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릿광대의 나비
엔조 도 지음, 김수현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읽어 본 메타소설이다. 저번 주 토요일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는 읽을 책 한 권을 신청하고 버릇처럼 신간란을 뒤척이다 토마스 핀천의 <중력의 무지개>를 보곤 일단 고개를 설레 설레...... 이건 지금 읽을 내 상태가 아닌 게야. 패스하고 페이지 수 작은 책들 위주로 훑었는데 주홍 색의 짧은 양장본이 눈에 걸리기에 한동안 두꺼운 것들만 읽다가 - 근래엔 아이네아스를 무려 일주일 넘게 읽었다. - 좀 가벼운 일본 소설로 눈 호강을 하자 싶었는데 왠걸 읽는 첫 장부터 심상치 않았다. 그러기에 스마트폰으로 간략 검색을 해보았더니 음...... 불온한 냄새의 띠지 와 표제 이미지가 ^^

 

 

도서관 대여의 책은 양장본의 경우 앞 표지를 걷어내어 이렇게 사전 정보 없이 즉흥적으로 건져내면 내가 기대했던 것과 정 반대의 상황과 맞닥뜨리는 경우가 종 종 있다. 근래에 아쿠타가와 상 작품들이 좀 가벼워 진 것 같아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리하여 토마스 핀천식 메타픽션에 (아...... 다행인 것은 소설 자체가 꽤 짧았다는 위안이) 피할 수도 없이 빠져 결국엔 사흘에 걸쳐 세 번을 다시 읽었다. 머 결국은 반납하기 전까지 두 번은 더 읽을 것 같은데 역시 시간을 좀 두고 – 그래 봐야 하루? - 다시 전후 관계를 따져 가며(별로 찾을 것도 없이 인과 관계를 찾기는 어렵지만..) 읽으면 뭔가가 잡히긴 하는 것 같다. 좀 몽롱하지만 재미를 찾아가는 고역의 행로라고나 할까.

 

 

 

확실히 중남미 작가들의 메타포와는 차이가 있는 듯싶다. 이탈로 칼비노나 훌리오 코르타사르 혹은 토마스 핀천의 소설에서 보여준, 소설 형식이 현실을 담은 투명한 '용기'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만든 가 존재의 확장성을 담은 불투명한 대체물은 - 이런 것들은 주요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의 소설에서 대부분 보여주고 있다. - 그 환상성에 있어서 전위적이고 마술적 리얼리즘에 기반을 두었다면 엔조 도는 그런 것과는 사뭇 다른 자유로운 주제와 관계론을 사유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소설에서 재현했다고 믿는 현실이란 언어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았음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며 허구와 현실이 호환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그들과 같다.
 
소설을 쓰는 일과 소설에 관하여 사고하는 일, 소설 텍스트를 만드는 일과 소설 이론을 탐색하는 메타소설의 기본적인 특성을 충실하게 수행해 나가고 있는 [어릿광대의 나비]에 대한 내용을 정리해 보자면 대략 아래와 같이 크게 세 개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로 도모유키 도모유키의 <고양이 아래에서만 읽을 것>에 대한 전체 번역을 한 2장의 나와 4장의 나는 현실 속 에이브럼스씨가 희대의 다언어 작가인 도모유키 도모유키의 글을 찾기 위해 고용한 나의 이야기이고 두 번째인 1장의 나는 <고양이 아래에서만 읽을 것>이라는 도모유키 도모유키의 소설의 내가 본 주인공(?)인 A.A. 에이브럼스에 관한 이야기이며 세 번째는 소설가 자신인 도모유키 도모유키의 나에 관한 이야기를 적은 3장과 5장이다.

