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 오이디푸스 - 자본주의와 분열증 현대사상의 모험 1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지음, 김재인 옮김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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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 장바구니 속으로 Go GO~ 참 오래도 걸렸군요. 복간된 것이..... 악덕 되팔이들은 훠이 훠이~~ 도서관에도 급속 신청 !! 고맙습니다. 이 책을 내어 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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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들 1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배수아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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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한 번역... 카프카의 저작 중 꿈에 관한 모음집이라면 돈이 아깝지 않는 책.... 아울러 책배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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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군주론 - 이탈리어 완역 결정판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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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간만에 다시 군주론을 읽어본다.

처음 군주론을 읽었을때가 한 육년은 넘었을 것이다. 까치글방에서 나온 번역본이 제일 읽을만하다 하기에 집어 들긴 했는데 갑자기 왜 군주론을 돈을 주고 사서 읽을 생각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쓸데없는 물욕이었는지 겹쳐 읽기를 하다 얻어 걸렸는지도 모르겠지만 이번에 다시 읽게 된 신동준역의 것을 비교해 같이 읽어 보려고 하니 어느 책더미에 쌓여 있는지 보일지 않기에 포기...... 거기에 같은 잉글레 제본의 최신판을 사용했다고 하니 큰 의미는 없을 듯 싶다. 어쨌든 서가 어딘가에 있겠지 싶어 당시 읽고 난 뒤 간단한 감상을 올려 놓을 것을 찾아 읽어보니 상당히 부정적인 문장이 많은 걸로 보아 세상에 참 불만이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재작년엔가 올재 클래식스에 나왔기에 재독을 하였는게 올재 특성상 재능 기부를 받아 절판된 책을 주로 내기 때문에 찾아 보았더니 역시1990년과 1998년에 삼성출판사에서 나왔던 판본 이다. 역시 그때 읽고 난 뒤의 촌평을 뒤에 적어 놓았는데 한줄 요약으로 이 책이 과연 지금도 유효한 것일까 ? 란다. 이탈리어과 교수인신 임명방 교수가 번역한 저본은 1966년 Giluio Dinaudi Edit판이라고 하는데 인간사랑에서 나온 신동준님이 번역한 판본과는 다른 듯 싶다. 실제로도 많은 차이가 보이는데

 

한가지 예를 들자면 3장의 경우 임명방 역에는 

"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단숨에 밀라노를 점령하였다가 또한 순식간에 이를 상실한 것, 이때에 로도비코가 소수의 자기 부하만으로 이를 해치울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즉, 그곳 주민들은 루이12세를 위해 성문을 열었지만 후에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거과 그들이 기대했던 미래의 행복에 대한 꿈이 깨진 것을 알아차려 새로운 군주를 더이상 모시기가 힘들었기에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이다 " 하고 하였는데

 

신동준역은 "1499년 10월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가 루도비코 스포르차공이 다스렸던 밀라노를 일거에 점령했다가 이듬해인 1500년 2월 곧바로 상실한 것도 바로 이때문인다. 최초 밀라노 탈환 때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자신의 군대만으로도 능히 루이 12세를 몰아낼 수 있었다. 루이 12세에게 성문을 열어 준 백성은 기대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하자 이내 새로운 군주의 억압적인 통치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기 빼문이다." 인 것으로 보아 이 둘은 필사본에 대한 차이가 있는 듯 싶다.

 

연도를 명확하게 기술한 것은 후대에 시대를 쉽게 파악하기 위해 필사자가 임의로 넣은 것이 아닐까 싶은데 원서 대조를 해보지 않는 이상 잘 모르겠고 어쨋든 마키아벨리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 생각이 들어 두 책을 비교하면서 굳이 읽을 필요가 없는 것 같아 이 부분은 넘어가고 위에서 말한대로 이 책이 현재에도 유효한지에 대해서만 몇가지 보기로 해야 될 것 같다.

