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 사회 - 냉소주의는 어떻게 우리 사회를 망가뜨렸나
김민하 지음 / 현암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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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연대와소통> 43호(2017년.3월), 노동사회교육원

 

책담(冊談)

 

냉소사회와의 화해, 정치를 구출하자

 

 

냉소사회/김민하/현암사/201612/15,000

       

 

양솔규(편집위원장)

 

 

   

헌법재판소가 박근혜를 파면한 지 약 9일이 지났다. 돌이켜보면, 통진당 해산, 세월호 사건, 메르스 사태, 개성공단 철수, 사드 배치 등 얼마나 많은 시대착오적 행태와 무능력을 보아왔던가. 과거회귀를 넘어 공동체 사회와 국가의 통치능력을 붕괴시키는 정권의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짓으로 인해 위기는 증폭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 정부의 임기를 1년 단축시킨 것은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압도적 다수의 분노와 흔들림 없는 행동으로 사상 초유의 탄핵 인용을 이끌어 낸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동안 우리 사회에 넓고 깊게 드리워져 있던 비관주의의 장막이 전부 거둬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촛불항쟁의 자신감의 근거는 조직되고 교육된 시민의 힘에서 나오기보다는 박근혜 정부의 비상식에 기인하던 바가 컸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이전을 돌이켜보면,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 그리고 진보정당운동의 자신감은 그 어느 때보다 떨어져 있었다.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할 거라는 자괴감과 패배주의는 활동가들의 마음을 짓눌렀다.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된 지 이틀이 지나 한진중공업 최강서 열사가 유서를 쓰고 자결했다. 그리고 세월호 사건은 아이들을 우리 사회가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더불어 앞으로도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진상을 규명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자괴감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민중총궐기 과정에서 백남기 농민이 숨졌다.

 

저자 김민하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등 진보정당과 덤프연대 등 노조에서도 활동했고, 지금은 <미디어스 medius>라는 인터넷 언론비평지에서 일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분석 대상이 고리타분(?)한 운동권만 대상으로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넷 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현상들(오타쿠, ‘오유일베사이트에서의 논쟁, 된장녀 담론과 인터넷 게임, PC통신, 트위터, 페이스북, SNS 분석, 아프리카 TV, 메갈리아, 오디션 프로그램, 한화 이글스 김성근 감독, 팟캐스트, 브렉시트, 미국 대선, 유럽 극우정치의 부상) 등 무궁무진하다. 어쨌든 저자가 보기에 개인이든, 체제 차원이든, On, Off를 떠나, 우리 사회를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은 열등감이다. 열등감을 해소하는 방식은 냉소하는 방법 열광하는 방법이다. 첫 번째는 거기엔 아무 것도 없다는 논리로 이어지며, 두 번째는 진정한 무엇은 있다로 이어진다. ‘냉담자열광적 신도는 온라인 게임 커뮤니티 속에서도 생겨나고, PC통신 시절에도(귀여니 논쟁) 벌어졌으며, SNS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속에서 실드의 논리가 만들어진다. 모든 사람들은 냉소열광사이를 반복하며 핵심 쟁점(근본적 질문)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기도 한다. (지젝과 비포 등의 철학적 개념을 통해 저자가 설명하는 것은 어려우니 넘어가자.)

 

냉소의 두 가지 버전

 

이러한 냉소소비자적 태도를 강화한다. 소비에 기반한 사회에서 소비자의 지위는 그야말로 절대적인데, 예를 들어 문화 비평에 대해 소비자들은 비평이 잘못됐다고 지적하거나 보고 즐기면 되지 뭐하러 비평을 하느냐며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곤 비평가들을 잘난 척 하고 싶어 하는 족속들로 평가절하 해버린다. 이를 노동조합운동에 비유해서 설명해 보자면, ‘노선사회적 전망을 가진 노동운동의 모색에 대해 조합원들은 단사 내 실용적인 노선이 맞다고 주장하거나 쓸데 없는 거 신경쓰지 말고, 조합원들의 경제적 이익을 방어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이 사회에서 거대한 소비자군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중적 존재는 현실에서는 노동계급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으로 기득권에 대항하는 손쉬운 길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손쉬운 방법은 안 산다는 선언이다. 어쩌면 노동조합 내 선거, 또는 정치적 선거에서 많은 투표 행위들이 이러한 논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열등감과 냉소주의에 빠진 진보정치, 진보정치를 냉소하는 대중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을 통해 진보적 원외 정치는 기득권 정치와 접촉면을 형성했다. 그리고 저자가 보기에 이 속에서 진보적 원외 정치론자였던 사람들은 기득권 정치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심리적 방어기제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보적 원외 정치에 대한 냉소이다. 저자의 이러한 심리적 분석은 진보신당 창당에도 대입해 볼 수 있을 거 같다. 예를 들면 민주노동당 주류가 된 NL세력에 대한 좌파의 열등감은 진정한 진보정치는 있다노선으로 발현되었으며 진보신당 창당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어쨌든 저자가 보기에 기득권 정치에 대한 열등감에 대한 방어기제를 통해, ‘운동이 아닌 정치를 해야 한다는 논리(부당하게 대립시키며)가 진보정당 내(정확히는 정의당 내)에서 득세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저자가 보기엔 제공이라기 보다는 약탈당한 것)한 것이 최장집, 박상훈 선생이다.(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현실에서는 막혀버렸다. 안철수가 제3당 노선을 빼앗았고, 노동자정치세력화와 사회운동정당론은 현실의 진보정당에서 부차화되었다.)

