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매진 - 21세기를 위한 사회주의의 비전
토미 셰리단.앨런 맥쿰즈 지음, 김현우 옮김 / 이매진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이매진 - 21세기를 위한 사회주의의 비전

양솔규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redstar@jinbo.net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통권146호, 2006년 8월호

<이매진-21세기를 위한 사회주의의 비전> / 이매진 / 13,000원 / 2006년 5월

1999년, 신자유주의의 또 다른 심장부 영국의 스코틀랜드에서는 ‘작은 승리’가 일어났다. 처음으로 구성되는 스코틀랜드 의회에 SSP(스코틀랜드사회주의당)의 토미 셰리단이 비례대표 21.5%의 지지로 입성하게 된 것이다. 그의 오른손엔 ‘독립 공화국’이라는 카드가, 그의 왼손엔 ‘사회주의자’라는 카드가 들려 있었다.

4년이 지난 2003년에는 토미 셰리단 외에도 5명의 의원이 더 배출되었다. 여전히 그들은 사회주의를 외치고 있으며, 노동당이 독점해 온 진보정치 비슷한 지형에 귀퉁이 하나를 차지한 것이다. 이것은 싫든 좋든 어쩔 수 없이 ‘노동당’(구노동당이든, 신노동당이든)을 선택하도록 ‘강요’ 당해 온 노동자들에게, 빈민들에게, 성소수자에게 자신의 꿈과 삶을 포기하지 않을 새로운 선택지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무나 오른쪽으로 가버려 이제는 ‘노동’당이라고 부르기조차 어색한, 이제는 ‘빈곤의 짜르’가 되어버린, 그래서 자신들조차도 ‘신’노동당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 당이 아니라, 민중에게 실질적인 통제권을 부여할 권력을 돌려주기 위해 투쟁하고 연설하고 모여서 집단적인 역사형성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당이 스코틀랜드 민중에게 생겼다. 그것을 SSP는 ‘홀리루드(의회가 있는 곳)를 향한 사회주의적 진전’이라 부른다.

이 책은 SSP의 대표적인 정치인 토미 셰리단과 ‘스코틀랜드 소셜리스트 보이스’의 편집자이자 SSP의 핵심적인 인물인 앨런 맥쿰즈가 함께 쓴 책이다. 이 책의 미덕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에 있다. 또한 한 문장, 한 문단이 짜임새가 있을 뿐만 아니라, 독창적인 예들과 비유, 폭소를 자아내게 하는 풍자, 적절한 인용과 글의 부드러움도 함께 만끽할 수 있다.

이매진, 비틀즈의 노래 제목이다. 이 책의 각 장의 제목과 책의 내용에는 존 레논의 노래가사나 제목이 쓰이고 있다. 저자의 말대로 ‘이매진이라는 노래 자체가 불평등과 착취, 인종주의와 전쟁이 없는 그런 사회주의 세상의 비전을 불러’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저자들의 책 제목으로서는 아주 ‘딱’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을 번역 출판한 출판사 이름조차 이매진이 아닌가.

우리가 이 책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한국과 스코틀랜드의 역사적 배경이 매우 다른 것만큼이나 공통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주장하는 SSP는 스페인의 카탈로니아와 바스크, 영국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등의 민족주의+좌파정치세력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이라는 고전적이면서 현대적인 쟁점에 천착하고 있다. 또한, 사상적 폐허 위에서 다시 사회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반자본주의세력의 결집을 선도하고 있다. ‘거대한 소수’ 전략의 성실한 발걸음이다.

민주노동당이 처한 현실에서 이러한 주제들은 많은 부분을 생각하게 하고 상상하게 한다. 그들이 ‘거대한 소수’ 전략을, 명확한 ‘사회주의’라는 기치를 내걸면서 ‘전진’하고 있을 때, 민주노동당은 늪에 빠진 자신의 발을 원망하며, ‘거세당한 소수’의 행보를 거듭하고 있었다. 당내 소수자 문제에 대한 민주노동당의 시각은 따뜻하지도 않았으며, 정치적 슬로건과 전략의 채택을 놓고서는 단호하지도 않았다. ‘거대한 소수’를 바라보는 진짜 거대한 대중들의 시선을 민주노동당은 고정시키지 못했다. 채널을 고정시킬만한 내용이 부족했으며 채널을 좌지우지하는 리모콘을 민중들에게 돌려주지도 못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있고 움직이고 있으나 당의 숨소리는 잦아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SSP는 민주노동당이 승인할지도 모르는 광범위한 전선체의 토대 위에서 생겨났다. 하지만 경로가 다르다. SSP가 당적 통일전선체를 통일전선적 당이라는 실험을 통해 탄생했다면 민주노동당은 자기 외의 또 다른 옥상옥을 지으려 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문호를 열면 열수록 배타적으로 되어 버리는 마술같은 역설이 진행되고 있다. 21세기의 초입에서 20세기로, 19세기로 자신의 상상력을 후퇴시키는 것을 ‘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반동’이라고 불러야 하나.

SSP는 민족문제를 세계화시대의 반자본주의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와 결부하면서 ‘미래’를 예견해 나가는 지렛대로 삼고 있다면 민주노동당은 ‘현재’의 문제로 축소시키거나 그 자체에 매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우리가 바랬던 것은 소수가 다수가 되는 양적 확대 자체보다는 소수이면서도 ‘당당’하고 그 ‘당당’함이 곧 미래를 보증하는 선순환구조가 아니었던가. SSP가 ‘당당하게’ 초국적자본에 투항해버린 노동당과 보수당에게 맞서고 있는 것은 굉장한 경험이며 그 모습 때문에 이 책은 수많은 ‘몽상가’들에게 몰입의 기쁨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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