 

군주론에서 가장 눈여겨 볼 대목은 바로 18장인 '군주는 어떻게 약속을 지켜야 하는가'이다.

 

 

" 현명한 군주는 신의를 지키는 데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약속한 이유가 소멸됐을 때 약속을 지킬 수가 없거니와 지켜서도 안 된다." 라고 하였는데 이것이야 말로 인간 역사의 과거와 미래에 이르기까지 변치 않고 이어나갈 위대한 지도자의 덕목이 아닐까 한다. 지금의 대통령을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지 않은가. 지도자는 그래야 한다..... 그러면 그 지도자 안의 국민은 어떻게 해야 할까? 저 말을 지도자의 입에서 직접 듣는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 과연 그 당시 바티칸이 금서로 정한 이유가 바로 저것이 아닐까 싶다. 지도자는 기본적으로 국민을 믿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다. 그래야만 지도자로 오래 살아남아 길이 길이 벽에 똥칠할때 까지 후대에 부귀영화를 누리며 혼자서 잘 처먹고 잘살지 않는가 말이다. 군주론은 그리하여 국민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이며 지도자가 어떻게 나올지 대응할 수 있는 교과서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러한고로 이책은 여전히 유효하고 대중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고약하고 쓰라린 고전인 것이다.

 

당시 마키아벨리와 같은 지도층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일반 국민들이 시선은 지금 현재의 지도층과 놀랍도록 일치한다는데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물론 나름 뉴스를 통해서 나름 적응되었다 하더라고 본인들.. 스스로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직접 들어보면 충격은 상당하다.

 

마키아벨리가 프란체스코 베토리라는 로마 교황청 주재 피렌체 대사에게 보낸 편지 구절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 저는 이처럼 벼룩처럼 하찮은 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머릿속에 핀 곰팡이와 가슴속에 악의로 가득찬 운명에 대한 저의 서운한 감정을 털어내곤 합니다. 운명이 저를 이처럼 형편없이 취급한 것을 두고 과연 부끄럽게 여기는 지 여부를 알 수 있다면 저는 이런 식으로 거칠게 짓밟히는 것도 감수할 것입니다. "

 

이쯤에서 떠오르는 것이 바로 지난 4월 세월호 실종자 가족에게 정몽준의 아들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국민정서 자체가 굉장히 미개하다 라고 촌평을 남긴 만 18세의 재수생은 차디찬 물속에서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아이들은 자신과는 다른 별세계에 사는 하등한, 벼룩같이 하찮은 자들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처럼 말이다. 그리고는 군주에게 부름을 받지 못하여, 정확하게 말하자면 본인이 그렇게도 바라던 공화정이 도래하였음에도 등용하지 못하여 충격을 받아 갑자기 죽은 것은 마키아벨리가 그렇게 모시고 싶어 했던 그 군주가 그를 벼룩처럼 하찮은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는 그리 말할 것이다. 그리 좁게 보지 말고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말 하고 싶었던 넓은 세계를 보고 배우고 실행하라고.... 냉철한 눈으로 군주론의 리더십을 배우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감히 그렇게 말하고 싶다. 이런 것을 배우고 실행하려는 지도자는 국민을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생각할 수 없다.

 

"현명한 군주라면 백성의 선택이 아닌 자신의 선택을 기반으로 권력의 기반을 구축할 것이다." 란 말로 성공의 비결을 뽑는 걸 보면 지금 이 나라에서 큰소리 떵떵치며 살아가는 분들이 이 책을 참 열심히도 읽고 잘 들 실천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존경스러운 마음이 하늘에서 우러나올 지경이다.

 

군주론은 사람의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현실적인 감각이 빛나는 책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대로 행하려고 하는 자는 성공할 것을 알기에 우리는 이를 막기 위해, 우리의 앞날을 망치지 않도록 힘써 이 책을 반드시 꼭꼭 씹어 먹어야 할 것 같다. 고맙다 마키아벨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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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다시 군주론을 읽어본다.

