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링허우,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자본주의를 살아가다
양칭샹 지음, 김태성 옮김 / 미래의창 / 2017년 8월
평점 :
품절


 

출처 : 평등사회노동교육원 <함께하는품> 31호 / 2017년 9월

 

 

은 것은 쇠사슬, 잃은 것은 세계 전체인 슈퍼차이나의 길 잃은 세대

 

책소개

 

양솔규(회원)

       

 

바링허우

양칭샹/미래의창/14,000/20178

 

오늘 부산교대에 갔다가 교원수급 계획 책임지라며 동맹휴업에 들어간 학생들의 플랭카드와 집회 걸게 현수막을 보게 되었다. 만감이 교차했는데, 저변에 깔려 있는 인구구조의 변화가 오랫동안 예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와 정(), 사회(社會) 구성원 누구하나 이에 걸맞은 세밀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는 게 드러났기 때문이었고, 또한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들과 교대,사대 예비교사들의 대립으로 현상화되는 것에 대한 갑갑함이 자리했다.

 

학생운동도 소진되고, 노동운동의 신규조직화도 막히면서, 상당히 오랜 기간 운동사회의 인력수급 시스템’(?)이 붕괴되었고, 그에 따라 사회운동의 고령화도 급격해졌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장벽이 높아갔고, 이제는 그 결과로 인구절벽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 어느덧 새로운 세대의 노동자계급은 흘러흘러 은퇴의 문턱에 서 있고, 저 멀리 또다시 새로운세대의 노동자계급과는 시간적, 공간적, 문화적, 언어적, 매체적 장벽을 넘을 수 없다. 그렇다고 아예 젊은 연령층 인구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선거를 앞두고서나 호출되어지는 남아 있는 소위 ‘88만원 세대’, ‘99만원 세대들에게 헬조선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화려한 21세기 첨단 자본주의의 그늘에서 허덕이고 있는 수많은 젊은 노동자들이 마주한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회는 변화가 불가능해 보인다. 이들 존재의 그늘에게 남은 것은 허무 밖에.

 

그런데 이러한 세대들은 반도의 남쪽 자락뿐만 아니라 대륙에도 (거대하게) 존재한다. 어떤 학자들(비버리 실버 노동의 힘, 리민치 중국의 부상과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종말)은 중국의 새롭게 부상한 노동자 세대들이 담지하고 있는 어떤 미래의 가능성(세계혁명?)을 논리적으로 발견했는지 모르겠지만, 과연 당사자들도 그렇게 느낄지는 의문이다. 중국의 문학평론가이자 린민대(人民大) 교수인 양칭샹은 80년대에 태어난 세대인 바링허우(80, 80)에 대해 분석한 책인 바링허우를 썼다. 그 자신 또한 1980년 생으로 바링허우이기도 하다. 마치 우석훈, 박권일이 88만원 세대를 썼고, 아마미야 가린이 일본 프리터를 분석해 프레카리아트 계급으로 분석했던 것처럼 중국의 바링허우는 또다른 동북아시아의 세대, 계급적 지형도를 제공해 준다.

   

중국에서는 마찬가지로 우링허우(50, 50년대생들), 류링허우(60, 60년대생들), 치링허우(70, 70년대생들), 지우링허우(90, 90년대생들), 링링허우(零零后, 2000년대생)를 구분해 부른다고 한다. 물론 그의 바링허우 계층은 단순한 세대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반드시 경제적 기반에서 시작해야 하고, 바링허우의 계급적 기원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80년대생 특권계층은 분석에서 배제된다.

 

80년대는 본격적으로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한 시기이다. 또한, 1980‘1가구 1자녀정책이 시작되면서 소황제들이 태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우링허우(50)들이 맞이했던 문화대혁명 시기와, 류링허우(60)들이 맞이해야 했던 1989년 천안문사태를 떠올려보면, 바링허우들이 맞이한 세계는 얼핏 중국 역사상 최초로 풍요로움을 맛보는 행복한 세대들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관찰에 불과하다. 선전(深圳)과 광저우의 화려한 스카이라인의 뒤편에는 숨죽인 농민공들의 슬럼이 즐비하다. ‘단위경제 체제가 해체되고 국가의 책임이 시장으로 옮겨지면서, 수억의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거리로, 도시로, 시장으로 내몰렸다. 그래서 등장한 계급이 농민공(農民工)”이다. 농촌에서 이주해 온 도시의 하층노동자들을 일컫는 말인데, 양칭샹은 이들에 대해 노동자도 아니고 농민도 아니라 농민+노동자인 것... ‘하반신만 얻은, 주체의식을 상실한(농민의 의식을 지닌) 노동자라는 것이다. 중국에 바링허우(80)’ 농민공(農民工)이 현재 1억 명이 존재한다고 한다. 1! 이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맞이한 비정함, 냉혹함, 혼란, 허무함은 그들을 허공에 뜬 계급으로 만들어 버렸다. “농촌에는 (그들의) 농지가 없고, 공장에는 (그들의) 작업라인이 없는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표지엔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자본주의를 살아가다는 부제가 달려 있기도 하다.

