의로 가기에는 너무나 편안한 사회인가? 아니면, ‘실천의 동력’이 없는 것인가? 생산력이 아직도 불충분한 것일까? 최종적인 질문을 던져보자면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

여기 이와 관련한 ‘글’이 있다. <에릭 포너,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 알마, 2006년 11월> 사실 ‘서평’란에 ‘책’이 아니라 ‘글’이라고 한 이유는 이 책의 모든 내용이 ‘미국 사회주의’와 관련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02년 미국에서 출판되었고 한국에는 2006년에 번역되었다. 이 책에는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에 대한 글뿐만 아니라, 역사가의 의미, 남아공에 대한 에세이, 러시아에 대한 글, 미국 흑인과 헌법 등 다양한 역사학자로서의 고뇌가 담긴 수필들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미국의 역사에 대해 쉽게 그리고 고급 해석을 바라는 독자들이 읽기에는 더없이 좋은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의 운동과 관련해서는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는가’를 제외하고는 약간은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만이 아니라, 미국의 역사, 저항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른 책들 역시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전제로 소개를 하고자 한다.

위의 질문은 예전부터 오래된 질문이기도 했다. 또한 나름 많은 학자들이 대답을 내놓기도 했다. 또한, ‘미국의 사회주의’의 ‘형성’이라는 실천적 문제는 ‘전진’ 동지들의 역사적 임무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미국의 (사회주의의 역사를 포함한) 역사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미국의 미래가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하는 점은 단지 미국에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수출주도 개방경제 체제인 한국이 외부의 조건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현실이며, 더군다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미국이라는 나라는 (남미가 미국의 앞마당이라면) 한국을 자신의 ‘베란다’ 정도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네그리 식 표현대로라면 미국 신자유주의의 확산의 결과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 변화했고, (제국=미국은 아니지만) 미국의 미래는 어쩌면 제국의 흥망성쇠를 가늠하는 결정적 열쇠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네그리는 지구 어느 곳이든 자신이 존재하는 곳이 곧 제국의 중심이라고 말했지만(실천의 의미를 부여해준다는 점에서는 고맙고 고무적인 발언이기는 하나), 내가 보기에, 또는 초국적 자본의 경영자가 보기에 그렇다고 본사를 부산이나 칸쿤에 가져다 놓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두 번째 이유는, 이게 더 중요한 이유일 수 있는데, 미국으로의 길이 어쩌면 우리의 앞날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맑스는 “자본”에서 “더 발전된 국가는 덜 발전된 국가들에게 그들의 미래상을 보여 준다”라고 했다. 물론 이러한 언급을 기계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당연히 없지만 말이다. 우리가 미국식의 사회로 변할 것이라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일이기도 하다. 미국 이외의 나라에게는, 그리고 초국적 자본의 지배블록 밖의 노동자계급에게는 이것은 하나의 재앙이 될 터인데, 그러한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이 제시하는 강력한 궤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미국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바로 이러한 점이 에릭 포너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저자인 ‘에릭 포너(Eric Foner)’는 말하자면 미국의 ‘에릭 홉스봄’ 같은 역사학자인 것 같다.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이면서 존경받는 역사학자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하지만 또한 미국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꽤나 정치적 보수주의자들로부터 민감한 인물인 것 같다. 마치 ‘강정구 교수’에 대해 한국 우파들이 난리를 치는 꼴이라고나 할까? 그에 대한 별칭이 ‘빨갱이 에릭 Eric the Red’ 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을 보면 에릭 포너가 단순한 학자라기보다는 정치적으로 실천적인 지식인이라는 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뉴레프트 리뷰나 먼슬리 리뷰 같은 잡지에 글을 실어 오기도 했다.

그에게 쏟아졌던 비판, 아니 언어폭력을 들어보자면,

“미국을 망치고 있는 1백인 가운데 75번째 인물”(버나드 골드버그, 언론인)

“소련 체제의 노골적인 옹호자이며 미국에 대해서는 앙심을 품은 역사학자”(존 패트릭 디긴스, 뉴욕시립대)

“단연 눈에 띄는 역사가이며 급진 분파 및 여론의 빨치산”(시어도어 드레이퍼, 역사학자)

또한 그에 대한 찬사를 들어보자면

“지난 20년 사이 가장 많은 저술을 발표한, 독창적이면서 영향력 있는 미국 역사가”(워싱턴 포스트)

“에릭 포너의 책은 미국의 모든 학교에서 읽어야 하는 필수적인 저작”(냇 헨토프, 언론인)

“에릭 포너는 다른 역사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다.”(스티븐 한, 펜실베니아대 교수)

그는 미국 역사학자 단체인 미국역사학자기구(OAH), 미국역사학회(AHA), 미국역사가협회(SAH), 세 단체의 회장을 모두 지낸 단 두 명 중 한 명이다. 그만큼 미국 역사학계와 미국 사람들에게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인 것 같다.

실제 에릭 포너의 글을 읽어보면 그다지 급진적이거나 위험한 사람 같지는 않다. 설마 이 사람이 권총이나 석궁을 들고 부시 대통령이나 대법관을 공격할 것 같지는 않다. 물론, 한 권의 책이 지배계급에게는 더 위험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한국에는 이 사람의 책이 처음으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마크 C. 칸즈가 쓴 “영화로 본 새로운 역사 2(소나무 출판사, 1998)”에 ‘역사학자 에릭 포너와 영화감독 존 세일즈와의 대화’라는 글이 번역되어 있다. 또한, 이 책을 번역한 손세호(현 평택대 미국학과 교수) 선생이 87년 ‘서양사론’에 쓴, 에릭 포너의 책인 “Nothing But Freedom(1983)”에 대한 서평이 4쪽 적혀 있을 뿐이다. 이 책에서 에릭 포너는 자신의 전공분야인 남북전쟁 이후 재건시대(Reconstruction Era)에 경제적 자원획득, 노동력 통제, 토지분배 등등의 문제에 있어 흑인노예와 농장주들의 투쟁 과정에 천착했다. 그리고 이들 간의 관계를 맑스주의적인 계급론에 입각해서 분석하고 있다.

