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도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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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 여관방에 들어가 극단적인 시도를 하는 남자.

그는 가정, 재산, 건강 모든 것을 잃었다. 죽기 전, 그는 생각한다. 인생이 왜 이렇게 됐는지.

내 인생이 삐끗한 단 한 순간, 그것을 찾아야 한다. 22p

주인공 원도는 은행에서 돈을 빌려주는 일을 했다. 가정을 꾸리고 아파트를 마련하기 위해, 사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회사 돈을 훔치기 시작한다. 아파트 한 채 값을 마련했지만 더욱 욕심을 부렸고, 결국 투기에 실패하고 횡령이 적발되어 모든 것을 잃고 도망쳤다. 그는 실체 없는 신용과 약속을 사고파는 것에 집착했다. 감도 안잡히는 수많은 돈에서 일부를 빼면 어떤가 생각했다.

어머니는 돌봄노동을 했는데, 원도의 같은 반 아이 장민석을 돌보게 된다. 원도의 부모는 장민석을 집에 들였고 장민석을 원도보다 더 챙기게 된다. 원도는 질투심을 느끼며 장민석과 싸우게 된다. 장민석보다 항상 잘하고 싶었고, 잘나 보이는 장민석이 되고 싶었다. 얼마 뒤 장민석은 친부모를 따라 집을 떠나지만, 장민석의 그림자는 늘 원도를 따라다닌다.

근원적 무지, 순수해서 무지막지한 폭력이다. (...) 뭐가 여백이고 뭐가 결핍인지. 원근감이 생겨버렸다. 빈틈없이 가득 차 충분한 줄 알았는데 텅 비었다.

무섭다.

외로움도 고독도 쓸쓸함도 슬픔도 아니다. 두려움도 아니지만 그것에 가장 가깝다.

원도가 운다.

목 놓아 운다.


85p

장민석이라는 인물이 집에 들어와 나와 대립되었다. 죽은 아버지는 산 아버지와 대립되었고, 어머니가 장민석에게 준 애정은 나에게 쏟는 애정이랑 대립되었다. 그저 생겨난 구멍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 밀고 들어와 다른 한 편의 공간이 생겼다. 원도는 확실한 것을 원했다. 원도에게 세상은 이해하고, 돌아가는 대상이 아니었다.

학창 시절 학교폭력을 당하던 친구 야똘은 원도에게 "우리는 선택하지 않아. 선택 당하지"라 말한다. 타인에게 선택당하는 삶. 구애하는 삶. 원도는 지위에서 오는 박탈감과 즐거움 모두 누렸다. 은행 VIP 인생이 자신이 주어진 인생이라 믿었고, 부모님의 아들로서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이라 생각했지만 모두 무너졌다. 절대적인 믿음 앞에서 세상은 비웃었다. 어릴 적 목말라서 선택한 물이 원도가 가장 자유롭게 선택했던 유일한 것이었을까.

극단적 시도를 하는 원도를 발견한 여관 주인은 돈을 더 쥐여주면서 나가라고, 그리고 그냥 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일단 오늘만 버티라고 말한다. 그냥 사는 법. 그것을 원도는 몰랐다. 세상이 모르게 만들었을까. 여관 주인의 말이 최근 들은 말 중에 가장 따듯했다.

원도에게 어머니는 분명 존재했지만 그 자리는 비어있었다. 텅 빈 그곳을 온갖 상상과 환상으로 채우다 어느 순간 잊었다 잊고 살다 가끔 절감했다. 절감할 때마다 사랑하고 싶었다.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아니다. 사랑받고 싶었다. 누구에든, 무엇에게든. 장민석과 함께 살 때, 어머니는 달랐다. 그랬다고, 원도는 기억한다. 왜 그랬을까. 장민석의 무엇이 어머니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원도의 키가 30센티미터 이상 자라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변치 않았다. 평생 단 한 사람만을 위해 기도하는 수녀처럼, 아무 요동도 갈등도 없이, 티 나지 않게 조금씩 늙어갈 뿐이었다. 222p

원도는 부모의 사랑을 그 자체로 받지 못했다. 어머니는 원도에게 어느 순간부터 차갑게 대했다. 반면 장민석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뿐 아니라 어머니를 변화시켰다. 어머니를 웃게 했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장민석이 했다. 사랑받지 못한 것도 고통이었지만 사람과 조응하며 그 사람을 긍정적으로 증폭시켜줄 능력을 갖추지 못하는 것, 장민석이 하는 것을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 거기서 자괴감을 느꼈을 것이다.

원도의 어머니에게 장민석은 삶의 의지였을지도 모른다. 원래는 자신이 약을 먹고 죽을 거였지만, 원도의 아버지가 대신 먹고 죽으면서 남겨진 어머니에겐 자신에게 힘을 쏟는 것이 아닌, 타인에게 정신을 쏟는 게 삶의 의지였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원도의 가족은 서로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그저 그 욕망을 감싸줄 이해. 그러나 살아있는 아버지의 합리적 이해는 원도의 마음에 완전하게 다가설 수 없었다.

<원도>는 최진영의 세 번째 소설이자, 그의 소설이 나타내는 우울함의 집약체라고 볼 수 있다. 원도라는 인물을 통해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말하는데, 상당히 불안하고 흔들리는 모습으로 그려나간다. 그런 점에서 불안한 사람의 심리 묘사가 효과적으로 전달되지만(중간중간 나오는 속마음의 표현까지), 한편으론 인물의 성격이 짜임새 있다거나 심리의 일관성이 잘 유지되었다고 느끼지는 못했다. 원도의 캐릭터 설정이 처음부터 이도 저도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것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등장인물들이 말끔히 정리가 안된 느낌도 든다.

한편으론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과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원도>에서 겹쳐 보인다. 원도는 욕망을 쫓다 인생이 무너졌고, 그것을 정당화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나타내지만 일종의 찌질함이 엿든다. '여관으로부터의 수기'다. 하지만 원도는 사랑받지 못했다. 최진영은 원도의 삶을 단순히 개인의 잘못으로만 볼 수 있는가 의문을 제기한다. 원도의 삶 자체가 '정신을 차리고 선한 일을 행하자' 따위의 정신 극복이 가능한 삶이었을까?

어린 시절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집안의 비밀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일종의 추리소설 같기도 하다.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가정의 구성원인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문제에서 비롯되었지만, 아버지가 죽으며 생긴 트라우마로 시작되는 원도의 결핍은 인생을 돌돌 꼬아버리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만족스럽다고 말한 것은 자신의 죽음이 만족스러운 것인지, 모든 상황이 죽음으로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이끌어 낸다는 것인지 그 의미는 확실치 않지만, 원도는 상황 자체에 만족스러움을 느끼진 못했고 죽지도 못했다. 몫은 살아있는 원도에게 넘겨진 것이다.

장민석은 정상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합리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계속해서 강조하는 세상의 환영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부터 욕심이 많고 고집이 센 원도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보이는 대로 반응했다. 장민석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세상은 바로 죽는 독약과 서서히 죽어가는 독약 중 하나를 마시는 것에 불과했다. 원도의 인생에서 삐끗한 '그 순간'이란 게 있었을까? 하나 둘 기억을 살피는 것은 어쩌면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공허함을 향한 하나의 현상들이지 않았을까.

원도를 죽어 마땅했을까, 아니면 감싸 안아 줘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인과응보인 것일까

원도가 '만족스럽다'라는 의미를 알았다면 지금쯤 따듯한 집안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원도는 계속해서 혼자였다. 앞으로도 혼자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원도(遠逃), 멀리 도망칠 뿐이다.




한겨레출판에게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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