처음 군주론을 읽었을때가 한 육년은 넘었을 것이다. 까치글방에서 나온 번역본이 제일 읽을만하다 하기에 집어 들긴 했는데 갑자기 왜 군주론을 돈을 주고 사서 읽을 생각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쓸데없는 물욕이었는지 겹쳐 읽기를 하다 얻어 걸렸는지도 모르겠지만 이번에 다시 읽게 된 신동준역의 것을 비교해 같이 읽어 보려고 하니 어느 책더미에 쌓여 있는지 보일지 않기에 포기...... 거기에 같은 잉글레 제본의 최신판을 사용했다고 하니 큰 의미는 없을 듯 싶다. 어쨌든 서가 어딘가에 있겠지 싶어 당시 읽고 난 뒤 간단한 감상을 올려 놓을 것을 찾아 읽어보니 상당히 부정적인 문장이 많은 걸로 보아 세상에 참 불만이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재작년엔가 올재 클래식스에 나왔기에 재독을 하였는게 올재 특성상 재능 기부를 받아 절판된 책을 주로 내기 때문에 찾아 보았더니 역시1990년과 1998년에 삼성출판사에서 나왔던 판본 이다. 역시 그때 읽고 난 뒤의 촌평을 뒤에 적어 놓았는데 한줄 요약으로 이 책이 과연 지금도 유효한 것일까 ? 란다. 이탈리어과 교수인신 임명방 교수가 번역한 저본은 1966년 Giluio Dinaudi Edit판이라고 하는데 인간사랑에서 나온 신동준님이 번역한 판본과는 다른 듯 싶다. 실제로도 많은 차이가 보이는데

 

한가지 예를 들자면 3장의 경우 임명방 역에는

"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단숨에 밀라노를 점령하였다가 또한 순식간에 이를 상실한 것, 이때에 로도비코가 소수의 자기 부하만으로 이를 해치울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즉, 그곳 주민들은 루이12세를 위해 성문을 열었지만 후에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거과 그들이 기대했던 미래의 행복에 대한 꿈이 깨진 것을 알아차려 새로운 군주를 더이상 모시기가 힘들었기에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이다 " 하고 하였는데

 

신동준역은 "1499년 10월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가 루도비코 스포르차공이 다스렸던 밀라노를 일거에 점령했다가 이듬해인 1500년 2월 곧바로 상실한 것도 바로 이때문인다. 최초 밀라노 탈환 때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자신의 군대만으로도 능히 루이 12세를 몰아낼 수 있었다. 루이 12세에게 성문을 열어 준 백성은 기대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하자 이내 새로운 군주의 억압적인 통치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기 빼문이다." 인 것으로 보아 이 둘은 필사본에 대한 차이가 있는 듯 싶다.

 

연도를 명확하게 기술한 것은 후대에 시대를 쉽게 파악하기 위해 필사자가 임의로 넣은 것이 아닐까 싶은데 원서 대조를 해보지 않는 이상 잘 모르겠고 어쨋든 마키아벨리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 생각이 들어 두 책을 비교하면서 굳이 읽을 필요가 없는 것 같아 이 부분은 넘어가고 위에서 말한대로 이 책이 현재에도 유효한지에 대해서만 몇가지 보기로 해야 될 것 같다.

 

군주론에서 가장 눈여겨 볼 대목은 바로 18장인 '군주는 어떻게 약속을 지켜야 하는가'이다.