또한, ‘진보저널 읽기모임(http://journal.jinbo.net/)’에서 먼슬리 리뷰에 실린 특집글을 번역했는데 (미국의 세기의 사회주의 잡지: 먼슬리 리뷰) 여기에 에릭 포너에 대한 언급이 딱 한 단어로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외국의 이론, 책, 주장들을 수입해서 매우 잘 버무리는 한국의 극성스러운 지식사회의 풍토를 생각해보면, 왜 ‘에릭’ 홉스봄이 알려진 만큼 ‘에릭’ 포너는 잘 안 알려졌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전진’이 꼭 ‘에릭’을 좋아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긴 요즘 ‘전진’과 ‘에릭’의 가는 길이 다르기는 하다.) 홉스봄이 영국에 국한되지 않는 세계사적 또는 유럽다국적 역사를 정리했다면, (영토로 보면 비슷하지만) 포너는 공간적으로 미국에 한정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 다르게 보자면, 한국의 진보적 서양사학자들이 게으르며, 특히 미국사 교수들이 너무나 ‘미국적’ 시각을 가져서인지도 모르겠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한국의 역사는 영국보다는 미국과의 상호작용이 너무나도 많았음에도 말이다. 오히려 김동춘 선생의 책(『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창비, 2004)이나 백승욱 선생(『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그린비, 2005) 같이 사회학자들의 분석들이 좀 더 대중적이거나 진지한 것 같다.

 

독일의 사회학자 좀바르트가 똑같은 질문을 던진 지 80년이 지났다고 한다. 그런데 에릭 포너가 보기에는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지금도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별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다고 한다.

첫째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너무 탈역사적으로, 추상적으로 취급하거나 상대방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마치 사회구성체 논쟁이 떠오르지 않는가?
둘째로, ‘부정의문문’에서 탐구를 시작했으니 대답이 탈역사적인 대답밖에는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질문’이 정확치 않은 바는, 유럽의 ‘사민당, 혹은 노동당’이 사회주의 정당 혹은 사회주의 정치라고 할 수 있는가와 관련이 된다. 사실은 이 질문은 미국에는 ‘사민당’, ‘노동당’이 없는 현실, 민주당과 공화당의 양당제라는 현실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에릭 포너가 보기에는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 라는 질문보다는 ‘왜 미국에서 사회주의가 한때 세력을 얻었다가 퇴장했느냐’ 혹은 ‘왜 유럽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주의적 전환이 일어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이 역사적 질문이며, 해답 가능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서유럽 사민주의는 포너가 보기에는 ‘마르크스주의 원론과 근본적으로 배치’되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의 좌파 정당들은 사회주의보다는 자유주의와 평등주의를 퍼뜨리는데 더 많이 이바지했으며,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추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미국 예외론’적 질문,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는 없는가?’라는 질문은 흔들리고 만다. 그렇다고 ‘미국 예외론’을 버리는 것이 자본주의 국가는 모두 똑같다는 것(사회과학적으로는 수렴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통적 양상을 가지고 ‘미국 예외론’을 설명하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계급운동이 노조 중심의 경제주의나 사회민주주의적 개량주의의 한계 안에 갇혀 있는 현상’은 미국에서 뚜렷한 바와 똑같이 유럽도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이무어 마틴 립셋의 “미국 예외주의(후마니타스, 2006)”와 비교해볼 수도 있다. (트로츠키주의에서 네오콘의 1세대로 전향한) 립셋의 ‘미국 예외주의’는 뛰어난 저작이기는 하지만, ‘미국인들의 자민족 중심주의 혹은 노골적인 우월주의 정치선전’에 빠져들게 만든다는 비판이 있다. ‘우리는 다르다’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자만심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튀는 행동(예를 들어 전쟁수행)의 알리바이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사회주의의 운명과 관련해 여러 가지 해석을 살펴보자.

첫째, 미국 노동자들이 현재의 조건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투쟁에 나서기보다는, 서부 이주 등 노동이동을 택한다는 이른바 ‘변경 테제’가 있다.(프레드릭 잭슨 터너) 일리가 있는 설명이기는 하나, 포너가 보기에는 ‘사회적 유동성은 정치적 안정성을 높이기보다는 해치는 교란 요인’일 수도 있기 때문에 위의 테제는 설명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둘째, 미국인들의 국민성 자체가 계급의식이나 사회주의는 물론 다른 급진주의에도 적대적이었다는 설명이다.(루이스 하츠, ‘일치’학파) 미국인들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따라서 로크식 개인주의 관점이 지배하게 되었고, 따라서 ‘봉건주의가 없으면 사회주의도 없다’는 식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식화에는 흑인이나 여성 등의 집단은 아예 분석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이러한 미국의 ‘통합성’에 대한 서술은 신노동사가 등장하면서 깨지게 되었다. 또한, 남부지역은 ‘봉건적’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여러 면에서 ‘전부르주아적’이었다는 것이다. 하츠의 논리대로라면 미국 남부는 사회주의의 온상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또한 미국 독립전쟁은 로크식 개인주의보다는 공화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포너가 보기에는 비자유주의적 사고방식 때문에 사회주의로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특정 형태의 급진적 관점이 끈질기게 살아남으면서 사회주의가 해야 할 역할을 대신했다는 것이다.

