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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있는 여성이 행복을 만든다
조동춘 지음 /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애플북스) / 2001년 1월
평점 :
제목으로 알 수 있듯, 이 책의 타깃은 여성이다. 부모님, 특히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며 읽었는데, 많은 부분에서 공감이 갔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이게 의식 있는 행위인가'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저자가 기존의 낡은 여성의식--백치미, 공주병 등을 권리로 아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자들의 의식 상태를 지적한다. 변하는 시대에 따라가지 못 하여 불행을 자초하는 여자들이 많다는 점에서, 그 지적엔 설득력이 충분하다. 그러나 '나는 이런 여자다'라고 당당히 밝히기 위해 자기계발을 하라는 것엔 동의하지 않는다. 문득 모 영화에서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고 말한 정마담(김혜수 役)이 생각났는데, 정마담은 그 말을 할 때 얼마나 콧대를 세웠을까.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 '의식 있는 여자'의 모습일까.
(자칭 의식 있는 여자라는) 저자의 강한 자부심 뒤에 열등감이 숨겨져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잡놈', '정신병자' 등의 표현에서는 거만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더 읽기가 불편해질 즈음, 저자의 어린 시절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저자의 아버지는 능력도 없으면서 아내를 버렸고, 마찬가지로 경제력이 없던 어머니는 혼자 여러 자식을 키웠다고 한다. 저자는 훗날 자식들을 고생시키지 않기 위해 경제력을 갖추려 했을 것이고, 남편으로부터 버려지지 않기 위해 남자의 사랑을 받는 여자가 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시종일관 '남편에게 사랑받는 여자가 되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그것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마침내 '명함을 내밀만한' 훌륭한 여자가 되었다. 그런데 저자의 자부심은 정말로 훌륭한 여자가 되었다는 데서 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보다 못난 여자들을 평가절하하는 데서 나오는 것일까. 자기 인생은 자기 하기 나름이라면서, 정작 자신의 일엔 팔자니 운명이니 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의식 있는 여자란, 남들을 깔보면서도 명함만 내밀 줄 알면 되는 사람인가.
내가 아들러 심리학을 몰랐다면, 저자가 생각하는 '의식 있는 여성상'과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일치했을 것이다. 하지만 갈수록 살기 힘들어지는 세상에서 살아 남으려면 여자도 경제력을 갖추는 게 나을 것이며, 자녀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처녀성 때문에 신혼 첫날밤에 파혼 당하는 일이 어처구니 없다면서도, 그런 일을 당한 여자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없다. 그에 대한 사적인 의견을 끝으로 리뷰를 마치려 한다.
남녀 관계에서 빠지지 않는 화두가 여자의 '처녀성'이다. 저자는 왜 남자들이 숫처녀를 선호하는지 잘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처녀 총각이야 하룻밤 잠자리 이전까지이지, 하룻밤만 지나면 이런 명예스럽던(?) 이름은 끝나는 것이 아니냐'고 한다. 그러나 남자들의 말에 따르면, 처녀성을 가져감으로써 정복욕을 충족했음을 확인하기 위해 처녀성에 집착하는 것이다. 심지어 처녀막이 찢어지는 고통에 괴로워하는 여자를 보고 정복욕을 느끼는 남자들도 있다. 제 생살이 찢어지는 고통에 인상 쓰는 남자를 보고 좋아하는 여자를 상상해 보면 그 남자들이 얼마나 소름 끼치는지 알 수 있다.
남자들은 그들이 처녀성에 집착하는 이유로, '여자가 밴 아이가 자신의 아이임을 확신하기 위해서'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실제는 어떤가. 남자들은 그들이 결혼할 여자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들도 숫처녀이길 바란다. 그 여자들과 결혼하거나, 자신의 친자식을 만들어 양육하지도 않을 거면서 말이다. 게다가 친자 확인 검사가 있는 요즘, 그런 변명은 너무 치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과학적으로 이렇다'고 하면 왠지 근거 있어 보여서 믿게 되는 심리를 이용하기 위해 진화심리학을 끄집어내는 것 같다. 하지만 진화생물학이라면 모를까 진화심리학으로는 어설프다. 심리학은 가정에서 출발하는 학문이며, 시대에 따라 변하고 문화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민족의 여자는 일부러 처녀막을 파열시키기도 한다. 그 민족의 남자에겐 결혼한 여자가 밴 아이가 친자식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말인가.
