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슬픔에 대처하는 방법이 제각각 다르듯, 동물들도 슬픔을 겪고 저마다의 방법으로 이겨낸다.

사진 한 장이 있다. 장례식 중에 찍힌 이 사진한가운데에는 국기에 휘감긴 관이 놓여 있다. 하지만 우리 눈길을 끄는 것은 관 아래에 누워 있는 검은 개다. 이 개는 이제는 세상에 없는 친구의 관 아래에 누워있는 것이다. 뒷모습이기에 우리는 이 개가 어떤 표정을짓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개가관과 죽음 사이의 연결관계를 이해하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 관앞에서 눈물 흘리는 개의 정면 사진을 찍어 올렸더라도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이 개는 오랫동안 함께해온 이의죽음을 슬퍼하는 걸까? (종종 사람들은 아무리 오랜 세월함께했더라도 작별을 슬퍼하지 않을 수 있다) 개를 비롯한 동물들은 인간과 같은 원리에 따라 눈물을 흘릴까? (너무나도 간단하게 의인화의 굴레를 씌우는 건 아닐까?)그렇다면 슬픔의 언어 속에서는 모든 종이 장벽 없이소통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같은 인간조차 슬픔을 각기다르게 통과한다. 눈물을 흘릴 수도, 말을 잃을 수도 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할 수도, 폭식을 거듭할 수도 있다. 넋을놓을 수도, 묵묵히 일상을 살아갈 수도 있다. 우리 각자가슬픔을 짓는 방식이 다르다면 동물들 역시 그럴 것이다. 다만 동물들이 어떻게 슬퍼하든,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이해하든(이해할 수 있다면),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슬픔은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사랑에서 온다. 슬픔이란 실로 사랑하기에 겪는 대가다. 동물들은 슬픔을 느낀다. 사랑 역시도
《헤아려 본 슬픔> 마지막 부분에서는 굉장히 흥미로운 말도 한다. "격정적 슬픔은 우리를 죽은 이와 연결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단절시킨다." 방을 제단으로 바꾸고, 기일을 기리고,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을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간직하려 갖은 애를 쓸수록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우리가 잃어버린 사람의 실체와 더욱 멀어진다. 이와 비슷하게 슬픔을 격정적으로 토로하는 회고록은 오히려 고인이나 회고록을 쓴 작가 모두와 독자 사이의 거리를 벌린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극도의 날것이나 의식의 흐름에 따라 갈팡질팡하는 목소리에 끌리지 않는 이유일 것 같다. 상실과 슬픔을 다루는 회고록은 그러한 언어로 전개되기 십상이지만 말이다. 2011년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프랜시스 스토너 손더스Fran-ces Stonor Saunders는 이 같은 회고록 작가들을 고대 그리스 연극의 코러스에 비유하고,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기 위해 고용된 사람들 같다며 "옷은 빌렸으되 서툴게 껴입었다"라고 평했다. 또 이들의 작품에 대해서는 "추상적이고 상투적인 표현, 반복, 집착, 무논리"로 가득하다고 못 박았다.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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