셋째, 미국 노동계급의 분열로 인해 사회주의 가능성이 없어졌다는 분석이 있다. 이 분석은 라이히, 고든 등의 분석인데 한국에도 번역되어 있다.(『분절된 노동, 분할된 노동자』, 신서원, 1998년. 노동시장론 등에서는 매우 중요한 저작이다.) 이들을 사회적 축적구조론자라고 일컫는데, 이들이 보기에는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하나의 거대한 단일 계급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종에 따라, 종족에 따라, 성별에 따라, 숙련에 따라 점차 여러 ‘노동계급들’로 분열되고 있다는 것이다.1) 한국  또한 이러한 분열이 노동시장 내 분절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또한 다양한 인종적 배경이 계급의식을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포너가 보기에는 이러한 사실은 분명 존재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나타나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보편적인 원인을 가지고 ‘미국 예외론’의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종족적 소속감이 특정 상황에서는 강력한 저항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넷째, 어쩌면 이 질문은 기각 여부와 상관없이 매우 중요할 수 있는데, AFL-CIO(미국노총)의 문제이다. 현재 미국의 총연맹은 ‘역사적인 분열’을 거쳐 두 개로 나눠져 있지만, 어쨌든 간에 미국노총은 그동안 흑인, 여성, 신이민자들 등이 노동운동에 참여할 수 없는 구조였거나, 노조 지도부가 계급투쟁보다는 자본과 타협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현실을 봐도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다. 말하자면 좌파들의 전통적인 주장이기도 한데, 에릭 포너가 보기에는 그렇다면 ‘잘못된 지도부’를 왜 조합원들이 선택하는 것인가? 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고에는 지도부를 제외한 나머지 조합원이나 미국 노동자들은 한결같이 단결돼 있고 전투적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는데 이를 뒤엎는 사례도 얼마든지 많다는 것이다. 예전 98년 당시 한국에서도 이런 식의 주장이 떠돌 때, 상당히 진위가 의심스러웠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다섯째, 미국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공짜로 주워졌기 때문에, 즉 미국 정치체제의 성격으로 인해 사회주의가 성공하지 못했다는 설명이 있다.(셀리그 펄먼) 하위적 요소로는 승자독식 대통령선거 제도 등이 양당제를 고착화시킨 점도 들 수 있다. 또한 미국 정치는 뉴딜 정책에서 보듯이 개혁 요구에 상당히 수용적이었으며 따라서 노동자들이 사회주의라는 정치적 ‘오버’를 할 필요가 없었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또한 사회당과 IWW에 대한 탄압에서 보듯이 직접적 탄압도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설명들을 모두 묶어서 포너는 다른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양상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미국보다 더한 탄압들도 있었으며(독일이나 스페인), 다른 설명들도 너무 지엽적이라는 것이다.

위와 같은 설명들이 대체로 ‘외재적’이었다면 사회주의 운동 ‘내재적’으로 실패의 요인을 따져볼 수도 있겠다. 여기에는 IWW, 사회당, 공산당 등의 역사적 분석이 필요하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 사회당의 노동계급과의 상대적 거리감과, 원칙성이(유럽과 다른 반전의 원칙을 고수) 미국 사회당을 몰락시켰다는 점. 미국 공산당은 유럽 사민주의 정당처럼 전시 국가 방위에 협조했다가 노동계급으로부터도 멀어지고 탄압에도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원칙이냐, 생존이냐 하는 점이 중요할 수 있다. 일종의 선택이 필요한 시기가 있는 것이다. ‘역사적 인정투쟁’을 선택하고 장렬하게 전사할 것이냐, 현실의 운동과 대중을 지키기 위해 잠시 ‘유연과 눈가림’을 할 것이냐? 언제나 투쟁에 있어서 다가오는 딜레마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 대해서는 설사 다소 주관적인 영웅심이나 다소 패배적인 느낌이 들지도 모르지만 두 개의 탁월한 저서 마이크 데이비스의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창비)와 리차드 O 보이어, 모레이스의 『알려지지 않은 미국 노동운동이야기』(책갈피)를 볼 필요가 있다. 또는 아주 최근에 나온 존 리드 평전(아고라, 2007)이나 워렌 비티가 주연한 영와 ‘레즈’를 참고할 수도 있다.

마지막 결론을 보자.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 하는 질문에는 바로 시간적으로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는 식의 논리가 깔려 있다. 유럽이 걸어간 사회주의 정당(사실은 사회주의를 포기한 사민주의)길을 미국이 따라와야 하는데 왜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마치 토끼가 지나간 길을 거북이가 따라와야 하는데 왜 거북이는 그 길로 안지나 갔을까? 묻는 것이다.

포너가 보기에는 토끼는 그 길로 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세히 보면 신자유주의 시대에 미국화가 진행되면서 유럽이 미국의 길을 뒤따라오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거북이가 저 앞에 있고, 토끼가 거꾸로 따라오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대중정치, 대중문화, 대량소비가 유럽보다 미국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아래서 사회주의적 정치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느냐 하는 딜레마를 미국 사회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부딪쳤다는 것이다. 계급이념 소멸에 관해 유럽은 미국의 사례를 보고 타산지석으로 삼으라는 메시지다. 그렇게 본다면,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왜 없는지 따지기 전에 너네들은 있었는지, 그리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미국처럼 되지 않으려면 뭘 해야 하는지 잘난 척 하지 말고 따져봐야 할 일인 것이다. 예전 90년대 초반 신경영전략이 대우조선을 뒤덮으면서 노동조합 활동이 힘들어졌을 때, 현대중공업 활동가들에게 대우조선 활동가들이 ‘너네들도 준비해라, 곧 닥친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한 공장에서 어쩐다고 될 일인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쩌면 중공업 활동가들은 당시 내부 준비를 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현재의 ‘세계혁명’의 출발이자 완성은 ‘미국혁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직된 미국 노동계급에게 이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고, 미국 내 다양한 내부 식민지들의 노동계급의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하고 있는 인종, 계급, 성, 정체성에 착목해야 할지도 모른다. 또는 포너의 기대처럼 유럽과 미국의 새로운 급진적 흐름이 부상할 지도 모른다. 또한 이러한 흐름이 미국 역사에서 되풀이 되는 그저그런 흐름으로 끝날 수도 있다.