 

" 현명한 군주는 신의를 지키는 데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약속한 이유가 소멸됐을 때 약속을 지킬 수가 없거니와 지켜서도 안 된다." 라고 하였는데 이것이야 말로 인간 역사의 과거와 미래에 이르기까지 변치 않고 이어나갈 위대한 지도자의 덕목이 아닐까 한다. 지금의 대통령을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지 않은가. 지도자는 그래야 한다..... 그러면 그 지도자 안의 국민은 어떻게 해야 할까? 저 말을 지도자의 입에서 직접 듣는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 과연 그 당시 바티칸이 금서로 정한 이유가 바로 저것이 아닐까 싶다. 지도자는 기본적으로 국민을 믿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다. 그래야만 지도자로 오래 살아남아 길이 길이 벽에 똥칠할때 까지 후대에 부귀영화를 누리며 혼자서 잘 처먹고 잘살지 않는가 말이다. 군주론은 그리하여 국민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이며 지도자가 어떻게 나올지 대응할 수 있는 교과서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러한고로 이책은 여전히 유효하고 대중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고약하고 쓰라린 고전인 것이다.

 

당시 마키아벨리와 같은 지도층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일반 국민들이 시선은 지금 현재의 지도층과 놀랍도록 일치한다는데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물론 나름 뉴스를 통해서 나름 적응되었다 하더라고 본인들.. 스스로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직접 들어보면 충격은 상당하다.

 

 

마키아벨리가 프란체스코 베토리라는 로마 교황청 주재 피렌체 대사에게 보낸 편지 구절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 저는 이처럼 벼룩처럼 하찮은 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머릿속에 핀 곰팡이와 가슴속에 악의로 가득찬 운명에 대한 저의 서운한 감정을 털어내곤 합니다. 운명이 저를 이처럼 형편없이 취급한 것을 두고 과연 부끄럽게 여기는 지 여부를 알 수 있다면 저는 이런 식으로 거칠게 짓밟히는 것도 감수할 것입니다. "

 

 

이쯤에서 떠오르는 것이 바로 지난 4월 세월호 실종자 가족에게 정몽준의 아들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국민정서 자체가 굉장히 미개하다 라고 촌평을 남긴 만 18세의 재수생은 차디찬 물속에서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아이들은 자신과는 다른 별세계에 사는 하등한, 벼룩같이 하찮은 자들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처럼 말이다. 그리고는 군주에게 부름을 받지 못하여, 정확하게 말하자면 본인이 그렇게도 바라던 공화정이 도래하였음에도 등용하지 못하여 충격을 받아 갑자기 죽은 것은 마키아벨리가 그렇게 모시고 싶어 했던 그 군주가 그를 벼룩처럼 하찮은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는 그리 말할 것이다. 그리 좁게 보지 말고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말 하고 싶었던 넓은 세계를 보고 배우고 실행하라고.... 냉철한 눈으로 군주론의 리더십을 배우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감히 그렇게 말하고 싶다. 이런 것을 배우고 실행하려는 지도자는 국민을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생각할 수 없다.

 

 

"현명한 군주라면 백성의 선택이 아닌 자신의 선택을 기반으로 권력의 기반을 구축할 것이다." 란 말로 성공의 비결을 뽑는 걸 보면 지금 이 나라에서 큰소리 떵떵치며 살아가는 분들이 이 책을 참 열심히도 읽고 잘 들 실천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존경스러운 마음이 하늘에서 우러나올 지경이다.

 

 

