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의 위기
한병철 지음, 최지수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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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베냐민(1892-1940)은 말한다.
"더 이상 멀리서 오는 지식이 아닌, 바로 다음에 일어날 일의 단서를 제공하는 정보만이 공감을 얻는다"(P.13)


깊은 깨달음을 주는 것, 역사와 같은 옛 것은 중요성을 잃어버렸다.
현대사회는 정보로 가득 차 삶과 공동체의 의미를 잃어가는 서사의 위기에 놓여있다.
한병철은 서사의 위기에 놓여있는 사회를 비판하며 삶은 이야기임을 피력한다.


서사(이야기)와 대비되는 정보란 무엇이며 저자는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먼저 정보의 사전적 정의는 "관찰이나 측정을 통하여 수집한 자료를 실제 문제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정리한 지식. 또는 그 자료"지만, 우리가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의미로 생각해도 상관없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정보의 특징'이다. 저자는 정보는 이야기의 짜임이 없으며 정보만이 자극의 형식으로 생산되고 소비된다고 말한다.


"정보사회는 정신적 고도 긴장의 시대를 열고 있다. 정보의 본질이 다름 아닌 놀라움의 자극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지루함을 허용하지 않기에 정보로 꽉꽉 채운다. 자극적인 정신적 고도 긴장의 상태가 지속되는 과잉활동성을 띤다는 것이다. 반대로 이야기는 말 그대로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며 사건들을 잇는 하나의 이야기다.


"정보는 단지 세상을 앞에 전시할 뿐이다. 그럼으로써 세상을 손에 잡히도록 한다. 그와 달리 먼 곳을 가리키는 '기록'은 암시하는 바가 풍부하게 들어 있어 이야기로 이어진다." 현실의 정보화는 직접적인 현존 경험들을 약화시킨다고 말하는데, 이는 현실의 정보화 자체가 애초에 완벽히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경험이라는 것은 따로 떼어내어 정보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뿐이지.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을 "경험의 빈곤"이라는 도구를 통해 진단한다. 경험이 부재한 이들을 야만인이라 말하는데, 이 신 야만인은 경험의 빈곤을 해방으로 여기고 즐거워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또한 "내부적인 빈곤이 순수하고도 거침없이 통용되어 자기들에게 적당한 어떤 것이 나타날 수 있는 환경을 갈망한다."


야만인의 특징은 근대와 후기근대 둘로 나뉜다.


"미래와 진보의 서사를 가지고 다른 삶의 형식을 향한 갈망을 품었던 근대와 달리, 후기 근대는 새로운 것 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에 해당하는 혁명적 파토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후기 근대에는 출발 직전의 분위기가 없다. '계속 그렇게 하기'와 대안 상실로 힘이 빠져 있다. 이야기할 용기, 세상을 바꾸는 서사를 향한 용기를 상실했다. (P.36)


과거를 밀어내고 새로운 이념, 갈망을 가진 근대였지만, 후기근대는 어떤 희망조차 갖지 않으며 그저 흘러가는 대로 생각한다는 말로 들린다. 이는 현대에도 적용되는 굉장한 통찰이기도 하다. 이젠 청년들마저 끓어오르는 어떤 정의감이나 연대감조차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벤야민의 이론을 통해 그저 쉴 곳을 찾으며 편리함 또는 좋아요에 예속되는, 미래를 잃은 현대사회를 비판한다.


오늘날의 정보 쓰나미는 우리를 최신성에 도취된 상태로 추락시킴으로써 서사의 위기를 악화시킨다. 정보는 시간을 잘게 토막 낸다. 시간은 현재의 좁은 궤도로 단축된다, 여기에는 시간적 폭과 깊이가 없다. '업데이트 강박'은 삶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과거는 더 이상 현재에 유효하지 않고, 미래는 최신의 것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며 그 폭이 좁아진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가 없는 채로 존재하게 된다. 이야기가 역사이기 때문이다. 응축된 시간인 경험뿐 아니라 도래할 시간인 미래 서사 모두 우리에게서 사라져 간다. 현시점에서 다음 현시점으로, 하나의 위기에서 다음 위기로, 하나의 문제에서 다음 문제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다니는 삶은 생존을 위해 마비된다. 문제 풀기에만 몰두하는 사람에게 미래를 없다. 서사만이 비로소 우리로 하여금 희망하게 함으로써 미래를 열어준다.

