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 - 문보영 아이오와 일기
문보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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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들판이 있다면, 난 끝없이 들판을 걸어보고 싶다. 반대 방향으로 걸었을 때 우연히 진짜 삶을 발견하게 되어 지금까지의 삶을, 그리고 앞으로의 삶을 전혀 다르게 바라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한국과 정반대에 있는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유를 발견한 것과 같이. 그것은 들판이 내게 준 것이었다.
6p

저자 문보영은 아이오와 글쓰기 프로그램에 참가한다. "아이오와 글쓰기 프로그램 IWP, International Writing Program은 30여 개국에서 온 작가들이 3개월간 한 호텔에 묵으며 리딩, 강연, 토론 등 여러 문학 행사에 참여하는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다. 2023년 가을, 한국 시인으로 아이오와에 가게 되었다."(13p)

한국을 떠나 비행기를 타고 아이오와로 향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공항에서 IWP에 참여하는 작가들을 보게 되고 인사를 나눈 뒤 숙소를 배정받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최승자 시인은 아이오와 대학의 요청으로 4개월간 체류하며 산문집을 썼는데, 문보영은 많은 책을 가져온 작가들과 달리 최승자의 책 하나만을 들고 간다.

새로운 친구도 사귀며 서로 글을 쓰고 피드백을 받고, 영감을 떠올리며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 저자의 가장 친한 친구는 코토미로, 대만 작가이자 일본 작가였다. 대만 사람이지만 일본 문화에 빠져든 후 일본어 책만 읽는 등 일본인처럼 살아갔다. 저자가 만나는 사람들은 이런 '이중 문화', 이중언어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저자도 한국인이지만 영어로 글을 써야 하는, 이중언어의 상황에 있었다. 이런 '이중'의 관계 속에서 겪는 다양한 인물들의 일화를 소개한다.

낭독회, 영화 관람, 발표, 피드백 등등...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경험을 함께 하는데, 사실 저자는 영어를 잘 못해서 어려움을 겪었다. 간단히 소통하는 것은 괜찮지만 작품은 설명이 필요했기에 서로의 작품에 대한 뜻과 마음을 나누려면 영어로 설명할 줄 알아야 했다. 특히 시를 통역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똑같이 풀어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다른 언어로 바꾸는 것은 다른 세계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어디서 말하기를, 제2외국어를 배울 때 가장 먼저 내려놔야 하는 것 중 하나가 100퍼센트 같은 단어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라고 한다. 언어와 언어는 1 대 1로 대응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언어가 빨리 는다는 것이다. 어차피 대체어가 없다면, 아주 멀어지는 건 어떤가? 새라는 단어를 손전등으로 번역하기, 바꿔버리기, 강탈하기, 중간에 탈환하기, 가로채기, 사기 치기. 하나의 언어가 다른 언어를 건드려 쓰러지게 하며,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것이 내가 지니고 있는 번역에 관한 희미한 인상이다. 쓰러짐과 옮김. 들것으로 싣고 가다가 엎어버림. 그것의 반복.
158P

번역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장면에서 어쩌면 인생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세계가 다른 언어로 쓰여있다면, 우리는 완벽한 소통을 할 수 없기에 다양한 대체어와 해석을 만들어내며 살고 있지 않나. 그리고 거기서 답답함을 느끼기보단 즐거움을 얻지 않나 생각해 본다. 그것이 시를 번역해야 하는 저자의 입장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느끼는 것들도 그 범주 안에 있지 않나 생각했다.

아이오와에서 나는 처음으로 영어로 시를 쓰게 되었다. 그 시는 사랑이 있어 가능했다. 오릿에게 주려고 쓴 시였으니까. 사랑으로 밀어붙이면 모르는 언어로도 시를 쓸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선오의 경우, 피자를 주문하거나, 사람들과 스몰토크를 한다거나, 뭐 그런 종류의 영어는 부족할지 몰라도, 문학에 관해서라면 일시적으로 영어 천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게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도 사랑하는 것들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219P

저자는 프로그램을 하면서 영어 실력이 늘고, 자신을 조금 더 잘, 더 정확히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그 애매한 순간 또한 가치 있고 또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는 영역일 수 있기에 어떤 작가는 이 순간을 잘 기억하라는 말들을 하지만, 저자가 아이오와에서 겪은 경험들은 세상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볼 수 있도록 도와줬다. 숙소 뷰가 안 좋았던 것, 수상한 남자를 쫓아갔던 것, 코토미가 시카고에서 인종차별을 당한 것 모두가 공유하지만 다르게 표현하는 경험이었고, 끝없이 뽑아낼 수 있는 글감이었다.

모든 일정이 끝난 후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고, 저자 문보영은 작가들과 작별 인사를 한다.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아이오와를 떠난다. 그리워할 아이오와와 인사하며, 미래를 확신할 수 없지만 또 굳이 과거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자세로, 다른 언어로 다른 세계로 들어가듯, 또 다른 나의 세계로. 삶의 들판을 계속해서 걸어나간다.

여러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처럼 세상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보게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새로운 땅에서 저에게는 영원토록 낯설 수밖에 없는 영어로 글을 쓰는 것이 저를 어느 길로 이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걷다가 힘들면 항복 나무처럼 조금 항복한 자세로 살아보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요.
297P


한겨레 출판에게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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