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힘 - 1870년 이후의 노동자운동과 세계화
비버리 실버 지음, 백승욱.안정옥.윤상우 옮김 / 그린비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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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출처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2005년 11월호 (137호) 
양솔규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 redstar@jinbo.net

비버리 J.실버 / 그린비 / 2005.8월/15,900원

도전과 응전의 파노라마,《노동의 힘》

 

9월 4일, 현대차비정규노조 조합원 류기혁 동지가 노동조합 사무실의 옥상에서 자결하였고, 9월10일에는 화물연대 조합원이자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활동하던 김동윤 동지가 신선대 부두 앞에서 분신하였다. 김주익․곽재규 열사, 이현중, 이해남 열사 등과 박상준, 최복남, 고성학 동지 등 화물운송 노동자들의 죽음에 이어 도대체 끊이지 않고 있는 이 죽음의 행렬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강승규 비리 사건으로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가 사퇴하였고, 울산 북구 선거 패배 후 민주노동당 김혜경 대표와 최고위원회가 사퇴하였다. 혹자는 ‘사퇴정국’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짧은 만개와 때이른 조락이 낳은 불안한 기운이 여러 사람들의 얼굴빛을 어둡게 한다.

부산 서면에서 열린 김동윤 열사 추모 촛불집회를 마치고 참담하고 허탈한 마음을 안고 지하철에 올랐다. 부산대 앞에서 전두환 아들이 운영하고 있는 서점(리브로)에 들려 새로 나온 신간들을 살펴보려 했지만, 인문사회과학 신간 코너는 새학기를 맞아 어느새 대학교재 코너로 바뀌어 있었다. 경영경제 도서나 예술, 컴퓨터 실용서들은 버젓이 자신의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지만 인문사회과학은 어느새 답답하고 돈 안되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나보다.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책을 뒤지던 중, 최근에 나온 책 하나가 눈에 띄었다. 비버리 J. 실버가 지은 ‘노동의 힘’이 그것이다. 표지에는 멕시코의 예술가 디에고 리베라의 프레스코 벽화 <Industria de Detroit o Hombre y Maquina, 디트로이트 산업 혹은 인간과 기계>가 전면에 그려져 있다. 이 표지 그림으로서는 도저히 ‘노동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왼쪽 옆에 관리자인지 자본가인지가 안경 너머 매서운 눈초리로 일하는 노동자들을 ‘꼬나보고’ 있고, 노동자들의 눈동자는 보이지 않는다. 정신없이 작업에만 매달려 있는 모습들. 더군다나 노동운동의 위기를 말하고, 노동 연구의 위기라 말하고 있는 이 시기. 신자유주의 광풍을 힘겹게 맞이하고 있는 한국의 노동운동과, 일시적인 ‘열사정국’이 아니라 ‘열사의 시대’ 아니, ‘죽음의 시대, 절망의 시대’라 할 수 있는 바로 이 땅에서 ‘노동의 힘’을 선언하기에는 도무지 자신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이 책을 꺼내봤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역자 중 한 사람인 백승욱 선생은 최근 중국 노동의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저작들과 논문들을 발표하고 있고,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같은 세계체제론자들의 책들을 번역했는데, 그 긴요성을 간취하는 뛰어난 능력에 걸맞게 좋은 책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이 책은 1870년 이후의 노동자운동을 세계노동운동집단 데이터베이스에 기반해 몇 가지 개념을 가지고 분석하고 있다. 그 개념이란 첫째, 맑스식 노동소요와 폴라니식 노동소요이다. 맑스식 노동소요는 ‘역사적 자본주의의 발전이 과거의 노동계급을 해체시키는 와중에 의도치 않게 낳은 결과로서 출현해 잇달아 형성, 강화되어 가는 새로운 노동계급의 투쟁’을 뜻한다. 폴라니식 노동소요는 전지구적인 경제적 전환 탓에 해체되어 가는 노동계급이 벌이는 저항을 뜻한다. 둘째, 노동소요에 대응하는 자본의 방식은 공간 재정립과 기술 재정립, 제품재정립, 금융적 재정립으로 나눌 수 있다. 재정립을 통해 자본은 노동소요를 무력화시키고 안정적인 자본 축적 구조를 만들고자 하지만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다는게 저자의 생각이다. 셋째, 노동의 힘은 연합적 힘과 구조적 힘(시장교섭력, 작업장교섭력)으로 나누고 있다.

저자가 주목하는 바는 전세계 노동운동이 위기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재정립을 통해 노동소요를 파괴하고 피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최종적’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본이 가는 곳에 갈등이 따라간다’는 주장을 저자는 책 한 권을 통해 증명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저자들은 먼저 20세기 자본주의의 선도산업인 자동차산업에서의 노동소요와 자본이동을 다루고 있다. 자동차산업의 노동소요는 자본의 공간재정립에 따라 지리적으로 변화되어 왔다. 미국에서 서유럽으로, 다시 제3세계(브라질, 한국, 남아공 등)로 이동해온 이러한 자동차산업 노동소요는 이제 최종적인(?) 거대한 노동소요의 진원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바로 세계의 생산기지 중국이 그러한데, 아직 현상적으로는 조용하지만 그 거대한 대륙이 요동칠 시간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자동차산업 내부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보통 린생산(Lean Production)이라고 부르는 일본식 생산방식이 전세계로 확산되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바로 기술재정립의 과정이다. 그런데 일본의 린생산방식(이중적 린생산)보다는 ‘인색한 린생산’ 방식으로 변형되었고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90년대 후자의 방식을 도입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재정립은 오히려 노동의 강력한 작업장교섭력을 증대시켰다.

