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Smila > 마리코 모리 Mariko Mori
'코스프레 오다쿠족이 세계적인 아트 스타가 되었다.' 너무 단순화시킨 표현이긴 하지만, 서구 언론에서는 마리코 모리 Mariko Mori 에 대해 언급할 때 이런 표현을 쓰기도 한다.
몇 해전 호주 여행을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마리코 모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시드니에 있는 내셔널 갤러리인가에 (정확한 명칭은 기억 못한다) 구경을 갔는데,
그곳에서 현대 신예 작가 4인전 뭐 그런 비슷한 초대전을 하고 있었다. 4인의 작품 가운데, 지금에 와서는 마리코 모리의 작품만 기억하고 있으니 그녀의 작품이 인상적이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내가 본 작품은 그녀의 비디오 작업으로 , 마리코 모리가 직접 분장하고 출연한 작품이었다. 완전히 일본 전통 복장같지는 않고 어쩐지 중국 설화 속의 선녀같기도 한 야릇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녀를 보자마자 떠오른 생각.
"오호~, 서양 사람들이 이걸 보면 좋아서 자빠지겠군!'
비디오 작업 안에는 컴퓨터 합성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우주 공간 같기도 하고 옛 설화 속 풍경 같기도 한 그곳에선 공상만화에 등장할 것 같은 괴물체들이 떠 다녔다. 마리코 모리는 그 안에서 뭔가 주술적이면서도 해석 불가능한 행동을 반복했다. 동양적인 것과 미래적인 것, 저패니메이션의 이미지가 혼재된 공간이었다. 예쁘장한 얼굴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묘한 표정들, 그 카리스마도 만만치는 않았다.


그러나, 그 후에 그녀의 뒤를 캐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인상적이었다고는 하나 어쩐지 학생 작품같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얼마 전 <뉴욕 미술의 발견: 갤러리, 경매장, 미술관 그리고 아트스타들>이라는 책에서 마리코 모리를 다시 만났다. 이게 왠걸, 그냥 예쁘장한 일본 계집아이같던 그녀는 뉴욕과 유럽을 사로잡은, 최고로 잘 나가는 아트 스타였다! 내가 보는 눈이 없었던게지?!!
최근 서구의 잘 나가는 아트 딜러들은, 될성 부른 작가들은 20대때부터 적극 후원해서 30대 초 정도에 아예 세계적인 아트 스타들로 만들어 버린다고 한다. 그들이 가진 젊음과 스타성, 생명력으로 미술계의 파워를 더욱 공고히 이어가는 것이다. 마리코 모리도 그런 식으로 이미 30대 초반에 '대가'가 되어버린 아트 스타였다.

그녀는 일본에서 원래 모델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젊은 이미지를 위해 나이를 비밀에 붙이고 있으나, 알려진 바로는 67년생이다.) 다양하게 스스로를 연출하고 사진찍기를 좋아했던 그녀는, 20대 초반에 영국의 미술 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고 그 이후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보통의 코스프레족들은 복장을 따라하고 자기들끼리 즐거워하다 말지만, 그녀는 거기에 독창적인 이미지와 공간 (아마도 그녀만의 유토피아)를 접합시켰다. 서양 사람들 눈엔 얼마나 독특하고 신기했을까!

주로 비디오 작업과 대형 사진으로 이루어진 그녀의 작업은 우리나라에서도 광주 비엔날레와 경주 선재 미술관 등에서 몇차례 전시되었었다고 한다. 정보가 어두웠던 나는 그 전시들 모두 놓쳤고...
그녀가 최근에 제작하는 작품들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아트 프로젝트들에 속한다. (요즘 아트 비디오 작품들은 왠만한 헐리우드 영화 뺨치는 제작비들이 소요된다.) 그래서, 소니와 시세이도가 그녀의 제작비 스폰서 노릇을 하고 있다.
그녀의 작품을 단 한편만 보고서 그녀에 대해 평가하자니 여러모로 자격이 부족하지만, 그냥 눈치로 때려보자면... 그녀의 성공은 그녀의 재능, 스타일의 시의적절함, 그리고 일본이라는 국가 이미지, 이 3박자가 딱 들어맞았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사실은 여기에 한 요소가 더 있다. 그녀는 모리 부동산이라는 일본 최고 재벌집안 딸이다. 최근에 도쿄에서 문을 열어 세계적인 관심을 끌어모은 모리 미술관이 -우리나라 9시뉴스에서도 다룬 그 곳- 그녀의 삼촌꺼다. 활동 초기부터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을리 없다.)
그냥 그림을 잘 그리는 것만으로는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이 요즘 현대 미술계의 판세인 것 같다. 우리나라라고 어찌 이 여성보다 재능있는 작가가 없겠는가. 어찌보면 손보다는 머리 싸움이고, 어찌보면 '최첨단 발명품 경연대회' 처럼 보이는 현대 미술계. 마리코 모리 수준의 성공을 얻으려면 전폭적인 지원 외에도 작가 개인의 외모와 카리스마까지 받쳐줘야 한다.
내게 진지함이 부족한 탓일까? 순전히 아마추어 관람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현대 미술계의 판도가 더할 나위없이 흥미진진하다. '예술은 사라졌다' 라는 탄식보다는 '앞으로는 도대체 어디까지 갈껀가?'하는 호기심이 앞선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여전히 궁금한 점은 남아있다. 백년 후, 혹은 2백년 후쯤에도 마리코 모리의 작품이 지금같이 화끈한 평가를 받을 것인가? 내가 직접 확인할 방법은 없겠으나, 이 점은 여전히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