음경에도 처녀막이 있다는 걸 아는 남자들이 몇이나 될까. 그들에게도 진화심리학을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어처구니 없어 할 것이다. 차라리 경제적으로 어려우니 남의 자식은 키울 수 없다고 하는 게 더 설득력 있다. 예전부터 그래 왔으니 그대로 따른다는 것도 부질없는 생각이다. 모든 숫처녀가 첫 성관계 때 출혈하는 것도 아니고, 처녀막 재건 수술의 발달은 숫처녀를 찾는 남자들의 기대를 실망으로 바꿔버린다.
남자들에겐 처녀막 수술을 하는 여자들을 비난할 권리가 없다. 그 수술이 왜 생겼을까. 숫처녀를 찾는 남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수술을 없애기 위해선,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노력해야 한다.) 그 여자들이 거짓말 했다고 분노할 필요도 없다. '그 거짓말'은 남자들이 컨트롤할 수 없을 뿐더러--내 통제밖의 일에 휘둘리는 것은 에너지 낭비다, "당신이 처음이에요."라는 말을 들어도 끝까지 의심하기로 선택하는 사람은 다름아닌 그들이다. 거짓말하는 것 자체가 인성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숫처녀라는 말을 믿지 않기로, 숫처녀가 아니라는 말을 믿기로 선택한 남자들의 문제는 무엇일까. 선택권은 남자들이 누리면서 그 책임은 상대에게 전가하는 것은 인성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처녀성은 여자들의 인성 수준까지 보장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비처녀성은 여자들의 인성이 나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여자에게 처녀막 수술을 받을 경제력이 있고 '그렇게 하는 게 좋다'는 분별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낫다. 세상살이에 필요한 것은 처녀성이 아니다.
숫처녀와 결혼하고 싶은 남자들은 그들 자신부터 --여자들이 처녀막 수술을 하듯, 포피를 봉합하는 수술을 하든지 해서. 물론 여자들이 보기에도 어이 없다-- 숫총각임을 증명하는 게 어떨까. 여자들도 결혼할 남자가 아무 여자들과 성관계하고 그 여자들 중 누군가가 내 남자의 아이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하고 불명예스런 생각은 하기 싫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직 남자들에겐 그들이 숫총각임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 남자들은 그것을 다행이라 생각하고, 심지어 남자에겐 혼전 성경험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혼전 성경험이 없는 남자들을 찾는 여자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남자들이 있을까. 남자들은 그 기대에 얼마나 부응하고 노력하고 있을까.
왜 남자들이 "처음이야?"라고 물을까. 누군가 내게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하죠?"라고 묻는다면, 나는 당장 헤어지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 질문엔 '처음 아니지?'라는 의심이 깔려 있다. 당신을 숫처녀라고 생각하고 믿는다면, 그런 질문을 할 이유가 없다. 믿지 않기로 작정하고 묻는 거라고 생각해도 된다. 당신이 "처음이에요."라고 하면 그 남자는 "거짓말."이라 할 것이고, "처음 아니에요."라고 하면 "역시."라고 할 것이다. 당신이 뭐라 대답하든 그 남자는 믿고 싶은 것을 믿을 테니, 숫처녀라 할지라도 '처녀 아니다'는 거짓말로 한 방 먹이고 당당히 돌아서라.
그 남자는 당신과의 관계를 언제든 쉽게 끝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처녀성으로 당신이 결혼할 만한 여자인지 시험했듯, 당신이 계속 같이 살만한 여자인지 계속 시험할지도 모른다. 그 남자는 당신이라는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남자가 만들어 낸 이상(허구)에 집착하는 것이다. 집착은 사랑이 아니다.
아이가 생기기 전에 끝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라. 그런 남자에게 당신의 처녀성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라. 그런 남자에게 낭비할뻔한 애정을 더 나은 남자에게 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라. 당신의 여생을 더 나은 남자와 함께 보낼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