 

현실과 소설 속 이야기는 서로 주고 받기도 하고 왜곡하기도 하며 환상 속에서 헤매게도 한다. 가령 소설 속 A.A. 에이브럼스씨는 착상을 포집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는 사업가인 남성으로 분해져 있지만 돈이 될 것을 직감해 도모유키 도모유키를 쫓던 현실의 에이브럼스는 자궁암으로 죽은 여성이며 그 둘의 사실적 관계는 어떤 내용이 진짜였는지에 대해 판단하기가 어렵다. (소설 속의 에이브럼스에 관한 이야기 자체가 현실과 가상이 섞인 환상이니) 그런가 하면 자신이 소설 속에 언급한 또 다른 소설책을 이야기하며 -  그런 연유로, 내가 살던 집에서 구해 낸 내 원고를 공개해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 중략 --- 그렇게 해서 지금 내가 이렇게 듣고 있는 <팔이 셋 달린 사람에게 털어놓는 이야기>가 빛을 보게 되지만 세상에는 팔이 세 개 달린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아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본래 그 이야기는 세 개의 뜨개바늘을 동시에 썼을 경우에 만들 수 있는 모양에 관해 고찰하는 인물의 독백에서 비롯되었으며, 한때 나는 그런 것에 빠져 있었다. ---후략 --- p. 60) 천연덕스럽게 이 책도 출판되었음을 알려주는 등 어느 것이 먼저이고 나중인지 그런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경계의 모호성은 이 소설만이 가지고 있는 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메타픽션에서 결말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플롯 자체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거나 극단적으로 무의식을 따라 일관성 없이 흘러가는 이런 소설의 결말, 이런 소설적 기법에 따른 특성에 대하여 잘 모르거나 자주 접하지 못한 독자는 그래서 뭐야? 라고 허무하게 느껴질 만도 하겠지만 이는 열린 소설로서의 엔딩이 어떤 줄거리의 결말이 아닌 해체에 관한 메타포를 찾아가는 유희적인 차원으로 이해한다면 그 즐거움을 충분히 찾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이런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는 소설 자체를 연구하고 몇 번을 읽어가며 작가가 어떤 의도로 이런 문장을 여기에 써놨는지에 대한 퍼즐을 꿰어 맞추어야 하는 인내심과 지적 호기심이 충만해야 하는 골치 아픈 단계를 밟아야 하니, 그리하여 후에 어렴풋이나마 이해를 하고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작품을 이해하면 그것이 내것이 되어 그 즐거움이 배가 될 수 있으리라 싶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던 간에 나는 이 소설을 이렇게 이해한다. 어릿광대가 의미하는 것은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소설이고 - 어릿광대는 각양각색의 띠와 모자를 쓰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역할이 아니던가 - 나비는 착상이며 발상이다. 그리고 소설가는 나비를 잡기 위해 애쓰는 은색 포충망이다. 나비는 자유롭다. 에이브럼스 씨는 나비를 잡은 적이 없다. 멋대로 나비를 따라왔을 뿐이지. - 소설가는 그런 직업인가 봅니다. - 도모유키 도모유키는 그 무한한 나비이지 않았을까? 잡았다고 믿었던.

    아를레키누스 아를레키누스.

 

 

“ 이것도 인연일 텐데 둘 중 하나를 드리지요. 어릿광대 나비건 어릿광대를 잡는 망이건 둘 중 하나를. “
에이브럼스 씨는 착상을 잡는 망을 선택한다. 그런 그에게 노인은 이렇게 말을 한다.
“ 그런가요. 너무 남용하지 마시지요. 당신 몸도 망칠 테니까. ”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풀려나 다음에 깃들 사람을 찾는 여행으로 돌아간다. 나는 남자의 머릿속에 알을 하나 낳았다. 알에서 부화한 그녀는 말을 먹고 자란다. 이렇게 나는 사고를 이어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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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동안밖에 읽을 수 없는 책이 있으면 좋겠다. 그런 착상이 남자의 머릿속에서 천천히 형태를 취하기 시작한다. 지금은 더 지켜볼 여유가 없지만 결과는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자손이 하는 날갯짓으로. 

 수많은 나비 중 대체 무엇이 그녀인지는 날개 모양으로 분명히 알 수 있다. p. 97

 

 

덧글. 메타소설의 이론적 견해는 문예출판 한용환 선생님의 소설학 사전에서 일부 인용하였습니다.

 

덧덧글. 이 책의 또다른 중편소설인 [마쓰노에의 기록]은 주절 주절 쓰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냥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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