그러나 19세기의 섬유산업의 노동소요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산업에 노동소요의 역사적 임무를 넘겨줄 운명에 처해 있다. 노동-자본 갈등의 장소가 부문간으로 이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부문이 21세기의 노동소요를 책임질 것인가? 이를 포착하기 위해 저자는 ‘제품재정립’이라는 용어를 도입했다. 이는 바로 ‘혁신적이고 더욱 이윤이 높은 새로운 생산라인과 산업으로 자본을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한 제품의 후기 단계(경쟁이 격화되면서 이윤율이 낮아짐)는 새로운 제품 산업의 시작과 겹쳐진다. 바로 지금의 시기는 자동차산업과 새로운 산업이 겹쳐지고 있는 시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산업이 자동차산업의 계승자가 될 수 있을까? 저자는 반도체산업, 생산자서비스 산업(도시 시설관리. 바로 SEIU가 행했던 건물관리인을 위한 정의 캠페인을 상기하라. 이는 젊은 활동가들을 흥분시키는 캔 로치 영화 “빵과 장미”에 잘 묘사되어 있다.), 운송과 교육산업을 검토한다. 결론적으로는 21세기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은 20세기의 자동차산업보다는 19세기 섬유산업과 비슷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도체산업은 섬유, 자동차와는 달리 고용성장의 원천이 아니며, 고소득 국가에 집중되었고, 자동화되고 있다. 교육과 생산자서비스는 제조업과 달리 공간재정립이 힘들다. 그렇다고 이러한 산업들에서 우리가 자동차산업과 같은 폭발적 전투력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21세기 노동의 ‘구조적 힘’이 침식되는 것만큼 우리는 19세기 섬유노동자들이 그랬듯이 ‘연합적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이 힘은 ‘지역’을 근간으로 한다. 바로 도시 시설관리나 교육산업과 마찬가지로 지역 차원의 연합적 힘이 필요하며 이는 젠더, 시민권, 계급 등의 여타 다른 범주들의 동원과 협력, 수용이 필수적이다.

최근의 상황에 대해서는 저자는 ‘금융적 재정립’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전세계적인 경쟁의 압력은 무역과 생산에서 이탈해 자본이 금융과 투기로 옮겨지게 만들었다. 현재의 과잉축적된 금융적 재정립은 사회협약의 붕괴와 기존의 조건의 후퇴에 대항하는 폴라니식 노동소요의 전세계적인 확산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금융적 재정립은 곧 노동운동의 위기를 불러왔고, 19세기의 금융적 재정립과 유사한 패턴을 보이고 있다.

마이크 데이비스는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에서 미국 노동의 힘이 거세당하는 과정과 원인을 추적하면서 결국 자신의 대안을 제3세계 노동자에게 찾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약 20여년이 지난 지금, 혹 우리는(아니 나는) 우리의 대안을 ‘중국 노동자’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만큼 중국이 세계노동정치에 주는 함의는 대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활동가는 이 책의 저자 실버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거대한 노동소요의 물결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마틴 하트 랜즈버그 역시 <중국과 사회주의>(한울)에서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투쟁이 유발되고 있으며 이는 중국 자본주의의 복고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도 마찬가지로 노동소요의 거대한 진원지로 중국을 파악하고 있다. 그에 따른 광범위한 중국 노동자들의 폴라니식 노동소요가 분명한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맑스식 노동소요는 분명치 않은 것 같다. 어찌되었든, 결국 자기대안은 자기가 마련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유일하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중국의 노동소요가 전세계 노동계급의 재생의 힘이 될 지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국을 찾은 중국 공회의 간부가 공산당의 발전주의이데올로기를 읊는 것을 보면서 황망했던 기억이 있다. 수많은 중국 인민들과 더 많은 전세계 노동자들이 슬기롭게 자신의 힘을 낙관하지도, 비관하지도 않으면서.

 

이제 21세기의 노동이 마주한 거대한 전환점에서 우리는 우리 노동운동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 파악 하에서만이 정확히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와 한계, 전략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효과적으로 우리 자신의 힘을 이용해야 한다. 실버의 ‘노동의 힘’은 바로 ‘노동의 힘’을 증대시켜줄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하게 해주는 책인 것이다. 우리가 자본이 이윤을 위해 추구하는 재정립이라는 도전에 끊임없이 응전하는 이유는 그것이 나의 삶의 본질적인 회복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나의 구성요소이자 내가 그 일부분인 공동체의 본질적인 회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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