우리의 상황은 어떨까? 아니, 우리는 유럽이 미국에게 던지는 약간은 오만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지도 못했다. 계급의 조건만을 보자면야 미국이나 한국이나 매한가지이며, 역사적 전통으로 따져 봐도 미국보다 나은 상황은 아닌 것 같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형성되었는가? 어쩌면 그럴 수도,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단일한가? 이 질문도 난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질문, ‘미국의 사회주의’를 따져보는 것은 우리에게는 학문적 관심이 아니다. 이미 이러한 제목을 가진 책들이, 논문이, 연구서들이 한국에도 나와 있고, 외국에도 나와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에릭’의 힘을 빌려 ‘전진’의 지렛대는 무엇이어야 하며, ‘전진’이 피해가야 할 것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따져봐야 하는 점이다.

과연 ‘전진’이 부르는 사회주의는, 그 애매하기 짝이 없는 ‘민주적 사회주의’는 사민주의인가? 그 이상인가? 우리의 사회주의는 역사적 조건을 충족시켜 가고 있는 중인가? 우리를 옥죄고 있는 노동시장과 정치제도는 어떻게 바꾸어야 하며, 한국 노동계급(들)의 역사적 배경인 한국전쟁, 북한, 기업별 노동조합, 계급정치와 의식의 후진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미국 노동계급, 또는 사회주의에 대한 질문에 순진한 호기심을 머금기에는 현실의 과제는 너무나 크기만 하다.

역사적 법칙을 그야말로 법칙으로 인식하고 있는 자는 단지 ‘열심히’만 살면 될지 모르지만, 법칙이 ‘실천’을 매개로 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또한 그 ‘실천’의 귀결은 ‘승리의 필연성’ 못지않게 ‘실천의 패배’로 역사화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악몽처럼 인식해야만 한다. 필연성이 가능성으로 전환되지 못하면 ‘승리의 필연성’은 ‘실패의 가능성’이 될 것이다. 봄에도 눈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패배의 가능성을 인식하는 것은 실천적으로 매우 중요할 것 같다. 그 악몽이 현실화되었을 때는 주체와 역사에게 치명적인 상황이 될 것이다. 이는 맑스가 가르쳐 준 무서운 잠언이기도 하지만, 미국 역사가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책의 원제는 Who Owns History?, 누가 역사를 소유하는가 이다. 노동계급이 역사를 소유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부르주아지가 역사를 소유한다는 것이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같이 사이좋게 역사를 소유할 수는 없다. 중간은 없다. ‘전진’은 이 먹고 먹히는 길에서 작은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한국의 노동계급이, 운동이, 얼마나 많은 성취를 이룰 지는 우리 같이 힘을 합쳐보아야 할 것이다. 포너는 미국의 사회주의의 운명에 대해 좀 더 기다려봐야 한다고 했다.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소심할 필요도 없지만, 잘난 척 할 필요도 없다. 가보는 것이다. 나는 ‘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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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진 - 21세기를 위한 사회주의의 비전
토미 셰리단.앨런 맥쿰즈 지음, 김현우 옮김 / 이매진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이매진 - 21세기를 위한 사회주의의 비전

양솔규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redstar@jinbo.net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통권146호, 2006년 8월호

<이매진-21세기를 위한 사회주의의 비전> / 이매진 / 13,000원 / 2006년 5월

1999년, 신자유주의의 또 다른 심장부 영국의 스코틀랜드에서는 ‘작은 승리’가 일어났다. 처음으로 구성되는 스코틀랜드 의회에 SSP(스코틀랜드사회주의당)의 토미 셰리단이 비례대표 21.5%의 지지로 입성하게 된 것이다. 그의 오른손엔 ‘독립 공화국’이라는 카드가, 그의 왼손엔 ‘사회주의자’라는 카드가 들려 있었다.

4년이 지난 2003년에는 토미 셰리단 외에도 5명의 의원이 더 배출되었다. 여전히 그들은 사회주의를 외치고 있으며, 노동당이 독점해 온 진보정치 비슷한 지형에 귀퉁이 하나를 차지한 것이다. 이것은 싫든 좋든 어쩔 수 없이 ‘노동당’(구노동당이든, 신노동당이든)을 선택하도록 ‘강요’ 당해 온 노동자들에게, 빈민들에게, 성소수자에게 자신의 꿈과 삶을 포기하지 않을 새로운 선택지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무나 오른쪽으로 가버려 이제는 ‘노동’당이라고 부르기조차 어색한, 이제는 ‘빈곤의 짜르’가 되어버린, 그래서 자신들조차도 ‘신’노동당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 당이 아니라, 민중에게 실질적인 통제권을 부여할 권력을 돌려주기 위해 투쟁하고 연설하고 모여서 집단적인 역사형성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당이 스코틀랜드 민중에게 생겼다. 그것을 SSP는 ‘홀리루드(의회가 있는 곳)를 향한 사회주의적 진전’이라 부른다.