 

이전 세대들은 달랐다. 우링허우(50)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초기 역사와 삶의 역사가 일치한다. 반우파투쟁,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개혁개방 등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이들 세대가 직접 경험한 역사이다. 마치 우리의 386, 87년 세대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바링허우(80)들에겐 역사는 역사고, 생활은 생활이었다. 말하자면 역사의식이 결여된 세대이다. 과연 누가 이들에게서 역사를 배제시켰는가? 역사는 사라질 수가 없다.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역사를 눈앞에서 소멸시키는 것은 화려하지만, 허무를 배가시키는 자본주의 그 자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저자는 그렇다면 바링허우를 포함해 농민공들을 조직하고, 교육하는 역할을 누가 할 것인가 묻는다. 자본가와 공장주들은 농민공들을 로봇으로 교육하고 변화시키려 할 것이다. 권력과 관료들도 말 잘 듣는 국가정책의 손발로 만들려 할 것이다. 그런 방식 말고 농민공들의 주제성을 각성시키고 새롭게 의식화하는 책임을 누가 질 수 있을까? 저자는 샤오즈(小资) 계급이 이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묻는다. 샤오즈 계급은 불어로 petit bourgeoisie를 한자(간자)로 만든 것인데, 우리가 보통 맑스주의 계급론에서 얘기하는 소자본가 계급, 쁘띠 부르주아와는 약간 의미가 달라 보인다. 역자의 설명에 의하면 1990년대부터 중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용어로, 서양의 사상과 생활을 지향하면서 내면의 체험과 물질적, 정신적 향유를 추구하는 젊은 계층, 즉 도시 화이트칼라나 사회에서 일정한 부와 지위를 갖춘 사람들을 일컫는다고 한다.

    

90년대 이전의 샤오즈(小资) 계급은 그나마 허무주의 이후에 이어진 자각적 저항이 있지만, 90년대 이후의 샤오즈(小资) 계급은 소비화된 샤오즈이다. 반항의식은 거세되었다. 따라서 저자는 샤오즈 계급이 농민공들을 교육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없으며, 샤오즈 스스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 (샤오즈 계급을 교육시킬 수 있는 유일한 노동자 계급이 21세기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본다.)

샤오즈 계급이 중요한 이유는 모든 바링허우(80)의 마음속에는 샤오즈의 꿈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질생활과 정신생활의 이중 보장을 꿈꾸는 것. 현실은 이를 배반한다. 샤오즈는 마지막 구원의 지푸라기이지만, “결코 실현할 수 없고 그 꿈은 이데올로기의 환상이 되고 만다.

바링허우(80)들에게 역사에 동참할 수 있는 통로는 간헐적으로만 나타나는데, 저자 역시 이러한 개인적 경험을 언급한다. 바로 재난을 통해서이다. 개인으로 고립되어 있던 바링허우들은 시기적으로 한정적인 재난’, 원촨 대지진(2008년 쓰촨성 대지진을 말하는 것임.) 구호활동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주체성과 진실한 존재감을 발견하려고 한다. “재난이라는 모진 사건을 통해 모든 사람이 손을 잡고 화해하는 과정은 그러나 오래갈 수 없다. 사회 구조의 근본적 변화가 발생하지 않을 경우 개인의 해방도 제한적이다. 샤오즈의 꿈에서 깨어나는 경험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불합리한 자본 분배와 이윤의 착취에 대한 인식으로 각성되어야 하며, 그래야만 샤오즈(小资)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역사적 동맹을 결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문학평론가답게 위와 같은 분석을 중국의 수많은 현대문학 작품들을 통해 분석한다. 그리고, 책의 후반부는 다양한 출신, 다양한 계층의 바링허우(80)들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해외유학을 다녀온 87년생 여자 바링허우, 80년생 중소기업 사장 남자 바링허우, 81년생 공장 여성 노동자 바링허우, 82년생 남성 공장 노동자 바링허우, 공산당원이자 국영기업 80년생 남성노동자 바링허우 등이 그들이다. 이 인터뷰들은 다양한 바링허우들이 실제 경험하고 있는 중국의 물질적 지형과 이데올로기적 지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 책이 중국 노동자들과 바링허우들의 모든 현실을 보여주진 못한다. 중국공산당의 언론통제에도 불구하고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바링허우(80), 지우링허우(90)들의 거대한 파업의 물결 역시도 어쩌면 거대한 대륙 전역으로 뻗어나가지 못하는 단말마적 함성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2010년 푸스캉(富士康, 폭스콘, Foxconn : 애플 아이폰을 만드는 대만계 제조사)의 연쇄 자살사건은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바링허우(80), 지우링허우(90)들의 벼랑에서 외친 마지막 절규일지도 모른다.

 

풍요와 화려함 속에서도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고 있는 한중일 세 나라의 젊은 세대들이 함께 어깨 거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아직은 시기상조일 지도 모르지만, “() 속에서도 실()을 찾는노력은 계속되어야 하겠다. 계급이 사물이 아니라 관계라면 더더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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