P.37


저자는 하이데거의 실존 개념을 언급한다. 그에게 자기 존재란 무엇인가, 실존한다는 것은 세계 내부적 이야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 즉 근원적이고 상실되지 않는, 맨 아래 바닥에서 계속되는 존재의 확인이다. 이와 달리 스스로 '순간적 실제'에 내맡기는 사람, 정보로 그때그때 자신을 채우는 사람에겐 이러한 운명이 없고 고유한 역사성이 없음을 비판한다.


"디지털화된 후기 근대에 우리는 끊임없이 게시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공유하면서 벌거벗은, 공허해진 삶의 의미를 모르는 척한다. 소통 소음과 정보소음은 삶이 불안한 공허를 드러내지 못하게 만든다." (P.64)


우리는 다른사람(타자)를 시선을 통해 인식한다. 타자는 시선으로써 비로소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대상이 나를 바라봐야 한다. 그러나 스마트폰은 물리적 의미를 포함한 철학적 의미의 시선을 모두 차단한다. 이런 시선의 차단은 소통의 불가뿐만 아니라 나르시시즘화의 증가로까지 이어진다. "나르시시즘은 허구의 이미지를 위해 시선, 즉 타자를 제거한다." 타인의 시선은 나를 과시하는 수단이 되기에 더더욱. "라캉의 시대에는 세계는 여전히 시선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었지만, 현대에는 시선의 소멸은 늘어가는 지각의 나르시시즘화로 이어진다."


인간에게 이야기란 그저 대화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프로이트의 치료 방식을 이야기하면서 이야기 자체가 치료이며 의사와 이야기하기가 치료 행위에 포함됨을 말한다. 환자가 스스로 자유롭게 이야기할 때 치유되는 것이다. 이야기 자체에 치유되는 힘이 있다. 그러나 현대의 병원에서는 환자의 이야기보단 의사의 처방이나 일방 사고가 퍼져간다. 이야기가 사라져 가는 시대에 더더욱 병이 깊어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야기를 위해선 상대가 있어야 하고, 시선이 있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할 대상의 존재다. 우리는 이 대상을 어떻게 만나는가? 또 이야기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접촉'이다. 여기서의 접촉은 그저 물리적 접촉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접촉은 줄고, 접촉의 시도조차 사라진다. 접촉의 상실이 곧 바른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현실의 접촉이 곧 현실의 완전한 접촉인데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접촉이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접촉한다는 것은 타자로부터 가용성을 박탈하는 타자의 타자성을 전제한다. 우리는 소비 가능한 대상을 어루만질 수 없다. 단지 그것을 쥐거나 소유할 뿐이다. (...) 커져가는 접촉의 빈곤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
P.120


저자는 이런 서사의 위기가 곧 공동체의 위기임을 말한다. 이야기는 사회적 응집성을 만들기 때문이다. 공통의 서사와 역사가 내려오고 그것을 답습하며 공통점으로 묶이는 사회. 미래까지 함께 나아가는 사회였지만 신자유주의 체계의 목표는 완전히 달랐다. 신자유주의 체계의 기초가 되는 세상, 즉 신자유주의적 성과 서사는 공동체 형성 자체를 방해한다. "모든 사람을 스스로 자기 자신의 기업가가 되게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성과 서사가 '우리'를 만들지 않으며 연대뿐 아니라 공감까지 해체하며 사람들을 고립시킨다고 말한다. 자기 자신이 우선이며, 자기 숭배적이며 스스로 지도자이자 스스로를 생산하고 공연하는 곳에서 안정을 찾는 곳엔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이제 서사조차 상업에 의해 독점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소비를 위한, 스토리 셀링(STORY SELLING)이라 말한다. 서사를 공동체와 연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자아와 연결하는 것이다. 공정무역은 나를 드러내는 것, 선하 이미지의 소비와 연결되지만 말이다. 이야기 또한 나를 드러내는, 전시하는 방식이 된다. 관건은 단순히 서사를 찾는 것을 넘어 이것을 공동체와 연결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이어지게 된다.


인간과 삶은 정보의 나열이 아니다. 이야기다.
하나로 연결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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