이 책은 SSP의 대표적인 정치인 토미 셰리단과 ‘스코틀랜드 소셜리스트 보이스’의 편집자이자 SSP의 핵심적인 인물인 앨런 맥쿰즈가 함께 쓴 책이다. 이 책의 미덕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에 있다. 또한 한 문장, 한 문단이 짜임새가 있을 뿐만 아니라, 독창적인 예들과 비유, 폭소를 자아내게 하는 풍자, 적절한 인용과 글의 부드러움도 함께 만끽할 수 있다.

이매진, 비틀즈의 노래 제목이다. 이 책의 각 장의 제목과 책의 내용에는 존 레논의 노래가사나 제목이 쓰이고 있다. 저자의 말대로 ‘이매진이라는 노래 자체가 불평등과 착취, 인종주의와 전쟁이 없는 그런 사회주의 세상의 비전을 불러’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저자들의 책 제목으로서는 아주 ‘딱’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을 번역 출판한 출판사 이름조차 이매진이 아닌가.

우리가 이 책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한국과 스코틀랜드의 역사적 배경이 매우 다른 것만큼이나 공통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주장하는 SSP는 스페인의 카탈로니아와 바스크, 영국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등의 민족주의+좌파정치세력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이라는 고전적이면서 현대적인 쟁점에 천착하고 있다. 또한, 사상적 폐허 위에서 다시 사회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반자본주의세력의 결집을 선도하고 있다. ‘거대한 소수’ 전략의 성실한 발걸음이다.

민주노동당이 처한 현실에서 이러한 주제들은 많은 부분을 생각하게 하고 상상하게 한다. 그들이 ‘거대한 소수’ 전략을, 명확한 ‘사회주의’라는 기치를 내걸면서 ‘전진’하고 있을 때, 민주노동당은 늪에 빠진 자신의 발을 원망하며, ‘거세당한 소수’의 행보를 거듭하고 있었다. 당내 소수자 문제에 대한 민주노동당의 시각은 따뜻하지도 않았으며, 정치적 슬로건과 전략의 채택을 놓고서는 단호하지도 않았다. ‘거대한 소수’를 바라보는 진짜 거대한 대중들의 시선을 민주노동당은 고정시키지 못했다. 채널을 고정시킬만한 내용이 부족했으며 채널을 좌지우지하는 리모콘을 민중들에게 돌려주지도 못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있고 움직이고 있으나 당의 숨소리는 잦아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SSP는 민주노동당이 승인할지도 모르는 광범위한 전선체의 토대 위에서 생겨났다. 하지만 경로가 다르다. SSP가 당적 통일전선체를 통일전선적 당이라는 실험을 통해 탄생했다면 민주노동당은 자기 외의 또 다른 옥상옥을 지으려 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문호를 열면 열수록 배타적으로 되어 버리는 마술같은 역설이 진행되고 있다. 21세기의 초입에서 20세기로, 19세기로 자신의 상상력을 후퇴시키는 것을 ‘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반동’이라고 불러야 하나.

SSP는 민족문제를 세계화시대의 반자본주의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와 결부하면서 ‘미래’를 예견해 나가는 지렛대로 삼고 있다면 민주노동당은 ‘현재’의 문제로 축소시키거나 그 자체에 매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우리가 바랬던 것은 소수가 다수가 되는 양적 확대 자체보다는 소수이면서도 ‘당당’하고 그 ‘당당’함이 곧 미래를 보증하는 선순환구조가 아니었던가. SSP가 ‘당당하게’ 초국적자본에 투항해버린 노동당과 보수당에게 맞서고 있는 것은 굉장한 경험이며 그 모습 때문에 이 책은 수많은 ‘몽상가’들에게 몰입의 기쁨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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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창원 역사읽기
마산창원지역사연구회 엮음 / 불휘미디어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출처: 영남노동운동연구소(http://www.ynlabor.net) <연대와실천>2006년4월호(제142호)


저무는 골목 안, 역사와 출구 - 마창 3부작

양솔규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지난 2월 25일, 신문에 실린 기사 하나가 내 눈을 잡았다.

“구로 노동자 문학회, 문패 내리던 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 자신이 문학에 그다지 관심이 있다거나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니고, 90년대 초반 이후에는 매니아급의 문학 편력을 펼친 것도 아닌데, 횡한 바람이 가슴 한켠을 휩쓸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18년의 역사, 그러니까 1988년의 첫 시작의 설레임이 끝난 것이다. 마치 수줍은 손 잡던 연애가 파경으로 끝나듯이. 노동자의 글쓰기, 자기고백과 성찰, 현장성 있는 삶글, 이러한 수식들이 여러 문학단체나 행사들을 규정해주던 그 시기는 지났는가?
글만이 아니다. 이젠 민중가요도 보급되지 않는다. 김호철의 새 노래가 나왔다고, 테잎 하나 사서 복사해서 듣고는 뒷풀이 자리에서 문화의 전도사인양 목청 돋우며 ‘잘난 체’ 하던 그런 장면은 이제는 없다. 오로지 ‘파업가’와 ‘단결투쟁가’, ‘철의 노동자’ 등 몇 곡 외에는 듣지도, 부르지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신곡이 나오지 않느냐? 지금도 많은 문화활동가들은 앨범을 내고, 공연도 하지만 문화를 향유해야 할 동지들은 관심이 없다. 신곡을 풍성하게 담은 민중가요 노래책이 나오지 않은 지도 꽤 오래 된 것 같다. 많은 노동조합들은 집회용 CD를 제작보급하지만 신곡은 절대 없다. “내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 10곡 넣을 때, 한 두곡씩 넣으면 안 되겠니?”
진보운동 속에서 문화운동을 고민하고, 급진적인 문화와 사회적 파급력을 고민해도 실천적으로 향유하지 않는 한 찻잔 속에 태풍이 될 수밖에 없다. 칠레와 네루다의 시, 빅토르 하라의 절절한 노래, 80년대 한국민중운동과 민중문화운동, 그 속에 있던 임진택과 오윤과 홍성담과 김호철. 알고 있으나 지금은 고민되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풀 수 있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날 보고 신세조졌다 한다, 동료들은 날 보고 걱정된다고 한다……노동운동 하고 나서부터 참 삶이 무엇인지 알았네.” 한국 노동운동의 또 다른 중심축이었던 마산창원에서 고승하 선생의 ‘고백’이라는 노래가 불리워지고, 전국적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던 시절, 확실히 입소문과 귀동냥의 강력한 파워는 그 시대를 풍성하게 규정하고 있었다. 그 마창에서 2005년과 2003년, 세 권의 책이 나왔다.

