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엔젤 1 블랙 로맨스 클럽
주예은 지음 / 황금가지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황금가지에서 한국 작가 소설이 나왔다고 한다. 그것도 나와 동갑인 작가라고 한다. 한국 소설, 특히나 한국 판타지는 잘 출간하지 않는 황금가지에서 젊은 작가의 책을 내다니. 대체 어떤 책인가 궁금했다. 주예은 작가의 『데미엔젤』은 천사와의 로맨스라는 소재에서 느껴지는 소녀스러움 그대로일까.  




소설은 내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표지와 소개글에서 느껴지는 반짝반짝한 사랑이야기 그대로. 아니, 그보다 더 소녀스러운 환상의 재현이었다. 런던의 하늘빛일까. 구름이 껴 흐릿하지만 곧 갤 것도 같고, 비는 오지 않는 미묘한 날씨, 그 아래 늘어선 빅토리아 시대의 건물들, 꽃이 핀 정원, 그 사이를 걸어가는 조각처럼 완벽한 외모의 남자와 창백할 정도로 여린 소녀. 이런 이미지. 


준은 어린 시절 학대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소녀이다. 예쁘지만,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없고 자신을 사랑할 줄도 모른다. 죽음을 열망하는 그녀 앞에 한 천사가 나타난다. 그녀를 지킬 소명을 가지고 있는 데미 엔젤, 로이. 준은 완벽하고 아름다운 그와 금새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고귀한 영혼, 샤인스피림인 준을 노리는 악마들 때문에 사고가 생기고, 로이 준을 지키기 위해 악마와의 계약하고 타락하게 된다. 과거로 돌아가 준을 만나게 된다. 준이 과거의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리고 그녀를 계속 사랑하기 때문에. 




완벽한 남자주인공. 


트와일라잇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을 초월한 절대적이고 완벽한 존재의 그야말로 흠 잡을 데 없는 헌신적 사랑 이야기이다. 어장 관리는 없지만. 작가가 준에게 이입해서 이야기를 썼다는 게 느껴졌다. 완벽한 사랑을 꿈꾸는 소녀라면 아마 준에게 감정이입해서 이야기 속의 로이와 사랑에 빠질 것이다. 판타지보다 로맨스의 비중이 크다. 서사보다는 로이와 준의 예쁜 사랑을 아름답게 그려내는 데 치중했다.  오글거리는 대사와 완벽한 데이트 사랑을 통한 치유. 


그의 얼굴은 경악할 정도로 잘생긴 외국 배우를 연상시켰다. 그냥 미남이 아니라 신이라 해도 믿을 법했다.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약간 긴 금발이 아까 성당에서 내 눈을 잠깐 스친 빛과 같았다. 그의 눈동자는 내 검은 눈동자가 초라할 정도로 영롱한 짙은 파란색이었다. 태양빛을 쪼개 만든 듯한 그 눈동자는 잠깐 보아도 눈이 시릴 지경이었다._1권 27쪽

 


그러나 나는 역시나 소녀심이 부족하다. 아니면, 이런 식의 완벽한 남자 주인공이 못마땅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너무 완벽하면 재미가 없지 않나 싶어서. 저런 소녀같은 주인공에 잘 감정이입하지 못하는 탓이기도 하고. 워낙 성격이 삐딱해놔서 준이 만약 내 앞에 있었다면 삐딱삐딱하게 대했을지도 모르겠다. 






과거? 미래? 현재? 


그런데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삐딱하게 본 것은 '시간'이다.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에서는 흔히 타임 패러독스, 즉 시간 역설이 제기된다. 시간 여행이 가능함으로써 생기는 수 많은 모순들. 타임 패러독스에는 여러 유형이 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작가들이 내놓은 여러 가설이 있다. 가장 쉬운 예로 과거로 돌아가 아버지를 죽이는 걸 들 수 있겠다. 그러면 나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존재하지 않는 내가 어떻게 아버지를 죽이는가. 뭐 대충 이런 것들이 시간 여행을 다루게 될 때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모순을 로이가 일으키려고한다. 준과 로이가 미래를 바꾼다면, 시간과 시간 사이에는 구멍이 생긴다. 그 구멍을 메울 설정은 무엇인가. 평행우주? 또 다른 타임라인? 수많은 시간의 역설 사이에서 나를 이해시킬 설정을 찾을 수 없었다.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이 육신 전체가 과거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과거의 그 상황에 다시 놓이는 것이라는 건 알겠는데(이 부분 또한 애매한 점이 있다), 그렇다고 뭔가 달라질 거 같지는 않고. 내가 놓친 것일까. 


"넌 멀지 않은 미래에 날 만날 거야. 베룬으로 타락해 버린 내가 지금 네 앞에 나타나든가 나타나지 않든가에 상관없이. 그리고 미래에서, 큰 이변이 없는 한 넌 또 다시 날 사랑하겠지. 문제는 거기에 있어. 미래에서도 나는 소멸할 거고 아무 영문을 모르는 넌 엄청난 충격과 상처를 받을 거다. 난 그걸 막아야해." _1권 220쪽


이런 설정의 구멍이 생긴 것은 판타지적 장치가 그저 로이와 준의 사랑을 진행시킬 수단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의 변화는 사랑을 위한 판타지적 요소였고, 그렇기에 때에 따라 입맛 따라 상황 따라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가벼운 것이었다. 과거와 미래는 얼마든지 가변할 수 있었고, 무엇이 실제 미래였고 어떻게 미래가 바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로맨스를 위해. 그저 사랑을 위해.




소녀심으로 무장할 것


소녀심이 필요하다. 이제까지 영어덜트나 블랙로맨스클럽의 소설들은, 로맨스는 뒷전으로 두고 '판타지다!', 'SF 괜찮네', '오, 이거 미스터리네' 하는 태도로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데미엔젤은 다른 무엇보다 로맨스가 우선되는 이야기라서 저런식의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반짝반짝하고 예쁜 소녀의 판타지를 위한 소설이니 10대 소녀의 감성을 갖추고 읽을 준비를 하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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