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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부 ㅣ 러시아 고전산책 6
막심 고리키 지음, 이수경 옮김 / 작가정신 / 2014년 1월
평점 :
1990년대 초반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는 사람의 머리를 하고 생각을 하며 산다고 하는 이들이 한번쯤은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읽었다고 할만큼 하나의 열풍과도 같은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학원가 근처에서 호프집 알바를 하던 저는 서울대 법대를 다니고 있던 사장의 동생이 -그때만 해도 똑똑한 동생을 위해 형이 공부를 접고 장사로 뒷바라지 하는 이들이 종종 있기는 했습니다만 - [어머니]를 읽다 공부는 하지 않고 불온한 책을 읽는다며 불꽃 싸다구를 형에게 맞는 광경을 보고는 저 책이 도대체 뭐길래 저 형이(당시 저는 스무살이었고 사장의 동생은 스물 셋이었습니다.) 사장님한테 맞으면서까지 읽지? 하고 몹시도 궁금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와 제법 친했던 그 형은 몹시 착한 동생이라 사장에게는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고 처연한 얼굴로 물끄러미 자신의 형을 쳐다보다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법대를 다니던 형은 사장에게 빼앗겨 버린 줄 알았던 그 책을 저에게 읽어보라며 선물로 주고는 군대를 가버렸습니다. 그 이후로 알바를 그만 두면서 그 형은 다시는 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땅끝마을에서 천재로 소문이 났다던 그 형은 아마 변호사가 되어 선량한 사람들 곁에서 열심히 삶을 이어나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해 해봅니다. -너무 긍정적인가요 ^^ - 여튼 저는 막심 고리키를 1992년 8월 무더운 여름 그렇게 어머니란 책으로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천둥벌거숭이와 같이 아무 생각없이 날뛰던 저에게는 엄청난 책이었지요.이사를 몇번 다니면서 몇 권의 책은 없어지거나 정리되거나 하는 통에 사라지긴 했지만 아직도 그때 읽었던 그 서늘하면서도 주먹을 절로 쥐여지는 그 느낌은 잊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막심 고리키의 초기 단편집인 [마부]는 <이제르길 노파>라는 작품을 제외한 나머지 아홉편이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되는 것이라 하는데요. 저는 예전 혜원출판사에서 나온 고리키의 단편집을 읽어 본 적은 있었지만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제는 책 정리를 하다가 간간히 모아 놓고 있는 소담출판사의 월드북 시리즈중 막심 고리키의 [소녀와 죽음] 이라는 단편집에 <노파 이제르길>이 있다는 사실을 우연치 않게 알게 되어 책정리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슬슬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막심 고리키의 초기 낭만주의 성향의 작품은 [어머니]라는 위대한 작품에 가려 거의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리얼리즘 성향이 강한 것들이 힘을 쓰지 못하는 근래에는 오히려 인간 바탕에 깔린 그 본연의 것에 대한 갈망이 커지면서 이렇게 고리키의 초기 작품이 번역되어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습니다만 저는 <마부>를 읽고 나서 역자 후기를 보다 좀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 결국 두 사람은 팔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 종교적으로 참회하고 구원을 받는다. 종교적으로 무관한 듯 알려져 있던 고리키의 종교적 성향이 나타난 작품으로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문제를 보여준다. p.233 "
막심 고리키는 역자가 고리키 연보에서도 밝혀 있듯 다윈 이론의 변종인 라마르크의 진화론에 경도돼 있던 볼셰비키 지식인 분파였던 건신주의자였습니다. 물론 시기적으로는 이 단편집에 수록된 글을 쓴 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저는 [마부]라는 단편소설을 읽으면서 막심 고리키의 건신사상이 이때부터 표면화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참고로 건신주의자는 존 그레이의 불멸화 위원회란 책에서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데요. - 마르크스주의를 선형적인 진보사관으로 해석한 소련의 혁명가들은 다른 맥락에서 죽음을 연구했다. 그들은 과학의 힘으로 죽음을 추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볼셰비키의 지도자들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은 나머지, 인간이 신격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건신주의라고 부른다. 소설가 막심 고리키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인간을 기계라고 상상하는 편을 좋아한다. 소위 ‘죽은 물질’들을 정신의 에너지로 스스로 바꾸어내고, 먼 미래에는 세계 전체를 순수하게 정신적인 어떤 것으로 바꾸어낼 기계로 말이다.” 그들에게 혁명이란 사회구조의 급진적 변혁일 뿐 아니라 새로운 인간의 탄생이기도 했다.)