『마산 창원 역사읽기』(불휘, 2003)는 노동자들의 책은 아니다. 오랫동안 마산창원지역을 연구하던 마산창원지역사연구회에 있는 교수 또는 언론인, 전교조 선생 등이 쓴 글을 모은 책이다. 마창에서는 꽤 유명한 홍중조, 김재현, 이은진, 김주완, 김용택, 김건선, 박호철, 유장근, 박진해 선생 등이 쓴 책인데, 필자가 다양한 만큼이나 다양한 주제와 꼭지로 마창 지역의 오래된 역사를 재미있게 소개 하고 있다. 이 책이 나온 것을 처음 안 것은 2월에 마산 전교조 사무실에 갔을 때였다. 사실 필자도 이런 책이 나왔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청동기시대부터 10.18까지 여러 꼭지를 실었고, 이원수나 이은상, 장지연 등의 인물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면서 마창의 역사를 풀기도 한다. 또한 마창 노동자들의 삶과 밀접하거나 밀접했던 공간들, 예를 들어 어시장, 『마산문화』, 결핵병원과 월영대, ‘책사랑 도서관’ 등에 대해서도 소개를 하고 있다. 민간도서관 책사랑은 88년 처음 문을 열었는데 지역 노동자들의 이용에 초점을 맞추었고, 하루 이용자가 200명이 넘었으며 개관 후 6개월 만에 가입자가 1만 명을 넘었다. 서울로 치면 ‘사회과학 서점’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 마을 도서관의 성격을 혼합한 것이다. 여타 공간과는 다른 독특한 문화와 역사를 간직하는 ‘지역’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가? 새삼 부끄러워지게 만드는 책이다. 마산 오동동에 있는 ‘불휘’라는 지역 출판사가 정성스럽게 편집을 했으나 불행히도 품절된 상태이다. 부산에도 ‘산지니’라는 출판사가 있다. 과연 지금 부산, 울산, 경남에 있던 얼마나 많은 출판사들이 문을 닫았을까 생각해보면 지역의 ‘문화공동화’를 걱정하게 된다.

『출구』와 『저무는 골목에서 삶을 만나다』는 문학도서이고 비매품이다. 두 권 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옛 문예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만든 책이다. 『출구』는 구로노동자문학회와 함께 노동자문학운동을 해온 ‘마창노동자문학회 참글’의 열두번째 작품집이다. 구로노동자문학회 관련 신문기사의 부제는 이렇게 되어 있다. “노동자의 삶글 쓰기 어디서 ‘출구’ 찾나?” 막힌 출구를 부여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창노동자문학회 작품집『출구』라는 제목은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출구를 못찾은 구로노동자문학회는 결국 자기 손으로 스스로를 정리했고, 마창노동자문학회 참글은 『출구』라는 작품집으로 ‘출구’를 찾고 싶었을까?

문학회 회장 김건곤 형의 말을 들어보자.

이번 작품집은 5년 만에 발간되는 것이라 그런지 다른 어느 해 보다 감회가 다른 것 같습니다. 5년 도안 참글이 무엇을 했는지 일일이 기억조차 힘들지만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2006년에는 헤어진 발길들도 하나, 둘 참글로 돌아오는 꿈을 꿔 봅니다.


힘들게 힘들게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마창노동자문학회 참글의 처지가 과연 구로노동자문학회보다 나을까? 자신의 삶만큼이나 문학회 활동이 힘들테고, 그 힘든 삶들이 문학회 활동을 더 힘들어 할테고, 부족함이 채워지지 않으나 삶을 참되게 증명하기 위해 5년 만에 작품집을 낸 그들에게 우리는 사실은 무관심하지 않았나? 5년 동안 공장을 다니며 삶과 문학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 했으나 그 어느 것도 손아귀에 잘 달라붙지 않았을 지도, 그래서 스스로 무기력해졌을 수도 있겠다.

“문학이 부박해지고 노동자 민중의 통 큰 감동을 상실한 것은, 문학자체가 노동자 민중의 대지를 떠나는 것을 넘어 최소한의 70년대식 친구 의식조차도 버거워 한 그 순간이다”

결국 삶의 문제이다. 지난 5년보다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우리의 주위를 힘겹게 한 발 한 발 딛는 것이 숙제일테다. 참글이 그랬듯이. 우리에게도. 모두에게도.