군주론은 사람의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현실적인 감각이 빛나는 책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대로 행하려고 하는 자는 성공할 것을 알기에 우리는 이를 막기 위해, 우리의 앞날을 망치지 않도록 힘써 이 책을 반드시 꼭꼭 씹어 먹어야 할 것 같다. 고맙다 마키아벨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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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부 러시아 고전산책 6
막심 고리키 지음, 이수경 옮김 / 작가정신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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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초반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는 사람의 머리를 하고 생각을 하며 산다고 하는 이들이 한번쯤은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읽었다고 할만큼 하나의 열풍과도 같은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학원가 근처에서 호프집 알바를 하던 저는 서울대 법대를 다니고 있던 사장의 동생이 -그때만 해도 똑똑한 동생을 위해 형이 공부를 접고 장사로 뒷바라지 하는 이들이 종종 있기는 했습니다만 - [어머니]를 읽다 공부는 하지 않고 불온한 책을 읽는다며 불꽃 싸다구를 형에게 맞는 광경을 보고는 저 책이 도대체 뭐길래 저 형이(당시 저는 스무살이었고 사장의 동생은 스물 셋이었습니다.) 사장님한테 맞으면서까지 읽지? 하고 몹시도 궁금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와 제법 친했던 그 형은 몹시 착한 동생이라 사장에게는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고 처연한 얼굴로 물끄러미 자신의 형을 쳐다보다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법대를 다니던 형은 사장에게 빼앗겨 버린 줄 알았던 그 책을 저에게 읽어보라며 선물로 주고는 군대를 가버렸습니다. 그 이후로 알바를 그만 두면서 그 형은 다시는 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땅끝마을에서 천재로 소문이 났다던 그 형은 아마 변호사가 되어 선량한 사람들 곁에서 열심히 삶을 이어나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해 해봅니다. -너무 긍정적인가요 ^^ -  여튼 저는 막심 고리키를 1992년 8월 무더운 여름 그렇게 어머니란 책으로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천둥벌거숭이와 같이 아무 생각없이 날뛰던 저에게는 엄청난 책이었지요.이사를 몇번 다니면서 몇 권의 책은 없어지거나 정리되거나 하는 통에 사라지긴 했지만 아직도 그때 읽었던 그 서늘하면서도 주먹을 절로 쥐여지는 그 느낌은 잊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막심 고리키의 초기 단편집인 [마부]는 <이제르길 노파>라는 작품을 제외한 나머지 아홉편이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되는 것이라 하는데요. 저는 예전 혜원출판사에서 나온 고리키의 단편집을 읽어 본 적은 있었지만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제는 책 정리를 하다가 간간히 모아 놓고 있는 소담출판사의 월드북 시리즈중 막심 고리키의  [소녀와 죽음] 이라는 단편집에 <노파 이제르길>이 있다는 사실을 우연치 않게 알게 되어 책정리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슬슬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막심 고리키의 초기 낭만주의 성향의 작품은 [어머니]라는 위대한 작품에 가려 거의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리얼리즘 성향이 강한 것들이 힘을 쓰지 못하는 근래에는 오히려 인간 바탕에 깔린 그 본연의 것에 대한 갈망이 커지면서 이렇게 고리키의 초기 작품이 번역되어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습니다만 저는 <마부>를 읽고 나서 역자 후기를 보다 좀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 결국 두 사람은 팔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 종교적으로 참회하고 구원을 받는다. 종교적으로 무관한 듯 알려져 있던 고리키의 종교적 성향이 나타난 작품으로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문제를 보여준다. p.233 "

 

막심 고리키는 역자가 고리키 연보에서도 밝혀 있듯 다윈 이론의 변종인 라마르크의 진화론에 경도돼 있던 볼셰비키 지식인 분파였던 건신주의였습니다. 물론 시기적으로는 이 단편집에 수록된 글을 쓴 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저는 [마부]라는 단편소설을 읽으면서 막심 고리키의 건신사상이 이때부터 표면화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참고로 건신주의자는 존 그레이의 불멸화 위원회란 책에서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데요. - 마르크스주의를 선형적인 진보사관으로 해석한 소련의 혁명가들은 다른 맥락에서 죽음을 연구했다. 그들은 과학의 힘으로 죽음을 추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볼셰비키의 지도자들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은 나머지, 인간이 신격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건신주의라고 부른다. 소설가 막심 고리키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인간을 기계라고 상상하는 편을 좋아한다. 소위 ‘죽은 물질’들을 정신의 에너지로 스스로 바꾸어내고, 먼 미래에는 세계 전체를 순수하게 정신적인 어떤 것으로 바꾸어낼 기계로 말이다.” 그들에게 혁명이란 사회구조의 급진적 변혁일 뿐 아니라 새로운 인간의 탄생이기도 했다.) 