단편소설인 <마부>나 <환영>, <종>의 주인공은 역자의 말대로 돈을 삶의 최고의 가치라고 여기며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살인과 탐욕스러움, 그리고 착취를 합니다. <마부> 에서의 주인공인 파벨 니콜라예비치가 노파를 죽이고 돈을 간단하게 취한 다음 팔년을 사람들에게 존경 받으면서 시장으로 선출되었을때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역겨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당황하게 만들어 괴롭히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에 휩싸이게 되면서 결국 자신의 정체에 대해 스스로 폭로합니다.
" 만일 그가 타협하듯 조용히 참회를 했다면 그들은 그의 말을 중지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는 사람들을 모욕하고 조롱했다. 그의 눈은 광기도 아닌 내적인 힘으로 불타고 있었다. 강한 자들은 언제나 약한 자들의 증오을 불러 일으키는 법이다. p.37 " 저는 이 문장이 고리키를 대변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마부의 말에 빗대어 기독교를 농락하기까지 합니다. " 살인했다고요? 괜찮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약탈자는 기억하세요? 그는 단지 여덟 단어로 신께 기도 하고 사면을 받았죠. 나리는 깊게 생각했습니다. 이제 가서 고통 받으세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잊어버려요. p.38 "
그리고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는 현실 속으로 돌아왔으며 꿈 속에서 집안일과 아이들에 대한 끊임없는 걱정 때문에 신경질적이었던 여인에서 멋진 자선가로 변신했던 아내는 피곤에 지쳐 윗 입술을 신경질적으로 떨며 그의 어깨를 흔들며 내 자리에서 일어나 달라 소리 칩니다. 방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고 말입니다.
이 작품이 어떻게 종교적으로 참회하고 구원을 받는지 저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요구하는 -과연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각성을 요구하는 개혁자의 성향이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이런 인간에 대한 희망이 나중에 가서는 변질된 초인에 대한 열망으로 세속화 된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런 기조는 내내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 각 작품 속에서 슬쩍 슬쩍 내비치는 느낌 입니다.
<환영>도 마찬가지 입니다. 위대한 예수의 탄생일에 두 딸이 늦잠을 잔 것에 것에 대해 신을 믿지 않는다 투덜대는 주인공은 그것과 상관없이 탐욕스러운 백만장자 입니다. 그는 평생 양 어깨에 커다란 짐을 지니고 있었던 듯 인간-지친 영혼을 만나 당신의 돈으로 학교, 영혼을 위한 집, 또 도시에 필요한 것을 지으라는 권유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유혹에 빠져 구원을 받고자 하는데 글쎄요 지금 기준...도덕적인 과점에서 보자면 기성종교의 속물근성(돈으로 천국으로 가는 승차권을 산다고나 할까요?)이 그대로 드러나 보입니다. 하지만 그 환영에서 깨어난 주인공은 다시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열린 결말이긴 하지만 제가 보는 시선에서 주인공은 현재의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련한 중생이며 막심 고리키는 인간의지의 나약함과 인간의 고뇌에 대해 그리 하지 말라는 교훈과 그 가치, 어떻게 살야야 하는지에 대해 독자 스스로 고민 하라 주문을 할 뿐 주인공이 구원을 받았다라고 느끼기에는 어려울 듯 싶습니다.