『저무는 골목에서 삶을 만나다』는 2004년 마산창원진해 문학교실을 수강한 사람들을 주축으로 하고, 2005년 ‘마창노동자문학회 참글’에서 주최한 ‘르포문학 실기교실’에서 공부하고 취재하고, 발로 돌아다니면서 만든 책이다. 마창에서 오랫동안 고독하게 노동문학을 움켜쥐고 있는 김하경 선생이 두 행사의 중심에 있었고, 남해에 사는 괴짜(?) 사진작가 오남해 형이 마산창원진해를 다니면서 구석구석을 필름으로 기록했다. 글은 노동문학을 하는 오도엽 시인과 정윤, 이일균 도민일보 기자와 김규석, 신미란, 박미영 등이 썼다.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마산창원진해의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노인네들이나 토박이들에게서 그 동네의 애환과 변천, 고민과 부대낌을 담았다. 한때 전국 7대 도시에 들었다던 마산에는 어시장과 원조 아귀찜에 얽힌 사연들, 오동동 나래비골목과 통술집의 주당들의 취중추억이 빼곡하게 숨쉬고 있다. 마산의 관문인 양덕동에는 지금은 없어진 한일합섬, 이를 대체한 한일타운 아파트, 당시의 눈물나는 설움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한일여실 출신의 노동자들이 있다. 부림시장 옆 도둑놈 골목에는 ‘인자 이 골목은 끝나 뿟어’라고 말하지만 이 골목에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고, 그게 마지막 고집인 삶이 있다.

영원히 사라지는 게 있는가 하면, 사람의 기억은 지웠다가도 되찾을 수 있다. 콘크리트 지우개로 하나씩 지워져 가는 양덕동 골목, 결코 지울 수 없는 것이 보인다.(오도엽, 129쪽)

그렇게 되살아난 마산창원의 질긴 삶들이 담겨 있는 이 책을 보면서, 부산과 울산에는 얼마나 또 기가막힌 사연들과 변화들, 애환과 진솔한 재미가 흘러넘칠까 궁금해진다. 하지만 그 궁금증은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워질 수도 있다. 그래서 안타깝다.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이제 그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사진 한 장이라도 찍어둘 걸. 뼈아픈 반성이 회한으로 변했다. 사라져가는 골목과 거리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없어지기 전에 빨리 기록해야 한다. 바로 지금이다. 기록의 필요성이 절박해졌다.(김하경, 9쪽)

그나마 마창이라서 이런 걸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게다. 울산도, 부산도, 거제도 골목 안 이웃들이 있고, 거리엔 노동자들이 있다. 때론 안타까움이 용기를 갖게 만든다. 부디 그 용기가 충천해 돌아봄의 용기로 울산과 부산을 휘감기를 바란다. 역사를 만들고 기록하는 것은 출구를 찾는 것에 다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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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운동 - 독일, 서유럽, 미국
잉그리트 길혀-홀타이 지음, 정대성 옮김 / 들녘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출처: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2006년 2월호

1) 이희영, 「한국 80년대 세대의 초상화: 독일 68세대와의 비교」, 이해영 엮음, 󰡔1980년대 혁명의 시대󰡕, 새로운세상, 1999년

[68운동]

양솔규(redstar@jinbo.net)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그의 유명한 저서 󰡔반체제운동󰡕 에서 “이제껏 세계혁명은 단 둘뿐이었다. 하나는 1848년에, 그리고 또 하나는 1968년에 일어났다. 둘 다 역사적인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둘 다 세계를 바꿔 놓았다”고 쓰고 있다. 1968년 혁명에 대한 웬만한 책들의 서평에는 거의 월러스틴의 언급을 빠뜨리지 않고 쓰고 있다. 본 서평도 어쩔 수 없이 월러스틴의 언급을 인용하고 말았는데 거기에는 한국 사회의 지적 변화를 언급해야 할 것 같아서이다. 월러스틴의 평 중 가장 중요한 언급은 1968년 혁명이 ‘세계’혁명이었다는 점도 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두 혁명‘만’이 세계를 ‘바꿔 놓았다’는 것이다. 이는 역으로 두 혁명 외의 다른 혁명들은 세계를 바꿔놓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잉글리트 길혀-홀타이,『68운동』, 2006.1, 들녘코키토, 12,000원

사실 1980년대 운동권에게 있어서는 1968년 혁명은 거의 금기시되거나 애초 관심 밖이었던 것 같다. 내 자신이 그 세대가 아니어서 잘은 모르겠으나 그 시대는 소위 ‘혁명의 시대’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1968년 혁명과는 달리 80년대 꿈꾸던 혁명은 레닌의 혁명, 전위정당의 혁명을 뜻했다. 또는 대중조직의 성장을 담보해야만 하는 시기였다. 한마디로 ‘정치적으로 바빴고’ 바빴기에 빠른 길을 원했다. 68혁명과 같은 패배한 길보다는 ‘승리’가 필요했고, 그 염원은 서유럽보다는 러시아로 시선을 향하게 했다.

60, 70년대 젊은이들에게는 정확히 1968년의 영향이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유추해보자면 박정희의 쿠데타와 유신의 치하에 있었고, 좌파는 한국전쟁으로 소멸되었으며, 대학가는 여전히 80년대에 비해 느슨했다고나 할까? 대학가 밖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는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었고, 공화국은 도로 닦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68세대의 문화적 유산이 흘러들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전위예술의 소문이, 다른 한편으로는 비틀즈와 밥 딜런, 존 바에즈의 노랫소리가 말이다. 그렇다고 현해탄 건너편 일본의 좌파들이 나리타 공항에 상륙한 1968년의 세계적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있을 때 한국의 60, 70년대 젊은이들은 라디오나 듣거나 대학로 학림다방에 죽때리며 띵가띵가나 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섭섭해 할 지도 모르겠다. 대신 한국의 젊은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전쟁터였다. 베트남 전쟁에 총알받이와 살육자로 떠나야 했던 청년실업자들, 청년 노동자들이 있었다. 김수영은 이렇게 썼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이 혁명은 4.19혁명을 말한다. 혁명이긴 혁명이네.

