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장석준 지음 / 개마고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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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 제7호 2014년3월호

 

 

지구적 좌파정치의 르네상스를 위한 프리즘

양솔규 기획조정실 국장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장석준 / 개마고원 / 20141/ 15,000

 

19891230KBS 명화극장에서는 낯선 영화 한편이 방영되었다. 칠레 인민연합 아옌데 정권의 등장과 미국 CIA의 사주로 벌어진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를 다룬 영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가 그것이다. 아무리 87년 민주화 이후였다 하더라도 엄연히 군부독재의 주역 중 한 명인 노태우가 집권한 시기에 이런 영화가 공중파로 상영되는 거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에피소드의 주역은 패기 넘치게 기습 편성해 내보낸 KBS 노동조합이었다. 바로 다음날인 한 해의 마지막 날에는 국회에서 면피성대국민 사과 연설을 하던 전두환이 초선 국회의원이던 노무현이 던진 명패에 맞을 뻔한 수모를 겪었다. 명화극장 기습 상영은 광주학살 원흉전두환의 퇴장에 KBS 언론노동자들이 보내는 찬사이자 그간 군부독재의 언론통제 협조에 대한 일종의 반성문이었다. 미국의 개입, 군사독재, 민간인 학살 등 한국 현대사와 겹치는 상황 때문에 많은 시청자들의 기억에 남기도 했지만, 이 영화는 바다 건너 운동 세력에 대한 정보에 목말라 하던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한 잔의 샘물이었다.

 

박정희 18년 독재와 전두환 정권 7년은 한국의 민주화운동세력과 좌파세력에게 암흑의 시기였다. 단지 폭압과 착취 때문만이 아니다. 한국의 군사독재는 다른 여타 군사독재정권과 마찬가지로 해외의 모든 정보를 통제했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모든 우편물은 검열을 거쳤다. 좌파 서적 비슷한 거를 국내에 반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오죽하면 막스 베버(Max Weber)와 마르쿠제(Marcuse)의 책을 들고 다니다가 경찰서에 끌려갔다는 우스갯소리까지 회자되겠는가? 국민이 접할 수 있는 정보는 정권이 선별해 제공하는 정보 밖에는 없었다. 외신이라고 해봤자 미국, 일본의 통신사와 언론사 외에는 없었다. 시각은 좁아지고 시력은 떨어졌다. 보통 사람들에게 해외여행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전국민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진 것도 8911일 이후에나 가능했다. 그 이전 시기에 여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으로 여겼다. 해외 사람들과 손에손잡고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장소는 잠실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으로 한정되어 있던 것이다. 그나마 한국을 알고 있는 소수의 외국 사람들에게 한국이라는 나라는 아프리카 변방에 있는 독재정권과 비슷한 나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은둔의 나라, 폐쇄적 공화국은 한반도 북쪽 뿐만이 아니라 남쪽도 마찬가지였다.

 

한반도 남쪽으로 좁혀진 시야와 시력은 조정되어야 했다. 그러나 민주화가 시작된 이후에도 여전히 이러한 한계는 극복되기 어려웠다. 주체사상과 정통맑스 레닌주의는 한반도 남쪽의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의 시각을 옭아맸다. 어쩌면 진정한 조정의 계기는 87년 민주화 뿐만 아니라 911231, 소련의 해체 이후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소련과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는 한국의 좌파들에게(또한 전 세계 좌파들에게) 저주이면서 동시에 축복이었다. 90년대가 사상적으로 혼돈의 시기였는지는 몰라도, ‘조정은 늘 혼돈을 동반하기 마련 아닌가.

계기는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좌파들의 현재성에 대해 그러나 우리는 많이 알지 못했다. 브라질노동자당(PT)의 활약상이 소개되고, 만델라의 석방과 ANC의 집권을 뉴스를 통해 접하긴 했지만 말이다. 장석준은 이러한 정보불균형정보비대칭의 시대에 세계 좌파정당의 동향에 대해 일찍부터 소개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 장석준과 일군의 젊은 활동가들은 <카피레프트 모임>을 결성하고 외국의 좌파저널 중 논쟁적인 글들을 번역해 읽을꺼리라는 자료집으로 묶어 냈는데, 읽을꺼리5호는 세계 진보정당의 이념/구조/운동이 주제였다.(http://copyle.jinbo.net에 가면 당시 카피레프트모임의 읽을꺼리를 다운받을 수 있다.) 이 자료집은 민주노동당 창당 일정을 염두에 둔 것이었는데, 이후 만들어진 민주노동당 기관지 이론과실천에 장석준은 역사 속의 진보정당들등의 코너를 통해 꾸준히 세계 좌파정당들의 동향을 소개해 왔다. 2005년 공공연맹에서 세계 진보정당 운동의 교훈과 한국 진보정당 운동의 과제라는 자료집을 냈는데, 그 중 상당수의 글이 장석준의 글이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좌파들의 힘이 약화되고, 우여곡절을 겪게 되면서 세계 좌파정당들의 공시적(共時的) 실천을 소개할만한 여유와 지면이 부족하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한겨레21>에 이러한 주제를 다루는 코너가 마련되었고, 여기에 실린 글을 묶어서 낸 게 바로 장석준의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이다.