<로맨스> 와 <아름다움>은 가질 수 조차 없는 사랑에 관한 슬픈 소설이기도 합니다. 외로운 사람은 조그만 관심에도 쉽게 사랑을 느끼며 그것이 전부인양 갈망하게 됩니다. 그의 모든 것이 되어 버리지요. 그 외 <푸른 눈의 여인>이나 <아쿨리나 할머니>는 자식과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통해 역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마부나 환영 등을 통해 대비하여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고리키의 소설은 여성은 자기 희생과 헌신을 통하여 남을 구원하는 세속적이지만 종교적인 구도자의 면을 보여주는 반면에 남성은 권위적이고 이기적이며 탐욕스런 인물상으로 대부분 그려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르길 노파>는 일종의 환상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라라의 이야기는 신화속 인물의 원형과 닮아 있습니다. 오만한 신 즉, 자기 자신을 최고라 여기며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 그가 짊어질 고독이라는 운명 앞에 죽음도 그를 외면한 사람들 사이에 그가 있을 곳은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이제르길 스스로의 이야기는 마치 오디세이와 같이 험난하지만 주체적이고 자유스러운 삶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단코의 불타는 심장에 나온 푸른 불빛에 대한 이야기는 옛 이야기를 차용한 듯 (일종의 건국신화에 가깝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만 ^^) 위대한 영웅이 짊어져야 할 고난과 죽음으로 사람들을 구원하는 예수의 이야기와도 많이 닮아 있습니다. 다만 물 위를 걷고 병든 자를 고치는 날때부터 신이 아닌 평범했던 아름다운 젊은이 중 하나였다는 것이 그 차이겠지요.
" 생각만으로 길 위의 돌을 치울 수는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왜 우리는 생각과 슬픔에 빠져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까 ? 일어나십시오. 숲을 헤치고 나아갑시다. 그 끝이 있을 겁니다. 이 세상 모든 것에는 끝이 있습니다! 감시다! 자! 헤이! p. 221"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도 큰 울림이 되는 말입니다. 언제나 그래왔듯 세상은 행동하는 평범한 사람에 의해 위대하게 바뀌며 성숙해져 왔습니다. 뒷방에 앉아 서로를 물고 뜯으며 떠드는 이야기는 설령 그것이 옳던 그러지 않건 간에 아무 의미도 없으며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누군가 길거리에 똥을 쌌다면 누군가는 꼭 그것을 치워야 합니다. 왜 하필 그게 나인지 나의 시대인지 원망을 할 지언정 싼 똥은 치우고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똥 싼 놈만 욕하고 생각하면 그 똥은 세월에 의해 분해가 될때까지 그대로 그 더러운 냄새를 풍기면서 오래도록 그 자리에 남아 있겠죠. -너무 똥 똥 해서 죄송합니다 ^^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뜻하지 않게 울컥했습니다. 막심 고리키는 역자가 말한대로 인간에 대한 믿음과 그 열정의 위대함을 일깨우며 멋진 삶을 살아가기를 기원하는 간절한 염원이 드러나 있었던 것입니다.
글자가 써 있다고 다 글이 아니듯 생각없이 읽는 글은 글자만 쫒고 이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누군가의 말을 반추하며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어 봅니다. 좋은 책은 어느시대를 막론하고 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이런 순문학이던지 SF 소설이던지 로맨스 소설이던지 어떻던지간에 말입니다.
ps. 원서를 읽는 재주가 없어서 번역에 대해서는 뭐라 말하기가 조심스럽지만 개인적으로 몇가지 아쉬웠던 것은 비교/대조의 의미를 나타날때 주로 쓰이는 보조사인 은,는 이 주격조사인 이,가 와 너무 혼용되어 쓰이거나 주격조사인 자리에 보조사가 쓰여져 주체의 의미가 불분명한 문장들이 여러 곳에서 나타났는데요 이것이 번역상 역자의 버릇인지 아니면 막심 고리키 특유의 문체인지 아니면 문법상 영어식 To부정사 처럼의 해석인지 모르겠으나 이런 부분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우리말로 정확하게 주체의 촛점을 잡아 다듬어 주었으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어느 페이지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문장이 복문인 경우 좀 매끄럽지 못했던 것 같아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편집자나 교정자의 실수이기에 아래에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만. 독자들은 이런 사소한 것에도 살짝 실망을 한다는 점 잊지 말아 주세요 ^^
p63. 작은 강으로 둘러싸인 산 아랫부분으로 내려오며 자리한 이 도시에는 교회 종탑에서 내려다 보면 작은 오두막집까지 (보일) 정도로 조그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