80년대 젊은이들에게 그 시대는 ‘정치적으로 바쁘고’, ‘정신적으로 바쁜’ 시절이었겠지만, 60, 70년대 젊은이들에게 그 시대는 ‘경제적으로 바쁘고’, ‘육체적으로 고된’ 시절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40년의 세월이 다 되어가는 한국의 ‘지나가시는’ 세대들이나 68을 만든 외국의 ‘지나가시는’ 세대들의 젊은 시절을 논하는 것은 어쩌면 쓸데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클린턴도 힐러리도 블레어도 그 세대니.

80년대 프랑스의 5월운동에 관한 책이 번역되어 나왔으나(일월서각?) 그다지 관심을 끌었던 것 같지는 않다. 1979년 한나 아렌트의 「공화국의 위기」에 68학생운동과 관련한 표지 사진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나 어렸을 적 엄마 책꽂이에서 본 기억이니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회학에서는 신좌파의 스승들(밀즈,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한 관심은 80년대 이래 사라졌고 레닌이 사라진 후 ‘신사회운동’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철학도 마찬가지였고, 정치학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과 알게 모르게 연결된 1968년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는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나타났다. 1968년의 주역이었던 타리크 알리와 죠지 카치아피카스 등의 책이 출간되었다.

오랜 잠복기간을 지나 1968년에 대해 이제는 수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번역되기 시작한 1968년 혁명에 대한 책들은 이미 부담스러워지고 있다. 인터넷 블로그와 까페에는 1968년에 대한 기사, 논문, 책줄거리, 서평들이 꽉 차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심사는 저절로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학생운동의 쇠퇴가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분명해지던 시기인 1990년대 초반, 한국 학생운동의 한 정파는 1968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이무렵, 이들의 정치학교 자료집 “조반유리(造反有理))”에는 1968년에 대한 자료들과 해설들이 알차게 들어있다. 좌파의 보다 정통적인(?) 분파들은 이 정파를 심각한 어조로 훈계 내지는 조롱, 경계하였으나 대부분의 훈장님들은 이제는 자취를 감추었다. 예전 소련에서 번역된 「철학사전」(동녘)에는 1968년 사상가들과 이 운동에 대해 과연 훈장님처럼 비난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또 다른 한국 학생운동의 정파는 독일의 ‘자유대학’ 개념을 본따 ‘제3대학’ 등을 열기도 했다.

2000년 하고도 벌써 6년이 지난 지금 세대들에게 이 사건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사실은 필자의 세대에게도 뭔가 이상하게 받아들여졌듯이 지금도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뭔가 있는 듯 하나 뭔지는 모르겠는. 어쨌든 바꾼 혁명!

1월 25일에 출간된 따끈따끈한 책, 「68운동」은 이전의 1968년에 대한 책들에 비하면 매우 훌륭한 장점이 있는데 그것은 매우 짧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다. 이전의 책이 베트남 전쟁 등의 사건을 잘 알고 있거나, 마르쿠제, 아도르노, 밀즈 등의 사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재밌게 읽힐 수 있지만 이 책은 그렇지는 않다. 짧고 어렵지 않은 것. 그건 활동가들 취향이기도 하고, 직장인들 취향이기도 하다.

이 책을 쓴 잉그리트 길혀-홀타이는 빌레펠트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이다. 독일 역사학계에서 1968년 혁명에 대한 연구를 선도적으로 하고 있는 교수라고 한다. 이 책에는 1968년의 혁명의 사상, 혁명 전야의 스케치, 혁명 와중의 사건들, 문화, 동원 과정, 그리고 운동의 붕괴와 그 영향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흔히 1968년의 세계적 사건을 각 나라별 차이점을 부각시키기도 하지만 이 책은 독일, 서유럽, 미국의 혁명과정의 공통점을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1968년 혁명은 무엇보다 맑스주의 이론을 새롭게 해석했다. 교조적인 정통 맑스-레닌주의에 반기를 들었고 이러한 이론의 새로운 해석은 이후 맑스주의와 전세계 좌파의 사상적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또한 이들은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었지만 ‘구좌파’에게도 반기를 들었다. 이들이 보기에 몇 가지의 사건들 ‘프라하의 봄’, ‘헝가리 침공’은 소련 및 구좌파의 숨길 수 없는 치부로 보였으며 사회주의의 새로운 차원과 경로를 인식해야만 하는 증거로 보였다.

민주노동당이 내세우는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애매모호하지만 의미 있어 보이는 그 용어는 바로 사민주의와 현실사회주의를 동시에 넘어서고자 했던 1968년의 깨달음이라는 점에서 1968년은 멀지만 가깝기도 한 과정이기도 하다.

네이버는 물론이고, ‘도전! 골든벨’에도 심심찮게 나오는 1968년이라는 주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다못해 조카나 후배가 물어볼 때 어슴푸레 대답이라도 해줘야 할 테니까. 1980년대를 살아온 분들에게는 이 책과 함께 각주의 논문이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1)

1960년대 세대 김근태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혹 ‘미워도 다시 한번’ 김대중이 아니라, ‘미워도 다시 한번 - 비판적 지지’가 또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오빠가 돌아왔다! 하면서! 1960년대, 당시의 날카로운 시대정신과 생동감만 가져오자! 68에서 후퇴하지도 말고, 스며들고 조우하며 전복하기로 하자! 어떻게? 책을 읽으며!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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