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무랑가시아 송
김효현 지음, 김보현 그림 / 기적의책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신화에서 나무는 땅과 하늘을 잇는 상징이라고 한다. 북유럽 신화에서는 이드그라실이 세계를 지탱하며, 환웅은 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다. 땅에 단단히 뿌리 내려 하늘 저 멀리까지 가지를 뻗고, 인간이 보지 못한 과거 부터 보지 못할 미래까지 그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거목. 거대한 나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다. 기적의책에서 나온 김효현 작가의 『무랑가시아 송』은 그런 나무에 다가가려는 사람들의 여정을 그린다.
무랑가시아 송
서해 바닷물의 중심에 뿌리박은 해송은 전설보다 오랜 세월부터 육지의 성흥과 쇠망을 굽어보며 창파의 두 세계, 바다와 하늘 사이에 자리애 왔다. 고대인의 믿음에 따르면 심해저보다 깊게 뻗은 뿌리는 지상의 물을 길어 올려 천공을 뚫고 올라간 가지 끝에서 흰 구름을 맺는다고 했다. 자욱한 안개를 뿜어내고 있어 하늘을 매달고 있는 해송의 가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땅거미가 내릴 때 서쪽 하늘에서 어릿어릿하는 검은 형체는 석양의 고도보다 높기에 지는 해를 받는 나무로 불리기도 한다. 신비로운 청잣빛을 띠는 줄기는 측량할 수 없을 만큼 굵어 수만 년 간 하늘을 지탱할 만하고, 해수면 위로 드러난 뿌리는 어떤 섬보다 넓지만 성지로 불리기에 스스로의 혼이 두려운 이들은 접근하려 하지 않는다. 나무는 그림자가 없었지만 모든 이가 나무의 그늘 아래에서 살았다._63쪽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그림자를 드리우는 거대한 나무가 있는 세계. 한 종단에서는 그 나무를 신성시한다. 그 종단은 순수의 결정체인 성화가 그 나무에 닿을 때, 세상의 모든 악이 사라지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1200년 전부터 성화를 찾아내 무랑가시아 송을 향한 여정을 보내지만 열 번의 시도 중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악마의 방해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열한 번째 성화를 데리고 가는 길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종단의 수호자 다섯 명과 성화의 오라비 류이치, 성화 신며리이다.
악마는 최후에 꼬리를 내민다
-이 지상이 곧 천국이 되는 거라네. 원래부터 있던 죄악이 말소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세상 자체가 죄악을 넘어서 버리게 되지. 그 누구도 죄악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다네. 원래부터 죄악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죄악에 의해 슬퍼하는 자, 분노하는 자, 혹은 스스로를 포기해버리는 자들도 사라지고 용서하는 자와 구원하는 자들 또한 사라져._90쪽
성화를 찾아가는 여정 그 자체가 바로 이야기이다. 분위기는 몽환적이고 환상적이며 미스터리하다. 소설 속에서 캐릭터들의 개성은 두드러지지 않으며, 큰 사건이 일어나도 별로 위기같지 않고, 때로 늘어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기묘하게 긴장된 공기만은 지속된다. 누가 이 여정을 방해하려 하는가, 누가 다른 이들의 죽음에 관여했는가, 누구를 믿을 수 있는가, 즉, 누가 악마인가. 뻔하다면 뻔한 반전일지도 모를 그 결말까지, 악마가 꼬리를 드러낼 그 최후의 순간까지, 진실은 해송의 주위를 둘러싼 바다 물안개 같은 긴장과 몽환 속에 잠겨 있다.
결국 이건 선과 악에 관한 물음이다. 순수성의 씨앗인 성화와 그를 방해하려는 악마.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과연 악마를 비난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과 함께, 결국 이 여정의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걸 생각하게 된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성을 갖춘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 신으로 도약하고 선을 구축하는 것이 가능할까. 어쩌면 무랑가시아 송은 절대 닿을 수 없는 이상향이다. 인간은 하늘과 땅을 이은 그 사다리에 도달할 수 없다. 땅 위의 삶이 있는 이상은. 그 삶에 어떤 무게를 두고, 어느 것을 가치로 둘 것인지는 개인의 판단이기 때문에.
수묵화처럼 그려진 정적인 분위기의 이야기는 담담히 흘러가며 이상과 선악에 관해 묻는다. 인간은 순례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그 순례에 성공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인간이라는 종족이 미성숙할지라도 해송이 거기 서있고 거기에 도달하려고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것 아닐까.
눈을 현혹시키는 매듭들 너머 숨은 뜻을 알아내야만 했지만, 한 번 풀고 나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선뜻 끈을 잡아당길 수 없었다._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