 

 단편소설인 <마부>나 <환영>, <종>의 주인공은 역자의 말대로 돈을 삶의 최고의 가치라고 여기며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살인과 탐욕스러움, 그리고 착취를 합니다. <마부> 에서의 주인공인 파벨 니콜라예비치가 노파를 죽이고 돈을 간단하게 취한 다음 팔년을 사람들에게 존경 받으면서 시장으로 선출되었을때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역겨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당황하게 만들어 괴롭히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에 휩싸이게 되면서 결국 자신의 정체에 대해 스스로 폭로합니다. 

  " 만일 그가 타협하듯 조용히 참회를 했다면 그들은 그의 말을 중지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는 사람들을 모욕하고 조롱했다. 그의 눈은 광기도 아닌 내적인 힘으로 불타고 있었다. 강한 자들은 언제나 약한 자들의 증오을 불러 일으키는 법이다. p.37 "  저는 이 문장이 고리키를 대변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마부의 말에 빗대어 기독교를 농락하기까지 합니다. " 살인했다고요? 괜찮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약탈자는 기억하세요? 그는 단지 여덟 단어로 신께 기도 하고 사면을 받았죠. 나리는 깊게 생각했습니다. 이제 가서 고통 받으세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잊어버려요. p.38 " 

   그리고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는 현실 속으로 돌아왔으며 꿈 속에서 집안일과 아이들에 대한 끊임없는 걱정 때문에 신경질적이었던 여인에서 멋진 자선가로 변신했던 아내는 피곤에 지쳐 윗 입술을 신경질적으로 떨며 그의 어깨를 흔들며 내 자리에서 일어나 달라 소리 칩니다. 방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고 말입니다.

 

 이 작품이 어떻게 종교적으로 참회하고 구원을 받는지 저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요구하는 -과연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각성을 요구하는 개혁자의 성향이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이런 인간에 대한 희망이 나중에 가서는 변질된 초인에 대한 열망으로 세속화 된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런 기조는 내내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 각 작품 속에서 슬쩍 슬쩍 내비치는 느낌 입니다.

<환영>도 마찬가지 입니다. 위대한 예수의 탄생일에 두 딸이 늦잠을 잔 것에 것에 대해 신을 믿지 않는다 투덜대는 주인공은 그것과 상관없이 탐욕스러운 백만장자 입니다. 그는 평생 양 어깨에 커다란 짐을 지니고 있었던 듯 인간-지친 영혼을 만나 당신의 돈으로 학교, 영혼을 위한 집, 또 도시에 필요한 것을 지으라는 권유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유혹에 빠져 구원을 받고자 하는데 글쎄요 지금 기준...도덕적인 과점에서 보자면 기성종교의 속물근성(돈으로 천국으로 가는 승차권을 산다고나 할까요?)이 그대로 드러나 보입니다. 하지만 그 환영에서 깨어난 주인공은 다시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열린 결말이긴 하지만 제가 보는 시선에서 주인공은 현재의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련한 중생이며 막심 고리키는 인간의지의 나약함과 인간의 고뇌에 대해 그리 하지 말라는 교훈과 그 가치, 어떻게 살야야 하는지에 대해 독자 스스로 고민 하라 주문을 할 뿐 주인공이 구원을 받았다라고 느끼기에는 어려울 듯 싶습니다.

 