과거 독재 vs 민주 공식은 우파 vs 반우파로 대체되었다. 이를 진보정당은 우파 vs 좌파의 대결로 대체해야 했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사태는 진보 진영이 도덕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 그리고 진보 정치가 유권자를 속이고 이용한다는 점 등 진보정치의 부끄러운 민낯을 대중들에게 가감없이 드러내 보였고, 진보정치에 대한 냉소주의는 사회에 대한 냉소주의를 더욱 심화시켰다.

 

냉소주의와 화해하기 위하여

 

저자가 보기에 만연한 열등감과 냉소주의, 그에 기반한 소비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정치가 이와 싸우면서 스스로를 정립하고 작동시켜야 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요소(열등감, 냉소주의, 소비주의)극복이나 파괴가 아니라 화해해야 할 요소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개념과 완전히 결별할 수 없다는 말이다. 열등감을 극복하자는 말이 자칫 능력주의로 귀결될 수도 있고, ‘정신승리로 귀결될 수도 있다. “열등감을 극복하려다 오히려 열등감을 만나는 악무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또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경쟁에 몰입하는 것 역시 답은 아니다. 경쟁에서 배제되면 죽음뿐이다. 이를 넘어서는 기술이 필요한데, 바로 이 기술이 한정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분배하기 위한 합의의 모색, 정치이다. ‘정치라는 수단을 통해 다른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냉소주의 때문에 망하는 것은 당위명분의 정치이다. 그런데, 대중들의 냉소주의는 실제로 믿었던 존재로부터 배신당하거나 이용된 경험으로 인해 갖게 된다. 그런 사람들에게 냉소주의의 한계를 말하는 것은 별 소용이 없다. 차라리 냉소주의자들에게 우리는 지금 여기에는 없지만, 진정한 무엇은 어딘가에 분명히 있다고 설득해야 한다. “냉소주의자의 의문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한 새로운 대답을 제출하고 쟁점을 제기해야하는 것이다. ‘실패의 퇴적속에서 다시 냉소의 논리를 재전유하는 대답을 시작해야 한다.

소비주의는 모든 것을 자본주의의 구매 논리로 평가한다. 소비주의를 활용한 저항 방식은 결국 정치적 맥락은 제거하고 대안 모색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들에게는 판매자가 아닌 생산자의 존재를 고취시켜야 한다. 생산 과정을 단지 상품을 기준으로 상상하는 게 아니라 생산자를 기준으로 상상하게 하는 것이다. 저자는 노동자가 자신의 작업장을 벗어난 이후의 시간대에 노동자의 정체성을 상기하고 유지하도록 할 방법이 무엇인지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산별노조의 지역화, 민중의 집 운동, 협동조합운동이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을 파훼(破毁)하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운동의 현실에서의 효과에 대해서는 평가가 다양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위의 운동들이 효과적으로 잘 작동했다고는 볼 수 없을 거 같다.)

 

정치를 복원하자

 

수많은 사례를 들며 종횡무진 하는 저자가 결국 얘기하고 싶은 것은 체제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 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를 예외적인 권력으로 볼수록 냉소주의의 수렁은 더욱 깊어진다. 삼성에 특혜를 줬던 것은 박근혜 정부뿐만이 아니라 역대 모든 정권이 그러했다. 우리는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당위명분의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 그래야만 정상화된 박근혜 정권을 다시 한번 반복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책 머리에 이 책에 대한 세 가지 반응을 예상했다. 첫째는 무관심, 둘째는 미미한 조롱과 조소, 마지막은 무난한 호평이다. 글쎄, 무관심했다면 서평 자체를 쓰지 않았을 테고, 조롱과 조소를 보내기엔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다. 특히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담론들에 대해 정통하지 않는 평자로서는, 매체비평뿐만 아니라 문화비평에도 한 수준하는 저자의 방대한 분석대상을 꿰는 담대함이 놀라울 뿐이다. 서평자가 냉소사회에 대해 냉소할 수는 없고, 마지막 선택지로는 무난한 호평만이 남았는데, 이는 더 많은 사람들이 독자의 대열로 들어선 후 책담(冊談)하기로 하자.

 

 

진보 정치와 노동운동은 죽을 날만 기다리는, 혹은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무기력한 사형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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