새로운 세계 좌파정당 입문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는 이전의 좌파정당 동향 소개와는 다른 점이 있다. 바로 지리적 초점의 이동이다. 글의 개수로만 보면, 30개의 글 중 16개가 유럽을 다룬 것으로, 여전히 서구중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변화가 눈에 띈다. 유럽 내에서도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 그동안 주목받지 않았으나, 유로존의 위기 한가운데 있는 남유럽 국가들의 좌파들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또한, 아이슬란드나 러시아, 덴마크 등 새로운 좌파가 부상에 주목한다. 심지어 스웨덴,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이른바 사민주의의 선도국가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수 좌파들의 약진과 재구성에도 주목한다.

 

이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아프리카와 중동 등 아랍의 봄의 핵심 지역과 인도에서 독재와 근본주의 모두에 반대하며 부상하고 있는 세속 좌파들에 대한 분석, 그리고 좌파연대를 통해 지구적 반신자유주의 중심으로 부상한 남미의 베네수엘라, 브라질, 우루과이, 칠레 등에 대한 분석 등이다. 이러한 지리적 초점의 이동의 이면에는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생-청년 세대의 불만의 표출과, ‘아랍의 봄’, ‘남유럽 점거운동등 새로운 공세적 거리정치의 등장이 있다.

장석준은 에필로그를 통해 한국 진보좌파정치도 세계 좌파정치와 마찬가지로 기나긴 재구성의 과정에 놓여 있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한국 정치가 마주했던 결정적 계기들을 짚는다. 예를 들면 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진보좌파의 독자적 정치구심 결성 여부가 이후 브라질과 한국의 진보좌파 정치의 경로를 좌우했다는 것이다. 또한 남아공과 한국 모두 민주화 과정과 신자유주의 시기가 중첩되면서 자본 독재와 겹쳐진 민주주의가 결국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기회들은 존재했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새로운 대안 제시를 통해 명실상부한 제3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2007년 대선시기와, 2011년의 글로벌 점령 운동의 설익은 한국판 버전이었던 2008년 촛불항쟁이 그러했다. 그러나 진보좌파정치는 민주대연합론을 넘어서지 못했다.

 

남은 것은 새 출발이다. 그러나 새 출발은 재건복원과는 다르다. ‘단절이 전제되어야 한다. 장석준은 단절의 과제로 자유주의 세력 중심의 연합 흐름과의 단절’, 그리고 주체사상과의 단절을 주장한다. 단절 뒤에는 좌파정치의 철저한 실험과 개척, 정비를 통한 혁신이 필요하다고 단언한다. 조바심은 금물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련의 시간이지 시간 단축이 아니다. 현재를 비관하되 미래를 비관하지 말자. 기나긴 시간 지평 속에서, 지구적 시야를 통해 자본주의 문명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사유를 가지고 실천하자. 바로 지구 곳곳에서 우리 동료들이 그러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더 읽을만한 책과 자료>

 

위기 반란 대안 1,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엮음, 책세상, 20131, 12,800

유럽의 경제위기와 정치 변동 : 남유럽을 중심으로, 김종법, 내일을 여는 역사47(20126)

북아프리카 민주화운동의 성격과 전망, 엄한진, 비판사회학회, 경제와사회90(2011년여름)

유럽통합의 모순과 재정위기의 정치경제, 박상현, 비판사회학회, 경제와사회97(2013년봄)

라틴아메리카의 중도좌파 붐, 이성형, 역사비평사, 역사비평96(2011년여름)

라틴아메리카: ‘종속배제에서 해방의 혁명으로, 안태환, 문화과학사, 문화과학67(2011년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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