 <로맨스> 와 <아름다움>은 가질 수 조차 없는 사랑에 관한 슬픈 소설이기도 합니다. 외로운 사람은 조그만 관심에도 쉽게 사랑을 느끼며 그것이 전부인양 갈망하게 됩니다. 그의 모든 것이 되어 버리지요. 그 외 <푸른 눈의 여인>이나 <아쿨리나 할머니>는 자식과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통해 역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마부나 환영 등을 통해 대비하여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고리키의 소설은 여성은 자기 희생과 헌신을 통하여 남을 구원하는 세속적이지만 종교적인 구도자의 면을 보여주는 반면에 남성은 권위적이고 이기적이며 탐욕스런 인물상으로 대부분 그려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르길 노파>는 일종의 환상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라라의 이야기는 신화속 인물의 원형과 닮아 있습니다. 오만한 신 즉, 자기 자신을 최고라 여기며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 그가 짊어질 고독이라는 운명 앞에 죽음도 그를 외면한 사람들 사이에 그가 있을 곳은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이제르길 스스로의 이야기는 마치 오디세이와 같이 험난하지만 주체적이고 자유스러운 삶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단코의 불타는 심장에 나온 푸른 불빛에 대한 이야기는 옛 이야기를 차용한 듯 (일종의 건국신화에 가깝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만 ^^) 위대한 영웅이 짊어져야 할 고난과 죽음으로 사람들을 구원하는 예수의 이야기와도 많이 닮아 있습니다.  다만 물 위를 걷고 병든 자를 고치는 날때부터 신이 아닌 평범했던 아름다운 젊은이 중 하나였다는 것이 그 차이겠지요. 

 

" 생각만으로 길 위의 돌을 치울 수는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왜 우리는 생각과 슬픔에 빠져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까 ? 일어나십시오. 숲을 헤치고 나아갑시다. 그 끝이 있을 겁니다. 이 세상 모든 것에는 끝이 있습니다! 감시다! 자! 헤이!  p. 221"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도 큰 울림이 되는 말입니다. 언제나 그래왔듯 세상은 행동하는 평범한 사람에 의해 위대하게 바뀌며 성숙해져 왔습니다.  뒷방에 앉아 서로를 물고 뜯으며 떠드는 이야기는 설령 그것이 옳던 그러지 않건 간에 아무 의미도 없으며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누군가 길거리에 똥을 쌌다면 누군가는 꼭 그것을 치워야 합니다. 왜 하필 그게 나인지 나의 시대인지 원망을 할 지언정 싼 똥은 치우고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똥 싼 놈만 욕하고 생각하면 그 똥은 세월에 의해 분해가 될때까지 그대로 그 더러운 냄새를 풍기면서 오래도록 그 자리에 남아 있겠죠.  -너무 똥 똥 해서 죄송합니다  ^^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뜻하지 않게 울컥했습니다. 막심 고리키는 역자가 말한대로 인간에 대한 믿음과 그 열정의 위대함을 일깨우며 멋진 삶을 살아가기를 기원하는 간절한 염원이 드러나 있었던 것입니다. 

글자가 써 있다고 다 글이 아니듯 생각없이 읽는 글은 글자만 쫒고 이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누군가의 말을 반추하며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어 봅니다. 좋은 책은 어느시대를 막론하고 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이런 순문학이던지 SF 소설이던지 로맨스 소설이던지 어떻던지간에 말입니다.   

 

ps. 원서를 읽는 재주가 없어서 번역에 대해서는 뭐라 말하기가 조심스럽지만 개인적으로 몇가지 아쉬웠던 것은 비교/대조의 의미를 나타날때 주로 쓰이는 보조사인 은,는 이 주격조사인 이,가 와 너무 혼용되어 쓰이거나 주격조사인 자리에 보조사가 쓰여져 주체의 의미가 불분명한 문장들이 여러 곳에서 나타났는데요 이것이 번역상 역자의 버릇인지 아니면 막심 고리키 특유의 문체인지 아니면 문법상 영어식 To부정사 처럼의 해석인지 모르겠으나 이런 부분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우리말로 정확하게 주체의 촛점을 잡아 다듬어 주었으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어느 페이지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문장이 복문인 경우 좀 매끄럽지 못했던 것 같아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편집자나 교정자의 실수이기에 아래에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만. 독자들은 이런 사소한 것에도 살짝 실망을 한다는 점 잊지 말아 주세요 ^^

 

p63. 작은 강으로 둘러싸인 산 아랫부분으로 내려오며 자리한 이 도시에는 교회 종탑에서 내려다 보면 작은 오두막집까지 (보일) 정도로 조그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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