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통각하
배명훈 지음, 이강훈 그림 / 북하우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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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센테니얼 챈슬러>가 잡지 《판타스틱》에 실렸던 것은 2008년이다. 그 때는 그냥, 재미있다며 보고 넘겼더란다. 투표권도 없던 소녀의 최대 관심사는 대학과 성적뿐이었다. 매일 아침 습관적으로 신문의 정치면을 읽었지만 그건 내가 있는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 때로부터 거의 5년이 지났다. 나는 그 소녀에서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로 있다.





그의 뮤즈, 총통각하를 위한 소설

5년 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솔직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 이전이 어떤 세상이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대체 무엇을 했는지 모를 그 5년 동안 배명훈 작가는 단편들을 썼고, 그걸 모아 『총통각하』를 출간했다. 그 사이 장편도 내고, 상도 받고.


『총통각하』는 여기저기, 여러 매체에 실린 작품들 중 한 가지 주제로 모아놓은 선집. 책 제목과 뒷면의 홍보문구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지난 5년간 쉴 새 없이 영감을 선사한 총통각하, '그분'에게 이 책을 던진다!_뒷표지




현실을 비틀어낸 다른 세계들


다른 어떤 것보다 주제 쪽에 초점을 맞추고 모은 선집이라 강한 통일성이 느껴진다. 책을 통괄하는데 각 단편들의 장르는 크게 장애가 되지 않는다. 소설들은 어떤 것은 SF이고, 어떤 것은 판타지이고, 어떤 건 일반 소설이지만 읽을 때는 못 느꼈다. 다 읽고 돌이켜보는 지금에서야 '아 그랬지 참' 이러고 있다. 어떤 장르의 문법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든 그 이야기 속의 세계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 닥 단편들은 현실에 대한 은유이며, 곧 풍자로 이어진다. 이 세계에 이질감이 느껴지는 요소를 집어 넣어서 배명훈식으로 비틀어낸다. <바이센테니얼 챈슬러>를 위시한 대부분의 소설이 그렇다.


※이 이야기는 특정 국가의 국내 정치상황과 관련이 없으므로 시리아, 리비아 이집트를 비롯한 각국 정부당국자들께서는 불필요한 오해를 삼가시기 바랍니다._85쪽



총통이 마음에 안 들어서 냉동인간이 되었다가 200년 후에 깨어나고(바이센테니얼 챈슬러), 낙하산 부대가 도시 곳곳에 착륙해 도시를 점거하고(새벽의 습격), 용이 지배하는 나라가 용과 공존하는 방식을 보여주고(고양이와 소와 용의 나라로부터), 평화롭게 시위를 구경하고 돌아오니 옷에 알 수 없는 발자국이 찍혀있고(발자국), 오랜만에 만난 선배는 많이 변해있다(혁명이 끝났다고?). 그 밖의 작품들도 마찬가지. 총통각하의 통치 아래서 벌어지는 현상들과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들이 무엇을 비판하고 있는지는 명백하다. 무너져가는 민주주의와 오남용되는 공권력. 잘못된 사회 시스템과 그 안에서 사라져가는 개인들. 현실에 대한 비유와 은유로 가득 차 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직접적으로 말을 하고 있어서 '이래도 돼?'싶다. 『타워』에서도 그랬지만 참 용감하시달까.



그리고 새삼 눈에 띄는 게 한 가지가 더 있었어요. 시위대를 둘러싸고 쭉 늘어서 있는 경찰 병력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 말이야.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있더라고. 그래서 그 생각이 났지. 그 여자의 나라에서 용을 둘러싼 경찰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었는지가. 어디였겠어? 당연히 용 반대쪽이었지. 그때 깨달은 거야. 지키려고 마음먹은 건 등 뒤에 두는 거구나. 시선이 향하는 쪽에는 위험해 보이는 걸 두는 거구나. _81쪽. <고양이와 소와 용의 나라로부터>




그렇게 5년이 지났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 5년이 펼쳐진다. 그 5년간 이 작가는 또 무슨 소설을 써낼까. 어떤 세계를 그려낼까. 팬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기대되는데, 총통각하2가 나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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